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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경주마가 천재로 불린 이후

2013.05.16 18:05 | Posted by 북인더갭

한 경주마가 천재로 불린 이후

 

율/ 대표

 

 

오스트리아 출신의 세계적 소설가이자 에세이스트인 로베르트 무질은 그의 대표작 『특성없는 남자』에서 ‘천재가 된 경주마’에 대해 쓴 적이 있다. 지금이야 ‘야구 천재 ○○○’ ‘축구 천재 △△△’ 같은 말을 흔히 사용하지만 20세기 초만 해도 그런 어법은 꽤 충격적이고 모던한 발상에서 나온 것이었던 듯하다. 무질은 당시 언론에 보도된 ‘천재 경주마’에 대한 기사를 읽고는 경주마 하나가 천재로 불리는 사회는 어떤 사회인지를 깊이 고민했다.

 

가령 축구도 없고 경주마도 없던 시절에 천재란 무엇이었을까? 물론 당시에도 경쟁은 있었을 테고 그래서 어떤 분야에서 뛰어난 사람도 있었을 것이며 그런 수재들이 천재로 불리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일생을 축구로 보낸 사람, 공만 보이면 잘 훈련된 전신의 근육이 먼저 움직여 상대 진영을 파고드는 사람을 천재라 칭송하는 것을 당시 사람들은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으리라.

 

내 생각에 원래 천재는 좀더 부드럽고 모든 면에서 유연하며 다방면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 아니었을까 싶다. 굳이 말하자면 정약용이나 레오나르도 다 빈치 같은 사람 말이다. 잘 알다시피 다산(茶山)의 관심은 정치학에서 경제학, 건축학, 종교 등을 넘나드는 복합적인 것이었다. 또한 자녀들의 작은 문제까지도 세심하게 챙긴 부드럽고 유연한 가장이었다. 다 빈치는 어떤가. 공식적인 직업은 화가였지만 그는 해부학이나 천문학, 식물학 등에도 식견을 갖춘 뛰어난 과학자이기도 했다. 또한 얼마나 산만했는지 그림 하나를 끝까지 완성하는 법이 거의 없었고 그리하여 그 유명한 ‘모나리자’도 미완성인 채 남게 되었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무질이 고민한 것은 바로 이것 아니었을까. 깊은 공감능력을 바탕으로 인류의 발전에 기여하던 천재들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오로지 1등을 위해 단련된 사람 또는 경주마가 들어서게 된 현대의 풍경. 그 후 거의 1백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야구 천재, 수학 천재, 피아노 천재 같은 ‘현대적 천재’들은 계속 생산되고 있다.

 

가장 우려스러운 것은 다 빈치 같은 산만함이 갈수록 홀대받는 현실이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한 반에는 이른바 산만한 친구들로 가득했다. 이 친구들은 등교하다가 두더지를 잡아서 신발주머니에 넣어오기도 했고 하교할 때는 개구리밥이 가득한 논을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뒷동산은 늘 뛰어노는 아이들로 왁자지껄 했으며 어스름이면 골목마다 ‘밥 먹으러 들어오라’는 엄마들의 외침이 어김없이 울려퍼졌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런 산만함은 병으로 진단되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검사를 받고 장애가 있음을 판정받는다. 놀란 부모들은 눈물을 머금고 여러 부작용이 있을 수 있는 독한 약을 아이에게 먹인다. 아이들의 산만함이 혹시 주변의 스트레스를 아이들 나름대로 발산해보려는 정상적인 과정이 아닌지는 의심되지 않는다. 아이가 갑자기 얌전해지고 공부에 집중하는 것을 보고서야 부모들은 안심한다. 그리고 인간의 정신까지 통제하는 놀라운 현대적 발명품에 감탄을 금치 못한다.

 

어쩌면 이런 상황은 백년 전 한 경주마가 ‘천재’로 불리던 그 순간 시작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 순간 인간과 사물에 대한 부드러운 관심, 자연에 대한 끊임없는 호기심, 영혼의 자유를 향한 열망 같은 것들은 계량적인 순위에 밀려 사라져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의 수많은 천재 친구들은 다 어디로 사라져버린 것일까.

<월간 에세이> 2012년 11월호

Comment

<토성의 고리> 나는 소설가다

2012.11.07 13:19 | Posted by 북인더갭

에디터의 서재

나는 소설가다

-『토성의 고리』(W.G. 제발트)를 두 번째 읽고

 

김실땅

 

 

시작부터 엄살

사실 나는 소설을 좋아하지만 즐겨 읽지는 않는다. (이건 무슨 심보일까.) 이래봬도 김실땅이 소설가이기 때문에 소설을 읽지 않는 듯하다. (점점 억지가 늘어간다.) 소설을 잘못 읽으면 불현듯 미친듯(!) 소설을 쓰고 싶기 때문에 나로선 조심히 읽어야 한다. 무엇보다, 쓰고 싶다고 척척 써지지 않는 게 소설이기에 돌다리도 두들기며 건너듯 쓰고자 하는 욕망의 찌꺼기는 건져내고 처음 글을 배운 사람이 자신의 이름을 공책에 또박또박 쓰는 맘으로 소설은 써야 한다. 왜냐하면 그래야 진정한 소설가이기 때문이다.

 

소설가로서 책 한권 세상에 내놓지 못한 주제에 말은 잘한다. 안타깝게도 소설가로서의 내 자존감은 애저녁에 바닥을 쳤다. 신문사 공모에서부터 문예계간지에 이르기까지 퇴짜와 빡꾸(혹은 빳꾸??)를 번갈아 받아먹으며 형성된 내공이다. 누군들 환희와 환멸의 밤을 오가며 글을 쓰지 않겠는가마는, 정말 왜 이러고 사는지 모르겠다. 세상에서 젤로 듣기 싫은 게 엄살떠는 소리다. 그런데 삶에는 사실만 정확히 말하는데도 턱없이 기가 죽어버리거나 이유도 모를 억울함과 분노에 심장이 떨리는 순간이 있다. 쪽팔리지만, 내게는 소설가 운운할 때가 그러하다. 그만큼 세상물정 모르고 한량으로 살았단 소리겠지. 이 얘긴 여기서 일단 그만두자.

 

왜 다시?

도대체 내가 『토성의 고리』를 왜 또 집어들었는지 누가 설명 좀 해줬으면 좋겠다. 작년에도 ‘거, 상당히 지루하네’ 어쩌구 하면서 읽었던 소설인데, 왜 나는 올 가을에도 뭐에 홀린듯 또 펼쳐들었을까.

 

 

재미삼아 스스로 분석하건대, 이 책에는 아무래도 여러 낯선 도시가 왕왕 나오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실제 존재하는 도시건 상상의 도시건 낯선 도시나 낯선 거리가 나오면 나는 쉽게 끌린다.

 

소설 한편 쓰기 위해 여행을 ‘소비’하는 글쓰기에 끌린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제국주의 방식으로 짐꾼과 가이드를 동원해 자본 없인 불가능한 여행을 소설을 (혹은 소설을 쓰기) 위해 떠난다거나, 소설 집필에 필요해 취재차 떠난다는 말은 소설가에게 합당하지 않다. 기자나 여행작가, 에세이스트에겐 그런 여행이 가능하다. 하지만 소설가라면 낯선 곳으로의 여행에 어떤 목적을 갖다부칠 필요가 없다. 그리고 내 골방에서 써지지 않는 글이 돈 들여 떠난 그곳에서 잘 써질 리도 없다. 떠나는 데 굳이 목적을 대라면 멍 때리기 위해, 이 정도가 가장 타당하고 솔직할 듯하다. 머릿속으로 멍 때리다 지겨우면 글이나 그림, 노래, 춤 아니면 뭐 어떤 형식으로라도 뭔가를 만들어내며 노는 게 사람의 본성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은 아주 심심하게 자라나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여튼, 아이 방에 있던 지구본을 내 책상에 갖다놓고, 때론 구글 지도도 검색하며 연필을 쥔 채 새로운 지명이 어서 또 나오길 기다리며 나는 『토성의 고리』를 다시 읽었다. 다시 읽은 뒷맛은 뭐랄까, 나름 새롭고도 재밌다고나 할까(!). 지루함에 중독돼보긴(?) 처음인데, 지루함과 익숙해지는 것도 못할 일은 아닌 듯하다. 이건 전적으로 소설가 제발트의 힘이자 그의 소설가로서의 인문학적 양심에서 기인한 형식의 묘미이기도 한데, 나는 그런 제발트가 부럽다. 이런 지루한 소설을 책으로 내주는 사회도 부럽고, 이 책을 번역해 낸 대한민국 사회도 아직 희망이 있지 않나 싶다. 제발트에게 이러한 형식의 소설이 가능했던 건 제발트가 속했던 사회에 단 하나의 틀만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불특정 다수의 그 누군가도 과거에 일어났던 ‘파괴의 흔적’에 귀가 솔깃했기 때문일 것이다. 새롭고 재밌기 위해선 그 재미를 만들어낸 사람(작가)의 양심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는 것을 제발트는 말하고 싶었던 게 확실하다.

