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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성 없는 남자 1, 2'에 해당되는 글 5

  1. 2013.10.31 특성 없는 남자의 자기소개서_강연 (2)
  2. 2013.04.28 언론이 본 <특성 없는 남자>
  3. 2013.04.24 <특성 없는 남자> 미리보기_1부 1장
  4. 2013.04.22 20세기 최고의 독일어 소설! (9)
  5. 2013.04.22 영혼과 정신의 신음 (6)

로베르트 무질 <특성 없는 남자>의 자기소개서

 

안병률

2013. 10. 8. <숨도> 책해부학 강연 

 

 

소설의 제목에서 시작해봅시다. 이 소설에서 <특성 없는 남자>의 주인공 울리히는 30대에 갓 접어든 젊은이죠. 그런데 사실 이 주인공에게 특성이 없는 걸까요? 읽어보신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특성이 없는 남자라고 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정말 특성이 많은 남자라고 생각했죠. 만약 울리히가 회사에 들어간다. 그래서 자기소개서를 쓴다고 생각해봅시다. 정말 쓸 게 하나도 없을까요? 아닙니다. 이 남자는 쓸 게 많습니다.

 

 

일단 사관학교를 나온 기병대 장교 출신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장교 출신은 채용 때 큰 이익을 받지요? 제 친구들도 ROTC 출신들은 취직이 잘된 편입니다. 아마 제가 울리히라면, 그걸 맨 위에 썼을 것 같고요. 그 다음은 엔지니어입니다. 장교 출신에다가 기술까지 가지고 있다면 정말 최고 아닙니까? 게다가 울리히는 수학까지 공부했네요. 그냥 기술자가 아니라 뭔가를 제대로 혁신할 줄 아는 기술자란 말입니다. 그는 복싱도 할 줄 압니다. 머리도 상당히 비상해서 아마 적성시험 같은 것도 잘 쳤을 것 같습니다. 이 정도면 삼성은 그냥 들어가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울리히의 최고의 라이벌인 발터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그는 늘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알고 있어. 그는 여자의 눈을 들여다볼 줄 알아. 모든 순간에 모든 것들을 제대로 숙고할 수 있지. 복싱도 할 줄 알고 말이야. 그는 재능있고 의지력도 있으며 편견도 없지. 용감하고 끈기도 있고 대담하며 신중하기도 해. 그가 그 모든 특성들을 소유했다는 것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아".(1권 115~6면)

 

[시계줄을 단 엔지니어]

결국 울리히는 특성 있는 남자군요. 그런데 왜 제목이 <특성 없는 남자>가 되었을까요? 그러니까 이 제목에서 <없다>는 말은 좀더 해석이 필요해 보입니다. 저는 그 없다가 무(無)가 아니라, 반(反)인 것 같습니다. 울리히는 특성 없는 남자가 아니라 특성이란 것이 싫은 남자, 그러니까 특성에 반대하고 저항하는 남자입니다. 그런데 왜 울리히는 특성에 저항하는 것일까요? 먹고살려면 특성에 저항해서는 안되는 것이 현대 사회 아닌가요? 자격증 하나, 그것도 없으면 면허증 하나라도 더 따두는 게 정말 중요한 사회잖아요. 그런데 여기서 특성이란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특기나 개성, 인간성 같은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럼 그가 그토록 혐오해마지 않는 특성이란 무엇일까요? 가령 여기서 한 대목을 읽고 넘어가고 싶습니다.

