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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득권층/옮긴이의 말'에 해당되는 글 1

  1. 2017.03.31 <기득권층> 옮긴이의 말_조은혜

옮긴이의 말



영국 전통의 엘리트 양성소인 옥스포드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했으며 『가디언』을 비롯한 여러 신문에 기고하고, BBC처럼 유명한 TV와 라디오 방송에 자주 출연하는 젊은이가 ‘기득권층’을 비판하는 책을 썼다고 하면 그저 맥 빠지는 자기반성에 그치겠거니 하는 편견이 앞설지도 모른다. 그러나 전작이자 첫 단행본 『차브』를 통해 일상에서 폭넓게 작동하는 노동계급의 악마화 문제를 속속들이 파헤쳐 찬사를 받은 오언 존스는 이 책에서도 기득권층의 문제를 거침없이 탐구한다. 그가 보기에 자신의 위치는 기득권층에게 접근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특권적일 수는 있지만, 그럼에도 이 점이 기득권에 대한 비판을 불가능하게 할 모순점이거나 자신을 기득권의 테두리 안에 넣을 이유는 되지 못한다고 단언한다. 



‘기득권층’에 대한 반감은 꽤 널리 퍼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 기득권층이 누구이고, 어떤 사람들이며, 기득권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는 오랫동안 불투명하게 남겨져 있었다. 저자가 보기에, 그러한 불투명성은 기득권에 대한 의미있는 도전을 더욱 지연시킨다. 군주가 부여하는 작위가 아직 존재하며 사회 계층・계급간 분리가 어느 정도 가시적인 영국에서, 기득권층이란 세습된 부와 작위를 가지고 태어나 이튼 칼리지-옥스브리지를 졸업한 상류계급 인사와 그들의 관계망 정도로 생각되기 쉽다. 실제로 기득권을 뜻하는 영어단어 ‘establishment’가 오늘날과 같은 용례로 쓰이는 데 큰 영향을 미친 1950년대 칼럼니스트 헨리 페얼리는 영국 귀족 및 상류계급의 인맥을 통해 작동하는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특권을 가리키는 말로 기득권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오언 존스는 기득권의 그러한 정의가 충분하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기득권층은 시대에 따라 변하는 유동적인 집단이기에 세습된 신분만으로 정의될 수 없다. 저자가 보는 현 기득권층의 핵심 요소는 대처리즘 이후 정착된 현 영국의 사회적 합의를 불변의 상식으로 여기며, 거기에 도전하는 모든 생각과 행동을 극단적이고 비현실적인 것으로 규정하는 일련의 사고방식이다. 이 사고방식은 경제적일 뿐 아니라 도덕적이기도 한 일련의 내러티브를 생산해낸다. 예를 들면, ‘개인의 자유로운 욕망 추구가 사회 발전의 원동력이다. 뛰어난 능력을 가진 비범한 기업인과 금융인이 나머지 무능한 인구를 부양할 부를 생산하므로 그들에게 충분한 보상이 있어야 한다. 시장이 다 알아서 최선의 길을 찾는다. 국가는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고, 각종 규제로 뛰어난 개인들의 재능 발휘를 방해할 뿐이다. 국영사업은 민간에 비해 비효율적이고 경쟁력이 떨어진다’와 같은 견해가 그것이다. 이와 동시에, 자유시장의 작동을 방해하고 교란하는 국가개입(복지와 같은)과 노동운동 등은 타파해야 할 적으로 악마화된다. 