 

(그렇지만 우리 사회에서 통용되는 ‘재미’나 ‘새로움’을 나는 여전히 의심의 눈으로 바라본다. 우리가 추구하는 재미나 새로움의 실체는 계량화 된 후 기술화와 대량생산화의 과정을 거쳐 획일적으로 뿌려진 상품일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그러한 전형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축에도 낄 수 없는 사회의 몰개성 문화도 아직 만연하다. 내가 가해자인지 피해자인지 규명할 수 없는 공범의 사회란 이런 것.)

 

밀려오는 당혹스러움

제발트는 일년여 도보여행를 한 뒤 ‘온몸이 마비된 상태로 지방의 주도(州都)인 노리치의 병원에 입원’한 장면으로 글을 시작한다. 그가 걸어야만 했던 이유를 굳이 책에서 찾자면 ‘다소 방대한 작업을 끝낸 뒤 나는 내 안에 번져가던 공허감에서 벗어나고자’ 걷기 시작했다고 나와 있다. 그러나 장기간의 도보여행 여독이 그를 쓰러뜨렸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랜 과거로까지 거슬러올라가는 파괴의 흔적들을 보며 느낀 먹먹한 전율의 기억에서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쓰러졌을 가능성이 더 높다. (10쪽) 적어도 내가 볼 땐 그렇다.

 

병원에서 퇴원한 그는 17세기 영국 노리치에서 의사로 활동하던 토머스 브라운이란 인물을 연구하기 시작한다. 제발트가 그를 왜 연구해야하는지는 알 수 없다. 알 수 없는 게 당연하다. 그는 소설가니까. 특히 토머스 브라운의 표류하던 두개골에 깊은 의미를 둔 작가의 의도도 불투명하고 사실 아직까지도 나로서는 제발트가 왜 해골바가지란 소품에 천착해 토머스 브라운을 찾아 나섰는지 의아하다. 제발트가 떠올린 고인이 된 친구 마이클 파킨슨도 평생 라뮈(1878-1947, 프랑스계 스위스 작가로 농민의 생활을 묘사하는 방대한 소설들을 썼다)라는 작가를 연구했고(13쪽), 마이클 파킨슨의 오랜 친구 재닌 로잘린드 데이킨스 역시 ‘19세기 프랑스 문학에 대한 일종의 사적(私的) 학문을 전개했다.’(15쪽)

 

제발트가 이들 동료와 어떤 대화를 나눴으며, 마이클 파킨슨이 죽었을 때의 그의 마음은 어떠했는지, 그들의 집요한 연구의 성과나 효용, 그 연구로 얻은 명예와 부 따위나 갈등, 혹은 서로 오해는 없었는지 등등 평범한 이야기 흐름은 어째 영 보이질 않는다. 몇 페이지를 더 읽어도 소설답게 이제 곧 펼쳐질 무엇인가 사건의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우리가 알고 있던 소설의 작법, 혹은 소설의 전형성을 조금이라도 기대했다간 이 글을 한줄도 읽을 수 없다는 점이다. 해골바가지 사진과 시체를 해부하는 렘브란트의 그림을 보는 순간엔 그 당혹스러움이 절정이 이르러 무슨 소설이 이래?, 그 한마디 남기고 초반에 책을 덮을 게 분명하다. 이게 바로 (역설적으로 말해) 소설가 제발트의 힘이다.

 

제발트에게 그 순간 의미 있었던 것은 상대방과의 대화도 아니요, 그들과의 관계도 아니요, 연구결과나 연구목적도 아니었다. 모두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말하는 지나온 날들에 남겨진 ‘파괴의 흔적’이 아직도 그를 공격하며 사로잡았기 때문이라는 걸 나도 두 번째 읽으며 알았으니까. 그러한 흔적을 독서와 연구, 집필로 이어지는 지난한 과정을 통해 소설로 형성화한 작가가 제발트 하나만은 아니겠지만, 오로지 활자로 남겨진 지식을 주인공 삼아 상처를 재해석하고 공격자들의 공격이 아직도 진행 중인 것을 고발하며 지식에 새로운 값어치와 캐릭터를 부여해준 작가는 제발트가 유일하지 않을까 싶다.

 

로저 케이스먼트와 중국

그가 파헤친 흔적 중 기억하고 싶은 한 남자가 있는데 이 사람은 1916년 런던의 감옥에서 처형당한 로저 케이스먼트라는 죄인이다. 죄명은 반역죄.(124쪽)

 

그 사내의 진가를 제일 먼저 알아낸 사람은 『암흑의 핵심』의 작가 조셉 콘래드다. 1890년, 벨기에 브뤼셀에 있는 콩고 상업주식회사로부터 콩코강 상류를 오가는 증기선의 지휘권을 맡은 조셉 콘래드는 부푼 가슴을 안고 콩고를 향해 떠난다.(물론 이 부푼 가슴은 금방 멍이 들지만.) 콘래드와 케이스먼트가 처음 만난 곳은 아프리카 콩고. 콘래드는 ‘열대기후 탓에, 그리고 그들 자신의 욕심과 탐욕 탓에 타락해가는 유럽인들 가운데 오직 그만을(로저 케이스먼트) 올곧은 사람으로 여겼다.’(125쪽)

 

케이스먼트는 콩고 서부 도시 보마에서 다름 아닌 영국 영사직을 맡고 있었는데 토착민들에게 저질러진 백인들의 끔찍한 범죄가 바로 케이스먼트를 통해 일반인들에게까지 알려진다. 영국의 외무장관 랜스다운 경에게 케이스먼트는 ‘돈을 향한 탐욕으로 눈이 멀지 않은 사람이라면 콩고강 상류를 올라가면서 한 민족 전체가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죽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고 적어 보냈다.(154쪽) 이러한 보고에도 꿈쩍하지 않은 관계자들은 그를 페루, 콜롬비아, 브라질 등 남아메리카로 보내버렸는데 그곳에서도 케이스먼트는 콩고와 별다를 것 없는 상황을 발견한다. 사람들은 케이스먼트를 향해 돈키호테와 같은 열정의 소유자라 돌려 말하며 그에게 귀족신분을 수여함으로 권력의 편으로 끌어당기지만 이미 제국주의적 사고방식에 눈을 뜬 케이스먼트는 다른 길을 선택한다.

 

그런 그가 아일랜드 사람으로서, ‘특히 연민의 감정에 예민했던’ 그의 의식은 아일랜드 사람에게 가해진 부당한 행위에 더 이상 침묵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 아일랜드 해방을 위해 병력을 모집하고 무장하는 작업에 케이스먼트는 적극 참여한다. 그러나 봉기는 진압되고 그는 이미 감방에 갇힌 상황에서, 케이스먼트의 가택수색 중 발견된 이른바 검은 일기장이 세기의 권력자들에게 전달된다. 지금까지의 사건은 이 수첩 하나로 방향이 완전히 틀어지는데, 이 일기장에는 다름 아닌 케이스먼트의 동성애에 대한 일종의 연대기가 수록되어 있었기 때문이다.(158쪽) 이 반전에 대한 제발트의 평은 다음과 같다.

 

바로 케이스먼트의 동성애가 그에게 사회계급과 인종의 벽을 넘어서 권력의 중심에서 가장 멀리 있는 사람들에 대한 지속적인 억압과 착취, 노예화와 불구화를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해주었다는 것이다. (…) 1965년에야 비로소 영국 정부는 로저 케이스먼트의 시신이 내던져진 펜톤빌 감옥 마당의 석회구덩이에서 더 이상 신원을 입증하기도 어려운 그의 유골을 발굴하도록 허가했다’ (161-162쪽)

 

이 정도면 파괴의 흔적은 완전범죄에 가깝다. 아마도 케이스먼트의 죄명은 반역죄라기보다는 풍기문란죄. 유럽인 중 제정신을 가진 한 사람이었던 케이스먼트의 양심적 투쟁은 동성애자라는 사실 앞에 한낱 가쉽거리로, 그런 인간이었어, 라는 비난과 함께 모두 백지화 된다.