 

하지만 왜 엔지니어들이 이러한 예측에 꼭 맞는 삶을 살아가지 않는지를 말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예를 들어 왜 그들이 종종 조끼주머니의 바닥에서부터 한쪽으로 치우쳐 수직으로 이어진 채 그 위의 단추까지 걸쳐 있는 시계줄을 차고 있는지, 또한 왜 그것이 복부 위에서 마치 시를 읊는 듯한 하나의 상승과 두개의 하강 곡선을 그리게 놔두는 것인지, 왜 사슴 이빨이나 편자로 된 브로치를 넥타이에 꽂고 다니는 게 그들을 만족시켜주는지, 왜 그들의 옷은 마치 자동차의 앞좌석처럼 생겼는지, 그리고 왜 그들은 자신들의 직업 이외의 것은 거의 얘기도 하지 않고, 한다고 해도 깊이 들어가봐야 겨우 연골쯤에서 멈출 것 같은 자기들만의 어설프고 연관성도 없으며 피상적인 이야기만 해대는 것인지 하는 것들 말이다. 물론 모든 엔지니어들이 그렇진 않겠지만, 울리히가 근무했던 첫번째 회사의 사무실에서 알게 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랬으며, 두번째 사무실도 마찬가지였다. 제도판 위에 딱 붙어서, 그들은 자신이 직업을 사랑하고, 그 안에서 놀라운 덕목들을 소유하게 됐다는 식의 태도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기계가 아닌, 자신들의 생각이 지닌 대담함을 발휘해야 할 때면, 그들은 마치 망치로 사람을 죽여보라는 부당한 요구를 받은 것처럼 행동하곤 했다. (1권 64~65면)

 

 

이 대목에서 묘사된 엔지니어의 모습은 다음 사진 같지 않을까 짐작해봅니다. 참 고색창연하지요? 이 사람이 그냥 귀족이라면 별 문제가 없겠지만, 이 사람이 엔지니어라면 어떨까요? 실제 이 사진의 주인공은 무질의 아버지로, 그는 당시 전형적인 엔지니어였습니다. 저 복부 아래쪽에 슬며시 드리워진 시계줄이 바로 위에서 묘사된 그 시계줄이지요.  이 사람은 비록 엔지니어의 특성, 그러니까 아주 합리적이고 정확하며 과감하다는 특성을 가지고 있지만 이상하게도 그에게는 여전히 불합리한, 그러니까 과거에 집착하고 비이성적이며 겁이 많은 특성 역시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그의 직업이 정확성을 추구한다고 해서 인간까지 정확해진 것은 아니라는 것이죠. 가령 아주 고성능의 핸드폰이 있다고 했을 때, 유독 그 껍데기의 디자인만큼은 뭔가 동물의 가죽이나 날렵한 몸 같은 원시적인 느낌이 선호되지 않습니까? 그 고성능 핸드폰을 개발한 사람 입장에서는 단지 디자인 때문에 제품이 덜 팔린다면 속상할 일이지만, 그게 인간인 것을 어쩔 수가 없는 것이지요. 아마도 무질이 혐오한 특성이란 이렇듯 정확함을 지향하는 듯하지만 결국 반만 정확할 수밖에 없는 현대의 상황이 아니었을까요? 이것 말고도 다른 하나가 있습니다. 제가 이 소설에서 참 좋아하는 대목인데요.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76~77)

 

그러던 어느날 울리히는 그 희망을 포기하게 되었다. 그때는 이미 축구장이나 권투 링에서의 천재들이 이야기되기 시작했고, 단 하나의 하프 백이나 테니스 선수가 잘 보도되지도 않는 열명의 발명가나 테너, 작가들보다 더 나은 시절이 돼버렸다. 그 새로운 정신은 자기자신을 확실히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그때 울리히는 어디선가 ‘천재적인 경주마’라는 기사를 읽었는데, 그 말은 마치 익기도 전에 떨어져버린 과일 같다는 느낌을 주었다. 그 기사는 세인들의 주목을 끌었던 한 경주마에 관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기자는 세인들의 정신이 그에게 그 기사를 쓰도록 만든 영감의 거친 부분들에 대해선 완전히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울리히는 단번에 천재적인 경주마가 자신이 살아온 모든 삶과 어떤 연관을 맺고 있는지를 알아챘다. 왜냐하면 말은 기병대에서 신성시하는 동물이었고, 유년시절에만 해도 말과 여자 이야기 말고는 어떤 것도 들어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가 중요한 사람이 되기 위해 그 말을 떠나 여러 일에 매달린 후, 이제 자신의 노력이 어느 정점에 도달했음을 느꼈을 때, 그 말은 그를 앞질러 달려와 그에게 인사를 건네는 것이었다. (1권 76~77면)

