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힐/책 소개

독특하면서도 아름답다! _최윤

by 북인더갭 2015. 6. 28.

은근한 기이함이 빛을 발한다! _최윤

 

  독특하면서도 아름답다는 최윤 작가의 상찬을 받으며 지난 2004파라 21로 등단한 작가 김조을해의 첫 장편소설 이 출간되었다. 작가는 리조트처럼 꾸며진 가상의 수용소 을 배경으로, 인간 정신을 박탈하려는 세력에 맞서 사투를 벌이는 남매의 스토리를 힘있게 끌어나간다. 장편 은 피난민 3세대의 내면 깊이 자리잡은 냉전의 상처와 근원적 고향상실을 독특한 상상력으로 풀어낸 역작이다.

 

지금 여기 힐만한

판타지 공간이 또 어디 있겠어요?

 

작가 김조을해의 첫 장편소설 은 가상의 수용소 을 배경으로 한다. 이미 풍요가 이뤄질 대로 이뤄진 제국에서 힐은 수용소가 아니라 마치 리조트와 같은 외양을 갖추고 있다. 아름다운 건물과 산책로, 체력단련실에 스파까지 갖춘 힐은 인간이 디자인할 수 있는 가장 세련되고 이상적인 교화기관이다. 힐의 이념은 구속과 감시를 통한 교화가 아니라, “스스로 쉬면서 삶을 정돈하고 결국은 정신을 포기하게끔 만드는것이다.

 

반사회적 인물들이 수용되는 이곳 힐에 주인공 마기가 입소하면서 소설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마기는 본국인(本國人) 아버지와 속국인(屬國人)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다. 그의 어머니는 원시부족에 가까운 속국 출신의 작가로서 국제적인 명망을 얻지만 제국의 감시 속에 일찍 숨을 거두고 만다. 마기가 힐에 수용된 이유도 그가 어머니의 유작을 소수부족 방언으로 번역하려 한다는 혐의 때문이다. “스스로 싸움을 포기하도록 점잖게 기다리는 힐에 맞서 마기는 시종일관 자신의 정신을 꺾지 않는다.

 

길을 벗어나 시간을 뛰어넘었다 떠들지 마십시오. 시간을 단축했다면 언젠가 그만큼의 고통과 부작용이 꼭 나타납니다.” (240)

 

이 소설은 주인공 마기의 판타지와 힐의 판타지가 충돌하는 장면이 큰 축을 이룬다. 힐의 판타지는 시민의 정신을 제국의 통치권에 묶어두는 것이다. 힐은 그런 판타지를 위해 설립된 휴양지이자 병원이며 훈련소이기 때문이다. 반면 마기의 판타지는 어머니의 고향을 회복하는 것이다. 비록 고향은 제국에 의해 파괴되었지만, 마기의 판타지는 아름답게 그곳을 되살려내고 있다.

 

강가에서는 기쁜 일들을 이야기했고 아기들을 씻겼습니다. 그렇게 하면 강물의 힘이 세져 바닷물에 섞여도 혼돈의 바다를 이길 거라 믿었습니다.” (177)

 

이렇듯 이 소설의 가장 아름다운 문장들은 고향에 대한 마기의 판타지에 녹아들어 있다. 마기에게 남은 가족은 이제 늙고 병든 아버지와 행방을 알 수 없는 동생 욘데뿐이다. 사건은 동생 욘데가 먼저 힐을 거쳐갔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마기를 상담하던 힐의 직원 에보스가 누군가에게 피습당하면서 점점 더 긴박하게 흘러간다.

 

정신과 가슴에 새겨넣은 걸

제도가 어떻게 빼앗겠어요?

 

장편 에서 가장 매력적인 캐릭터를 꼽으라면 단연 욘데가 될 것이다. 주인공 마기의 여동생이자 입양아인 욘데는 어머니 리간의 작품을 부족방언으로 번역해 아이들이 따라 부르게 한다. 그저 따라 부르게만 했으므로 그것은 흔적을 남기지 않고 제국을 혼란에 빠뜨리는 기막힌 방법이었다. “욘데는 굳이 제국을 상대하지 않는다. 아이들을 상대한다.”

또한 그녀는 천부적인 총명함과 빛나는 상상력으로 부족방언의 변천사를 해와 달과 별과 같은 그림으로 정리해 아이들에게 가르친다. 제국은 이런 욘데의 천재성을 이용하고 싶어 힐로 불러들였던 것이다. 그러나 욘데는 아무도 모르게 힐에서 종적을 감추고 만다. 그녀의 운명은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그 실마리 하나를 암시하는 인물이 바로 에보스다. 열정에 대한 강연으로 청중을 감동시키는 솜씨로 볼 때 에보스 역시 욘데와 마찬가지로 원래 명민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에보스는 결국 제국에 굴복한 정신이다. 힐의 용어를 빌리자면, 그는 머리를 다친 사람이며 머리에 붕대를 감은 사람으로, 제국의 순화교육에 의식 모두를 빼앗긴 사람이다. 그러니 욘데 역시 에보스처럼 될 위험에 처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소설은 욘데의 행방에 관해서는 끝까지 함구한다. 다만 그녀가 남으로갈 것이라는 암시를 남길 뿐이다.

 

나도 함께 가도 될까요?

 

일견 미래의 판타지 형식을 취하는 이 소설은 사실 한국사회의 역사와 현실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 그 뿌리를 타고 내려가다보면 우리는 분단된 나라에서의 난민의 정체성이라는 무거운 주제의식과 마주치게 된다. 피난민 3세대로서의 작가의 정체성은 이번 소설을 구상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작가의 말에서 드러나듯, 이 소설은 6·25 때 살 길을 찾아 남으로 피난온 실향민들의 삶이 중요한 단서가 되어 씌어졌다.

힐을 벗어나 남으로향하고 싶어하는 욘데와 마기, 세벡, 그리고 그들의 친구들에게서 독자들은 그러한 단서를 엿볼 수 있다. 물론 여기서 ’()이란 물리적 남쪽이 아니라, 제국의 간섭을 받기 이전, 그래서 분단도 전쟁도 없었던 원초적 고향을 상징한다고 보는 쪽이 옳을 것이다. 또한 그것이 무엇이 됐든, 이른바 피난민 3세대의 내면 깊이 새겨진 냉전의 상흔, 그리고 그들의 무의식 깊이 자리잡은 근원적 고향상실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뜻깊은 일이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소설가 최윤이 지적하듯이 작가의 현란하지 않은 주제의식이 그저 범상한 형식으로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남다른 발상과 참신한 관찰력, 고유한 언어의 든든한 지원을 받고 있는 점이다. 그 점에서 은 우리 문학이 기다려온 하나의 수확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