 

제발트는 싸우스월드에 도착한 이튿날 저녁, BBC에서 방영한 이 다큐멘터리를 끝까지 보지 못하고 잠이 든 자신의 무책임함(!)을 탓하며 사료를 통해 케이스먼트의 이야기를 재구성하리라 다짐한다. 인적이 끊긴 해변가를 몇시간이고 며칠이고 돌아다니다 겨우 들어선 호텔에서 심야 다큐멘터리를 보다 잠이 든 건 결코 무책임한 일이 아니다. 다만 케이스먼트에게 가해진 위선적인 폭력, 파괴의 흔적이 시대를 뛰어넘어 제발트의 심장까지 강타했을 뿐이고, 공감과 연대의 힘으로 지금이라도 파괴를 막아보려는 제발트의 노력이 책 한권으로 발현됐을 뿐이다. 양심도 없는 것들은 당연 읽지도 않을 테지만.

 

기독교를 가장한 경건과 돈이면 된다는 탐욕이 문제다. 그들은 늘 심심한 편인데 그것도 문제다. 악한 손과 거짓된 발이 부지런하니 못할 일이 없는 것이다. 도와달라 한 적도 없는데, 다짜고짜 문명을 발전시켜 주겠다며 (말도 안 되는) 교역을 강요하는 건 어느 나라 법인고 하니 영국법이었다. 팔아먹을 게 없어 아편을 팔았을까. 영혼을 악마에게 팔지 않은 한 불가능한 생각이다. 완전 무례한 것들이 살았던 곳은 화성도 아니고 달나라도 아니라는 사실이 새삼 더 두렵다. 그럼 어떻게 아편을 팔 생각을 했을까. 인도라는 큰 땅떵어리를 차지했으니까, 그곳에서 대량 생산되는 물자를 어딘가로 또 팔면 더 많은 돈이 생기겠으니까, 벵골지방 넓은 들판에서 양귀비를 재배하면 내 욕심이 더 채워질 테니까.

 

이게 바로 사람이란 짐승이었다니. 그렇다고 자기네끼리는 신뢰가 두터웠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투쟁의 용사라 여겼던, 불의 앞에 양심의 목소리를 높였던 한 사내의 동성애 편력이 드러나는 순간 워낙에 경건을 사랑했던 사람들은 망설임 없이 그를 향해 돌을 던진다. 자기네들은 얼마나 더 무섭고도 잔혹한 일을 글로벌하게 해내고 있는지 이미 돌아볼 힘을 잃었다. 완전 탐욕스러운 돼지들이다. 그들이 양심을 되찾아 새사람 되는 축복을 맛보지 않고 계속 돼지처럼 살다 죽도록 이 고통을 감내하겠다 기도했던 사람들이 분명 그 시절에도 있었을 것이다.

 

(여기서 잠깐, 아이 방에 가서 『먼나라 이웃나라』 중국편을 가져와 함께 펼쳐놓고 책을 읽는다. 나라별 역사 배경지식이 딸릴 땐 먼나라 이웃나라 시리즈에서 종종 도움을 받는다. 요긴한 만화책이 아닐 수 없다^^)

 

아편전쟁과 서태후, 함풍제, 광서제, 황제의 인공낙원 별장 원명원, 특히 이 별장이 서양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불태워지는 장면…

 

‘그날 이후 며칠 동안 이 전설적인 정원에서 자행된, 군기는 고사하고 일체의 분별력을 잃은 듯한 끔찍한 파괴행위는 결정적 전환이 자꾸 미루어지는 데 대한 분노를 감안하더라도 제대로 이해되지 않는다. 추측건대 그들이 원명원을 불태운 진정한 이유는, 중국인이 미개하다는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보여주는, 현세에서 창조된 이 낙원이 고향에서 끝없이 멀리 떨어져 강요와 궁핍과 갈망의 억압밖에 알지 못하는 병사들에게 어처구니없는 도발로 비쳤던 데 있었을 것이다’(172쪽)

 

마치 언젠가 시오노 나나미의 『십자군이야기』을 읽을 때도 이러한 장면을 읽은 것만 같아 나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이슬람교도들을 살육하고 살육하다 지치는 장면, 강을 피로 물들인 십자군 병사들이 평화롭게도 곯아떨어지는 장면.

 

영국은 중국에게 아편을 맘놓고 팔아먹기 위해, 프랑스는 자국 선교사를 처벌한 중국에게 맛 좀 보여준 후 동시에 포교활동을 맘놓고 하기 위해, 늘 세상의 중심에 서서 조공을 받으며 일대일 교역이란 상상도 못해본 용의 나라 중국를 넘어뜨리기 위해 결코 친근하지 않은 두 나라가 손을 잡는다. 선과 악 따위는 애시당초 고려한 적 없는 제국주의의 언어를 중국이 알아듣지 못한 건 어쩌면 당연한 일.

 

서양작가의 입에서 자연스럽고도 신비롭게 흘러나오는 19세기 침몰하는 중국의 역사는 독자를 완벽하게 매료시킨다. 역사를 이토록 객관적이면서도 우아하게, 또한 가슴 저리면서도 아름답게 서술할 수 있는 작가는 제발트 하나일 것이다. 특히, 서양에서는 부정적으로 꾸며낸 서태후를 함축적이고도 간결하게 묘사한 문장은 압권이 아닐 수 없다. 26세에 과부가 되어 역사에 부대끼며 여인으로서도 권력자로서도 단 하루도 행복할 수 없었던 무소불위의 권력을 소유했던 그녀. 끝 모를 불안과 고독을 은폐하기 위해 어마어마한 사치를 부리고, 누에고치가 뽕잎을 갉아먹는 소리에 한없는 평화와 안식을 누렸던 강박관념의 이 여인이 바로 내 앞에서 죽어가는 듯한 당혹스런 연민이 나를 사로잡았을 때, 나는 묘한 감동과 두려움마저 느꼈다.

 

‘그녀는 궁궐 정원의 기묘한 그림자 풍경 속으로 나아가 인공절벽과 양치식물 풀밭, 짙은 색의 측백나무와 싸이프러스 사이를 서성였다. 아침 일찍 맨 먼저 상해를 입지 않게 해주는 묘약이라고 여겨지던 곱게 빻은 진주를 먹었고, 때로 낮이면 생명없는 사물들을 가장 애호하던 그녀답게 몇시간이고 방의 창가에 가만히 서서 그림처럼 펼쳐진 고요한 북쪽 호수를 쳐다보았다.(…) 특히 밤이 되면 혼자서 누에가 자라는 대(臺’)사이에 앉아 신선한 뽕나무 잎을 갉아먹는 무수한 누에들이 내는 나지막하고 일정하며 한없이 마음을 안정시켜주는 소리를 듣는 것을 아주 좋아했다. 그녀는 오래지 않아 스스로 자아놓은 귀한 실을 위해 목숨을 읽게 될 이 거의 투명하고 창백한 존재야말로 자신의 진정한 신하라고 생각했다.’(178쪽, 180쪽)

 

파괴의 흔적은 어디에 남는가. 민족성에 남는가, 얼굴색에 남는가, 가해자에게만 남는가. 제국을 향한 적확하면서도 날카로운 일침은 도대체 작가의 상상력일까 학자로서의 탐구열일까. 가늠할 수 없는 깊이와 절제된 분노로 동양의 한 거대한 제국의 멸망을 제발트는 블라이스강 위를 가로지르는 철교를 바라보며, 저 강을 가로지르는 열차의 물품들이 중국을 향해, 중국의 어느 비운의 황제를 위해 달려갔던 것을 회상하며 되새긴다. 날아오르지 못한 용이 그려진 낡아빠진 기차를 상상하며 파괴의 형태로만 충분히 각인되는 과거를 지금까지도 그는 마비를 일으킬 정도로 여전히 고통스러워하며.

 

나는 소설가다

누군가 이 글은 소설이 아니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제발트 자신도 자신의 글을 ‘보고’라고 지칭하기도 했다.(166쪽) 보고서라 해도 맞고 소설이라 해도 맞다. 중요한 건 글의 근본에 글을 쓴 사람의 양심이 있느냐 없느냐이다.

제발트는 (내가 볼 땐) 왕이다. 제발트는 절대군주처럼 자신의 소설에 군림한다. 사상과 문장을 장악하고, 독자가 익숙해하는 인과관계의 스토리 도식을 완벽히 깨부수며(계몽군주?), 두 번 세 번 되새기지 않으면 자신의 소설에 대해 입도 뻥끗 못하게 하는 치밀한 군주다. 제발트 그는, 이야기에는 어떠한 전형도 없으며 지켜야 할 원칙도 없고 스스로 외치고 싶은 것을 주저없이 외칠 수 있는 용감함이 필요할 뿐이라고 포교하는 전도사다. 그는 또한 우리가 오래 전부터 여겨온 소설의 재미라는 미덕 위에 연구와 통찰이라는 육중한 대체물을 제시하는 사차원의 자유영혼이다.