 

[위대한 경주마]

울리히의 자기소개서에서 마지막으로 등장한 스펙이 바로 수학자였습니다. 울리히가 엔지니어를 때려치우고 수학자가 된 데에는 아주 중요한 이유가 있었죠. 수학자의 특징은 엔지니어처럼 그저 정확하기만 한 것인 아니라, 전복적인 힘을 소유했다는 점입니다. 잘 아시겠지만 수학은 그저 계산을 하는 학문이 아니잖아요. 수학에 있어서 진짜 중요한 힘은 부정이겠지요. 여기서는 늘 새로운 가정이 문제가 되니까요. 새로운 가정이 나오면 옛날의 증명은 다 헛것이 돼버리는 것이죠. 적어도 울리히한테는 이런 게 천재의 진정한 모습으로 생각됐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말 한마리가 나타나더니 수학자를 앞질러 달리게 된 것이죠. 정말 그렇지 않나요? 요즘 누가 수학자를 기억이나 하나요? 물론 수학자 때문에 폭탄이 제조되고 수많은 사람이 죽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수학자를 기억하지는 않잖아요? 반면 복싱선수나 경주마는 어떻습니까? 우샤인 볼트 같은 선수는 육상 천재로 기억되지요. 야구 천재 이종범이란 말이 저는 아직도 뇌리에 깊이 박혀 있거든요. 그러니까 현대는 전복적인 힘이나 열망 같은 게 스포츠 같은 현상으로 넘어간 것이나 다름없다는 생각. 이것이 바로 무질이 바라본 현대의 특성이 아닐까 짐작해봅니다.

 

[캠핑]

그래서 이 모든 걸 종합해볼 때 무질이 반대하고자 했던 특성은 여기 사진에서와 같은 모습이 아닐까 저는 생각해보았습니다. 정말 오해는 말아주시길 바랍니다. 여기도 캠핑 하시는 분들이 있겠지만 저는 캠핑 자체에 대해서 아무 불만이 없습니다. 저도 하고 싶고 그런데 다만 돈도 없고 워낙 게을러서 못할 뿐입니다. 아마도 캠핑을 즐기시는 분이나 그냥 저처럼 눈팅만 하시는 분이나 동의하는 게 한가지 있을 겁니다. 캠핑은 옛날의 유목민이나 사냥꾼들을 떠올리게 한다는 것이죠. 우선 야외에서의 거친 숙박이 그렇죠. 텐트가 꼭 필요합니다. 또하나 중요한 것은 고기를 구워먹는다는 점입니다. 이건 사냥한 짐승을 그 자리에서 요리해 먹는 것을 떠올리게 하죠. 그렇다면 겉으로는 아웃도어 스포츠에 불과하지만 캠핑의 이면에는 우리가 인간으로서 뭔가 더 본질적인 것을 체험하고 싶다는 욕구가 깔려 있지 않을까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닙니다. 선과 악을 떠나서 그 행위에는 뭔가 인간적인 경험에 대한 강한 욕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캠핑의 실상은 어떤가요? 우리가 먹는 고기는 우리가 사냥한 것인가요? 우리가 먹는 야채는 우리가 채집한 것인가요? 여기서 우리는 체험의 상실을 겪게 됩니다. 뭔가 더 인간적인 체험을 원했지만 그저 흉내만 내고 말았다는 허탈함이랄까요? 제가 좀 쉽게 설명하려고 든 예라 좀 그렇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바로 이런 것이 무질이 말한 <특성>이 아닐까 저는 생각합니다. 저한테는 이 구절이 아주 중요하게 느껴져서 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예전의 인간들은 오늘날보다 더 나은 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사람들은 들판의 짚더미 같았다. 아마도 그들은 신, 우박, 불, 페스트나 전쟁 때문에 오늘날보다 훨씬 더 심하게 동요되었겠지만 전체로서, 시(市)로서, 지역으로서, 들판과 아직 개인적인 것으로 남아 있는 각각의 집단으로서 그것들은 대답될 수 있었고 명확히 설명될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책임감의 무게중심은 사람들이 아니라 상황들에 넘어갔다. 만약 인간이 자신들의 경험이 인간과는 상관없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들은 극장으로 달려가거나, 책으로, 통계연구원의 보고서로, 탐사여행으로, 이데올로기나 종교집단으로, 그렇듯 마치 사회적인 실험이라도 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의 경험을 지불하는 대가로 독특한 방식의 체험들을 만들어내는 곳으로 달려가고 그 체험이 곧바로 실현되지 않는 한, 그것은 허공에 뜬 채로 남겨질 뿐이다. 오늘날 누가 과연 자신의 분노가 자신의 분노라고 말할 수 있을까? (1권 267면)

