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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의 예술을 항해 던지는 전언

 

김성호_서울여대 영문과 교수

 

이 책은 리하르트 바그너에 관한, 더 넓게 말해 음악에 관한 ‘전공서적’이 아니다. 이는 바디우의 논의가 소박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 정반대를 뜻한다. 사실 이전 시대에 아도르노가 그랬듯이 바디우의 음악학적 소양은 결코 만만치 않고, 특히 바그너 오페라에 대한 애착과 식견은 놀라울 정도다. 그러나 그에게 바그너라는 화두는 현대 예술과 문화, 그리고 철학의 중심문제들로 곧장 통하는 문이다. 「반지」 연작을 비롯해 수많은 바그너 오페라와 그 공연의 역사를 논하는 이 책에서 ‘총체화’ ‘라이트모티프’ ‘극화’ ‘지연되는 피날레’ 등의 음악사적·음악학적 쟁점은 한편으로 동일성과 차이, 부정변증법, 시간성, 주체, 기독교의 지양과 같은 철학적이거나 정신사적인 쟁점과, 다른 한편 독일 민족주의, 파시즘, 집단적 의식(儀式), 민주주의, 대중 같은 정치적 쟁점과 긴밀히 교차된다. “이처럼 ‘바그너의 경우’는 미학적·철학적인 경우이자 동시에 이데올로기적·정치적인 경우다.” ‘바그너의 경우’가 역사적으로 구성된 것인 한, 바디우가 바그너의 오페라 작품 못지않게 그것의 미학적·철학적·정치적 전유의 역사에 주목하는 것은 당연하다.

 

여기서 바디우는 서로 밀접하게 연관된 세 가지 기획을 동시에 펼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첫째는 바그너를 그에 대한 고전적인—미학적인, 그리고 정치적인—비판들로부터 구출하고 새로운 바그너 형상을 제안하는 것이다. 둘째는 음악과 철학의 관계를 사유하는 가운데 현대 예술과 철학의 근본적 문제들과 대결하는 것이다. 셋째는 앞의 작업들을 바탕으로 음악, 더 넓게는 예술 전반의 미래를 탐색하는 것이다.

 

바그너의 구출이라는 기획은 기존의 지배적인 바그너 형상을 해체하는 작업을 의미한다. 아도르노에 이어 프랑스 철학자 필립 라쿠라바르트로 대표되는 바그너 비판의 전통적 논리는 그의 예술을 총체화와 신화화의 정점이자 기술공학적 효과에 의존하는 대중예술의 시작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바그너에게는 총체적 예술작품(total artwork)을 창조하려는 야심이 있었고, 이는 오페라의 재현적 세계를 기원적 신화체계 및 신화적 규범에 종속시키려는 경향과 맞물려 있었다. 바그너의 오페라는 예술작품 내의 모든 변별적 요소들, 다시 말해 차이를 통일성에 종속시키고 불연속성을 연속성으로 덮어버리며 부정이나 지연을 궁극적 긍정과 “동일주의적 종결”로 해소하고자 하는 목적론적 지향을 함축했다. 음악에 통일성을 부여하는 일은 동시에 이데올로기적 작업이기도 했으니, 그것은 어떤 신화화된 독일 민족의 이념을 구축하는 데 봉사함으로써 바그너가 나치 지도자들에 의해 전유되는 길을 열었던 것이다. 다른 한편 바그너는 오페라에 음악적 기술 및 그 외의 기술을 총동원하여 예술을 가히 기술공학의 차원으로 이끌어갔으며, 이로써 오늘날 일반화된 기술공학적 대중예술의 창시자가 되었다고 이야기된다. 여기서 바그너와 대중예술의 연관 못지않게 흥미로운 것은 그의 예술이 지니는 ‘키치적’ 성격에 관한 논의다. 바디우 자신은 제국의 임박한 몰락에 발맞추어 “소란과 허무주의의 결합, 또는 소란한 허무주의”로서의 키치가 생산된다고 주장하면서 오늘날의 할리우드 영화에서 이 사실을 확인하는데, 바그너의 비판자들은 이미 이 ‘대중예술의 창시자’에서 진정한 역사적 내용을 결여한 채 기술공학적 효과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키치 예술을 발견했던 것이다.

 

