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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낙원에 머물지 않는다> 역자이신 박총 선생님을 모시고

11월 25일 저녁 홍대 인근 <카페바인>에서 북토크를 가집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를 참고하세요^^ 

 

<카페바인> 약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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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鐘)의 기원

-어느 우상숭배자의 고백

 

『신은 낙원에 머물지 않는다』의 엉성한 리뷰 _김실땅

 

경건하고 신성한 것에 넋이 나갔던 처음 기억은 초등학교 2학년 때다. 우리집은 그때 서울 변두리 한 동네 셋집으로 이사를 했는데, 이사 간 그 집에서 어느 날 아름다운 종소리를 들었다. 성도들을 저녁 예배로 초대하던 동네교회 종소리는 ‘예수 나를 오라 하네’ 라는 찬송가였는데, 그 느리고도 은은한 멜로디가 나를 사로잡았다. 건넌방 벽 한면 가운데는 미싱이 있고 양쪽으로는 철제 책상 두 개가 놓여있었는데 나는 미싱 위에 있던 화분을 치우고 그 위로 올라가 창문을 열고 밤하늘을 보며 종소리의 진원지를 찾아보았다. 어린 마음에도 정말 아름다운 멜로디라고 생각했다.

 

두번째 기억은 서른이 다 되어 엄마랑 전남 강진으로 여행을 떠난 여름이었는데, 그때도 종소리가 나를 사로잡았다. 우리는 영랑 생가와 다산초당 등을 둘러본 후 다산초당 근처 민박집에서 짐을 풀었다. 그러곤 잠이 들었는데 새벽녘 곤하게 잠든 모녀 귀에 분명히 교회 종소리는 다시 또 은은하게 들려왔다. 예수 나를 오라 하네…

 

 

그런데 읍내 컴퓨터학원에 가야 한다는 민박집 주인 딸이 자기 교재가 손님방에 있다며 책을 챙기러 이른 아침에 들어오더니, 급기야 동네 누군가는 민박집 마당에서 ‘손님이 아직도 자네’ 어쩌구 하면서 모기장 너머로 우리를 힐끔거리는 통에 엄마와 나는 잠에서 깼다.

 

-엄마도 들었어?

-교회 종소리?

-아, 그럼 꿈이 아니었구나.

 

신(神)은 그렇게 아름다운 멜로디로 나를 찾아왔다. 작은 예배당의 종소리가 나를 향한 신의 콜링이었는지 환청이었는지는 영원한 수수께끼일 것이다. 그러나 경건하고 신성하며 흠이 없고도 아름다운 완전한 어떤 존재 앞에 무릎 꿇고 경배하는 삶을 나는 어려서부터 동경했는데 그것은 아마도 종소리의 기억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아름다운 종소리에 넋이 나갔던 어린아이는 곧 삐딱한 어른이 되었다. 소위 ‘모태(못해?)신앙’이라 분류되는 나는 신이 방관한 혹독하고도 추한 역사의 장면을 증거 삼아, 또한 인본주의적이고 이성적인 논리를 잣대 삼아 나름 벼르고 있었다.

 

-주님 얼굴 뵈옵는 날, 주님은 나와의 끝짱토론을 각오하삼, 나를 납득시키지 못했다간 주님은 나때매 피곤할 거임… 큭

 

지금도 세계 구석구석에는 말도 안 되는 불의한 현실이 판을 치고 있다. 『신은 낙원에 머물지 않는다』는 이러한 여러 다른 상황에 놓인 땅을 개척지 삼아 그 상황 속에 임재하는 하나님을 탐구한 책인데, 신앙이 있건 없건 여하튼 혼란을 겪고 싶지 않다면 아예 펼치지 않는 게 상책인 책이다.

 

그들의 신학적 작업은 하나님의 위대함, 총체성, 모든 것을 망라하는 전체성에 집중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고통에 깊이 관여하는 파토스의 하나님을 그들은 보석과도 같이 아름답게 소개하는데(3장 십자가에 달린 연민의 하나님), ‘고통을 감내하며, 고난당하는 사람들과 함께 패배를 맛본 고통의 하나님이라는 강력한 상징’이 나에게 일격을 가한 혼란을 실토해보겠다.

 

네가 믿는 하나님은 고통에 찬 세상에 무엇을 줄 수 있느냐,고 사람들이 물었을 때, 믿음이 왜곡되어 넘치는(!) 나는 이제 곧 하나님이 오셔서 모든 걸 전복시킬 것이다, 라고 대응했다. 전능하심의 뜻을 완전 자의적으로 해석한 나는 작금의 부패하고 죄악된 세상을 뒤집어엎을 구원자에게는 그러한 힘과 위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거의 폭력에 가까운 괴력을 발휘하는 신을 내면에 우상화하고서 그 힘이 곧 정의라고 결론내린 채 몰래몰래 그 힘을 맹신했다. 그런 내게 신의 ‘전능하심’은 그런 뜻이 아니라고 이 책은 선포한 것이다. 신은 고통당하는 이들과 함께 아파하고 눈물 흘린다고, 그들과 함께 저항하며 울부짖는다고, 그러므로 인간이 해야 할 일은 우상화된 하나님을 파괴하고 참 하나님을 향해 슬퍼하며 소망을 갖는 것이라고, 하나님의 현존은 고통과 어둠 속에서 바로 ‘나’와 관계를 맺는다고.

 

결국, 모든 걸 전복시키고야마는 폭력적이지만 위대한 신은 나만의 우상이었다. 내가 선하고 의롭다고 생각한 방법은 힘이었고, 그 힘은 응징하는 구세주로 내게 각인됐다. 그러나 개척자들이 찾아낸 하나님은 함께 울어주며 저항하는 연민의 신이었다.