 

오늘날 누가 자신의 분노가 자신의 분노라고 말할 수 있을까? 바로 이것이지요. 우리의 분노는 혹시 헐리우드 영화의 분노가 아닐까, 어제 본 막장드라마의 분노가 아닐까, 또는 스릴러 소설에서의 분노가 아닐까. ‘우리의 체험은 이미 체험을 상실한 체험이다.’ 이것이 바로 특성 없는 남자에서 무질이 그토록 반대하고자 했던 우리 시대의 특성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진단해봅니다.

 

[살인의 추억]

그렇다면 무질은 엔지니어의 세계, 수학자의 세계로 대변되는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정확성의 세계를 그저 반대만 한 것일까요? 제가 보기에 이 작품을 오해하기 쉬운 지점이 바로 여기인 것 같습니다. 이 소설이 단순히 정확성에 대한 반대라고 한다면 그건 정말 정확하지 못한 낭만적인 판단일 수 있습니다. 오히려 무질이 안타까워한 것은 단순히 정확성이 나쁘다는 게 아니라, 정확성이 모자란다는 것이 아닐까요? 바로 이 소설에서 모오스브루거 살인사건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정확성’ 때문입니다.

 

모오스브루거는 한 어린 여자를 아주 끔찍하게 살해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의 정신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이죠. 그는 “다람쥐는 여우가 될 수도, 토끼나 고양이가 될 수도 있다”고 합니다. 또한 “14 더하기 14는 28에서 40쯤 된다”고 대답하죠. 상황이 이렇다보니 이 사건에는 여러가지 전문가들이 개입합니다. 일단 언론은 센세이셔널한 측면에 주목하죠. 몇군데를 어떻게 찔렀다는 상세한 묘사들, 또는 사건과 전혀 상관없는 범인의 이력들. 이건 요즘 언론에서도 흔한 설정이지요. 그런데 언론이 애써 외면하는 것은 살해자의 인간적인 면모들이죠. 아무래도 살인하고는 안 어울릴 것 같은 고결한 품격 같은 건 절대 기사로 쓸 수 없잖아요. 하지만 그 반대라면 어떤가요? 아주 추악하다든가 내국인이 아니라든가 아이들을 학대했다든가 동영상을 자주 봤다든가 이런 것은 낱낱이 기사거리가 됩니다. 이런 측면 때문에 언론은 늘 부족한 인식에 머물 수밖에 없다는 게 무질의 비판 아닐까 싶어요. 그리고 의학이 접근하죠. 하지만 이런 살인사건에서 의학은 주인공이 되지 못합니다. 이미 파워에서 법에 한참 밀리는 것이죠. 그저 법의 눈치나 살피다가 자신들의 연구거리나 챙겨가고는 잊어버리는 그런 상황입니다.