여기서 보듯이 비판자로서든 옹호자로서든 ‘바그너의 경우’에 연루된다는 것은 현대 예술과 철학의 주요 문제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함을 의미한다. 바디우의 책에서 이 문제들은 여러 가지 대립쌍으로 변형되어 나타나는데, 이미 거론한 경우를 포함하여 몇가지를 열거해보면 다음과 같다. 총체화와 탈총체화(절제), 통일(단일성)과 분해(다수성), 동일성과 차이, 연속성과 불연속성, 닫혀 있음(폐쇄, 봉쇄)과 열려 있음(개방, 탈봉쇄), 긍정(변증법)과 부정, 형식(정형)과 비형식(비정형), 조성과 무조(無調), 구상과 성좌, 구원과 유기(또는 헛된 기다림), 수사(修辭)와 현존하는 고통, 정체성과 변신, 전통과 혁신, 순수예술과 불순한 예술. 이 쌍들이 음악과 철학의 교차지점에 있다는 사실, 즉 그것들이 예술적 가치의 문제를 구성하는 동시에 현대 철학의 가장 큰 관심사랄 수 있는 주체의 문제를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하기는 어렵지 않다. 또 하나의 사실도 곧바로 우리 시야에 들어오는데, 그것은 현대의 예술과 철학, 특히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불리는 제 경향은 전자를 비판하고 후자를 옹호하는 입장에 서 있다는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 볼 때 바그너는 두말할 필요 없이 총체화, 순수예술 등등의 관념을 대표한다. 문제는 바디우가 이런 식의 평가에 반대하면서도 바그너를 총체화가 아닌 탈총체화, 순수예술이 아닌 불순한 예술 편에 속한 음악가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며, 또 그 스스로가 단순히 후자의 관념들을 옹호하는 것도 아니라는 데 있다. 바그너에 대한 평가에서, 그리고 예술형식과 주체의 문제에서 바디우의 관점은 그보다 복잡하며, 바로 그 복잡성에 새삼스러운 바그너 옹호의 현재적 의의가 있다.

 

바디우가 ‘바그너의 경우’에 개입하여 궁극적으로 취하는 입장은 무엇인가? 우선 그는 기왕에 구축된 바그너의 형상이 터무니없는 것은 아님을 인정한다. “그런 바그너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전할 뜻은 없다.” 그러나 헤겔이 서구 형이상학의 정점이자 종결을 대표하듯이 바그너가 순수예술의 정점이자 오페라의 종결에 해당한다는 것은 총체적 예술작품에 관한 그의 선언, 즉 예술가의 의도에 기댄 관념일 뿐, 실제의 예술작품에서 검증되는 사실은 아니라고 바디우는 주장한다. 바그너에 대한 압도적인 비판과는 달리, 그리고 바그너 자신의 의도와는 별개로, 그의 오페라들(특히 「반지」 연작의 마지막 악극인 「신들의 황혼」과 「명가수」, 「파르지팔」 등)에는 피날레에서의 완전한 해결에 저항하는 표지들, 결말짓기의 어려움에 관계된 어떤 주저함, 그리하여 다수의 해석 가능성을 열어두는 경향이 과장된 종결의 제스처와 나란히 존재하며, 이는 대사보다 음악 자체를 통해 더욱 잘 드러난다는 것이다. 이 논의는 몇가지 다른 주장과 결부되어 있다. 바그너의 작품에서 실은 (수사로 환원되지 않는) 고통이 경험된다거나 새로운 시간성이 창조된다는 것도 그 주장의 일부지만, 더 주목할 만한 것은 바그너의 오페라에서 주체성이 그 이전까지의 오페라에서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구성된다는 주장이다. 모차르트의 경우를 포함하는 이전의 오페라에서 주체는 관습적 인물유형이거나 유형들의 조합이었다.

 

[그러나] 바그너에서 주체의 정체성은 다르게 기능하는데, 이는 주체가 그런 식의 인물유형들의 조합에서도, 심지어는 플롯에서조차도 자신의 정체성을 취하지 않고, 본질적으로 자기자신의 분열, 내적 분리에서 정체성을 취하기 때문이다. 이는 조합으로서의 주체적 정체성이라는 관념—내가 보기에는 사실상 바그너 직전까지의 오페라에서 여전히 통용되던 관념—을 근본적으로 뒤흔든다. 바그너에서 고통받는 주체는 변증법에 포괄될 수 없는 분열, 치유될 수 없는 분열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사실 어떤 진정한 해결의 가망도 없이 내적 이질성을 확립하는 주체 내의 분열이다.

 

내적 분열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지니는 주체란 간단히 ‘탈근대적 주체’로 정의될 수 없다. 바디우가 논하는 바그너의 작품에서 그것은 분열을 그 자체로 즐기는 주체가 아니라 해결을 탐색하는 주체이며 때로는 결단하는 주체이기 때문이다. 요는 궁극적 해결이 불가능하다는 점이며, 따라서 주체는 탐색과 변화의 과정 자체로 나타난다. 부정적으로 말해 바디우가 파악하는 바그너적 주체는 정주하는 주체도, 움직이기는 하되 최종 목적지에 정신적으로 결박된 주체도, 자의식적으로 다수의 정착지 사이를 떠도는 허무주의적 주체도 아니다. 바그너 오페라의 예술적 형식도 이에 조응한다. 바디우의 관점을 따르자면 바그너의 음악은 아도르노가 찬미하는 바의 ‘앵포르멜’(비정형) 음악, 즉 분열의 음악이 아니지만, 모든 부분을 남김없이 단일한 의미로 통일시키는 총체화의 화신도 아닌 것이다. 바디우는 “형식의 변형 자체가 절대적으로 무정형적일 수 있는가?”라는, 스스로 제기한 질문에 직설적으로 답하지는 않지만, 바그너의 경우를 통해 “열려 있음만을 지향”하는 음악 대신 “열려 있음과 닫혀 있음 사이의 독특한 상호작용”의 가능성을 옹호하는 듯싶다. 연속성과 불연속성, 전통과 혁신에 대해서도 근본적으로 동일한 말을 할 수 있다. “혁신은 새롭지 않은 어떤 것에 기초한 혁신이며, 예술이 재가해야만 하는 것, 그리고 예술의 힘을 창조하는 것은 바로 이런 변증법”이다. 나아가 “예술이 그런 힘을 지닐 수 있을 때, 예술이 역사를—절충적 종합을 통해서가 아니라 내재적 승인을 통해서—새로운 것 안에 편입시킬 수 있을 때, 오직 그때에만 예술은 하나의 민족이나 국민을 대표할 수 있다.” 이 마지막 인용문에는 정치적 맥락의 바그너 비판에 대한 바디우의 답변이 들어 있다. 이 대목에서 바디우는 「명가수」를 논하고 있는데, 그에 따르면 이 오페라는 독일 예술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그것은 독일 예술이 ‘독일의’ 예술이기 때문이 아니라 독일 예술 자체가 바로 독일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독일의 본질은 특정 정치체의 운명과는 단절된 독일 예술이다. 그러나 이 민족예술의 관념은 배타적·운명론적 민족주의와, 또는 ‘정치의 미학화’와 아무 상관이 없다. 독일 예술은 하나의 특수한 예술이지만, 어떤 특수한 동일성의 표현이라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전통과 혁신, 또는 열려 있음과 닫혀 있음의 변증법이 일어나는 역사적 장소라는 의미에서 그러하기 때문이다.