 

이상하다. 나는 가부장적인 모든 걸 싫어한다. (그래서인지 엉뚱하게도 아빠와의 대결의식은 아직도 치열하다!) 늘 배제되는 존재일 뿐만 아니라 부차적이고도 그림자 같은 전통적인 여성상에 반기를 들며 그러한 공격에 굴하지 않으려고 나는 늘 나를 훈계했다. 나의 언어와 나의 목소리를 갖고자 골몰했고, 이러한 나를 시답잖게 여기는 남성들을 나도 우습게 봐줬고 그 결과 모태솔로서의 삶을 이십대 내내 기꺼이 살았다. 그런 내가 내 가슴에 품었던 거짓 신을 까발려보니 영양상태가 좋으며 힘이 있고 가부장적인 권위를 휘두르는 신이었다니. 한편으론 혐오하며 한편으론 흠모하는 나의 분열된 정체성에 빠직, 균열이 일기 시작했다. 5장 ‘여성답게 행하시는 하나님’은 이토록 가혹하고도 적나라하게 나를 무장해제 시켰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신비는 여성성이나 남성성으로 간단하게 규명되는 문제가 결코 아니다. 그리고 정해진 틀 안에서 하나님을 정의하다간 또 다른 기형적인 우상만 재생산할 뿐이다. 단지 이 홀가분함과 동시에 느껴지는 쪽팔림, 그리고 한없는 감사와 기쁨에 내가 감동하는 까닭은 이 모든 깨달음이 분열된 나를 위로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바로 파토스의 하나님이며 나를 먹이시고 내 모습 이대로를 사랑하는 하나님이다.

 

그 하나님은 나와 함께 여행을 떠나 어느 시골교회의 은은한 종소리를 함께 들었던 엄마의 존재로 충분히 느껴지는 따뜻한 모성이다. 하나님을 남성의 언어로 묘사하고 우상화한 세계에서 나는 섬세하고도 유머러스하며 총명하고 따뜻한 엄마의 존재를 하나님 사랑과 동일하게 만끽하는 것이다. 짧은 여행길에도 하나님은 임재하며 동시에 햇살과 바람에 깃들여 초월적인 존재로 동행하신다. 아주 작은 추억 하나, 아주 흔한 찬송가 한 소절, 아주 엉뚱한 농담 한마디도 하나님은 나와 함께 소중히 여기고, 나와 함께 흥얼거리며, 나와 함께 킥킥 거려주는 다정한 엄마다. (이런 나를 이단이라고 손가락질 하면 아마 나는 이단이 맞을 수도 있다.) 이런 깨달음과 설레는 고백은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전혀 불가능했을 만큼 나는 하나님을 오해했을 수 있다. 내 신앙의 감수성은 너무 빨리 굳어버렸고, 심판자이자 통치자인 한 이미지에 갇혀 그 품 안에서 뛰놀 수 있는 특권도 알아서 반납했던 것 같다.

 

충만한 사랑으로 인간을 회복시키는 하나님은 인간의 언어로 정리된 남성/여성의 메타포, 혹은 제국주의자들의 탐욕과 권력욕으로 결코 박제되지 않는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그건 참 신이 아니란 증거다. 하나님은 인간이 자유롭기를 원하신다. 모든 독점적인 권력과 그 권력이 남발한 왜곡된 이미지를 파괴하고, 현대의 우상을 깨뜨리며 참 생명을 향해 다같이 저항하며 연대하라고 하나님은 명령하신다. ‘내가 모든 걸 곧 뒤집어엎어줄 테니 나를 믿고 내 힘을 믿어라’가 아니라 ‘나도 같이 울어주며 저항할 테니 함께 싸우자’고 손을 내미신다. 하나님은 이토록 섬세하고도 과감하며 완전하고도 위대한 분이자, 지금 이곳에 다정히 임재하시되 영원히 초월적인 존재로 다스리시는 신비한 존재이다. 그래야 살아계신 신이라 할 수 있고, 그 신비로움을 사랑하고 추구하며 끊임없이 간구할 때에 세상의 우상은 사라지는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 지나친 자기애(自己愛)가 문제다. 나를 병적으로 사랑하니까 나를 위한 우상이 필요한 거다. 내가 약하고 부족하고 한심하고 병신 같이 느껴질 때, 그때야말로 누구든지 참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하지만 일단 엇나가고 보는 나는(또한 당신은) ‘힘’을 소유한 다른 존재, 내가 혐오했던 폭력과 권위와 탐욕의 다른 존재가 되고픈 열망의 노예가 되고, 현실속의 내가 당장 변화될 수는 없으니 그러한 신을 만들어 나를 중독된 사랑의 상태에 방치한다. 아, 신앙도 자기애의 발로로 경건을 소비할 수 있다. 소비하고 남발하는 ‘고객님’의 내공이 신앙에서도 빛을 발하는 위험한 세대에 나는 살고 있는 것이다.

 

자, 이래도 이 책을 읽으며 나처럼 혼란을 겪고 싶은가? 나처럼 기꺼이 무장해제당하며 분열된 신앙의 정체성을 스스로에게 까발리고 싶은가? 지금까지 알았던 허공에 떠 있던 하나님이 아닌 ‘연민하며 저항하는 사랑의 주’를 만나고 싶은가? 그렇다면 빨랑 책을 (제발 도서관에서 빌리지 좀 말고!ㅎㅎ…) 사서 읽으시길 바란다. 북인더갭에서 신의 신비를 선포하는 귀한 책을 냈다고 동네방네 입소문도 좀 내주고, 알고보니 북인더갭 김실땅 예수쟁이더라고 소문도 좀 내주시라^^

 

언젠가 경건한 종소리는 다시 또 내게 들려오리라 확신한다. 읽고 쓰고 생각하고 움직이며 책을 만드는 동안 바쁘다고 핑계만 대지 않으면, 같이 아파하며 따뜻하게 다가오는 임재와 초월의 주를 곧 뵈올 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은혜를 기대하고 사모한다. 이 책을 만드는 동안 나에게 현재진형형인 혼란과 경건한 쪽팔림을 허락한 하나님께 감사드릴 뿐이다.

