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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낙원에 머물지 않는다/베스트 서평'에 해당되는 글 1

  1. 2013.10.18 <신은 낙원에 머물지 않는다> 리뷰 _김실땅

 

종(鐘)의 기원

-어느 우상숭배자의 고백

 

『신은 낙원에 머물지 않는다』의 엉성한 리뷰 _김실땅

 

경건하고 신성한 것에 넋이 나갔던 처음 기억은 초등학교 2학년 때다. 우리집은 그때 서울 변두리 한 동네 셋집으로 이사를 했는데, 이사 간 그 집에서 어느 날 아름다운 종소리를 들었다. 성도들을 저녁 예배로 초대하던 동네교회 종소리는 ‘예수 나를 오라 하네’ 라는 찬송가였는데, 그 느리고도 은은한 멜로디가 나를 사로잡았다. 건넌방 벽 한면 가운데는 미싱이 있고 양쪽으로는 철제 책상 두 개가 놓여있었는데 나는 미싱 위에 있던 화분을 치우고 그 위로 올라가 창문을 열고 밤하늘을 보며 종소리의 진원지를 찾아보았다. 어린 마음에도 정말 아름다운 멜로디라고 생각했다.

 

두번째 기억은 서른이 다 되어 엄마랑 전남 강진으로 여행을 떠난 여름이었는데, 그때도 종소리가 나를 사로잡았다. 우리는 영랑 생가와 다산초당 등을 둘러본 후 다산초당 근처 민박집에서 짐을 풀었다. 그러곤 잠이 들었는데 새벽녘 곤하게 잠든 모녀 귀에 분명히 교회 종소리는 다시 또 은은하게 들려왔다. 예수 나를 오라 하네…

 

 

그런데 읍내 컴퓨터학원에 가야 한다는 민박집 주인 딸이 자기 교재가 손님방에 있다며 책을 챙기러 이른 아침에 들어오더니, 급기야 동네 누군가는 민박집 마당에서 ‘손님이 아직도 자네’ 어쩌구 하면서 모기장 너머로 우리를 힐끔거리는 통에 엄마와 나는 잠에서 깼다.

 

-엄마도 들었어?

-교회 종소리?

-아, 그럼 꿈이 아니었구나.

 

신(神)은 그렇게 아름다운 멜로디로 나를 찾아왔다. 작은 예배당의 종소리가 나를 향한 신의 콜링이었는지 환청이었는지는 영원한 수수께끼일 것이다. 그러나 경건하고 신성하며 흠이 없고도 아름다운 완전한 어떤 존재 앞에 무릎 꿇고 경배하는 삶을 나는 어려서부터 동경했는데 그것은 아마도 종소리의 기억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아름다운 종소리에 넋이 나갔던 어린아이는 곧 삐딱한 어른이 되었다. 소위 ‘모태(못해?)신앙’이라 분류되는 나는 신이 방관한 혹독하고도 추한 역사의 장면을 증거 삼아, 또한 인본주의적이고 이성적인 논리를 잣대 삼아 나름 벼르고 있었다.

 

-주님 얼굴 뵈옵는 날, 주님은 나와의 끝짱토론을 각오하삼, 나를 납득시키지 못했다간 주님은 나때매 피곤할 거임… 큭

 

지금도 세계 구석구석에는 말도 안 되는 불의한 현실이 판을 치고 있다. 『신은 낙원에 머물지 않는다』는 이러한 여러 다른 상황에 놓인 땅을 개척지 삼아 그 상황 속에 임재하는 하나님을 탐구한 책인데, 신앙이 있건 없건 여하튼 혼란을 겪고 싶지 않다면 아예 펼치지 않는 게 상책인 책이다.

 

그들의 신학적 작업은 하나님의 위대함, 총체성, 모든 것을 망라하는 전체성에 집중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고통에 깊이 관여하는 파토스의 하나님을 그들은 보석과도 같이 아름답게 소개하는데(3장 십자가에 달린 연민의 하나님), ‘고통을 감내하며, 고난당하는 사람들과 함께 패배를 맛본 고통의 하나님이라는 강력한 상징’이 나에게 일격을 가한 혼란을 실토해보겠다.