 

바디우가 제시하려는 새로운 바그너는 총체화와 순수예술 등의 반대항으로 이루어진 형상이라기보다 그 개념적 대립구조 자체를 넘어서 있는 형상일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중요한 것은 바그너 자체가 아닐지 모른다. 바디우의 궁극적 관심은 실재로서의 바그너보다 가능성으로서의 바그너, 그가 미래의 예술을 향해 던지는 소리 없는 전언에 있는 것이 아닐까.

 

내가 표명하는 입장은 우리가 순수예술의 부활 직전에 와 있다는 것이겠는데, 바로 이 지점에서 바그너가 호출되어야 한다. 내 가설은 순수예술이 다시 한번 우리 미래의 일부가 되었다는 것이다. 어떻게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나는 이것을 절대적으로 확신한다. 위대함은 더이상 우리 과거의 일부만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미래의 일부이기도 한 것이다. 두말할 필요 없이 그것은 예전과 똑같은 종류의 위대함은 아니다. 그러면 그것은 어떤 위대함인가?

그것은 확실히 순수예술이지만, 총체성에서 분리된 순수예술, 즉 총체성의 미학화로서의 순수예술이 아니라 오로지 총체성에서 분리되는 한에서의 순수예술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분명 새로운 유형의 위대함이다.

 

“총체성에서 분리된 순수예술”—이것이 바디우가 예견하는, 또는 희구하는 예술의 미래다. 또 그것이 바그너 오페라의 상반된 요소들 또는 지향들로부터 바디우가 구성해내고자 하는 새로운 가능성이다. 물론 여전히 모호하기는 하다. 라쿠라바르트처럼 예술작품의 총체성을 거부하되 그와는 대조적으로 순수예술을 살려내고자 하는 바디우의 이 시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바그너가 다만 그 그림자일 뿐이라면, 그런 순수예술의 실체를 어디서, 어떻게 분간할 것인가? 바디우의 “확신”은, 그가 그 근거에 관해서는 발을 빼지만, 어쨌거나 오늘날의 예술에 대한 직관에 기초하는가, 아니면 다만 바그너와 미래를 이어보겠다는 포부에 불과한가?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은 바디우로부터, 적어도 바디우로부터 충분히, 오지 않을 것이다. 답을 구해야 하는 곳은 끊임없는 실험이 이루어지는 예술적 실천과 비평의 현장이다. 철학자 바디우의 몫은 미래를 위해 하나의 의제를 던지는 것이며, 이 책에서 그는 이 몫을 충분히 감당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긴 발문을 쓴 지젝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지젝의 다른 책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그에게서 바디우의 논의에 대한 자상한 해설이나 제기되는 질문에 대한 답을 기대해선 안된다는 사실을 금방 알아차릴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발문’(Afterword)이라는 명칭은 그저 형식적인 것에 불과하다. 지젝이 실제로 ‘덧붙여놓은’ 것은 바디우의 바그너론에 관한 글이 아니라(물론 간간이 바디우가 언급되기는 한다) 자기 자신의 바그너론 및 모차르트론에다 이 논의들과 연관시킬 수 있는 온갖 주제—사랑과 섹스, 파스칼적 윤리, 자본주의적 요구로서의 경제외적 자선 등등—의 논의를 더한 어떤 것이다. 게다가 지젝의 바그너론이나 오페라에 관한 생각이 꼭 바디우와 일치하는 것도 아니다. (가령 지젝은 오페라에서 대사보다 음악이 진정한 의미를 전달한다는 통설을 반박한다.) 바디우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지젝의 글만 따로 읽어도 우리는 충분한 재미와 통찰을 얻을 수 있고,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을 (공저는 아니겠지만) 공편(共編)으로 부를 수도 있겠다. 자신의 글을 통해 바디우가 미래의 예술에 관한 의제를 제시한다면 지젝은 주체의 행위를 화두로 던진다. “참된 열려 있음은 결정 불가능성의 열려 있음이 아니라 사건의 여파 속에 살아가기, 결과를 이끌어내기의 열려 있음이다—무엇의 결과인가? 바로 사건이 열어 놓은 새로운 공간의 결과다. 셰로가 말하는 불안은 행위의 불안이다.” 이 불안을 견디는 것과 “총체성에서 분리된 순수예술” 또는 “새로운 유형의 위대함”에 헌신하는 것이 언제나 동일한 행위를 뜻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본질적으로 상통하는 지점이 있다고 나는 믿는다.