 

마지막으로 법이 나섭니다. 법에게는 아주 중요한 순간입니다. 살인의 정도, 범인의 상태 등을 파악해 아주 정확한 판결을 내려야 하는 것이죠. 그런데 이 판결의 정확성이란 게 영 믿음직스럽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누군가 반은 정상이고 반은 비정상이라고 한다면, 법은 그가 적어도 반은 도덕적일 것이므로 그의 행위는 도덕적 판단을 거쳐 나왔다고 판단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행위에 대한 법적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죠. 여기에 대해 무질은 재미있는 비유를 들고 있는데 한번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나 법학은 이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법학은 말하길 인간은 법을 지킬 수 있든지 아니면 그럴 수 없든지 둘 중의 하나다. 이 두 상태 이외의 제3의, 혹은 중간의 것은 법학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 능력에 따라 사람은 처벌받을 수 있고, 이렇게 처벌받을 수 있다는 가능성이 사람을 법적인 인간으로 만들며, 그런 법적인 인간으로서 사람은 법이 주는 초인간적인 자비를 누리는 것이다. 누구든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는 기병(騎兵)을 떠올려야 한다. 어떤 말이 올라타려 할 때마다 미쳐 날뛴다면 그 말에게는 가장 부드러운 붕대, 최고의 기수, 엄선된 사료, 절제된 조련 같은 아주 각별한 보살핌이 제공된다. 그러나 기병이 뭔가 죄를 지었다 치면 벼룩이 들끓는 우리에 처넣고 수갑을 채우며 먹을것도 주지 않는다. 이런 차이가 생기는 이유는 말은 단지 동물적인 체험의 세계에 머무는 반면, 기병은 논리적이고 도덕적인 세계에 속하기 때문이다. (2권 110면)

 

말이 미치면 각별한 보살핌을 받지만 기병이 그러면 감옥에 갇히고 맙니다. 이건 뭔가 말이 되지 않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법적 선이라는 것은 그저 상상의 정확성에 불과합니다. 실제로 정확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저 정확하다고 상상한다는 말일 것입니다. 우리 인류는 정확성을 추구해왔습니다. 거의 모든 분야에서 그러하죠. 하지만 완벽에 이르지는 못했습니다. 무질은 바로 이런 점을 지적합니다. 정확성이 나쁜 것이 아니지만, 늘 모자란 상태에 머물러왔다는 것이죠.

 

[알몸졸업식]

그렇다면 이렇듯 우리의 본질적인 체험을 빼앗기고, 그럼에도 여전히 부정확한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혹시 무질이 그런 문제에 어떤 단서라도 남겨두지 않았을까 하는 점을 결론삼아 이야기해보겠습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미완성으로 끝난 소설에 제가 어떤 결론을 제시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저 중간 결산 정도가 되더라도 한번 정리해보자면, 무질은 굉장히 과감한 작가였고 그래서 우리 인간이 뭔가 본질적이고 인간적인 체험들을 회복해야 한다는 아주 새로운 도덕적 입장을 가졌던 것이 아닌가 짐작해봅니다. 무질은 그것을 ‘다른 도덕’이라고도 했고, ‘가능성 감각’라고도 했으며, ‘에세이즘’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현재 우리의 문제 중 하나를 끄집어내자면 바로 여러분이 보고 계신 저 <알몸졸업식> 같은 것입니다. 우리 때는 졸업식 때 밀가루 정도를 뿌렸지요? 그런데 요즘 아이들은 교복을 찢고 그 위에 달걀을 던지고 겨자를 치고, 거기다가 밀가루를 뿌린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졸업식이 열리자 언론에서 아주 센세이셔널하게 보도를 했고(청소년 관련 보도는 거의 센세이셔널하지 않습니까? 저 한심한 놈들 언제 정신차리나. 이런 말이 나와야 직성이 풀리죠) 그것을 이어받아 국가에서 강력하게 개입했습니다. 그러니까 졸업식이 열리는 전 중고등학교에 순찰차와 경찰을 보낸 것이죠.

