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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통> 옮긴이의 말 _안병률

2016.11.03 13:16 | Posted by 북인더갭

옮긴이의 말

 

 

 

마흔이 되기 전까지는 나 역시 운이 좋은 편이었다. 이 책의 저자가 근무한 가디언같은 세계적인 언론사는 아니지만,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꽤 명망있는 출판사에 들어가 편집자로서 좋은 책들을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30대를 돌아보면 그저 감사할 뿐이다. 점잖은 선배들과 깍듯하고 총명한 후배들, 이름 석 자만 대도 알 만한 필자들에다 출간하는 족족 반향을 일으키는 책들 덕분에 나는 어깨가 으쓱할 수밖에 없었다. 결혼생활도 큰 싸움 한번 없이 순탄했으며 비록 하나지만 귀여운 아이가 있어 시간가는 줄 몰랐다.


그런데 딱 마흔이 되었을 때, 뭔가 이상한 조짐들이 나타났다. 우선 내 직업에 처음으로 중압감이 밀려왔다. 편집자란 직업은 뭐랄까, 늘 어딘가에 끼어 있는 존재에 가깝다. 세상에 나서고 싶어하는 필자와 그런 욕망 따위엔 아무 관심 없는 듯 냉담한 독자들. 편집자는 그 사이에서 예리한 균형감각을 발휘해야 한다. 필자를 조율하는 한편, 독자를 고무해야 하는 이중적인 상황 속에서 나는 알게 모르게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수천, 수만에 이르는 독자의 날카로운 눈을 생각하다보면 원고를 엄정하게 볼 수밖에 없었는데, 그러다보면 필자들의 항의에 부딪혔다. 애써 고친 원고를 필자의 불호령에 다시 원래대로 돌려놓을 때마다(물론 대부분의 필자들은 편집자의 수정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인다), 나는 이게 무슨 짓인가 내심 자조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한창 때라 그런지 일에 대한 욕심도 상당했던 듯싶다. 마흔에 팀장 자리에 올랐지만 나는 거기에 만족하지 못했다. 내고 싶은 책을 마음대로 기획하고 싶었다. 그런데 층층이 쌓인 조직의 서열이 너무 답답해 보였다. 결국 나는 회사에 사표를 내고 말았다.


1인출판사를 한답시고 덜렁 사무실을 냈으나 아무 대책 없이 뛰쳐나왔으니 막상 낼 책이 없었다. 일산의 한 오피스텔 옥상에 올라가 무심한 하늘을 보고 있자니 눈물이 다 났다. 내가 먹여살려야 하는 가족이 있는데, 당장 들어오는 돈 한푼이 없으니 눈앞이 캄캄했다. 결국 보험을 깨서 당분간의 생활비에 보탰다. 내 인생 처음으로 그냥 폼잡는 우울이 아니라, 제대로 된 우울이 밀려왔다. 그러던 때 가디언지 서평란을 뒤지다가 찾아낸 책이 바로 이 책 마흔통(원제 레몬트리 아래서’Underneath the Lemon Tree)이었다.

 

저자 마크 라이스-옥슬리의 우울 증세는 나와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다. 나는 우울하기는 했지만 항우울제나 수면제 없이도 견딜 만했고 자살충동 같은 것은 거의 없었다. 책을 못 읽을 정도는 아니었고 좋아하는 음악도 여전히 잘 들었으며 일에도 큰 지장은 없었다. 그러나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깊은 공감을 느꼈다. 비록 내가 우울증은 아니더라도 거의 그와 유사한 심리 상태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가령, 저자처럼 나도 모든 것이 부러웠다. 정말 지나가는 사람들만 봐도 부러웠다. ‘저들은 나와 달라. 적어도 월급 걱정은 안하겠지.’ 그런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퇴근 무렵 관공서를 나오는 직장인들을 볼 때면 부러운 나머지 거의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저자가 모두가 부럽다. 우리 아이들마저 부럽다고 할 때의 그 눈물겨운 마음 상태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거 같았고, 그런 저자의 모습에서 동병상련의 연민을 느꼈다.