 

이 가을, 모두의 영혼에도 아름다운 종소리가 울려 퍼지기를 소망하며 이만 엉성한 리뷰를 마친다.

Comment

| 옮긴이의 말 |

 

천의 얼굴을 가진 하나님

총 | 작가, 재속재가수도원 ‘신비와저항’ 수도사

 

 

우리는 결코 신을 모른다. 아무리 신과 살뜰한 사귐을 나눈다 해도 신을 안다고 말하는 순간 신은 아득히 먼 곳으로 사라진다. 신과 친밀하다고 믿는 사람일수록 신에 대한 사각(死角)이 너른 법이다. 신은 우리와 같은 몸을 입으면서까지 우리를 닮으려 애쓰지만 자신의 가장 깊은 존재는 불가해성의 신비 속에 남겨둔다.

 

 

그러고 보면 요즘 젊은이들이 연애의 정석으로 꼽는 ‘밀당’(밀고 당기기)의 원조는 신인 셈이다.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신에 대한 경험과 지식의 퍼즐조각을 모아 최대한 그럴듯하게 신의 얼굴을 짜맞추는 것이다. 하지만 무한한 신의 얼굴조각을 아무리 열심히 긁어모은다 해도 그것은 끼워맞출 수 있는 수많은 얼굴 중 하나에 불과하다. 인간은 그렇게 완성한 신의 얼굴을 가지고 누가 정통이네, 누가 성서적이네 하며 오랜 세월 지루한 싸움을 벌여왔다.

 

우리 모두는 신의 얼굴조각을 짜맞출 때 설명서를 사용한다. 신에 대한 자신의 선(先)이해가 바로 그것이다. 명토 박아 말하건대 신에 대한 우리네 지식은 선이해를 벗어날 수 없다. 자비로운 신은 우리의 제한된 선이해를 배려하며 그 안에서 자신을 계시해주신다. 이러한 그분의 맘씀씀이를 신적 적응성(divine accommodation)이라고 부르는데, 문제는 자신의 선이해와 그에 따라 재구성한 하나님의 얼굴을 절대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거기에 안주하는 데 있다. 크리스천들이 그토록 닮기를 사모하는 하나님의 얼굴이 특정한 방향으로 고착되는 한 아무리 묵상을 많이 하고 훈련을 오래 받아도 제 입맛에 맞춘 하나님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다. 입체적인 하나님은 평면으로 박제되고, 무지개색의 하나님은 무채색으로 탈색된다. 그렇게 한번 받아들인 하나님을 죽는 날까지 절대 바꾸려들지 않는 외곬의 태도야말로 한국교회를 좀먹는 가장 고약한 좀벌레다.

 

일군의 입맛에 맞춰진 하나님은 그들의 이해를 위해서 얼마든지 왜곡되기도 한다. 필자가 한국 기독교 토착영성의 광맥을 이은 분으로 평가하는 권정생 선생은 『우리들의 하느님』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기독교 2천년 역사 가운데서 예수님은 많이도 시달려왔다. 한때는 십자군 군대의 앞장에 서서 전쟁과 학살에 이용당하기도 하고, 천국 가는 입장료를 어마어마하게 받아내는 그야말로 뚜쟁이 노릇도 했고, 대한민국 기독교 백년사에서는 반공이데올로기의 선봉장이 되어 무찌르자 오랑캐를 외쳤고, 더러는 땅투기꾼에게 더러는 출세주의자들에게, 얼마나 이용당하며 시달려왔던가.

 

이런 점에서 팔색조 하나님의 다양한 얼굴을 접하고 이를 통해 내가 받들어온 하나님을 더 사랑하면서도 흔쾌히 상대화시킬 수 있는 것, 내가 추구해온 신념을 지속하면서도 겸손히 내려놓을 수 있는 것은 우리네 삶과 신앙을 위해 필수적인 작업이다. 졸저 『욕쟁이 예수』(살림 간)에서 겁쟁이 예수, 양다리 예수, 변두리 예수 등 낯설고도 익숙한 예수의 모습을 모색한 것이나, 공저로 나온 『내가 만난 은총』(한국기독교연구소 간)에서 자궁 가진 하나님, 산파 하나님, 젖가슴 달린 하나님의 모습을 구현한 것은 바로 이런 까닭 때문이었다. 이렇게 신의 입체적인 얼굴을 정직하게 대면하는 것은 경직된 하나님 이해를 풍성하게 해주고, 그만큼 우리네 하나님 체험은 가멸어진다. 이 지구별 곳곳에서 동료 인간과 뭇 생명들이 저만의 삶의 처지와 상황에서 만난 ‘살아계신 하나님’(본서의 원서 제목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찾아서 Quest for the Living God』다)을 접할 때, 내가 만난 하나님만이 옳고 다른 하나님은 그르다는 근본주의적 편협함에서 벗어날 수 있다. 거기서 신과 동료 피조물 앞에서의 겸허함이 나온다.

 

이 책에서 우리는 고통받는 하나님, 해방자 하나님, 여성답게 행하는 하나님, 인종적 소수자인 하나님, 타종교에 너그러운 하나님, 진화를 허락하신 창조주 하나님 등 고혹적인 하나님의 얼굴을 마주한다. 진보와 보수를 떠나 자신이 아는 바가 최고이자 전부라는 교만을 버린 이라면 이 책에 담겨진 하나님의 다양한 생명력에 매혹될 것이다. 특별히 가톨릭, 개신교, 성공회의 보수적이며 복음주의 노선의 신앙을 고백하는 분들이 이 책에 빠져들길 바란다. 그분들에게 부분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대목도 있겠지만, ‘살아계신 하나님’이란 관용구가 개인의 영적 경험에만 제한되지 않고 생태, 인종, 여성, 삼위일체, 종교간 대화 등에서 경험될 수 있음을 가슴 떨리게 발견할 것이다.