이들의 서사는 결국 대처의 개혁이 복지국가와 노동조합이 일으킨 ‘영국병’(British disease)의 끔찍한 비효율성에서 영국을 구해냈다는 것이다. 동시에 실업급여나 장애연금을 비롯한 국가보조금 수령자들(이민자를 포함한)은 기업가가 창출한 부를 좀먹는 쓸모없는 존재이자, 실질임금 삭감과 생활수준 악화에 끊임없이 시달리는 영국인들의 분노를 돌릴 좋은 표적이 된다. 이런 서사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난다면 사회적·학문적·정치적 주류로 진입할 수 없을뿐더러 경청할 만한 소수의견으로 여겨지기조차 힘들 정도로, 이는 영국 사회의 굳건한 주류 내러티브로 자리잡았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러나 논리정연해 보이는 기득권층의 설명은 이미 널리 통용되고 있기에 그것이 비교적 새롭게 나타난 내러티브라는 점을 잊기 쉽다. 저자가 세심하게 상기시키는바,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영국은 사회민주주의적 좌파와 온정주의적 복지국가에 공감하는 주류 우파가 권력을 겨루는 국가였다. 당시만 해도 민영화와 부자 감세를 포함한 현 기득권의 상식들은 지나치게 극단적이고, 너무나 과격해서 현실성이 없는 몽상으로나 여겨졌다. 그 사실을 직시할 때 비로소 대처리즘의 실체 또한 바로 보인다. 대처리즘은 단순히 그 ‘개혁’의 적시성과 과단성 덕분에 성공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논쟁이 일어나는 지형 자체를 바꾸고 무엇이 중도이고 무엇이 극단으로 규정되는지를, 즉 사회적 합의를 바꿔내는 지각변동이었던 것이다. 대중이 받아들일 만한 의견의 테두리를 지칭하는 ‘오버턴의 창’을 옮기는 사상적 작업이 뒷받침되었기에 대처리즘은 영국 사회의 상식으로 지속되어, 심지어 신노동당 같은 그들의 정치적 반대파마저 대처리즘이 주조해낸 용어와 한계 속에 자신들을 가두게 된다. 


따라서 대처라는 카리스마적 인물 한 명이 갑자기 등장해 영국을 장악했다기보다, 적어도 프리드리히 하이에크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이 투쟁에 몸을 던진 이론적 선각자(outriders, 본문에서는 ‘선동자’로 번역됨)들이 한 세대 이전부터 이미 등장을 예비했던 것이다. 저자는 바로 그 선각자들의 기원까지 거슬러 올라가, 오늘날까지 유지되는 기득권층의 합의가 영국에서 작동하는 방식을 탐구한다. 정치인과 언론인에서부터 경찰과 같은 관료들까지도 폭넓게 동조하며 그 유지에 힘을 보태는 기득권층 선각자들의 사상 덕분에 사기업들은 공공서비스를 넘겨받아 비효율적으로 운영하며 이윤을 추구하고, 그러면서도 세금을 부당한 비용인 것처럼 회피하며, 금융가들은 규제받지 않고 이윤을 추구할 수 있었다. 기득권의 대항세력이 자신들을 의미있는 대안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실패함에 따라, 이러한 체제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마저도 대안은 없다는 체념에 깊이 빠지고, 이는 다시 기득권과 그들의 사상을 강화한다. 저자는 민영화-감세가 효율성을 증진시킨다는 신자유주의 도그마, 일하기 싫어하는 노동계급이 부정하게 세금을 타내기 때문에 영국이 만성 적자에 시달리다가 경제위기의 늪에 빠졌다는 내러티브 등의 허구성을 풍부하고 자세한 실례와 함께, 샅샅이 파헤친다. 