 

(하략)

 

Comment

“파시즘의 화신인가, 위대한 거장인가?”

알랭 바디우, 바그너를 둘러싼 논쟁에 한획을 긋는다

 

바그너 하면 떠오르는 두 가지의 대중적인 이미지가 있다. 하나는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이 연출한 영화 『지옥의 묵시록』에서 미군이 베트남 해안마을을 폭격할 때 울려 퍼지는 ‘발퀴레의 기행’이며 또 하나는 결혼식장에서 흔히 연주되는 ‘결혼행진곡’이다. 각각 바그너의 오페라 「발퀴레」와 「로엔그린」에 삽입된 두 곡은 매우 상반된 의미를 갖는다. 전자가 강렬하고 스펙터클한 관현악으로 무시무시하고 파괴적인 제국주의의 분위기와 잘 어울린다면 후자는 매우 낭만적이고 목가적인 농촌마을의 결혼식 풍경을 떠올리게 한다. 이와 같은 바그너의 이중적 면모는 나치에 의한 추앙과 맞물려 서구의 수많은 철학자들과 예술가들에게 뜨거운 논쟁거리가 되어왔다.

 

프랑스 철학을 이끄는 거장으로 평가받는 알랭 바디우(Alain Badiou)의 신간 『바그너는 위험한가』는 이처럼 파시즘의 화신 혹은 위대한 거장이라는 극단적인 평가 사이에서 요동쳐온 바그너 상(像)을 니체, 하이데거, 아도르노, 라쿠라바르트에 이르는 서구 사상사의 맥락에서 검토하고 현대 예술의 가능성을 보여준 작가로서 바그너를 재정립하려는 시도다. 키치와 할리우드식 스펙터클이 지배하는 시대에 맞서 순수예술의 의미를 되묻는 이 책은 음악은 물론 철학과 예술 전반에 걸친 바디우의 중요한 성찰을 담고 있다. 마침 바그너 탄생 200주년을 앞두고 출간되어 내년 한해 동안 집중 조명될 예정인 바그너의 음악세계를 이해하는 데도 좋은 책이 될 것이다.

 

현대 철학과 바그너의 대결

 

바그너와 맞서온 서구 철학자들 중 알랭 바디우가 가장 심혈을 기울여 분석한 사람은 아도르노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아도르노는 철학자이자 뛰어난 음악이론가로서 『바그너를 찾아서』라는 책으로 바그너와 직접 대결한 바 있다. 하지만 바디우는 이 책을 뛰어넘어 곧장 아도르노의 주저(主著) 『부정 변증법』으로 향한다. 이 책을 분석하며 바디우가 가장 강조하는 지점은 바로 ‘아우슈비츠’다. 엄밀히 말해 아도르노는 본질을 사유한 철학자가 아니라 고통, 다시 말해 전대미문의 역사적 고통으로 체험된 아우슈비츠를 사유한 철학자라는 것이 바디우의 주장이다. 아도르노에게 아우슈비츠가 중요한 이유는 이 사건이 서구의 동일성 원리, 즉 차이를 무시하고 일자(the One)로 모든 것을 환원하는 원리가 극단적으로 구현된 재난이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그것은 ‘부정의 부정은 긍정’이라는 기계적이고 수학적인 사고방식이 이끌어낸 재난이기도 했다. 바디우는 이러한 고통의 체험을 반복하지 않기 위한 고투로서의 아도르노의 ‘부정 변증법’ 안에 담긴 예술적 의미를 추론해낸다. 그것은 바로 동일성의 논리에서 빠져나오는 앵포르멜(informelle, 비정형) 예술이고 차이와 타자성을 지켜내는 예술이며 어떤 구원의 가망도 없는 헛된 기다림―『고도를 기다리며』에서처럼―의 예술이다.

 

그러나 문제는 아도르노를 비롯한 서구 철학이 바그너를 전형적인 동일성 논리에 빠진 음악가로 비판해왔다는 점이다. 그 논쟁의 역사는 놀라울 정도로 흥미롭고 풍부한데 처음에는 니체가 바그너와 싸웠고, 그 다음에 나치가 바그너와 융화된 모종의 니체를 만들어냈으며 그 결과 하이데거, 아도르노, 라쿠라바르트가 시차를 두고 차례로 논쟁에 가세하게 되었다. 이 논쟁에서 주장된바, 바그너는 대중에게 음악적 통일성을 강제하여 차이를 없애버리는 작가이자, 독일 민족의 신화와 공모한 원(原)파시스트이며, 고통을 감상적 스펙터클에 종속시키는 작가로 평가된다. 바디우가 적절하게 지적하듯이 이처럼 ‘바그너의 경우’는 한편으로는 미학적이고 철학적인 경우이자 동시에 이데올로기적이고 정치적인 경우인 것이다.