 

필자 개인적으로는 본서에서 흑인 여성들이 만난 하나님이 마음에 가장 크게 닿아왔는데 그들의 하나님이 바로 우리의 하나님임을 절실히 경험했기 때문이다. 당시 우울증 등으로 만만치 않은 상황을 통과하고 있던 터에 흑인 여성들의 멘토로 추앙받는 하갈의 하나님이 필자에게도 나타난 것이다. 그 감동이 커서 ‘살아남게 하는 은혜’라는 제목의 글을 잡지에 싣기도 하고 설교로 나누기도 했는데 곳곳에서 큰 반향이 있었다. 낯선 이방인의 존재가 기존 사회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키듯이, 낯선 흑인들의 하나님이 기존 신앙에 신선한 들숨이 됨을 확인하고는 이 책의 가치를 한결 확신하게 되었다.

 

알다시피 이 책은 신학 서적이다. 하지만 이 책이 소개하는 신학‘들’은 학자의 서재에서 굴러다니던 사변과 정념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실제 삶의 자리에서 “맛보아 알게 된”(시편 34:8) 하나님의 생명력을 감칠맛나게 담아낸 신학이다. 저자 역시 서문에서 “이 책이 다루는 신학은 보통 학술적이거나 지적인 활동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행동에서 나온 것임을 독자들이 반드시 유념해주길 바란다”고 당부하고 있다. 한 영어권 추천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 책은 “모든 단어가 하나님과 교회와 세상에 대한 깊은 사랑으로 숨쉬는” 책이며 “저자가 평소 선보이던 신학적 정교함과 더불어 믿음의 삶에 대한 평생의 헌신에서 나온 실제적인 지혜가 결합된” 책이다.

 

따지고 보면, 여성신학이나 생태신학 등 현대 신학의 동향을 한 챕터씩 다룬 책은 허다하다. 하지만 이 책의 아름다운 차별성은, 그러한 현대 신학의 흐름을 하나님 체험과는 별개인 지적인 흐름으로만 다루는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이 어떻게 다양한 역사적 상황에 처한 이들에게 자신을 계시하고, 그들이 어떻게 실제 삶의 자리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에게 반응하는지를 보여주는 데 있다. 단언컨대, 『신은 낙원에 머물지 않는다』는 20세기 중반 이후 나타난 현대 신학의 동향과 우리 시대의 하나님 체험에 대한 성찰을 다룬 저작 중에 가장 탁월한 작품이다.

 

저자인 엘리자베스 존슨은 가톨릭교회에서 박사학위를 받을 수 있도록 허락한 최초의 여성신학자 중 한명이다. 전통적인 교계 인사들에게는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에 관용의 범위를 넘는 정도까지 도전했다는 말을 듣는 등 ‘하드코어’ 여성신학자로 비판받기도 한다. 하지만 본서 『신은 낙원에 머물지 않는다』를 통해 극단적인 여성신학 및 해방신학과 달리 기존 기독교 전통을 폐기하자는 쪽이 아니라 덜 배타적이고 수용적인 것으로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쪽임을 보여주었다. 그럼에도 미국가톨릭주교회의(United States Conference of Catholic Bishops) 교리위원회는 본서에 시도된 새로운 신학적 표현이 가톨릭교회의 인증된 가르침과 일치하지 않으며 이 책에서 드러난 하나님 이해가 심히 부적절하다고 비판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이름은 모두 메타포이다’ ‘하나님은 지속적으로 고통받는다’ ‘모든 종교는 하나님의 현존을 품고 있다’는 등의 표현은 가톨릭 신학 전통에 충분히 기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아가 넓은 독자층을 대상으로 쓰인 이 책이 일반 대중에게 교리 교과서로 사용될 수 있기 때문에 가톨릭 학교에서 금서로 지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맞서 미국가톨릭신학회(Catholic Theological Society of America) 등에서는 존슨의 신학을 옹호하며 나섰는데, 역자로서 모든 판단은 독자들에게 맡기는 바이다. 다만 전세계 각지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다양한 얼굴, 각기 다른 삶에 처한 사람들이 만난 하나님, 그리고 이를 글로 추려낸 다양한 신학의 모습을 살펴보는 데 있어 이 책보다 더 나은 책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본서의 1~4, 7장은 안병률이, 5, 6, 8, 9장은 박총이 번역했다. 평소 짧은 글을 번역하곤 했지만 단행본을 옮기는 일은 처음이었는데 아주 호된 신고식을 치렀다. 내가 쓴 글이야 내가 책임을 지면 그만이지만, 남의 말을 그릇 전달하면 어쩌나 하는 부담에 시달렸다. 두껍지도 않은 책을, 그것도 공저로 옮기면서 이런 말을 꺼내기가 부끄럽지만, 번역 기간 내내 ‘군대 귀신’에 가위눌려서 보냈다. 그동안 자신만의 문체를 가진 작가라는 과분한 평가를 받았지만, 매끄러운 문장과 저자의 의도라는 두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으려다 둘다 놓친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부족한 이들의 삶이 그렇듯 이 책도 많은 분들이 계셔서 나올 수 있었다. 이 멋진 책을 함께 옮겨보자며 제안해주고 우울증 등으로 진척이 없을 때에도 너그러이 기다려주신, 공역자이자 북인더갭의 대표인 안병률 선생님께 진심어린 고마움을 표한다. 또한 장신대 등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분주한 일정 속에서도 큰 도움을 베풀어준 이한숙 선생에게 사례한다.