그러나 이 책의 비범함은 단순히 오늘날 통용되는 지배적 내러티브 이면에 숨겨진 역사성을 밝혀낸 데 그치지 않는다. 저자는 사상의 확산과 통용이 이루어진 역사와 함께 그 양태와 영향을 살아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로 분석한다. 선각자들은 위기의 시대에 대안적 가치를 제시하고, 추상적 이념과 구체적 실현방안을 다각도로 연구했으며, 그들의 사상으로부터 얻을 것이 있는 이익집단의 동의와 지지를 구했다. 이 책은 선각자들의 사고 실험이 통치이념이 된 지금 영국을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존스는 힐즈버러 참사의 유족부터 영국 하원의원과 상원의원까지, 4대 회계법인 중역에서부터 불심검문에 노출된 흑인 피해자와 구직수당을 받은 경험이 있는 전 실업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목소리를 인용하고 있다. 그 인용은 특정인을 악마화하거나 반대로 도덕적으로 무조건 정당한 피해자로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저자는 백인, 비장애인, 남성, 성소수자 등으로 표현되는 자신의 자리를 부정하거나 망각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그들에게 공감하고, 반박하고, 동의하고, 논쟁한다. 그리고 그러한 분석을 바탕으로, 저자는 기득권층의 선각자들이 해냈던 것을 지금 기득권의 반대자들이 해내야 할 것이며, 따라서 현재 기득권의 반대자들은 선각자들과 같은 위치에 있다고 말한다. 저자는 선각자들이 주변부였을 때조차 잃지 않았던 신념과 낙관성, 끈기가 현재 학계의 상대적 주변부로 밀려난 장하준 같은 학자들의 쾌활함을 닮아 있다고 평한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저자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기득권의 선각자들이 수세에 몰렸을 무렵 19세기 자유주의를 향수했다면, 존스는 20세기 중반 이후 복지국가 모델의 성취와 성과를 돌아보며 그보다 더 앞으로 나아갈 힘을 구한다.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존스의 이야기는 선각자들의 내러티브에 대한 가장 철저한 반박임과 동시에 그들에게 보내는 찬사다. 수도 적고 현실성 없는 몽상가들, 한줌의 극단주의자들이 고안한 사상이 오늘날 영국의 지배이념이 되었다면 그 반대도 가능하지 않겠는가. 이제 지배이념의 승리는 좌파가 절망해야 할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오늘날 현 기득권의 반대자들에게 용기를 주는 선례다.


저자에 따르면, 선각자들은 일관적인 메시지를 반복하며 현 체제에 대한 체계적인 대안을 설계하는 데 골몰하여 마침내 위기를 기회로 전환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 역사를 상기하는 것은 그들의 성공 행보에 시작이 있었듯 끝이 있을 것이라는 점을 일깨워준다. 그러나 저자가 주지하듯이, 기득권의 반대편에 있는 이들은 2008년 경제위기 당시 그와 같은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보호무역주의를 앞세운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유럽연합이 흔들리며, 국경의 장벽 없는 자본의 이동과 수탈을 규제하고자 하는 열망이 들끓는 지금은 확실히 기존 기득권의 위기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득권에 대한 반감은 체제를 변혁하고자 하는 열망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반이민과 같은 극우주의 포퓰리즘의 자양분이 되는 것이 아직까지의 현실이다. 


한편, 한국에서는 한동안 ‘금수저’라는 말이 인터넷과 신문지상을 풍미했다. 원망과 선망이 섞인 형태로 금수저가 호명될 때, 거기에는 한편으로 신분상승과 자수성가의 신화가 더이상 지탱 불가능하다는 현실 직시가 존재하는 동시에 그같은 현실을 바꿀 수는 없다는 체념도 엿보인다. 


이처럼, 기존 기득권의 반대자들은 또다른 실패를 목전에 두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로 이런 때야말로 이 책이 필요한 시점이다. 공교롭게도 이 책이 영국에서 출판되고 한국어 번역 과정을 거치는 동안 브렉시트 가결이나 트럼프의 당선 같은 굵직한 사건들이 일어났다. 이런 시대에, 이 책은 세상을 바꾸는 일이 가능하며 실제로 일어났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지금 자연스러운 상식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을 주조하고 전파한 이들에 대한 값진 통찰을 제시한다. 저자가 기대고 있는 영국의 역사적 자산과 그다지 가깝지 않은 한국의 현실을 사는 사람에게도, 심지어 저자의 정치관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이 책은 귀한 참고점을 선물하리라 생각한다.


책을 번역하는 와중에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도움을 받았으나, 좋은 동료 연구자이자 조언자로 함께해준 루인과 영국의 기득권층을 한국의 ‘금수저’와 병렬하는 지혜를 통해 이 책을 읽어낼 통찰을 보태주신 이유진 선생님, 항상 곁에서 힘을 전해준 고양이 둘리와 개 아리, 원고 정리작업을 도와준 동생 은영과 늦어지는 작업을 너그럽게 기다려주신 북인더갭 안병률 대표님을 비롯한 출판사 여러분께 감사를 전한다. 


2017년 3월

조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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