 

슬슬 더 흥미로워지는 건, 그 새롭고도 특별한 글쓰기에 나도 도전하고픈 열망이 제법 꿈틀거린다는 사실이다. 이 모든 것은 기교나 천재적인 재능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 무한한 위로를 주기 때문이다. 기교에 탁월한 작가는 이미 에너지를 기교에 빼앗겼기 때문에 세상과 같이 아파하거나 통탄할 힘이 없다. 거칠고 날것인 채로 말할 수 있는 정신구조가 이미 흐트러졌다. 타고난 재능이 있는 작가는 스스로에게 속아 깊이와 넓이를 아우르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재능은 원석이지만 원석 그대로를 아름답고 유용하다 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일 것이다.

 

내가 소설을 쓰겠다고 뭣도 모르고 덤볐을 때, 나의 자의식은 내 재능으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리라는 허황함으로 가득했다. 지금 생각해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나란 사람은 넘치는 자신감의 소유자라 하기도 뭣한 이를 테면 못 말릴 백일몽환자(?)라고나 할까. 생각해보면 기교나 재능 때문에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를 못 깨닫는 경우가 많았다. 내가 왜 ‘나그네’라는 옛스런 낱말에 끌리고 세상에 넘쳐나는 ‘불빛’에 나만의 의미와 은유를 부여하는가를 나는 말하고 싶었다. 내가 선택한 방식은 20대말 30대 초반의 감성과 역량의 한계를 넘어설 수 없는 이미지와 묘사의 수법이었는데, 그때로서는 만족스러웠다. 그리고 그렇게 써내려간 초기의 단편이 내 맘엔 그런대로 괜찮았다. 그러니까, 먼지나 손때가 묻지 않은 잘 정돈된 어떤 형상물을 나는 원했던 것 같다. 그런데 만약, 다시 또 어느 날 나그네나 불빛이 내 맘을 파고든다면, 그렇다면 나는 이번에는 다른 방법을 선택할 것이다. 이미 40대가 되었고, 이미지나 묘사로 스타일을 살리는 것만으로는 이제는 성에 차지 않는(?) 아점마의 내공도 무시할 수 없고, 더 이상 못 참겠다 싶은 순간까지 글쓰기를 참을 줄 아는 인내심도 생겼기 때문이다.(충동구매와 충동창작은 모두 지양해야 한다!) 달리 말하면, 성질을 다 죽였다고나 할까.

 

그러니까 제발트 같은 소설가가 내게 왜 위험한 존재인가를 다시 한번 설명하자면, 워낙 소설이 특별하면서 기이하면서 재밌으니까 욕심이 생기는 거, 그런 기분, 흉내도 못낼 내공인데 막 따라하고 싶은 유치한 기분, 원래 허영이란 게 이루지 못할 걸 내 것으로 만들고픈 욕심 아닌가. 이런 대목에서 한번쯤 나도, 동시대 동연배의 작가가 아닌, 그렇다고 도스토예프스키나 톨스토이보다는 현대적이며 고전의 반열에도 곧 오를 21세기의 작가를 향해 동일시의 감정을 품으며 나도 이렇게 쓸 수 있다고 나를 세뇌하며 글을 열심히 쓰도록 나를 동기부여 하기 때문에 제발트는 내게 위험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 대목에서 제발트에겐 아무 잘못도 없다.)

 

그리고 제발트가 왕일 수밖에 없는 결정적인 이유는 자신의 글쓰기를 놓고 변명하지 않으며 세상에 양해를 구하지 않으며, 내가 구축한 사고와 문장으로 나는 세상을 살았고, 과거의 파괴의 흔적을 오늘도 아프게 느꼈으며, 그래서 세상을 향한 내 대결방식으로서의 글은 이러한 틀과 결을 갖추었다고 당당히 작품으로 항변한다는 사실, 바로 그것이다. 가수는 노래로 정체성을 평가받는 게 당연한 것처럼, 소설가는 소설로 인정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소설을 쓰고 고치고 빠꾸 맞고 다시 또 쓰고 고치고 또 빠꾸 맞고. 이러한 과정에서 내가 오해했던 건, 내 소설이 아주 형편없거나 시대착오적이라 생각했다는 점이다. 그런데 그건 아닌 듯하다. 내 소설이 탁월하다는 뜻이 아니라, 나는 세상을 향해 소설가로 맞짱 뜰 자신이 없었던 게 분명하다. 소설가이기 이전에 한 사람으로서 기우뚱한 진흙탕의 세상에서 균형을 잡고 살 자신이 없었던 듯하다. 세상을 바라보는 나의 시각과 나의 판단을 나는 확신할 수 없었던 게 틀림없다. 그러니 내용과 형식을 아우르는 주제의식을 확장시키지 못한 채 애꿎은 스타일만 붙잡고 늘어진 듯하다. 내가 늘 하는 우스갯소리 중 하나가 ‘하늘이 두 쪽 나도 스타일이다’ 인데, 스타일만으로는 양심 있는 소설가의 반열에 설 수 없다. 스타일과 분위기만 있는 글이 얼마나 공허하고도 얄팍한지는 누구나 다 안다. 누구나 알면서도 그런 글을 찾는 이유는 (아까 말했듯이) 여기는 공범의 사회이기 때문인 것이다.

 

제발트에게도 이렇게 물을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것도 소설입니까? 그럼 제발트는 이렇게 대답할 것 같다. 제가 소설이라고 썼으니 소설이죠. 이런 걸 소설이라고 내놓고 창피하지도않으십니까?, 괜히 걸고넘어지려고 또 물으면 그는 똑같은 얼굴로 말할 것이다. 소설가가 내 소설 읽어준 사람 앞에서 창피할 건 없죠. (끄덕끄덕… 그럴 것 같다. 내 글을 읽어준 사람이 악평과 혹평으로 나를 공격한다 해도 그건 창피한 일이 아니다. 고마운 일이지!) 세상엔 이런 거 안 읽은 사람이 더 많거든요, 나는 점점 더 그를 시험하고 싶어 그를 놔주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한다. 그러니까 앞으로도 계속 더 잘 써야죠.

 

거봐라. 자꾸 열심히 써야 된다고 나는 나를 몰아세우지 않는가. 올 가을에 왜 내가 또 『토성의 고리』를 읽었는지는 영원한 비밀로 남겨둔 채 글을 이쯤에서 마무리 해버리고 싶다. 왜냐하면 나는 (무명의??) 소설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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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알교양인으로 낙인찍힐 때까지

2012.06.18 10:55 | Posted by 북인더갭

에디터의 서재 3

이계삼 <영혼 없는 사회의 교육>(녹색평론사 2009)

 

레알교양인으로 낙인찍힐 때까지!

 

김실땅

 

 

내 주변에 늘 책을 끼고 사는 사람이 하나 있는데, 그 사람이 말하길 최근 『영혼없는 사회의 교육』을 읽고 되도록 자전거를 타기로 했다 한다. 원래는 바퀴가 두어 번만 굴러갈 그 어떤 가까운 거리라도 차를 몰고나가는 사람이라 왜 저러나, 늘 말리고 싶었는데 놀라운 변화가 아닐 수 없다. 차를 끌고 나가선 차가 막힌다고 분노하며 길거리 운전자를 향해 욕을 하느라 모든 에너지를 쏟는 사람, 겉보기엔 점잖은데(책도 많이 읽는 사람이!!) 왜 그런지 모르겠다. 그랬던 사람이 책에 도대체 뭐라 나왔기에 그런 기특한 결단을 내리고 실천에 옮기는 것일까.

 

나는 이 세상을 ‘힘의 세상’이라고 나름 규정한다. 내 규정이 맞는지 틀리는지는 따질 필요없다. 다른 이들이 다른 개념으로 삶을 규정해도 그것도 부분적으로 다 옳은 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삶을 완벽히 알고 나서 말을 하려면 평생 입을 꾹 다물 살아야 하는데 그건 또 너무 답답하고 비겁하다.

 

그렇다면 내게 힘이 있는 걸 다른 이들에게 어떻게 보여줄 수 있을까. 힘은 의미없이 남용해버려야 제맛(?) 아닌가. 먼저, 세상 사람들의 방법을 따라해야 한다. 그 방법은 어렵지 않은데 모든 힘은 일단 일상 속에서 ‘소비’의 형태로 흉내낼 수 있다. 소비가 가능하려면 돈이 필요하다. 그렇지만 당장 돈이 없어도 카드가 있으니 필요도 없는 걸 사들이고, 아직 쓸 만한 걸 버리기에 어려움은 없다. 만족도 감사도 없는 과정을 되풀이하면서 사람들은 이것을 풍요로운 삶이라고 착각한다. 그러니까 즉, 힘이 있는 사람은 ‘소비자’로 살 수 있는 사람이다.