 

이 책이 이끄는 조금은 낯선 여정을 앞두고 살짝 두려움을 지닌 독자들이 있을까 싶어 노파심에 한마디 남긴다. 낯선 곳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언제나 흥분과 더불어 불안과 불편이 반려한다. 하지만 두려움에 붙들려 더 너른 세상으로의 걸음을 떼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생명력 넘치는 수액이 얼마나 시퍼런지 알 수 없을 것이다. 하이데거가 즐겨 인용했다는 횔덜린의 파트모스 찬가는 “위험이 있는 곳에 구원도 자라는 법”이라고 노래한다. T. S. 엘리어트는 “너무 멀리 가기를 마다하지 않는 자만이 얼마나 멀리 갈 수 있는지 알 수 있다”고 화답한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보다 넓다. 그분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지 않은가!

 

이 책이 제시하는 지도에 따라 살아계신 하나님을 탐사하는 복된 여로에 오르는 독자들에게 모든 여행자의 수호신이신 그분이 함께 길벗하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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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10월 12일자

 

[책과 삶]역사와 현장 속에서 ‘살아 있는’ 하나님을 발견하라

신은 낙원에 머물지 않는다…엘리자베스 존슨 지음, 박총·안병률 옮김 | 북인더갭 |

서영찬 기자 akirame@kyunghyang.com

 

책은 약자, 가난한 자 그리고 고통받는 자에게 시선을 두면서 하나님을 성찰한 신학적 탐구이다. 여성 신학자인 저자는 현대 유신론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한다. 현대 유신론은 이성주의에 경도되고 신을 인격화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 근원은 자연과학이 득세하고 세속화하면서 기독교가 위기의식을 갖기 시작한 데 있다. 기독교는 방어적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명료한 관념으로 객관화하려 애썼다. 이런 태도는 결국 기독교를 엉뚱한 방향으로 이끌었다. 달을 보지 못하고 손가락에 집착하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저자는 하나님을 언어나 이미지로 규정할 수 없는 ‘불가해한 신성한 신비’로 정의하며 현대 유신론을 비판한다. 이를 위해 ‘살아 있는 하나님’(원제는 <Quest for the Living God>이다)이라는 신학적 명제를 도출한다. 이는 고착화, 정형화된 하나님 이미지에 반하는 개념이다. 저자는 “어두운 실험실에서 원자 같은 것을 발견하듯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다”며 “그렇게 발견한 이미지는 우상일 뿐”이라고 말한다. 살아 있는 하나님은 시간과 장소를 초월해 누구에게나 신성한 신비를 베푸는 존재이다. 따라서 역동적이고 호혜적이다. 그래서 저자는 정치신학, 해방신학, 여성신학, 흑인신학 등에 주목한다.

 

홀로코스트는 무신론보다 더 심하게 믿음을 위협한 사건이었다. ‘왜?’라는 물음 앞에 기독교는 당혹해 하며 제대로 답을 찾지 못했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을 몸소 체험한 3명의 독일 신학자는 이 질문과 맞섰다. 이들은 인류의 고통을 직시하며 십자가의 의미를 재발견했다. 이 같은 종교적 분투 과정에서 탄생한 정치신학은 개인주의와 평화주의에 물들어 고통을 똑바로 응시하지 못한 기독교단에 경종을 울렸다. 저자는 타인의 고통에 등 돌리지 않는 게 진정한 크리스천의 자세라고 말한다.

 

킬링필드, 인종청소, 르완다·수단에서 벌어지는 학살극 등 인류의 고통은 끊임없다. 학대와 차별도 마찬가지다. 이처럼 십자가는 지금도 세상 어딘가에 세워지고 있다. 살아 있는 하나님이란 역사와 현장 속에서 십자가를 재발견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저자는 타 종교를 포용하자는 다원주의자이기도 하다. 크리스천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인류 모두에게서 ‘살아 있는’ 하나님을 발견하라고 말한다. 그는 진화론마저 포용한다.

 

전통주의자가 들으면 표정이 굳어질 내용이 적잖다. 가령 ‘하나님은 왜 여성이나 흑인이면 안되는가’라는 대목이 그렇다. 로마 시스티나 성당 천장에 그려진 천지창조 그림의 주인공은 젊은 백인 남성인데 이는 남성 하나님의 이미지를 낳았다. 이 그림에는 인종, 계급, 성 차별이 반영돼 있다. 기독교의 통념으로 자리잡은 여성혐오와 ‘지배하는 남성 하나님’ 이미지는 우상이라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그러면서 저자는 하나님은 한없는 모성, 즉 여성의 면모도 지녔음을 역설한다. 살아 있는 하나님은 남자도 여자도 아니다.

 

심도 있는 고찰과 설득력을 갖춘 이 책은 미국 내 많은 대학에서 교재로 채택되는 등 인기를 얻었다. 그 때문일까. 2011년 미 가톨릭 주교회는 책의 일부 내용이 교리에 어긋난다는 성명서를 냈다. 사실상 금서로 지정된 상태다. 하지만 적잖은 신학자와 독자들이 저자를 지지하며 논쟁을 촉발했다.

 

<매일경제> 10월 12일자

 

"하느님은 왜 인간을 시험하나"

신은 낙원에 머물지 않는다 / 엘리자베스 A. 존슨, 박총 등 옮김 / 북인더갭 펴냄

 

"아버지, 아버지,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 그리스도가 끔찍한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 아버지 하느님은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

 

2차 세계대전 도중 나치는 유대인이라는 이름만으로 600만명을 대학살했다. 이 가운데 100만명은 어린 아이들이었다. 무자비한 대학살이 잔행됐을 때 하느님은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

 

전지전능한 신이자 사랑으로 가득 찬 존재인 하느님은 왜 인간의 고통을 멈추고 싶어 하지 않는가.

 

전통 신학의 관점에 따르면 하느님은 자신의 자연법칙으로 세상을 창조했고, 인류는 자유의지를 가지며, 때문에 하느님은 재앙을 허락하거나 용인한다. 인간의 원죄를 벌하기 위해, 인생을 시험하기 위해, 또는 교화시키기 위해, 아니면 천국을 향한 영혼들을 정제하거나 순화하기 위해 고통을 허용한다는 얘기다. 그러나 홀로코스트 대학살을 겪은 유럽은 이러한 전통 신학으로 인류의 거대한 고통을 설명할 수 있느냐며 의문의 눈길을 보냈다.