또 하나는 직장에서의 일과 경쟁이다. 그 전까지는 일을 즐기는 편이었는데 마흔 무렵이 되자 모든 게 버겁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팀장이라는 감투를 달자 회사가 요구하는 능력도 더욱 커졌다. 일을 잘해야 하는 것은 물론 부하 직원과의 관계도 매끄러워야 했다. 회사는 더욱 뛰어난 성과를 요구하는데, 그걸 다 따라가려니 내 감정의 소모가 너무 컸다. 인정을 받으면 받을수록 더 욕심이 나고, 욕심을 키워갈수록 더 불안해졌다. 되돌이켜보면, 그때가 한발 물러설 수 있는 좋은 타이밍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저자가 대처Thatcher의 아이(성과 중심적인 신자유주의 세대)인 것처럼, 나 또한 박정희(묻지마 근대화 시대)의 아이다. 우리는 모두 단기성과를 내도록 교육받은 세대로서 물러섬이라든가 희생 같은 가치에 익숙하지 않다. 결국 그런 성향이 우리의 마음을 더욱 메마르게 했으며, 우울의 불씨에 불을 댕겼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저자는 그 불씨에 확 타올랐던 반면, 나는 직장을 그만두면서 위기를 모면했다. 저자는 20대에 모스크바에서 첫 기자생활을 시작해 30대에 보스니아 등지에서 AFP 기자로 활동하다 드디어 세계적인 언론사 가디언에 입사했다. 하지만 마흔살이 되는 생일에 저자는 우울증에 빠져 칩거를 시작한다. 더이상 음악을 들을 수도, 책을 읽을 수도 없다. 그는 공황장애, 불면증, 자살충동에 시달리다 비로소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깨닫는다.


이 아름다우면서도 감동적인 고통의 기록에서 마크 라이스-옥슬리는 지독한 우울증의 기억을 파헤치는 동시에 의학적 치료, 명상, 마음챙김에 이르는 유용한 치료법들을 소개한다. 의사, 심리치료사, 환자와 친구들을 인터뷰하면서 그는 자신의 삶을 낱낱이 파고들 뿐 아니라 우울증이 일과 가족에 미친 끔찍한 결과들을 솔직하게 고백한다.


암이나 뇌졸중 같은 질병이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는 것처럼, 우울증 역시 불시에 우리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깨달았다. 무엇보다, 그것을 피해가기에는 시대가 너무 악하다. 저자의 말처럼, 우리는 목표 지향적이고, 자아 중심적이고, 조급하고, 분명하고, 자만심이 강하고, 풍요롭고, 소유욕이 강한 존재로 키워졌다. 어떤 일에든 인내심이나 복종, 희생, 개방성이 필요하다고 가르쳐준 이는 아무도 없었다.” 저자와 거의 같은 시대를 살아온 동시대인이자 현재 중년의 한가운데를 통과하는 사람으로서, 이 책은 지금의 나의 생활과 정신건강을 되돌아보는 값진 체험을 전해주었다. 우울증의 변방까지 다녀온 나는, 이 책이 던져준 따듯한 위로와 솔직한 고백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역자로서 이처럼 아름답고 유머러스하며 지적이고 감성에 찬 책을 번역한 것을 큰 행운으로 생각한다. 우울증의 시작과 끝을 잔잔하게 그려낸 한편의 수기이자 에세이로서도 뛰어나지만, 그 증세의 사회적 의미와 의학적 현황을 파헤친 르포로서도 손색이 없는 책이다. 우울증이 얼마나 무서운 병이며 또한 그 극복을 위해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를 가감없이 서술한 이 책이 현재 이 증세로 아픔을 겪는 분들뿐 아니라, 중년을 통과하며 마음의 병을 심하게 앓는 분들에게까지 도움이 되리라 확신한다.

 

이 책의 앞부분(처음~9)은 박명준 선생님이, 그리고 뒷부분(10~)은 필자(안병률)가 각각 번역했다. 뒷부분 번역의 일부는 채세진 선생님의 도움을 받았다. 가장 많은 부분을 유려한 문체로 번역해주신 박명준 선생님이 옮긴이의 말을 써야 마땅하지만, 이 책을 기획했다는 이유로 필자가 옮긴이 대표로 글을 썼다. 두 분 선생님께 깊은 감사를 드리고, 아울러 나의 40대 초반, 어려운 시절을 잘 참고 견뎌준 아내와 아들에게 이 자리를 빌려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이 책을 읽게 될 누구든 용기를 잃지 말고, 지금 처한 고통에서 어서 회복되기를 기원한다.

 

201610

옮긴이를 대표하여

안병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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