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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혼열차라는 게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다. 막 결혼식장을 빠져나온 부푼 가슴의 두 남녀가 미지의 그곳을 향해 첫 발을 내딛는 순간, 아무리 생각해도 그들에겐 기차가 가장 잘 어울린다. 신혼열차라… 당신은 촌빨의 극치(!)라며 웃기 시작한다. 그렇지만 당신이 유토피아라 생각했던 그곳에서 벌써부터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건 현실이다. 신혼열차가 아닌 비행기나 자전거, 혹은 최신형 자가용 헬기를 타고 여기를 떠난다 해도 ‘거기’에 닿자마자 만나게 되는 건 ‘현실’뿐이다. 이래도 계속 웃을 수 있는가.

한 남자의 목표는 곰스크로 가는 것이다. 한 여자의 목표는 도저히 알 수 없다. (안타깝다. 그녀가 어린아이였을 때도 소녀였을 때도 추상적인 것을 꿈꿀 만한 시간은 없었을 것이다. 우리의 할머니들처럼) 불균형의 시작이다. 한 남자는 점점 화를 내기 시작한다. 한 여자는 먼지투성이의 방을 살만하게 꾸미기 시작한다. 아슬아슬해진다. 한쪽은 고독과 무료함 속에서, 한쪽은 옷장과 안락의자 곁에서 외롭고 고통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이상한 커플이다. 아니 이상한 삶이다.

그런데 이 이상함이 낯설지는 않다. 그것이 ‘마지막 기회’였다고 스스로 인정하는 이 남자는 거짓말쟁이 아니면 이기주의자, 둘 중의 하나다. 그 남자를 향해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 같다’고 반격하는 이 여자는 세상에서 제일가는 겁쟁이거나 합리주의자, 둘 중 하나다. 이런 사람들 많이 봐왔는데, 끼리끼리 잘 만났다.

남자는 좀더 친절했어야 했다. 왜 곰스크라는 낯선 곳으로 떠나야 하는지, 왜 꼭 ‘너’와 함께 떠나야만 하는지 간절히 설명해야 했다. 여자는 좀더 거칠었어야 했다. 왜 내가 너랑 곰스크라는 낯선 곳으로 떠나야 하는지, 왜 준비도 안된 채로 거기서 새 삶을 시작해야 하는지, 한번쯤은 내질러줬어야 했다. 그랬다면 차라리 싸움은 빨리 끝났을 수도 있다.

삶은 대부분 그렇게 흘러간다. 말이 안 통해서 발을 구르며 소리를 지르고 상처를 주고받으며 흘러간다. 어딘가 불공평하고 밑지는 듯하게 여기까지 오긴 했지만 안락함을 얻었고 고정적인 수입을 얻었다. 결과적으로는 어떤가.

결국에는 이 이상한 삶을 두고 아름답다고, 말하게 된다. 추상적인 것과 구체적인 것들이 어떤 한정된 곳에서, 이를테면 거실이나 침실, 혹은 잘 정돈된 정원 같은 데서, 바로 그곳에서 울려오는 어린 자녀의 웃음소리 같은 것을 꿰뚫고 쩡 소리를 내며 부딪칠 때면, 아무 의미없어 보이는 삶조차도 결국에는 아름답다고 고백하게 된다. 뭐야 이건, 가슴을 통째로 후려치는 이 고통은 뭐야, 여긴 곰스크가 아니잖아, 기차는 떠났잖아, 우린 더이상 젊지도 않잖아, 당신과 나는 안주하며 나이를 먹어가잖아, 그리고 서로의 이야기를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잖아!