 

좋다. 늘 ‘고객님’ 소리 들으며 사는 것도 말 그래도 제 멋이다. 하지만 아이들을 키우고 가르치는 일에서도 소비자 마인드로 일관한다면 이보다 더 큰 죄가 있을까 싶다. 교육산업이란 말을 혼자 되뇌어보곤 한다. 이것도 산업이었다. 교육도 인풋이 있고 아웃풋이 있어 가시적이고 실제적인 이윤을 남겨야하는 시장 논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짜증난다. 아이들이 누려야 할 귀한 자유와 건강한 사유는 그럼 어떻게 키워주고 존중해주란 말인가.

 

휴일을 맞아 자동차를 몰고 여행을 떠난다고 할 때, 그 목적지와 방향을 결정하는 요소는 무엇일까? 그것은 고성능 자동차를 만든 기술에서는 나오지 않는다. 쉽게 고장 나지 않는다거나 공기조절장치가 우수하다거나 자동차의 속도가 빠르다는 등등 그런 문제들은 기술로 얼마든지 실현가능하다. 하지만 그 자동차를 타고 어디로 갈 것인가 하는 문제는 그런 기술과는 차원이 전혀 다른 문제이다.

-서경식, 카토 슈이치, 노마 필드 『교양, 모든 것의 시작』(본문 45쪽)

 

자동차를 타고 어디로 갈 것인가, 이것을 결정하는 게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고? 그럼 이건 무엇으로 가능한 일인가.

 

마음으로 꿈꾸던 자연의 한 풍경이나 지도에는 나오지도 않는 작은 골짜기나 오솔길을 그려본 적 있는가. 자동차야말로 소비로 치자면 화끈한 아이템의 대명사이다. 최고의 연비, 동급최강의 세단을 소비의 형태로 소유했다 치자. 그 다음엔? 이 차를 몰고 나만의 파라다이스로 떠날 수 없다면, 그래서 할 일 없이 바람소리 산새소리를 들을 마음의 넉넉함이 없다면, 아니 어디로 떠나야 할지 도무지 몰라 누군가 목적지를 골라줬으면 싶어 패키지여행 상품을 끝내 검색하기 시작한다면, 이 자동차는 내 삶에 무슨 의미란 소리인가. 내 취향을 설명할 수 없고 내 소망이 무엇인가 스스로도 알 수 없으니 남들 많이 찾아가는 곳에 나도 똑같이 돈 내고 갔다온 걸로 여가를 ‘소비’해놓고, 환상의 테크놀로지가 나를 좀비로 만들었다고 어디다 대고 하소연 하겠는가. 아니, 이게 하소연할 일인가를 깨달을 인식이라도 있는가. 노브레인이란 이런 사람을 일컫는 말 아니겠는가.

 

카토 슈이치라는 일본 지식인 할아버지가 제시한 삶의 작은 한 예가 바로 ‘교양’의 가치를 충분히 대변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영혼없는 사회의 교육』을 읽다 줄을 벅벅 그은 부분도 위의 내용과 일맥상통한 부분이었는데, 교양에 대한 더욱 날카로운 이계삼의 통찰은 나를 쥐구멍 찾도록 몰아세우고도 남았다.

 

진정한 의미에서 교양이란 책을 많이 읽는 것, 논리적으로 우수한 글을 쓰는 것과 별 상관이 없다. 이 시대의 우수한 교양인은 이 타락한 말과 글의 지배에 더욱 깊이 감염된 존재일 가능성이 높다. 살아있는 세계를 믿지 않고 말과 글을 존중하는 도착된 의식, 현실적인 쓸모밖에 볼 줄 모르는 유치한 계산속, 쓸데없는 엘리트의식으로 양 어깨가 빵빵한 가련한 허수아비가 될 가능성이 훨씬 더 높다는 말이다. 교양이란, 실제적인 쓸모가 없고, 값없이 주어져야 하며, 그 값없음, 쓸모없음으로 제 쓸모를 찾는다. 교양에 대한 지식과 그것을 표현하는 기술이 자신의 사회적 성취를 위한 불가결한 수단이 되는 그 순간부터 교양은 타락한다.(.『영혼없는 사회의 교육』  본문 63쪽)

 

논술학원을 차리라는 말을 수없이 들어봤다. 그런 권유의 뒷맛은 늘 찜찜하다. 돈 좀 벌어봐? 나도 한번 벌어봐? 아이들 머리수대로 돈을 따져봐? 어차피 아이를 돈으로 키우기로 작정한 부모 소비자들 돈 좀 끌어모아봐?

 

기숙논술학원을 차린다. 나는 그곳에서 논술을 배우겠다 몰려든 아이들에게 한가하게 시를 읽히고, 두꺼운 고전을 함께 읽으며, 같이 여행도 떠나고, 음악 듣다 졸리면 낮잠을 자고, 먹고 싶은 거 생각나면 같이 장을 봐와 함께 만들어 먹고, 밤에 잠이 안 오면 낮에 읽던 부분을 필사하도록 시킨다.

 

그러면 부모들은 몽둥이를 들고 나를 찾아올 것이다. 그게 아이들 성적과 무슨 상관이야, 당신이 이러고도 사기꾼이 아냐, 애들을 폐인으로 만들었잖아, 우리 애들 대학 못가면 다 당신 책임이야! 교양이 밥 먹여줘?

(순 밥통들 같으니라구)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교양은 밥을 먹여준다. 나는 확신한다. 삶의 어떤 상황에서도 유연하고 건강하게 상대방을 공감하고 배려하는 아이들, 같이 울어줄 줄 알고 웃어줄 줄 아는 아이들, 사회의 전문가랍시고 고액 연봉에 만족하기보다 기술의 위험성을 본능적으로 깨닫고 느리게 사는 아이들, 그늘진 곳의 약자를 위해 같이 싸울 줄 아는 아이들, 그들 정서의 밑바탕엔 쓸모없는, 순진한, 소박하고도 따뜻한 교양이 자리잡고 있다.

 

교양처럼 무시받기 쉬우며 곡해되기 쉬운 개념이 또 있을까. 부모들은(=세상의 어른들은) 아이들이 교양인이 아닌 전문가가 되길 원한다. 그들은 그들의 자녀가 전문기술이나 전문지식을 익혀 일반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직종에서 일하길 원한다. 그러기 위해선 영어를 잘해야 하고 좋은 대학을 나와야 한다.

 

한편 반대로, 기술처럼 추앙받으며 칭송되는 개념도 사실 찾기 힘들다. 기술은 우리를 편리하게 해주었고, 불가능하다 여겼던 병도 고쳐주었으며, 지구 반대편 나라의 사정까지 속속들이 알아 우리도 세계인 시늉을 할 수 있게 해주었다. 기술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리고 그 방면에 머리가 반짝이는 사람들은 당연히 연구하고 노력하여 많은 이들에게 유익을 주는 기술을 계속 개발해야 한다. 그러나 단, 그들은(또한 우리 모두는) 각 분야의 전문가가 되기 전에 교양인이 되어야 한다. 전문가의 길로 성공을 향해 혼자 빨리 달리던 중이었다면 교양인의 길로 갈아타 느리게 다같이 가야 한다. 건강한 양심을 공격하는 유혹을 혼자 물리치기 힘드니 옆의 사람과 연대해야 한다. (카토 슈이치 할아버지는 어디로 갈 것인가만 얘기했지 누구와 갈 것인가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누구와’ ‘어디로’ 가는가는 막상막하 중요하다.) 기술이 편리하지만 얼마나 위험한 수단인지 알기 위해선 전문기술이 아닌 교양이 먼저 인 것을 깨달아야 한다.