 

바디우가 재구성한 ‘바그너의 경우’

 

바그너에게 쏟아진 이런 비난들에 바디우가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바그너에게 그런 경향이 있었다는 것을 부인할 생각은 없다고 단호하게 밝힌다. 그러나 바디우는 바그너를 순수예술의 종말로 보는 견해, 즉 실패한 헤겔식 총체성의 예술로 보는 견해에는 다른 입장을 취한다. 바디우가 보기에 바그너는 오히려 순수예술의 마지막 거장이며 그 점에서 ‘총체성에서 분리된 순수예술’로서의 바그너가 다시 호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이 책에서 가장 독특하고 흥미로운 견해라고 할 수 있는데 바디우는 이 지점에서 비로소 서구 철학은 물론 바그너 자신의 견해와도 다른 새로운 ‘바그너의 경우’를 그려낸다.

 

바디우에 의해 전혀 새롭게 해석된 바그너는 우선 동일성에 저항하는 예술가다. 가령 「뉘른베르크의 명가수」 3막에서 자신의 예술적 권위와 사랑을 포기하는 작스의 결심은 일관되게 예측되는 결심이 아니라 선율 안에서 예측 불가능한 가능성으로 드러나는 결심이다. 또한 바그너의 고통이 결코 싸구려 연민이 아닌 분열적인 주체의 고통을 형상화한다는 사실도 중요하다.

 

바디우는 바그너 오페라의 주체가 본질적으로 자기자신의 분열에서 정체성을 찾는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그 예로 절대적으로 해결 불가능한 분열을 극한까지 경험하고야 마는 방랑자 ‘탄호이저’를 든다. 무엇보다 마르크스, 다윈과 동시대인으로서 스스로 드레스덴 5월 혁명(1849)에 참여했다가 수배 후 망명까지 했던 바그너가 19세기에 어울리는 진보적이고 열린 가능성을 탐색했다는 점도 강조된다. 이는 ‘신들의 죽음’ 이후 인류에게 넘어간 세계의 운명을 다룬 「신들의 황혼」의 결말, 신화가 아니라 예술 자체에서 독일의 보편성을 구현하는 「명가수」의 결말, 구원자를 구원함으로써 기독교를 넘어서는 「파르지팔」의 결말 등에서 열린 형식으로 잘 구현돼 있다.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결말 역시 아도르노가 말한 베게트식의 헛된 기다림, 즉 구원이 아니라 상실과 부재를 담은 피날레의 사례라고 바디우는 주장한다.

 

슬라보예 지젝의 발문

 

이렇듯 분열된 주체에 대한 옹호, 최종성 없는 변화, 가능성의 창조 등과 같은 바그너의 특징은 결국 총체성에서 자유로운 순수예술의 가능성을 밝혀준다는 것이 바디우의 결론이다. 우리에게 위대한 예술은 여전히 하나의 가능성으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역자 김성호 교수(서울여대 영문과)의 말처럼 이 책에서 슬라보예 지젝의 발문은 거의 공편에 값할 만큼 독립적인 완결성을 갖는다. 지젝 역시 「신들의 황혼」의 결말에서 사랑을 실천하고 신처럼 행위할 가능성을 넘겨받은 군중에게 주목한다. 지젝이 정의한 바 “행위의 불안을 견디는” 예술과 바디우가 주장하는 “총체성에서 분리된 순수예술”에는 본질적으로 상통하는 지점이 있다고 역자는 강조한다.

Comment

<한겨레> 8월 18일

바그너에 ‘파시즘 딱지’ 이의있소

철학자들 “통일성 강제” 비난에 바디우, 음악서 ‘불확실성’ 발굴

“총체성 분리된 순수예술” 재해석

 

19세기 독일을 대표하는 음악가로 꼽히는 리하르트 바그너(1813~1883·사진)는 서구의 수많은 철학자와 예술가에게 줄곧 뜨거운 논쟁의 대상이었다. 그 주된 내용은 그의 음악이 독일 민족 신화에 대한 숭배와 고통에 대한 감상적 극화 등으로 파시즘의 원형을 보여준다는 비판과 공격이었다. 프랑스 철학자 필리프 라쿠라바르트는 <무지카 픽타>에서 “원(原)파시즘적인 정치의 미학화”라는 말로 바그너를 비판하기도 했다.

 

프랑스의 급진주의 철학자 알랭 바디우(75)는 <바그너는 위험한가>라는 자신의 책에서 기존 비판들과 다른 맥락에서 바그너를 재평가하자고 주장한다. <비미학> 등을 통해 진리를 만들어내는 절차로서 예술과 철학의 관계 등을 따져물어온 지은이는 바그너 재평가를 통해 현대 예술, 특히 음악이 오늘날 철학·이데올로기에서 차지하는 구실에 대한 독특한 사유를 펼쳐낸다.

