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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너는 위험한가/바그너는 어떤 책?

파시즘의 화신인가, 위대한 거장인가_알랭 바디우가 말하는 바그너와 철학

by 북인더갭 2012. 8. 24.

“파시즘의 화신인가, 위대한 거장인가?”

알랭 바디우, 바그너를 둘러싼 논쟁에 한획을 긋는다

 

바그너 하면 떠오르는 두 가지의 대중적인 이미지가 있다. 하나는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이 연출한 영화 『지옥의 묵시록』에서 미군이 베트남 해안마을을 폭격할 때 울려 퍼지는 ‘발퀴레의 기행’이며 또 하나는 결혼식장에서 흔히 연주되는 ‘결혼행진곡’이다. 각각 바그너의 오페라 「발퀴레」와 「로엔그린」에 삽입된 두 곡은 매우 상반된 의미를 갖는다. 전자가 강렬하고 스펙터클한 관현악으로 무시무시하고 파괴적인 제국주의의 분위기와 잘 어울린다면 후자는 매우 낭만적이고 목가적인 농촌마을의 결혼식 풍경을 떠올리게 한다. 이와 같은 바그너의 이중적 면모는 나치에 의한 추앙과 맞물려 서구의 수많은 철학자들과 예술가들에게 뜨거운 논쟁거리가 되어왔다.

 

프랑스 철학을 이끄는 거장으로 평가받는 알랭 바디우(Alain Badiou)의 신간 『바그너는 위험한가』는 이처럼 파시즘의 화신 혹은 위대한 거장이라는 극단적인 평가 사이에서 요동쳐온 바그너 상(像)을 니체, 하이데거, 아도르노, 라쿠라바르트에 이르는 서구 사상사의 맥락에서 검토하고 현대 예술의 가능성을 보여준 작가로서 바그너를 재정립하려는 시도다. 키치와 할리우드식 스펙터클이 지배하는 시대에 맞서 순수예술의 의미를 되묻는 이 책은 음악은 물론 철학과 예술 전반에 걸친 바디우의 중요한 성찰을 담고 있다. 마침 바그너 탄생 200주년을 앞두고 출간되어 내년 한해 동안 집중 조명될 예정인 바그너의 음악세계를 이해하는 데도 좋은 책이 될 것이다.

 

현대 철학과 바그너의 대결

 

바그너와 맞서온 서구 철학자들 중 알랭 바디우가 가장 심혈을 기울여 분석한 사람은 아도르노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아도르노는 철학자이자 뛰어난 음악이론가로서 『바그너를 찾아서』라는 책으로 바그너와 직접 대결한 바 있다. 하지만 바디우는 이 책을 뛰어넘어 곧장 아도르노의 주저(主著) 『부정 변증법』으로 향한다. 이 책을 분석하며 바디우가 가장 강조하는 지점은 바로 ‘아우슈비츠’다. 엄밀히 말해 아도르노는 본질을 사유한 철학자가 아니라 고통, 다시 말해 전대미문의 역사적 고통으로 체험된 아우슈비츠를 사유한 철학자라는 것이 바디우의 주장이다. 아도르노에게 아우슈비츠가 중요한 이유는 이 사건이 서구의 동일성 원리, 즉 차이를 무시하고 일자(the One)로 모든 것을 환원하는 원리가 극단적으로 구현된 재난이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그것은 ‘부정의 부정은 긍정’이라는 기계적이고 수학적인 사고방식이 이끌어낸 재난이기도 했다. 바디우는 이러한 고통의 체험을 반복하지 않기 위한 고투로서의 아도르노의 ‘부정 변증법’ 안에 담긴 예술적 의미를 추론해낸다. 그것은 바로 동일성의 논리에서 빠져나오는 앵포르멜(informelle, 비정형) 예술이고 차이와 타자성을 지켜내는 예술이며 어떤 구원의 가망도 없는 헛된 기다림―『고도를 기다리며』에서처럼―의 예술이다.