 

교양은 태어나 죽을 때까지 이어지는 지속적인 과정이다. 어느 한시절 책 좀 읽고 글 좀 썼다고 교양인이 되지 않는다. 교양은 드러나지도 않고 내세울 것도 없는 순수하고 도도한 정신의 흐름이다. 교양은 인터넷이나 스마트폰 없이 즐거이 멍 때릴 수 있는 힘이다. 상품화 될 수 없고 시스템화 될 수 없는 잡생각을 즐기며, 공감하는 마음을 잃지 않으며, 인간이 기꺼이 짊어지고 가야할 고독을 피하지 않는 용기, 남들 다 가는 길이니 옳을 거라 생각하며 노브레인 좀비처럼 따라가지 않는 삐딱이 근성, 나 하나가 변한다고 세상이 변하지 않는다며 공격하는 세상을 향해 실천의 무기를 휘두르는 배짱, 이러한 자양분 속에서 교양은 자라난다. 겉치레주의자의 교양이 아닌 레알교양인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

 

이계삼의 글을 곱씹을 때마다 내가 천착했던 말과 글도 얼마나 병들고 뒤틀린 도구였던가(=나의 오만이 얼마나 언어를 병들게 했던가!), 그것들을 통해 나는 나의 말발과 글발에 얼마나 도취되었으며, 말과 글이 뒷받침 되는 않는 사람을 내심 얼마나 무시했던가, 나는 심히 쪽팔린 책읽기의 시간을 경험했다. 레알교양인이라면 말과 글을 학대해선 안 된다. 말과 글을 혹사시켜도 안 된다. 말과 글을 더럽혀서도 안 된다.

 

우리가 늘 우스갯소리로 던지는 질문, 책 한권 읽는다고(=멍 때린다고, 어려운 사람 돕는다고, 고장난 거 고쳐 쓴다고, 나 하나 차 안 끌고 나간다고) 밥이 나와 떡이 나와?, 내 생각엔 이 질문은 아주 중요한 질문이다. 왜냐하면 이렇게 바꿔야 맞는 말이기 때문이다. 책 한권 읽는다고(=멍 때린다고, 어려운 사람 돕는다고, 고장난 거 고쳐 쓴다고, 나 하나 차 안 끌고 나간다고) 내 영혼에 밥이 나와 떡이 나와?

 

나온다. 다 나온다. 병들고 고갈된 영혼에게 고단백 저칼로리의 건강식과 시원한 생수가 그 즉시 제공된다.

 

당장에 나에게 득이 되지 않는다 여겨지는 일들에 시간을 쏟아야 한다. 그 귀하고 귀한 여가마저 돈으로 소비해놓고도 뭐가 잘못 돌아가는지 모르는 세상이다. 아이들을 병든 좀비로 만들어놓고선 그들의 미래를 위한 선택이었다며 폭력을 가하는 세상이다. 영혼없는 사회가 생명의 아이들을 사육(!)한다고 말하는 게 과장이 아닌 현실이다.

 

집에서 사무실까지 걸어서 이십분여 걸린다. 컨디션이 아주 안 좋거나 폭우, 폭설, 방사능낙진 등 이상기후가 아닌 이상 앞으로도 계속 걷거나 자전거를 타겠다. 오피스텔이 위치한 동네를 현대판 버전으로 재미삼아 표현해보자면 좌청룡우백호가 아닌 좌클레오파트라 우호텔캘리포니아다.(이곳이 뭐하는 곳인지는 상상에 맡긴다) 나는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싶을 뿐이다. 뿐만 아니다. 풍수지리학적으로 표현해보자면 배산임수가 아닌 배코스트코 임홈플러스다. 완벽한 명당자리다. 이백여미터 북쪽으로 걸어가면 이마트도 어김없이 나를 기다린다. 내 잠재된 소비의 욕망을 이토록 가까이서 충동하는 괴물들. 집앞에 있는 한국유통, 코사마트, 두배로마트로는 내 소비욕구가 충족되지 못함을 고백한다. 사는 동네를 핑계삼아 넘어가선 안 될 일이지만 실천의 의지는 왕왕 무너진다.

 

말과 글에 자신이 있다 우쭐대는 나는, 평생 레알교양인으로 살고 싶은 나는, 어른인 나는, 무엇보다 엄마(!)인 나는, 영혼에도 따뜻한 세 끼의 밥을 챙겨줘야 한다는, 거룩하고도 두려운 책임감을 욕망과 탐욕의 명당자리에서 이제야 통감한다.

 

누구와 어디로 가려는가. 갈 곳이 있기는 한가, 같이 갈 사람은 있는가. 레알교양인의 힘을 더 늦기 전에 다같이 발휘해보자. 레얄교양인으로 낙인찍히는 영광의 그날까지! 왕왕 좌절한다 해도 적진 한가운데서 몸부림치는 김실땅을 동무 삼아 우리 서로 위로를 주고받으며.

Comment

  1. 김은실 2012.06.18 15:54 신고

    명쾌한 글 가슴을 울리네요.. 아이를 키우는 엄마의 입장에서 공감되는 부분도 많고 두려운 부분도 많지만 그래도 뭔가 다르게 살아보고 싶은 생각에 가슴 벅차게하는 듯.. <영혼 없는 사회의 교육>..꼭 읽어보고 싶네요.

    • 김실땅 2012.06.18 16:39 신고

      이런... 이 먼데까지 어케 들어오셨나여? 하긴 기술이 있어서 차비도 없이 오셨겠지만요^^ 이 여름, 얼라들 캠프 보내고 우린 찐하게 만나야겠죠ㅋㅋㅋ~ 보고픈 맘을 전하며!

 

                                                                                                              김실땅

아무나, 아무렇게나, 거칠게, 길게 말해도 틀렸다 말할 수 없는 주제가 우리 삶에 있다. 이럴 때 보면 삶은 공평하다. 정답이 없으니 저 하고 싶은 말 맘대로 하고, 아름다운 전례가 없으니 딱히 책임지거나 행동에 옮길 필요도 없다. 말 좋아하는 사람이나 말 싫어하는 사람이나 도전해볼 만한하다.

한 명의 시민으로 정치를 건드릴 만한 자신의 언어를 가졌다는 건 대단한 특권이다. 사실 말하고 싶어도 어떤 언어로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디서 들은 말을 안전하게 따라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누구나 말은 하는데 비슷한 얘기만 되풀이 되는지도 모르겠다.

진보의 발견?

『정치의 발견』을 읽는 내내 ‘흥분’, ‘자기확신’, ‘열정’이란 낱말이 ‘진보’라는 말과 만났을 때 생겨나는 의미의 반전을 생각해보았다. 맥락을 따라 읽다보면 ‘과도한 자기확신’, ‘넘치는 열정’, ‘이루는 것 없이 흥분만’처럼 위의 낱말들은 진보에 대한 아쉬움을 지적하는 수식으로 거의 사용되었다. 또한 책을 읽다 ‘진보’라는 낱말이 나오면 그 자리에 ‘초보’라는 낱말을 넣어 읽어도 흐름이 어색하지 않았다. 도대체 진보를 향한 필자의 태도는 어떤 마음인지 애매하다. 어떤 순간에는 애정이 지나쳐 진보를 발전시키고 보호해야 하는 지지자로 읽히다가도, 다른 순간에는 마치 퍼즐의 남은 단 한 조각, ‘진보’라는 퍼즐 조각 때문에 정치판의 그림이 망가진다고 화를 내는 듯 들리기도 한다. 필자가 중요시여기는 대의 민주주의와 정당정치, 선거라는 영향력 있는 정치과정을 ‘진보’가 알아주지 않기 때문인지, 화부터 내는 진보가 수준미달이라 여기기 때문인지, 여튼 진보진영에선 억울한 맘도 들었을 듯하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책을 오해한 상태에서 첫 장을 펼친 내가 잘못이다.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정치학 입문서는 분명 아니다. 『정치의 발견』 필자로선 진보에 대한 일침이 꼭 필요하다 생각했을 수도 있다. ‘진보적이되 좀 더 정치적이고 좀 더 인간적이 되어야’(24쪽)라고 지적할 때 알아봤어야 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책장을 덮을 수는 없었다. 정치는 한정지어 말하든 넓게 말하든 정답이 없으니까. 그리고 정치의 본성, 특히 우리가 놓치는 악마적 본성을 이해하는 데 좋은 지침서이기도 했고 민주주의의 가치에 대해서도 기본지식을 다질 수 있었으니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아 ‘정치의 발견’이란 제목보다 ‘진보의 발견’이라 말하는 게 양심적인 제목이 아니었을까 싶다.

내가 필자 박상훈에게 막스 베버에게서나 얻을 수 있는 내공을 바랐던 걸 수도 있다. 보편타당 하면서도 따뜻하고도 날카롭게, 깊이와 넓이 두 날개로 읽는 이를 압도하는 정치 에세이는 정녕 우리에겐 먼 얘기인가. 진정한 정치학자로, 아니면 현실 정치인으로, 또는 정치평론가로, 정치를 놓고 누구나 아무렇게나 말할 수는 있지만 자신에게 가장 정직한(!) 옷은 어떤 옷인지, 영향력 있는 사람일수록 더 많이 생각하고 글을 써야 독자들도 언어를 갖게 될 듯하다. 그러니까 나는 어느 진영에서든 수긍하며 읽을 수 있는 보편타당한 정치 에세이를 기대했는데, 좀더 기다려야 하겠다.