 

과연 알몸졸업식을 한 학생들이 이상한 걸까요 아니면 여기에 경찰을 보낸 국가가 이상한 걸까요? 저는 학생들의 알몸졸업식에 법적 선이라는 잣대를 들이대는 행위가 말이 미쳐 날뛰면 자상하게 보호해주면서 기병이 죄를 지으면 감옥에 가두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비이성적이고 폭력적인 나머지 거의 미친 것이나 다름없는 입시제도를 가진 나라에서 학생들이 극단적인 선택 대신 알몸졸업식을 했다는 것은 정말 이들이 뭔가 ‘다른 도덕’에 대한 창조적인 에너지를 잃지 않고 있다는 희망을 보여주지 않습니까? 저는 무질의 소설에서 이런 다른 체험을 향한 열망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를 비인간적인 것으로 만드는 무수한 기제들에도 불구하고, 그 기제들에 대항하여 어떤 체험을 갈망한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것 같습니다. 그것이 무슨 도덕적 모험이나 정신적 파탄을 겪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저렇게 알몸졸업식을 하는 아이들을 기성세대가 이해해주는 것, 그런 전복적 행위를 비난하지 않고 함께 고민해주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무질이 말하는 다른 도덕의 세계에 참여하는 것이 아닐까 저는 생각해봅니다. 나아가 우리 스스로 좀더 정확하고 인간적인 체험을 향한 영혼의 모험에 나설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지요. 지금까지 부족하고 두서없는 저의 말을 들어주신 분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Comment

  1. 동화 2014.10.23 09:23 신고

    안녕하세요- '특성없는 남자' 이 책의 표지 제목 폰트가 뭔지 궁금합니다.
    알려주실 수 있으신가요?
    수고하세요- 즐거운 하루되시구요.

    • 답변이 늦어져 죄송합니다.
      저희가 외주 디자이너 시스템이라, 서체는
      디자이너가 관리합니다. 제가 알기로
      <소금체>의 일종으로 알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경향신문> 4월 27일자

소설인가, 사유인가…

로베르트 무질의 20세기 모더니즘 걸작

 

로베르트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는 20세기 모더니즘의 걸작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소설은 서사보다는 작가의 사유가 주를 이루고 있다.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에서 태어난 무질은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인 1919년 <특성 없는 남자>의 집필에 들어간다. 당시 카카니엔(Kakanien·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별칭)의 수도 빈은, 그곳에서 활동하던 철학·사상·예술가들의 면면-프로이트, 비트겐슈타인, 에른스트 마흐, 클림트, 실레, 쇤베르크 등등-만큼이나 다양하고 풍성한 사상과 이데올로기, 예술이 모여 들끓고 있었다.

 

무질은 소설에서 ‘특성 없는 남자’ 울리히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당대를 풍미한 사상들-과학철학, 심리학, 군국주의, 민족주의, 사회주의 등등-에 대한 끊임없는 성찰을 보여준다. 그런 까닭에 밀란 쿤데라는 <특성 없는 남자>를 ‘소설 역사상 사유가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 작품’, 다시 말해 ‘사유(思惟)소설의 정수’로 꼽았다.

 

울리히가 밤길에서 맞닥뜨린 건장한 세 남자와 싸움을 벌인다. 그는 세 남자가 부랑아가 아니라 ‘자기와 같은 평범한 시민이며, 분명히 그들에게 계속 밀착돼온 억압에서 해방되어’ 적대감을 드러내 보인 것이라고 믿는다. ‘사실 오늘날 무수한 다수는 또 다른 무수한 다수를 향해 지속적으로 적대적인 입장에 있다. 자기자신의 범위 밖에서 사는 사람들을 뿌리 깊이 불신하는 것은 오늘날 문화의 한 본질이 된 것이다. 그래서 독일인이 유대인을, 또한 축구 선수가 피아노 연주자를 이해하지 못한 채 서로를 가치없는 인간으로 여기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것은 사물이 단지 경계를 통해 존재한다는 것, 그래서 결국 자신의 주변에 대한 어느 정도의 적대적 행위를 통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43쪽)

 