 

그러나 문제는 아도르노를 비롯한 서구 철학이 바그너를 전형적인 동일성 논리에 빠진 음악가로 비판해왔다는 점이다. 그 논쟁의 역사는 놀라울 정도로 흥미롭고 풍부한데 처음에는 니체가 바그너와 싸웠고, 그 다음에 나치가 바그너와 융화된 모종의 니체를 만들어냈으며 그 결과 하이데거, 아도르노, 라쿠라바르트가 시차를 두고 차례로 논쟁에 가세하게 되었다. 이 논쟁에서 주장된바, 바그너는 대중에게 음악적 통일성을 강제하여 차이를 없애버리는 작가이자, 독일 민족의 신화와 공모한 원(原)파시스트이며, 고통을 감상적 스펙터클에 종속시키는 작가로 평가된다. 바디우가 적절하게 지적하듯이 이처럼 ‘바그너의 경우’는 한편으로는 미학적이고 철학적인 경우이자 동시에 이데올로기적이고 정치적인 경우인 것이다.

 

바디우가 재구성한 ‘바그너의 경우’

 

바그너에게 쏟아진 이런 비난들에 바디우가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바그너에게 그런 경향이 있었다는 것을 부인할 생각은 없다고 단호하게 밝힌다. 그러나 바디우는 바그너를 순수예술의 종말로 보는 견해, 즉 실패한 헤겔식 총체성의 예술로 보는 견해에는 다른 입장을 취한다. 바디우가 보기에 바그너는 오히려 순수예술의 마지막 거장이며 그 점에서 ‘총체성에서 분리된 순수예술’로서의 바그너가 다시 호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이 책에서 가장 독특하고 흥미로운 견해라고 할 수 있는데 바디우는 이 지점에서 비로소 서구 철학은 물론 바그너 자신의 견해와도 다른 새로운 ‘바그너의 경우’를 그려낸다.

 

바디우에 의해 전혀 새롭게 해석된 바그너는 우선 동일성에 저항하는 예술가다. 가령 「뉘른베르크의 명가수」 3막에서 자신의 예술적 권위와 사랑을 포기하는 작스의 결심은 일관되게 예측되는 결심이 아니라 선율 안에서 예측 불가능한 가능성으로 드러나는 결심이다. 또한 바그너의 고통이 결코 싸구려 연민이 아닌 분열적인 주체의 고통을 형상화한다는 사실도 중요하다.

 

바디우는 바그너 오페라의 주체가 본질적으로 자기자신의 분열에서 정체성을 찾는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그 예로 절대적으로 해결 불가능한 분열을 극한까지 경험하고야 마는 방랑자 ‘탄호이저’를 든다. 무엇보다 마르크스, 다윈과 동시대인으로서 스스로 드레스덴 5월 혁명(1849)에 참여했다가 수배 후 망명까지 했던 바그너가 19세기에 어울리는 진보적이고 열린 가능성을 탐색했다는 점도 강조된다. 이는 ‘신들의 죽음’ 이후 인류에게 넘어간 세계의 운명을 다룬 「신들의 황혼」의 결말, 신화가 아니라 예술 자체에서 독일의 보편성을 구현하는 「명가수」의 결말, 구원자를 구원함으로써 기독교를 넘어서는 「파르지팔」의 결말 등에서 열린 형식으로 잘 구현돼 있다.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결말 역시 아도르노가 말한 베게트식의 헛된 기다림, 즉 구원이 아니라 상실과 부재를 담은 피날레의 사례라고 바디우는 주장한다.

 

슬라보예 지젝의 발문

 

이렇듯 분열된 주체에 대한 옹호, 최종성 없는 변화, 가능성의 창조 등과 같은 바그너의 특징은 결국 총체성에서 자유로운 순수예술의 가능성을 밝혀준다는 것이 바디우의 결론이다. 우리에게 위대한 예술은 여전히 하나의 가능성으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역자 김성호 교수(서울여대 영문과)의 말처럼 이 책에서 슬라보예 지젝의 발문은 거의 공편에 값할 만큼 독립적인 완결성을 갖는다. 지젝 역시 「신들의 황혼」의 결말에서 사랑을 실천하고 신처럼 행위할 가능성을 넘겨받은 군중에게 주목한다. 지젝이 정의한 바 “행위의 불안을 견디는” 예술과 바디우가 주장하는 “총체성에서 분리된 순수예술”에는 본질적으로 상통하는 지점이 있다고 역자는 강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