 

이때 탄생한 신학이 `정치 신학`이다. 독일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 도로테 죌레, 밥티스트 메츠가 창안한 것이다. 그들은 개인의 종교적 체험이나 도덕에 중점을 두기보다 종교의 공공성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메츠는 "평화로운 고요에 머무는 하느님이 아니라 세상의 악에 저항하고 질문하며 고통당하는 하느님"에 눈을 돌렸다. 몰트만은 십자가 사건을 가르키며 "모든 재앙과 하느님에 의한 버려짐, 절대적인 죽음, 지옥의 무한한 모욕, 무(無)로의 추락이 하느님 자신의 존재 안에 있어야만 하느님과의 결합이 영원한 구원이 된다"고 쓴다. 십자가를 기억하듯 모든 고통을 기억하고 연대하며 슬퍼해야 한다는 새로운 신학이다.

 

저명한 여성신학자 엘리자베스 존슨이 쓴 `신은 낙원에 머물지 않는다`는 금기시된 질문과 새로운 신학을 파고든 책이다.

 

2011년 3월 미국가톨릭주교회로부터 금서(禁書) 딱지를 받았지만 독자들의 뜨거운 반응에 힘입어 베스트셀러가 됐다. 이 책에서 하느님은 다양한 얼굴을 하고 있다. 백인 남성을 위한 하느님이 아니라 여성을 위한 하느님, 흑인을 위한 하느님, 타 종교에 너그러운 하느님의 얼굴이 신선하게 다가온다. [이향휘 기자]

 

 

<한국일보> 10월 12일자

홀로코스트 와중에, 신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신은 낙원에 머물지 않는다 엘리자베스 A 존슨 지음ㆍ박총 등 옮김

 

분명 변증론(apologeticsㆍ신의 존재를 옹호하는 관념체계)의 범주에 속하는 책이다. 신실한 가톨릭 신자이자 미국 포덤대 신학과 교수인 엘리자베스 A 존슨이 썼다.

 

"예수와 성령은 세상과 자기를 사랑으로 밀접하게 소통하는 단 하나의 또렷한 신비이다… 신성의 신비는 멀리 떨어진 존재가 아니라 우리를 둘러싼 세계의 모든 현실에 개입하는 존재이며…"(73쪽)

 

책은 20세기 중반 이후 정치, 과학, 철학, 심리학, 문학에서 용도 폐기된 신의 존재를 힘있게 웅변하는 현대 유신론자의 논변을 담고 있다. 그러나 2011년, 미국 가톨릭주교단으로부터 '중등학교 및 대학에서 읽혀서는 안 된다'는 사실상의 금서 처분을 받았다. 그 미묘한 균열에, 이 변증론이 기독교의 테두리 바깥쪽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괜찮은 인문지식으로 읽히는 여유가 자리잡고 있을 것이다. 그 균열에 서서 저자가 얘기하는 '신비'를 21세기 신학의 보편성으로 이해하고 싶다.

 

해방신학, 여성신학, 생태신학 등 현대 신학의 여러 개척지 풍경을 보여주지만 그러한 입장에 매몰되지 않는다. 이 책이 다루는 핵심은 현 시대 크리스천이 가질 수밖에 없는 실존적 질문들이다. 홀로코스트 속에서 신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신은 여성답게 행동할 수도 있는 것인가, 진화하는 세상에서 창조주 성령의 존재는 무엇인가… 해답을 구하다 벽에 부딪쳤을 때, 저자는 낡은 성경 주해서의 페이지 뒤로 숨지 않는다. 되레 무신론이 판치는 논변의 복판으로 전진한다.

 

예컨대 홀로코스트의 문제. 저자는 대학살을 자초한 독일의 정치신학자들의 연구에서 해답의 단초를 찾는다. 이들은 예수의 십자가를, 타인에게 가해지는 부당한 고통에 저항할 때만 신의 사랑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저항의 상징으로 해석한다. 예정된 희생이 아니라 주체적 저항의 십자가에 매달려 현존하는 하나님. 여기서 '크리스천은 세상 모든 고통을 기억하고 연대하고 슬퍼해야 한다'는 당위가 도출된다.

 

교회 안의 남성주의와 백인우월주의, 다른 종교를 배척하는 관점에 대한 현대 신학의 비판적 논변들도 접할 수 있다. 진보로 볼 수는 있겠지만 이단으로 분류할 성격의 얘기들은 아니다. 오히려 강하게 기독의 신을 옹호하고 있다. 이를테면 지구 생태계 속에서 인간의 겸허를 강조하는 근거가, 이 책 284쪽엔 다음과 같은 성경 구절로 나타난다.

 

"창조질서의 풍성한 전체 무늬는 호모사피엔스로 가는 길목의 몇몇 단계들을 거치는 것이 아니라, 고유한 가치를 지니며, 하나님이 창조적으로 거하시는 장소이기도 하다…'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고(사도행전 17:28)' 있다."

유상호기자 shy@hk.co.kr

 

<연합뉴스> 10월 8일자

하나님이 낙원에 머물지 않는 까닭은

엘리자베스 존슨 '신은 낙원에 머물지 않는다' 출간

 

(서울=연합뉴스) 공병설 기자 = 2011년 3월 미국가톨릭주교회는 이례적인 성명을 낸다. 저명한 여성신학자 엘리자베스 존슨이 쓴 책 '신은 낙원에 머물지 않는다'가 교리와 맞지 않아 학교에서 읽혀선 안 된다는 내용이다.