 

바디우는 먼저 니체·아도르노 등 기존 철학자들이 바그너를 비난한 내용들을 두루 살핀다. 특히 아도르노가 <부정변증법>에서 제시한 예술관이 비판에 주된 근거를 제공한다고 본다. 아도르노는 차이를 무시하고 ‘일자’(the one)로 모든 것을 환원하는 ‘동일성’ 논리를 비판했다. 곧 ‘아우슈비츠’ 같은 고통의 체험을 화해나 구원과 같은 어떤 ‘개념’으로 섣불리 연결지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아도르노를 비롯한 비난자들에게 바그너는 “대중에게 통일성을 강제하고 타자성을 녹여버린” 동일성 논리에 빠진 음악가다. ‘무한선율’ 등 인위적 통일성을 만들어낸 그의 음악 이론과 독일 민족 신화 집착에는 동일성에 대한 강요가 있다는 것이다. 음악을 서사에 종속시키고 기술공학적 장치들을 동원해, ‘순수예술 종결자로서 총체화와 신화화, 기술공학적 효과에 의존하는 대중예술의 시작점이 됐다’는 비난도 따른다.

 

바디우는 이런 비난들을 부정하지 않는다. 대신에, “바그너 스스로도 몰랐던 두 번째 바그너를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바디우는 우리 시대에 순수예술이 부활할 가능성을 제시하면서, “(그것은) 총체성의 미학화로서의 순수예술이 아니라 오로지 총체성에서 분리되는 한에서의 순수예술로서 새로운 유형의 위대함”을 말한다. 마치 영웅화 없는 영웅주의, 전쟁 패러다임에서 빠져나온 위대함같이 동일성 논리에 빠져들지 않은 새로운 위대함을 발견해내야 한다는 이야기다.

 

이런 관점에 따라 바디우는 바그너 음악 속의 역설들을 새롭게 찾아낸다. 바그너 오페라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거>에서 시인이자 음악가인 주인공 작스는 자신의 예술적 권위와 사랑하는 여성에 대한 우월한 지위를 포기하기로 결심한다. 지은이는 여기서 작스의 결심이 대본이나 서사 등 어떤 동일성 전개에 근거를 둔 필연적인 변화가 아니라, 음악 자체를 따라가며 만들어진 예측 불가능한 변화임을 주목한다. 이는 동일성 논리에 저항하는 바그너 음악의 한 성격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경우 이졸데를 기다리는 트리스탄의 긴 기다림을 표현하긴 했지만, 결국 이졸데가 찾아오게 만들어 ‘구원’이라는 궁극적 피날레를 형상화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에 대해서도 지은이는 이졸데의 도착에 트리스탄이 할 수 있는 일은 죽는 것밖에 없다는 점을 들어, 기다림의 해결이 아닌 기다림 자체를 보여준다고 반박한다. 곧 목적론적인 시간 구성만 있다는 아도르노의 비판과 달리, 바그너 음악 속에서 고통의 경험과 분열된 주체, 불확실성에 따른 변화 등을 찾을 수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지은이는 “바그너에겐 그 뒤에 포기된 어떤 새로운 스타일의 발명 같은 것이 있었다”며, “(그는) 여전히 미래의 음악을 대표한다”고 말한다. 그의 모든 것을 파시즘의 원조로 비난해 묻어버릴 것이 아니라, 총체성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 했던 음악적 시도 등을 되살려 순수예술의 새로운 시작에 기틀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불가능 딱지가 붙은 가능성을 새롭게 발견해낸다는 차원에서, 바디우의 바그너 연구는 또다른 급진주의 정치적 기획의 연장선 위에 놓여 있다. 사상적 동지인 슬라보이 지제크 역시 책 뒤에 붙은 독립적인 발문에서 바그너 음악을 주체와 주인의 관계로 풀이한 독특한 ‘바그너론’을 펼치고 있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서울신문> 8월 18일

 

바그너 다시 보니 순수예술의 거장

 

독일 철학자 니체는 책 ‘바그너의 경우’에서 음악가 바그너를 두고 “바그너가 도대체 인간이란 말인가. 그는 오히려 질병이 아닌가. 그는 음악을 병들게 했다.”면서 독설을 쏴댔다.

 

20대 청년 니체가 50대 위대한 오페라 작곡가 바그너와의 첫 만남 이후 “그는 우리 예상보다 훨씬 탁월하고 신성한 존재”라 추앙했던 것을 생각하면 니체의 변심은 엄청난 반전이다. 명확하지 않은 신의 존재와 가치판단의 혼동을 겪으며 급기야 “신은 죽었다.”고 한 니체에게 ‘트리스탄과 이졸데’, ‘니벨룽의 반지’ 등 신화적 요소가 가득 담긴 오페라를 내놓는 바그너가 체질에 맞았을 리 없다.

 

새로운 독일의 시대정신을 만들려는 이상에 젖은 니체에게 바그너의 자기중심적인 태도와 반유대주의 사상은 실망스러운 행보였다. 니체는 “내가 혐오하는 모든 것을 향해 바그너는 한 발짝씩 내려가고 있다. 반유대주의까지도.”(‘니체 대 바그너’ 중)라면서 바그너에게서 등을 돌렸다.