이러한 소통불능 상황에 이어지는 건 분노와 고독뿐이다. 하지만 균열의 틈을 타고 어쩔 수 없이 흐르는 실핏줄 같은 동경은 늘 ‘거기’를 꿈꾸게 한다. 동시에 오래전부터 ‘여기’에 있었던 먼지알갱이들도 괴력을 발휘하며 우리를 붙잡기 시작한다. 유한하구나, ‘여기’와 ‘거기’를 모두 아우를 수 없는 게 삶이라는 거구나, 그래서 한쪽 어깨가 늘 무거웠던 거구나. 불안함과 불균형, 안타까움과 슬픔, 고독과 절망의 순간을 하나로 버무려 일상으로 녹여내는 삶을 그래서 슬프고 아름답다 말하는 거였구나.

당신도 이쯤에선 생각을 바꿔야 한다. 삶이라는 게 뻔하지, 중뿔난 삶이 어디 있나. 한번 더 촌빨의 극치로 생각을 몰아가야 한다. 나는 잘못한 거 하나 없는데, 내 인생이 누구 때문에 이 지경까지 왔는데…? 헛소리.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교장선생님의 한마디를 차라리 잊을 수 있다면 아무 문제없을 것이다. 우리의 거짓된 울분을 도려내고도 남을 만한 폭언이자 진실이다. 당신은 당신이 원한 삶을 살았다고, 당신 삶은 의미없는 삶이 아니라고, 당신이 원하지도 않았다면 당신은 이곳에 내리지도 않았을 거라고…. 잔인하다. 그러니까 교장님의 말뜻인즉, 마누라와 애 탓하지 마라, 너는 니가 곰스크로 가길 평생 원했다 말하지만 너는 정원이 딸린 작은 집에서 일가를 이루고 사는 삶을 정말로 원했다, 너는 당장 인정하기 힘들겠지만 니가 원했던 삶은 곰스크가 아니었단 말이다, 지금의 이 모습이었단 말이다.

설마.

그렇다면 이렇게 가정해볼 수도 있다. 완벽한 거짓말쟁이는 교장선생님이라고. 그러면 동경에 찬 삶을 꿈꿔온 우리의 주인공 ‘나’는 평범한 인물로 전락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나’와 지금 숨쉬는 나를 동일시하며 묘한 연대의식을 느꼈던 나도 계속 나를 속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누가 진짜 거짓말쟁인지는 끝까지 알 수 없다.

아이를 가지면서 말발까지 세진 여자의 의미심장한 펀치도 위력적이다. ‘인생이 의미를 가질지 아니면 망가질지는 오직 당신에게, 다른 사람이 아닌 당신에게만 달려 있다는 사실을 왜 직시하지 않는 거죠?’ 그런 건가. 정말 내 인생의 의미는 나에게만 달려 있는 건가. 그렇다면 여자는 자신의 삶을 직시하며 여기에 머무른 것인가. 다른 어떤 곳을 한번도 꿈꿔보지 못했으면서, 다른 곳에 가보지도 못했으면서 어떻게 여기가 우리의 자리라고 확신할 수 있는 거지? 그렇게 자신있는 삶을 살아왔다면 왜 더 강할 수 없었던 거지?

의심하기 시작하면 모든 말에는 다 거짓말이 섞여 있는 듯하다. 아내와 아이들을 지나쳐 남자가 다락방으로 올라가 틀어박히는 마지막 장면만으로는 그의 마음을 헤아리기 힘들다. 그것이 쪽팔림이었는지 낭패감이었는지, 당신들이 뭘 알어, 하는 분노였는지, 막연한 후회의 감정이었는지. 그러니까 각자 ‘고집 센 어린아이처럼’ 외롭게 사는 게 인생인지도 모를 일이다.

사실 설명 안 해도 술술 통하는 소통불능의 경지까지 두 사람이 같이 가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닌 듯하다. 여기까지 같이 온 사람 아닌 그 누구도 당신의 고독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불균형과 외로움을 동반한 아름다움은 그런 종류의 아름다움일 것이다. 이상한 아름다움. 기다리던 기차를 떠나보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아름다움, 누군가에게 왜 자꾸 거짓말 하며 사니, 하며 불시의 질책을 받아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아름다움, 말이 안 통하네, 하면서도 일체감을 느끼며 같이 살게 되는 혼란스런 아름다움.