 

네가 믿는 하나님은 고통에 찬 세상에 무엇을 줄 수 있느냐,고 사람들이 물었을 때, 믿음이 왜곡되어 넘치는(!) 나는 이제 곧 하나님이 오셔서 모든 걸 전복시킬 것이다, 라고 대응했다. 전능하심의 뜻을 완전 자의적으로 해석한 나는 작금의 부패하고 죄악된 세상을 뒤집어엎을 구원자에게는 그러한 힘과 위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거의 폭력에 가까운 괴력을 발휘하는 신을 내면에 우상화하고서 그 힘이 곧 정의라고 결론내린 채 몰래몰래 그 힘을 맹신했다. 그런 내게 신의 ‘전능하심’은 그런 뜻이 아니라고 이 책은 선포한 것이다. 신은 고통당하는 이들과 함께 아파하고 눈물 흘린다고, 그들과 함께 저항하며 울부짖는다고, 그러므로 인간이 해야 할 일은 우상화된 하나님을 파괴하고 참 하나님을 향해 슬퍼하며 소망을 갖는 것이라고, 하나님의 현존은 고통과 어둠 속에서 바로 ‘나’와 관계를 맺는다고.

 

결국, 모든 걸 전복시키고야마는 폭력적이지만 위대한 신은 나만의 우상이었다. 내가 선하고 의롭다고 생각한 방법은 힘이었고, 그 힘은 응징하는 구세주로 내게 각인됐다. 그러나 개척자들이 찾아낸 하나님은 함께 울어주며 저항하는 연민의 신이었다.

 

이상하다. 나는 가부장적인 모든 걸 싫어한다. (그래서인지 엉뚱하게도 아빠와의 대결의식은 아직도 치열하다!) 늘 배제되는 존재일 뿐만 아니라 부차적이고도 그림자 같은 전통적인 여성상에 반기를 들며 그러한 공격에 굴하지 않으려고 나는 늘 나를 훈계했다. 나의 언어와 나의 목소리를 갖고자 골몰했고, 이러한 나를 시답잖게 여기는 남성들을 나도 우습게 봐줬고 그 결과 모태솔로서의 삶을 이십대 내내 기꺼이 살았다. 그런 내가 내 가슴에 품었던 거짓 신을 까발려보니 영양상태가 좋으며 힘이 있고 가부장적인 권위를 휘두르는 신이었다니. 한편으론 혐오하며 한편으론 흠모하는 나의 분열된 정체성에 빠직, 균열이 일기 시작했다. 5장 ‘여성답게 행하시는 하나님’은 이토록 가혹하고도 적나라하게 나를 무장해제 시켰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신비는 여성성이나 남성성으로 간단하게 규명되는 문제가 결코 아니다. 그리고 정해진 틀 안에서 하나님을 정의하다간 또 다른 기형적인 우상만 재생산할 뿐이다. 단지 이 홀가분함과 동시에 느껴지는 쪽팔림, 그리고 한없는 감사와 기쁨에 내가 감동하는 까닭은 이 모든 깨달음이 분열된 나를 위로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바로 파토스의 하나님이며 나를 먹이시고 내 모습 이대로를 사랑하는 하나님이다.

 

그 하나님은 나와 함께 여행을 떠나 어느 시골교회의 은은한 종소리를 함께 들었던 엄마의 존재로 충분히 느껴지는 따뜻한 모성이다. 하나님을 남성의 언어로 묘사하고 우상화한 세계에서 나는 섬세하고도 유머러스하며 총명하고 따뜻한 엄마의 존재를 하나님 사랑과 동일하게 만끽하는 것이다. 짧은 여행길에도 하나님은 임재하며 동시에 햇살과 바람에 깃들여 초월적인 존재로 동행하신다. 아주 작은 추억 하나, 아주 흔한 찬송가 한 소절, 아주 엉뚱한 농담 한마디도 하나님은 나와 함께 소중히 여기고, 나와 함께 흥얼거리며, 나와 함께 킥킥 거려주는 다정한 엄마다. (이런 나를 이단이라고 손가락질 하면 아마 나는 이단이 맞을 수도 있다.) 이런 깨달음과 설레는 고백은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전혀 불가능했을 만큼 나는 하나님을 오해했을 수 있다. 내 신앙의 감수성은 너무 빨리 굳어버렸고, 심판자이자 통치자인 한 이미지에 갇혀 그 품 안에서 뛰놀 수 있는 특권도 알아서 반납했던 것 같다.