 

이후 새롭게 바그너를 숭배한 인물, 히틀러가 등장했다. 바그너가 반유대주의자였던 배경도 작용했겠지만, 민중들이 열렬히 신봉하는 바그너의 음악은 히틀러가 지향하는 민족주의를 고취시키는 데 더없이 적절했다. 히틀러가 가두행진을 할 때 경건한 바그너의 ‘탄호이저 서곡’을 틀어 히틀러가 순례자이며 선지자라고 믿도록 한 것이 대표적이다.

 

이런 이유로 철학자와 예술가 사이에서 바그너의 평가는 극과 극으로 갈리면서 뜨거운 논쟁거리가 된다. 위대한 거장이거나 파시즘의 화신인 것이다. 영화 ‘지옥의 묵시록’에서 미군이 베트남 해안마을을 폭격할 때 울려 퍼지는 ‘발퀴레의 기행’과 같은 파괴적인 제국주의적 음악이거나, 결혼식장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결혼행진곡’처럼 낭만적이고 목가적인 바그너의 음악 성향과도 비슷하다.

 

모로코 출신으로 프랑스 철학계를 이끄는 알랭 바디우가 내놓은 ‘바그너는 위험한가’(Five Lessons on Wagner, 슬라보예 지젝 발문, 김성호 옮김, 북인더갭 펴냄)는 새로운 바그너를 꺼내든다. 바그너에게는 충분히 비판받을 만한 부분이 있었다는 점을 인정한다.

 

바그너는 동일성의 원리에 빠진 전형적 음악가이고, 음악적 통일성과 총체성을 강제했다는 것이 대다수의 인식이다. 하지만 바디우는 바그너의 작품 속에서 총체성에 저항하는 표지, 완벽한 결말의 회피, 다수의 해석 가능성을 여는 경향 등이 발견된다고 설명한다.

 

또 바그너를 순수예술의 종말이라고 표현하지만, 오히려 총체성에서 분리된 순수예술로서 바그너를 다시 불러들일 수 있다고도 주장한다. 바디우는 키치와 할리우드식 스펙터클이 지배하는 시대에 맞서 니체, 하이데거, 아도르노, 라쿠라바르트에 이르는 서구 사상의 이론을 살피면서 바그너 상(象)을 재정립한다.

 

바그너 탄생 200주년을 한 해 앞둔 시점에서 바그너의 음악세계를 이해하는 데도 좋다. 1만 6500원. 최여경기자 kid@seoul.co.kr

 

 

<경향신문> 8월 18일

 

나치 조력자 바그너에 대한 새로운 해석

 

리하르트 바그너는 위대한 음악가로 꼽히기도 하지만 파시즘의 화신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바그너 스스로가 반유대주의자이기도 했지만, 훗날 히틀러가 바그너를 추앙함으로써 그 이미지는 굳어졌다. 나치 군대가 행군할 때, 유대인들을 가스실에서 학살할 때도 그의 음악이 쓰였다. 이런 바그너의 면모는 니체, 하이데거, 아도르노, 라쿠라바르트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철학자, 예술가들에게 뜨거운 논쟁거리가 돼 왔다. 비판자들은 바그너의 오페라가 예술작품 내의 모든 차이를 통일성에 종속시켰고, 그것은 신화화된 독일 민족의 이념과 맞물리면서 나치 지도자들에게 전유당했다고 말한다. 현대 프랑스 철학의 거장으로 꼽히는 알랭 바디우도 이 논쟁에 가세했다. 그는 바그너에게 쏟아진 비판을 무조건 반대하지는 않는다. 다만 바그너 안에서 어쩌면 바그너 자신의 견해와 다를지도 모르는 동일성에 대한 저항, 분열된 주체의 옹호 등의 가능성을 찾아낸다. 거의 독립적인 완결성을 지닌 슬라보예 지젝의 발문도 함께 실렸다. 황경상 기자

 

 

<동아일보> 8월 18일

 

바그너 음악이 위험하다고? 순수 지키고 자유를 열었다

 

후기구조주의에 맞서 보편성과 주체를 강력히 옹호해온 프랑스의 노철학가 알랭 바디우가 가장 논쟁적인 클래식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의 음악미학을 새롭게 조명했다. 바디우는 ‘사도 바울’을 통해 그리스도교를 보수화시켰다는 비판을 받던 바울을 보편적 진리에 대한 신념을 실천한 주체적 사상가로 새롭게 조명했다. 마찬가지로 이 책에서는 ‘순수예술의 종결자’ 내지 ‘닫힌 총체성의 예술가’로 비판받는 바그너에게서 ‘순수예술의 마지막 거장’이자 ‘총체성의 닫힌 구조에서 자유로운 열린 예술가’의 면모를 끌어낸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한국일보> 8월 18일

 

바그너를 위한 변명

나치 꼬리표 떼고 순수예술 거장 재평가

 