권력지향적 시민

나에겐 정치적 성향이 없다, 고 예전엔 생각했다. 그러면서 정치적 성향이 강한 사람을 꺼리며 거리를 두기도 했다. 정치적 성향이 강한 사람이란, 그러니까 말이 많거나, 자신만이 옳다 주장하거나, 너는 잘 모른다고 상대방을 매도하거나, 굳이 편을 가르며 공동체를 분열시키는 하는 사람? (내가 넘 나쁘게 말했나?) 그런데 되돌아보니 그들과 거리를 두려는 나의 의지야말로 상당히 ‘정치적’이었다. 그리고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맘 깊은 구석엔 누구나 상대방을 향한 폄하와 매도의 칼을 숨기고 있지 않나 싶다. 당연하다. 정치의 본질상 어떻게 그 속에서 강제력을 뺄 수 있으며 ‘언어’도 없는 사람이 어떻게 ‘선수’들을 당해낼 수 있겠는가. ‘정당한 폭력’을 행할 수 있는 정치권력을 멀리서 욕하는 게 가장 쉽지 않겠는가. 너만 잘났냐, 너만 잘났어? 하는 정도의 곤조야 시민의 오래된 권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래서 하는 말인데, 정치적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마찬가지로, 정치권력이 싹트지 않을 공동체도 없다. 대표와 괴엑실땅 단 둘 뿐인(직원은 단 한 명도 없는!) 북인더갭 사무실에서도, 초딩 자녀와 허수아비 같은 부모 자식 사이에서도 권력의 다툼은 첨예하고 권력 배분의 양상 또한 나름 복잡하다. 그래서 정치를 공부한다는 것(정치가로 입문한다는 뜻이 아니다), 시대의 정치현상을 남의 눈이 아닌 나의 눈으로 바라보고 해석할 힘을 기른다는 것은 삶을 살아가는데 정말 필요한 자원이 아닐 수 없다. 이 책에는 그러한 과정에 도움을 주는 작은 미덕이 있다.

내가 나타내는 정치성이란 어떤 것일까. 내가 수긍하는 정치적 이성이란 너무 이상적이지 않은가 생각해본다. 한국에서 40대 중반의 여성(소위 아줌마)이자, 수도권 아파트 소유자, 기혼에다 사지 멀쩡한 신체조건의 대졸자, 그리고 읽고 쓰는 게 가장 재밌고 쉬웠던 한 시민이자 익명의 그녀. 그녀의 정치성…? 나열해 보니 평범하다. 그런데 쬐금 다르게 바라보면 그녀는 익명이 아니기도 하다. 나에겐 집이 있다. 그런데 전젯값 걱정에 밤잠을 설치는 사람이 나의 글을 읽는다면. 나에겐 가정도 있다. 남들처럼 지지고 볶으며 살망정 돌아서서 서로의 가슴에 상처를 주고받진 않았다. 하지만 돌싱들이 나의 글을 읽는다면. 나는 어디든 내가 가고 싶은 곳에 누구의 도움도 없이 언제든 갈 수 있다. 그런데 몸이 불편한 사람이 나의 글을 읽는다면. 나는 어떤 남자를 사랑했고 어떤 남자였던 그 남자랑 우여곡절 끝에(!) 결혼했다. 동성애자들이나 결혼을 원하는 미혼자들이 나의 글을 읽는다면. 나는 대학물을 나름 많이(?) 먹었고 그래서 가방끈이 중간 이상은 된다. 그러나 여러 이유로 대학 근처에도 못 가본 사람들이 내 글을 읽는다면. (쏘왓, 박수라도 쳐주랴??)

그렇다면 나는 대단한 특권층일지도 모르는 권력지향적 시민이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소수자인 여성으로서의 내 존재는 이 글에선 일단 넘어간다) 이것이 나의 정치성의 기본이라 생각하니 평범하다 쉽게 말해선 곤란할 듯하다. 정치가 바르게 행해지는 공동체에선 누구도, 어떤 소수자도 배제되어선 안 된다는 게 나의 정치적 이성인데, 내가 순진했다. 자신은 그 어떤 소수자의 입장에 서 본 일도 없으면서 내가 가는 길이 올바르고 정당하고 용감하다고 확신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없다. 정말 없다. 억지로 갖다 붙여서 될 일이 아니다. 이것이 지금 내가 발휘하는 정치편력의 수준이다.

나도 ‘정치적이고 인간적’이고 싶다. 박상훈의 지적대로 그러기 위해선 화부터 내면 안 되고, 나의 전인격이 타인에게 매력적으로 작용(하도록) 진솔해야만 한다. 앞으로는 내가 체험해보지 못한 삶에 대해 다 아는 척해선 안 되고, 그들을 계몽한답시고 먹물값 해서도 안 된다. 왜냐면 나는 더욱이 책을 만드는 사람이니까, 글을 쓰는 사람이니까, 어떤 무기보다도 위협적이고 살인적인 ‘펜’이라는 무기를 나는 재밌다고 갖고 놀기도 하니까.

정치는 정치판에서만 하는 게 아니라 나란 존재의 말과 행동 그리고 결정 하나하나가 모두 정치적인 파장이 되어 사회로 향한다는 걸 다시금 깨닫는다. 거대한 물살이다. 어떻게 이렇게 거대하고도 집요한 기운을 나와는 먼 세상의 일이라 느끼며 지금껏 살았을까.

『정치의 발견』을 읽으며 자신의 정치성을 점검받아보시는 2012년 되시길 바란다. 그래서 올 한해 모두 이 사회 안에서 각자가 맡은 민주주의의 몫을 멋지게 감당하시길.

늦은 새해 인사를 드리며 검토하던 원고로 눈과 마음을 다시 고정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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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탄 소년>을 보고

율 대표

초등학교 시절 어머니와 아버지가 집에 없는 시간이 많았다. 아버지는 생계 때문이라고는 해도 어머니가 왜 집을 비웠는지는 나에게 여전히 미스터리다. 하여간 형제자매도 없는 나로서는 밤늦게까지 혼자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시절 나는 자전거를 자주 탔다.

하루는 어둑해질 무렵 자전거를 끌고 나갔는데, 동네 골목에서 우리반 여자애와 딱 마주쳤다. 그 애는 “내일이 시험인데 너 뭐 하고 있니?”라고 물었다. 나는 말없이 웃고 지나쳤다. ‘저두 시험인데 골목에 나와 놀면서…’ 아마 그날도 저녁 내내 나는 자전거를 탔을 것이다.

아주 나중에야, 아마도 프로이트 같은 심리학자의 글을 대충 훑어보고 나서야 나는 어린 시절 부모의 부재가 한 사람의 성장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막상 나에게 부모가 부재하던 시기는 그저 막연한 외로움과 한없는 자유를 뜻했다. 정말 외롭고 슬프기는 했지만 그때만큼 자유로웠던 시기를 겪어보지 못했으니까.

<자전거 탄 소년>을 보면서 나는 아버지를 생각했다. 아니, 이 소년에게 어머니는 아예 없으므로 나는 아버지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소년들에게 아버지는 무엇일까? 그것은 법이다. 세속적인 기술이자 살아남기 위한 수단으로서 내가 모방해야 할 모든 것이 아버지에게 있다. 그러나 그것에게 버림받는 순간, 소년은 새로운 법을 상상 속에서 만들어낸다. 그것이 범죄이든 뭐든 소년은 가리지 않는다. 문제는 현재 아버지의 자리가 비어 있다는 것이지 옳고 그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을 채우는 과정, 다시 말해 아버지의 자리에 끊임없이 가짜 법들을 가져다놓는 것이 이 소년에게는 중요한 일이다.

아주 유감스럽게도 소년한테 접근한 새아버지(법)는 동네 양아치다. 그래도 소년은 이 법에 충성한다. 사람을 해치고 급기야 벌을 받는다. 그런데 중간에 한 여자가 끼어든다. 그녀는 어머니가 아니다. 그녀는 자전거와 함께 나타난 사랑과 연대의 여신이다. 여기서 갑자기 소년이 고분고분해지는 것을 보고 나는 어리둥절했다. 과연 그녀가 법을 대신할 수 있을까? 그것도 소년에게? 나는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다.

만약 내 소년 시절에 그런 여인이 나타났다면 나는 어떻게 했을까? 어머니도 아버지도 없는 방에서 나를 구원해주었다면. 나와 놀아주고, 무엇보다 자전거를 타고 같이 소풍을 가주었다면. 글쎄 잘 상상이 가지 않는다. 아마 나는 이 영화의 소년과 달리 그 여자를 끝까지 거부하고 귀찮아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소년이 돌에 맞고 쓰러진 후 다시 자전거를 타고 여자를 찾아나서는 엔딩이 좋았다. 뭔지 모를 감정이 올라와 한참이나 일어설 수조차 없었다.