 

충만한 사랑으로 인간을 회복시키는 하나님은 인간의 언어로 정리된 남성/여성의 메타포, 혹은 제국주의자들의 탐욕과 권력욕으로 결코 박제되지 않는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그건 참 신이 아니란 증거다. 하나님은 인간이 자유롭기를 원하신다. 모든 독점적인 권력과 그 권력이 남발한 왜곡된 이미지를 파괴하고, 현대의 우상을 깨뜨리며 참 생명을 향해 다같이 저항하며 연대하라고 하나님은 명령하신다. ‘내가 모든 걸 곧 뒤집어엎어줄 테니 나를 믿고 내 힘을 믿어라’가 아니라 ‘나도 같이 울어주며 저항할 테니 함께 싸우자’고 손을 내미신다. 하나님은 이토록 섬세하고도 과감하며 완전하고도 위대한 분이자, 지금 이곳에 다정히 임재하시되 영원히 초월적인 존재로 다스리시는 신비한 존재이다. 그래야 살아계신 신이라 할 수 있고, 그 신비로움을 사랑하고 추구하며 끊임없이 간구할 때에 세상의 우상은 사라지는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 지나친 자기애(自己愛)가 문제다. 나를 병적으로 사랑하니까 나를 위한 우상이 필요한 거다. 내가 약하고 부족하고 한심하고 병신 같이 느껴질 때, 그때야말로 누구든지 참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하지만 일단 엇나가고 보는 나는(또한 당신은) ‘힘’을 소유한 다른 존재, 내가 혐오했던 폭력과 권위와 탐욕의 다른 존재가 되고픈 열망의 노예가 되고, 현실속의 내가 당장 변화될 수는 없으니 그러한 신을 만들어 나를 중독된 사랑의 상태에 방치한다. 아, 신앙도 자기애의 발로로 경건을 소비할 수 있다. 소비하고 남발하는 ‘고객님’의 내공이 신앙에서도 빛을 발하는 위험한 세대에 나는 살고 있는 것이다.

 

자, 이래도 이 책을 읽으며 나처럼 혼란을 겪고 싶은가? 나처럼 기꺼이 무장해제당하며 분열된 신앙의 정체성을 스스로에게 까발리고 싶은가? 지금까지 알았던 허공에 떠 있던 하나님이 아닌 ‘연민하며 저항하는 사랑의 주’를 만나고 싶은가? 그렇다면 빨랑 책을 (제발 도서관에서 빌리지 좀 말고!ㅎㅎ…) 사서 읽으시길 바란다. 북인더갭에서 신의 신비를 선포하는 귀한 책을 냈다고 동네방네 입소문도 좀 내주고, 알고보니 북인더갭 김실땅 예수쟁이더라고 소문도 좀 내주시라^^

 

언젠가 경건한 종소리는 다시 또 내게 들려오리라 확신한다. 읽고 쓰고 생각하고 움직이며 책을 만드는 동안 바쁘다고 핑계만 대지 않으면, 같이 아파하며 따뜻하게 다가오는 임재와 초월의 주를 곧 뵈올 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은혜를 기대하고 사모한다. 이 책을 만드는 동안 나에게 현재진형형인 혼란과 경건한 쪽팔림을 허락한 하나님께 감사드릴 뿐이다.

 

이 가을, 모두의 영혼에도 아름다운 종소리가 울려 퍼지기를 소망하며 이만 엉성한 리뷰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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