매년 여름 바그너 오페라를 상연하는 독일 바이로이트 축제의 올해 개막작 주인공이 나치 문신 스캔들로 급작스레 물러났다. 바그너가 나치와 가까웠다는 세간의 평가 때문에 바그너의 후손들이 민감하게 반응한 때문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바그너는 수많은 예술가는 물론 철학자들에게도 열띤 논쟁을 불러일으킨 작곡가다. 특히 아도르노를 비롯한 서구 철학자들은 바그너를 총체 예술의 원류이자 순수예술의 종말로 본다. 이에 프랑스의 영향력 있는 철학자인 바디우는 바그너에 대한 재정립을 시도한다. 그는 오히려 바그너를 총체성에서 자유로운 순수예술의 마지막 거장으로 평가한다. 저자가 다른 여러 학자들과 함께 연 바그너 관련 세미나의 자료를 모아 정리한 책으로 슬라보예 지젝의 발문도 흥미로운 시각을 제공한다. 김성호 옮김. 북인더갭ㆍ336쪽ㆍ1만6,500원 김소연기자 jollylife@hk.co.kr

 

 

<매일경제> 8월 18일

 

거장과 파시스트 사이, 바그너가 있다

 

바그너 탄생 200주년이 되는 해가 4개월 앞으로 다가왔다. 저자는 `파시즘의 화신`과 `위대한 거장`이라는 극단적 평가 사이에 있는 바그너를 철학적ㆍ예술적 시각에서 검토하고 재정립한다. 니체, 하이데거, 아도르노, 라크라바르트에 이르기까지 서구 철학을 통해서 바라보는 바그너는 어떤 인물일까. 아도르노를 비롯한 서구 철학자들은 바그너를 전형적인 동일성 논리에 빠진 음악가라고 평가했다. 반면 바그너를 순수예술의 마지막 거장을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탄호이저` 등 분열된 주체를 옹호하는 음악으로 순수예술의 가능성을 열어줬다는 것이다. 북인더갭 펴냄.

 

 

<아시아경제> 8월 20일

 

◆바그너는 위험한가=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가 바그너 재정립에 도전한다. 바그너는 지금껏 파시즘의 화신과 음악적 거장이라는 극단적 평가 사이에 놓여 있었다. 바그너는 반유대주의자였다. 그를 숭배한 히틀러가 바그너를 나치 식 영웅주의로 전용하며 바그너는 더욱 논란의 대상이 됐다. 바디우는 니체와 하이데거, 아도르노 등 바그너를 두고 논쟁을 벌인 철학자들을 중심으로 서양사상사를 검토하는 한편 바그너를 순수예술의 마지막 거장으로 정의하며 철학과 예술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내보인다. 철학계의 '슈퍼스타' 슬라보예 지젝이 발문을 썼다. 알랭 바디우 지음. 김성호 옮김. 북인더갭. 1만 6500원.

 

 

<서울경제> 8월 18일

 

■바그너는 위험한가(알랭 바디우 지음, 북인더갭 펴냄)=프랑스 철학의 거장인 저자가 '파시즘의 화신' 혹은 '위대한 거장'이라는 극단적 평가를 받아온 바그너에 대한 재정립을 시도했다. 바그너를 동일성 원리에 빠진 전형적인 음악가로 규정한 서구철학의 압도적 비판과 달리 저자는 그의 음악에서 다수의 해석 가능성을 열어두는 경향이 발견된다고 설명한다. 1만6,500원.

 

 

<헤럴드경제> 8월 17일

 

▶바그너는 위험한가(알랭 바디우 지음, 김성호 옮김/북인더갭)=하이데거, 아도르노 등 서구 철학이 바그너를 바라보는 시각은 상반된다. 대중에게 음악적 통일성을강제하며 차이를 없애버리는 작가이자 독일 민족의 신화와 공모한 원조 파시스트이며 고통을 감상적 스펙터클에 종속시키는 작가로 평가한다. 바그너의 경우, 한편으로는 미학적이고 철학적이며 동시에 이데올로기적이고 정치적이란 얘기다. 바디우는 바그너를 순수예술의 종말로 보는 견해에 다른 입장을 취한다. 오히려 순수예술의 마지막 거장이며, 그 점에서 ‘총체성에서 분리된 순수예술’로서의 바그너가 다시 호출돼야 한다며 그는 새로운 바그너를 그려낸다. 슬라보예 지젝의 발문도 실려있다.

 

 

<연합뉴스> 8월 16일

 

프랑스 철학을 이끄는 거장으로 평가받는 저자가 '파시즘의 화신' 혹은 '위대한 거장'이라는 극단적 평가를 받아온 바그너에 대한 재정립을 시도했다.

서구 철학은 바그너를 동일성 원리에 빠진 전형적 음악가로 규정해왔다.

음악적 통일성을 강제함으로써 차이를 부정하고, 나치의 독일 민족 신화에 봉사했다는 것이 주된 비난이다.

하지만 저자는 바그너에 대한 압도적인 비판과 달리, 그리고 심지어 바그너 자신의 의도와는 별개로 그의 음악에는 완전한 해결에 저항하는 표지들, 즉 다수의 해석 가능성을 열어두는 경향이 발견된다고 설명한다.

저자는 바그너를 순수예술의 마지막 거장으로 호출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북인더갭. 336쪽. 1만6천500원. 임수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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