 

사실상의 금서(禁書) 조치였지만 이 책은 신학자들과 독자들의 뜨거운 반응을 얻으면서 단숨에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가톨릭교회에서 박사학위를 허락한 최초의 여성신학자 중 한 명인 저자는 '하드코어' 신학자란 비판을 받기도 한다. 관용의 수준을 넘어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에 도전했다는 이유에서다.

 

저자는 이 책에서 유대인 홀로코스트 같은 대학살 앞에서 하나님은 과연 무엇을 했을까 하는 질문을 던지고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 도로테 죌레, 밥티스트 메츠에게서 답을 찾는다.

 

십자가를 통해야 현실의 고통에 끝까지 함께하는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타인에게 가해지는 모든 부당한 고통에 저항할 때만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있으며, 십자가를 기억하듯 모든 고통을 기억하고 연대하며 슬퍼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매일 2만 5천 명이 굶어 죽는 비참한 세계에서 하나님은 무엇을 하는가? 저자의 두 번째 질문이다.

 

이 질문에 처음 답한 이들은 라틴아메리카의 가난한 사람들이다. 이들에 의해 해방신학이 제3세계로 들불처럼 번져갔다. 해방신학은 하나님이 만물의 번성을 원하며 이를 방해하는 모든 상황을 미워한다는 것을 성서적 근거로 삼는다. 교회가 경제 정의 회복에 나서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라는 것이다.

 

저자의 문제 제기는 남성 하나님, 백인 하나님에도 미친다.

 

하나님을 무심코 '그(He)'라 부르면서 권위의 왕으로 상상할 때 하나님의 모습은 또다른 우상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세상의 생명을 잉태한 하나님의 모성이 회복돼야 여성이 더 이상 '제2의 성'으로 차별받지 않으며, 교회에 깊이 스며든 남성중심주의와 가부장제도 없앨 수 있다.

 

흑인신학의 '검은 하나님'은 흑인들의 자존감과 자기애에 큰 영향을 미쳤고 스스로 노예의 사슬을 끊게 함으로써 또 하나의 해방으로 이어졌다.

 

가난한 자, 여성, 흑인과 마찬가지로 지구상의 모든 생명에 초점을 맞춘 게 생태신학이다. 이 신학은 인간의 탐욕이 빚은 생태적 파괴에 맞서 하나님의 연대를 모든 피조물로 확장시킨다. 우리가 사랑해야 할 이웃은 모든 생명이기에 인간에게 쏠려 있던 윤리적 관심을 모든 생명집단에 돌려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저자는 종교에 너그러운 하나님의 모습도 고찰했다.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다른 종교에 결함이 있다는 주장은 논리적 오류일 뿐 아니라 상대 종교에도 커다란 상처를 줬다고 비판한다. 상대 종교의 영적 세계를 체험해보고 교리를 통해 대화를 나누며 사회 문제에서 연대하는 게 하나님의 자비에 합당하다는 게 저자의 소신이다.

북인더갭. 박총·안병률 옮김. 347쪽. 1만6천500원.

Comment

미국의 저명한 여성신학자 엘리자베스 A. 존슨이 현대 신학의 개척지를 탐험한 책이다. 엄격한 학문을 추구하는 대신 좀더 폭넓은 독자들의 신학적 교양을 위해 씌어진 책으로 정치, 성, 인권, 생태 등 우리가 마주친 현실에서의 신학을 탐구한다. 오늘날 다원화되고 세속화된 세계에서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발견하기 위해 씌어진 이 책은 올바른 신학과 영적 리더십을 갈망해온 독자들을 사로잡기에 충분한 역작이다. 출간 후 미국주교회에 의해 금서로 지정되는 파장을 겪었지만 신학계와 독자들로부터는 찬사를 받았고 신학 분야의 베스트셀러로 자리잡았다.

 

지난 2011년 3월 미국가톨릭주교단은 이례적인 성명을 발표한다. 미국 포덤대학 신학과 교수이자 미국가톨릭신학회 회장을 역임한 저명한 여성신학자인 엘리자베스 A. 존슨의 『신은 낙원에 머물지 않는다』(Quest for the Living God)가 교회의 교리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에 중등학교 및 대학에서 읽혀서는 안된다는 내용이었다(『뉴욕타임스』 2011년 3월 30일자). 이는 사실상 주교단이 신학자의 저서에 금서(禁書) 처분을 내린 것으로, 교계는 물론 사회적으로도 큰 충격을 던져주었다. 그러나 주교단의 처분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신학자들의 폭넓은 지지는 물론 독자들의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과연 어떤 내용이 담겨 있기에 이 책은 미국 신학계를 뒤흔들며 일약 베스트셀러로 뛰어올랐을까? 사실 존슨이 진보적인 여성신학자로 활약하기는 하지만, 정치신학, 해방신학, 여성신학, 생태신학 등 현대 신학의 개척지를 다룬 이 책에 정통 교리를 해칠 부분은 전혀 없다는 게 신학계의 일반적인 평가다. 오히려 이 책은 홀로코스트에서 하나님은 무엇을 했을까, 하나님은 왜 어머니가 아닐까 같은, 평신도들이 궁금해할 만한 신학적 질문들에 대한 깊이있고 명석한 해답으로 가득하다.

 

인간의 고통 앞에 신은 무엇을 하는가?