아직도 신혼열차라는 게 있는지 모르겠다. 그들이 행복했을지 불행했을지 간단히 말할 수 없는 게 다행인지도 모르겠다. ‘여기’와 ‘거기’의 차이가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당신이 여전히 실실 웃고 있는지, 그것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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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yulim님의 리뷰/ 교보 알라딘


속되지 않은 꿈을 찾는 일이 가능하리라 믿었던 시절이 있었다. 조악한 복사본으로 <곰스크로 가는 기차>를 처음 읽었던 것도 그 때, 스무 살 무렵이었다. 당시의 나는, 어쩌면 우리들 대부분은 속세에 뛰어들 용기를 내기엔 지나치게 겁이 많았고, 속세 너머 무언가를 찾을 수 있다 확신하는 데만큼은 겁이 없었다. 막연하고 불투명해 대충만 설명해도 폼 나고 가치 있는 삶의 지향으로 보이던 저마다의 ‘곰스크’는 그 시절 얼치기 인문학도나 게으른 문학 청년들에게 적절한 피난처이자 알리바이였다.

곰스크로 가는 차표를 살 용기는커녕 차표 살 여비 모을 부지런함도 없이 이십대를 보냈던 나는 겨우 밥벌이를 할 직장을 찾았고 잠시 ‘곰스크’를 잊었다. 그리고 ‘대략 엇비슷하게 현실적이 되어’ 살아가면서도 술자리 치기를 빌어 ‘곰스크’로 가지 않은 선택의 아쉬움을 읊조리는 왕년의 우리들을 가끔 만날 때면 ‘곰스크로 떠난 것도 인생이고, 남은 것도 인생이다. 결국은 당신이 선택한, 바라마지 않았던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이다. 아닌 것처럼 굴지 말고 만족하라’ 따위 충고를 던지곤 했다. 선택은 선택이다. 물릴 수 없는 것은 물릴 수 없다. 현명하지만 동어반복일 뿐인 충고. 난 애저녁에 곰스크로 떠나지 못하고 주저앉은 주인공에게 늙은 선생님이 던지는 충고를 습득했었나보다. 그건 나 자신을 위안하는 충고이기도 했다.

하지만 난 군대 훈련병 시절부터 위장 군기의 대명사로 불리었던 인간이었다. 그 충고는 어쩌면 ‘곰스크’를 포기하고 남기 위한 변명이 아니라 언젠가 떠나는 선택을 했을 때를 위한 변명이었는지도 모른다. 난 주인공처럼, 아니 주인공보다 훨씬 안정된 삶과 예측 가능한 미래를 두려워했다. 결국 ‘곰스크’를 향해 떠났다. 삼십대 중반이 되기 전의 일이었다. 비교적 안정되었던 직장을 포기하고 위대한 드라마 한편 남기겠다고 작가가 되는 지망생의 길에 들어선 거다. 돈 버는 작가가 아닌 지망생인 한 내 밥벌이와 갑자기 들이닥치는 신산한 인생의 짐을 책임져야 하기에 이러저러한 임시직을 거치며 현재도 ‘곰스크’와는 거리가 먼 생계형 인간으로 살아가고 있다. 물론 그 사이 고질적인 게으름과 여전한 용기 없음, 태생적인 무능함으로 여러 차례 꿈의 좌절을 겪어야 했다.

난 지금 어디쯤 와있는 것일까? 조금 늦게 고백하자면 난 이 책 옮긴이의 골방 후배이며, 옮긴이의 말 속 ‘이따금씩 만나면 정말 거짓말처럼 또다시 곰스크를 이야기하고 우리의 못다 이룬 꿈과 그 대신 얻은 아내며 아이들에 대해 수다를 떨어대는’ 우리들 중 한 사람이다. 그들은 나에게 곰스크로 떠난 용기를 진심으로 격려하고, 얼마간 부러워하며, 얼마간은 그들이 대리 만족할 만큼 충분히 이상적인 ‘곰스크’의 삶을 살아가지 못하는 나를 안쓰러워해주는 것도 같다. 난 피식 웃으며 다시금 늙은 선생님의 충고를 반복하거나 생계형 인생의 고단함을 하소연한다. 떠난 이가 남은 이에게 하는 게 고작 시시한 넋두리라니.