나는 사랑과 연대라는 말을 잘 믿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을 작은 선의의 틈이라고 한다면 어떨까? 다르덴 형제의 영화는 늘  거대한 사회적 악을 다루면서도 그것에 맞서는 인물을 내세우지 않는다. 그저 연약한 인간이 온몸으로 뚫고 들어가는 선의의 작은 틈만이 있을 뿐이다. 그 틈에서 나는 무력하게 <황제> 2악장을 듣는다. 역사의 거대함 앞에서, 아주 여린 듯하지만 인간의 마음을 녹이는 것은 음악만이 아니라고 믿으면서. http://bit.ly/ezmGP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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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지연 2012.07.04 17:15 신고

    저도 이 영화를 보았는데... 참 아름다운 감상평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

  2. 그냥 소소한 제 이야기 적었는데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행복하시길...

<클래식 시대를 듣다> 대표의 특명

2011.12.14 11:38 | Posted by 북인더갭

<클래식 시대를 듣다>

 

김실땅

 

어느새 12월이다. 근데 나는 여름만 지나면 한해가 저물었다 여기는 사람이다.(성질 급한 한국사람^^) 9월에 혹독한 비염이 찾아오면 계절의 변화에 굴복하며 한해를 나름 성급하게 정리한다. 그러니 나에게 12월은 한해의 종지부를 찍고도 남은 그 몇 달 중 어쨌든 숫적으로 맨 끝달인 어떤 ‘때’이다. 사실 1월이건 12월이건 그 어느 때에도 딱히 갖다붙일 의미가 내겐 없다. 이런 삶이 제대로 된 삶인지는 잘 모르겠다. 고백하건대, 하루하루를 땜빵하듯 겨우 살다보니 2011년이 다 지났다. 

일 때문에 대충 들춰본 책은 빼고,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꼼꼼히 읽은 책이 얼마나 되나 한번 헤아려보았다. 괜히 수첩을 뒤적거리고픈 어느 밤의 이벤트라고나 할까. 읽은 책이 굉장히 많을 줄 알았는데 예상과는 달리 어림잡아 한 달에 두 권 꼴 읽으며 한해를 보냈다. 아, 책을 읽지 않으며 책을 만든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 사람마다 기준은 다르겠지만 나는 스스로에게 더, 좀더! 라고 꾸짖는다.  

그런데 더 찜찜한 건, 몇 권 안 되는 책들도 읽고 나면 손과 마음에서 금방 떠나간다는 점이다. 물론 종종 그렇지 않은 책을 만나기도 한다. 그런 책의 폐해라면 가까이 두고 자꾸 펼쳐보지 않으면 마음이 불편할 정도로 괴력을 발휘한다는 사실이다. 이런 책읽기의 기쁨과 감동의 시달림(!) 때문에 (아마도) 지금껏 책을 놓지 못하는 건 아닐까.

 

정윤수를 잡아라

두께부터 다르다. 허걱, 이걸 언제 다 읽나… 하지만 웬걸. 한 장 한 장 읽다보면 ‘이 놀라운 책은 더 아껴 읽어야 해’ 하는 열망에 사로잡힌다.

 음악은 누구에게나 첫사랑일 수 있다. 세상에 눈 뜨고 자신을 향해 눈을 뜰 때 사람들 귀에는 마침 음악이 들린다. 신비로운 일이다. 그리고 그 음악과 친숙해지다 보면 음악가가 살았던 시대며, 그/그녀가 태어난 도시의 어느 작은 골목, 아니면 그들이 품었던 사상과 그들을 둘러쌌던 유행이며 시대정신, 때론 가족이나 애인 등등 잡다한 게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똑같은 음악을 다른 예술 장르에선 어떻게 형상화하고 변용했는지가 미치도록 슬슬 궁금해지는 것이다. 사랑의 집요함이란 이런 것. 지은이 정윤수는 인생이 겪는 사랑의 열병을 다 겪어봤다는 듯 친절히도, 깊이 있게, 하지만 겸손하고 따뜻하게 들려준다. 딱 잘라 말해, 눈부신 필자다.

 정윤수를 잡아야 한다. 대표님의 명령이 떨어진다. 덜 떨어진 괴엑실땅(표준어로는 기획실장^^)은 겨우 알아낸 정윤수 필자 연락처로 꿈속에서 전활건다.

괴엑실땅 : 저어 여보세요, 안녕하십니까, 정윤수 선생니임 네, 여긴 부긴더개빕니다.
정윤수 : 뭐요? 부기?, 뭐라구요?
괴엑실땅 : 북,인,더,갭,입니다.
정윤수 : 북인더갭? 그게 뭐요? 뭐하는 곳이오?
괴엑실땅 : 출판삽니다.
정윤수 : 뭐 그런 듣도 보도 못한 출판사가 다 있소?

괴엑실땅은 아마 찍소리 못하고 전활 끊을 것이다. 아, 잡아야 하는데. 이런 필자를 놓치면 안 되는데… 대표님껜 뭐라고 변명을 하지, 땅을 치면서.

쉽지 않다. 페이지마다 소개되는 아티스트나 인용하는 책까지 두루 섭렵하지 않은 상태라면 읽다 포기할 가능성이 높다.

예를 들어 2장 ‘바흐 조화로운 세계를 향한 꿈’을 보자. 첫 페이지에 벌써 브레히트의 시 「마리아의 추억」이 나온다. 그 아랫줄에 독일영화 <타인의 삶>이 소개된다. 두 작품을 몰라도 읽는데 큰 지장은 없다. 하지만 뭔 소리하는지 정확히 알고 싶은 사람은 시와 영화를 곱씹으며 읽게 될 것이다. 나중에 찾아 봐야지… 하면서. 여튼, 브레히트 시에 등장하는 덧없는 키스의 기억과 구름 한 조각을 핑계로 필자는 아우구스부르크라는 작은 도시를 다시금 떠올리며 그 도시에서 들렀던 한 교회를 언급하는데, 이때부터 사건은 시작되는 것이다. 어느 노인의 손가락이 그저 꾹 눌렀을 파이프오르간에 소리에 그는 독침이라도 맞은 듯 깨어나는 것이다. 바흐, 오오 바흐, 하면서.

바흐가 나오기까지 브레히트와 영화 <타인의 삶>을 거쳐, 아우구스부르크라는 브레히트의 고향인 작은 도시를 또 거쳐, 그 도시의 성 안나 교회에 생각없이 발을 디뎠다가 파이프오르간 소리에 두 무릎 꿇으며 드디어, 바흐, 오오 바흐, 로 이어지는 과정이 너무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냥 빨아들이는 힘이 있는데, 다시 또 딱 잘라 말하자면, 그렇기 때문에 정윤수는 경건한 필자인 것이다.

음악을 듣기 전에, 음악가를 만나기 전에 그러한 음악이 가능할 수 있었던 시대 속으로 풍덩 빠지는 일, 자기도 모르게 일상에서 ‘클래식시대’로 밀려가는 기이한 체험은 가히 21세기에 만끽하는 타임머신 놀이라 해도 과장이 아닐 것이다. 그 시대엔 천재와 기인만 살았던 게 아니다. 궁정이나 교회에서 평생을 노예처럼 살았던 그/그녀들을 만날 수 있다. 시대의 알력과 이데올로기를 아우르는 보스를 만날 수도 있고, 상처와 분노로 열병을 앓는 루저도 만날 수 있다. 그들도 시대 속에 살았던, 나처럼 하루하루를 땜빵하듯 겨우 살았던 사람들일 수 있는 것이다. 시대를 듣는 재미는 그래서 남다른 것이 아닐까.

예술 관련 책을 읽다 나도 모르게 내뱉곤 하는 불쾌한 질문이 있다. 그래서, 어찌라고, 당신이 떠벌려놓은 소비와 탐욕과 허영을 포장해 세상에 책이랍시고 내놓은 당신을 어찌라고, 당신의 진심과 감동은 찾을 수 없고 배려와 공감의 따뜻함도 느낄 수 없는데, 당신의 얄팍함을 나더러 으찌라고.

『클래식 시대를 듣다』는 올해 내가 읽은 책 가운데 단연 최고의 책이다. 암, 두말하면 잔소리. 그 어떤 불쾌한 질문도 떠오르지 않는다. 페이지마다 도전이요, 문장마다 영감이다. 내 옆에 가까이 두고픈 책을 향한 사랑은 체험할 때마다 새로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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