이런 질문에 대답하기에 앞서 저자는 신은 하늘에 거주하며 인간의 고통에 참여하기를 거부한다고 주장해온 현대 유신론을 먼저 비판한다. 이같은 시각에 맞서 저자는 정치신학의 토대를 놓은 칼 라너(Karl Rhaner)의 이론에 주목한다. 라너는 세속적 상황에 놓인 인간의 본성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 결과 인간의 내면에는 언제나 현재를 넘어서고자 하는 열망이 있다는 점이 발견되었다. 라너에 따르면 이런 열망은 하나님과 따로 떨어져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늘 갈구하고 질문하는 존재로 창조함으로써 형언할 수 없는 신비에 이끌리는 피조물로 만들어놓은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신비가 인간의 영혼과 맞물려 있다는 게 우리가 신을 이야기할 때 잊어서는 안될 대전제라고 저자는 설명한다.(1~2장)

 

이런 전제가 놓이자 본격적인 질문이 시작된다. 홀로코스트와 같은 대학살 앞에서 하나님은 무엇을 했는가? 신은 인간의 고통을 외면할 뿐인가? 그 대답은 유럽의 폐허를 자초한 독일에서 활동한 세명의 신학자들에게서 나왔다. 위르겐 몰트만과 도로테 죌레는 예수의 십자가에 주목한다. 십자가를 통해 우리는 현실의 고통에 끝까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본다. 죌레는 우리가 이런 하나님의 일부가 될 때, 또한 타인에게 가해지는 모든 부당한 고통에 저항할 때만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요한 밥티스트 메츠는 그럼에도 이 고통이 미화되어서는 안되며 오직 십자가를 기억하듯이 모든 고통을 기억하고 연대하며 슬퍼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처럼 고통에 대한 기억, 저항, 그리고 애도는 파토스의 하나님이라는 선지자적 전통을 되살리면서 유럽 정치신학의 핵심이 되었다. 정치신학은 역사의 핍박을 받은 자들은 그저 죽은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통해 다시 살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3장)

 

두번째 질문 역시 비통하게 시작된다. 매일 2만 5천명이 굶주림으로 사망하는 비참한 세계에서 하나님은 무엇을 하는가? 이 질문에 처음 대답한 이들은 라틴아메리카의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에 의해 ‘해방신학’이라는 새로운 개척지가 제3세계로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이 신학의 성서적 근거는 하나님이 만물의 번성을 원하시며 그렇기에 이런 번성을 방해하는 모든 상황을 미워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가난한 자들을 더 사랑하시는데, 그것은 가난한 사람들이 더 착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처한 상황이 비인간적이기 때문이다. 가난과 비참은 하나님의 창조가 상처받았음을 드러낸다. 그렇기에 교회와 신도는 경제구조의 정의를 회복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실현하는 일에 나서야 한다고 해방신학은 강조한다.(4장)

 

한편, 사회는 물론 교회 안에서까지 뿌리깊은 남성중심주의와 가부장제에 대해 하나님은 어떤 대답을 주셨을까? 이 문제를 다뤄온 여성신학은 우선 남성 하나님으로 굳어진 이미지를 무너뜨리자고 제안한다. 우리가 무심코 하나님을 그(He)로 말하고 하늘에 계신 권위의 왕으로 상상할 때 하나님의 모습은 또하나의 우상이 되고 만다. 세상에 생명을 잉태하고 기르며 번영을 갈구하는 하나님의 모성이 회복될 때만이 여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구체적으로 체험된다. 그때에 여성은 더이상 ‘제2의 성’으로 차별받지 않으며 교회에 깊게 스며든 가부장제와 결별할 수 있고 평등한 제자도를 이루기 위한 소명에 헌신할 수 있다.(5장)

 

어머니이자 흑인이신 하나님

‘남성 하나님’이 하나의 우상이라면, ‘백인 하나님’은 어떠한가? 오랜 세월 박해와 차별 속에서도 미국의 흑인들은 해방의 선물을 주실 하나님을 갈구해왔다. 이는 출애굽 사건과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그들의 가슴속에 깊이 각인되었으며 비밀예배와 흑인영가 속에서 면면이 이어져왔다. 흑인신학은 억압받고 소외된 자들의 편인 하나님이 결국 흑인들의 편이 되어주실 것을 믿었으며, 이 믿음 가운데 하나님은 검다는 상징을 발전시켰다. 여기서 하나님이 검다는 것은 하나님이 억압된 상황을 취하시고 그것을 자신의 상황으로 만드신다는 뜻이다. 이는 흑인들의 자기애에 큰 영향을 끼쳤고 흑인 해방신학을 통해 스스로 노예의 사슬을 끊는 길에 나서게 했다.

 

(6장) 여성이나 흑인, 가난한 자들과 마찬가지로, 이 지구상에 가난한 생명으로 존재하는 생태계 역시 하나님의 창조물이며, 그에 걸맞은 사랑을 받아 마땅하다. 생태신학은 인간의 탐욕이 빚은 생태적 파괴에 맞서 인류를 넘어 모든 피조물들에게 하나님의 연대를 확장시킨다. 우리는 인간에게만 쏠려 있던 윤리적 관심을 모든 생명집단에 돌려야 하며, 우리가 사랑해야 할 이웃이 전체 생명집단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8장)

 

오늘날 교회에 다른 종교만큼 민감한 주제는 없을 것이다. 믿지 않는 이들은 구원을 얻을 수 있을까? 더 나아가 타종교인들에게 구원은 있을까, 하는 문제는 우리에게도 늘 의문으로 남아 있다. 이 문제에 관해 특히 가톨릭은 비신자와 타종교인의 구원 가능성을 폭넓게 인정해왔다. 그러나 최근의 문서(「주님이님 예수님」 2000)에서는 예수를 떠난 성령에 구원의 가능성은 없으며 타종교에 중대한 결함이 있음을 지적했다. 저자는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타종교에 결함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 논리적 오류일 뿐 아니라 상대 종교에 커다란 상처를 주었다며 이를 비판한다. 아울러 상대 종교의 영적 세계를 몸소 체험해보고, 교리를 통해 대화를 나누며, 사회적 문제에 연대하는 것이 하나님의 자비에 합당하다고 주장한다.(7장)

 

이 책의 역자이자 『욕쟁이 예수』 등을 발표하며 대안적인 영성운동을 펼쳐온 박총 작가는 “현대 신학과 하나님에 대한 성찰을 다룬 저작 중 가장 탁월한 작품”으로 이 책을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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