우, 난 지금 어디쯤 와있는 것일까? 아직도 난 곰스크행 급행열차의 차표를 사모으고 있거나 어디로 가는 지 분명치 않은 열차를 타고 있거나 그곳에 도착하긴 했지만 길을 잃고 헤매고 있다고 주문을 건다. 곰스크의 희망을 포기했다고 말하지 않기 위해. 나 또한 비록 평범하지만은 않은 나름의 방식으로 정착을 했지만, 오래된 곰스크의 갈망을 쉽게 포기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근 이십년 만에 다시 읽은 <곰스크로 가는 기차>는 더 이상 현실 때문에 꿈을 포기한 남성 가장의 정신승리법으로 읽히지는 않는다. 어쩌면 곰스크행 헛발질을 꽤 오랬동안 하고 있는 신세 탓이리라. 그렇기에 이 길지 않은 중편을 읽고 작가가 말한 것보다 말하지 않은 것에 대해 더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곰스크에서 돌아와 내린 승객들에게 왜 곰스크에 대해 묻지 않을까? 물으면 그들은 무슨 얘기를 할까?

가령 <와이키키 브라더스>는 한발 더 나아간다. 청춘 시절 록밴드 멤버의 꿈을 향해 몸을 던진 주인공은 고향으로 돌아와 친구들을 만난다. 꿈을 포기하고 현실을 택한 친구들은 그에게 묻는다. 하고 싶은 걸 하고 사니 행복하니? 단란주점에서 술손님 비위 맞추기 위해 벌거벗고 기타치는 처지의 주인공은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떠난 자도 남은 자도 지나치게 힘없이 그려지긴 했지만 어쩌면 그 장면이 곰스크에 대해 한 걸음 더 나아간 지점이리라. 곰스크는 세상 저 너머에 있지 않다. 곰스크로 떠나서도 우린 거칠고 비루한 현실을 살아야 한다.

떠나지 않은 이라면 어떨까? 오래 전 나의 독서가 주인공에 대한 안타까움과 연민으로 치우쳤다면 이번 독서에선 오히려 주인공의 아내에게 더 애정이 갔다. 저 답답한 남편 만나 고생이라고. 어쩌면 주인공의 관념 속 ‘곰스크’보다도 아내가 그곳 정착지에서 곰스크로 만들 수 있을 거 같았다.

십수년 전 이 책의 옮긴이인 선배는 내가 발로 쓰다만 소설을 보고 “모든 우화는 비극이다”라는 멋들어지지만 이해가 잘 되지는 않았던 전언을 남겼다. (그 소설에는 바이올린이 나왔고, 자전거가 나왔고 중국집이 나왔다. 소재만으로 낭만적 우화가 떠오르지 않는가?) 아직도 잘 이해하지 못한 그 전언을 <곰스크로 가는 기차>에 폼나게 적용해 보고 싶다. 늙은 선생님의 위로에도 이 소설은 비극적이다. 그건 이 소설이 삶의 디테일을 (어쩌면 작가가 의도적으로) 갖지 않은 우화이기 때문이다. 전언을 이렇게 바꿔보면 어떨까? “모든 코미디는 디테일에서 나온다.” 곰스크로 끝내 떠나지 못한 그들 부부의 삶의 속살을, 정착지에서의 좌충우돌한 삶을 그려본다면 그들의 인생이 그렇게 끔찍하지만은 않을 거다. 근원적으로는 결국 곰스크에 도달하지 못할 운명인, 우리 모두의 비극적 인생을 코미디로 구원하는 길은 삶의 디테일, 순간에 대한 천착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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