무질은 자신의 고국인 카카니엔을 설명하면서도 군국주의와 제국주의에 대한 사유를 멈추지 않는다. ‘여기저기서 남아프리카나 동아시아를 향해 배들이 출항했지만, 그렇게 자주는 아니었다. 세계경제도, 세계권력을 향한 열망도 없었다. … 군비를 지출했지만 단지 열강들 중 가장 약한 나라에 머물지 않을 정도만을 유지했다. … 단 하나의 잘못된 점이 있다면, 그들이 고귀한 신분이나 사회적 지위에 의해 뒷받침받지 못한 천재나 개개인들의 창조적인 동기들을 건방진 행동이나 불손함으로 간주했다는 점이다. … 카카니엔에선 천재가 무뢰한이 되는 경우는 있어도, 다른 곳에서처럼 무뢰한이 천재로 둔갑하지는 않았다.’(55쪽)

 

<특성 없는 남자>는 1, 2권이 발표된 뒤 정권을 잡은 나치에 의해 판매금지가 된다. 무질은 스위스로 이주해 소설의 마지막 마침표를 찍으려 애쓰다 1942년 결국 미완성인 <특성 없는 남자>를 두고 세상을 떠난다. 1999년 독일의 신문 ‘디 차이트’는 20세기 가장 중요한 독일어 소설 1위로 <특성 없는 남자>를 꼽았다. <특성 없는 남자>는 줄거리가 울리히와 등장인물들의 사유를 중심으로 이뤄졌기 때문에 사건의 빠른 전개를 좋아하는 독자에게는 한없이 지루한 여정일 수 있겠다. 그러나 무질의 광대무변한 사유를 따라 독자 스스로의 사유세계로 침잠해보는 것도 그 나름의 책 읽는 맛이 아닐까.

 

윤성노 기자 ysn04@kyunghyang.com

 

<동아일보> 4월 27일자

소설로 그려낸 19세기말 유럽의 사상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와 더불어 20세기 모더니즘 소설의 3대 걸작으로 꼽히는 작품. 앞서 국내에서 두 차례 번역 출간됐지만 절판됐다. 오스트리아 작가인 무질은 수학자인 주인공 울리히를 앞세워 19세기 말 유럽에서 활발했던 과학철학 심리학 생철학 군국주의 민족주의 사회주의에 대한 끊임없는 사유와 성찰을 소설 형식으로 담았다. 무질은 이런 독특한 전개방식을 ‘에세이즘’이라 칭하며 “인간의 내적 삶이 결정적인 사유를 통해 추출해낸 단 하나의 변할 수 없는 형식”이라고 설명했다.

 

<한겨레> 4월 29일자

특성 없는 남자 1, 2

 

오스트리아 작가 로베르트 무질(1880~1942)이 1930년과 1932년에 걸쳐 발표했으나 나치 정권에 의해 판매 금지되었던 소설의 1차분. 당대의 학문과 사상을 상대로 끊임없는 성찰을 펼치면서, ‘평행운동’이라는 애국주의 운동을 통해 파시즘의 대두를 예견한다. 안병률 옮김/북인더갭·각 권 1만2500원.

 

<서울경제> 4월 27일자

특성 없는 남자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그리고 조이스의 ‘율리시즈’와 함께 20세기 모더니즘의 대표작으로 꼽히지만, 유독 우리나라에는 잘 알려지지 않는 저자의 대표작. 독일에서는 카프카와 토마스만을 제치고 차이트(Die Zeit)지 ‘20세기 가장 중요한 소설’ 1위로 선정된 바 있다. 다양한 학문과 사상을 다루는 ‘사유소설’이면서도, 당대의 인물과 사회적 조건을 생생하게 그려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전 2권, 각 1만2,500원.

 

<매일경제> 4월 27일자

20세기 모더니즘의 걸작으로 꼽히는 로베르트 무질의 대표작이 번역됐다. 다양한 학문과 사상을 다루는 이 소설은 당대의 인물과 사회적 조건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평행운동`이라는 애국주의운동을 소재로 유럽의 정신이 빠진 함정을 파헤친다.

 

<국제신문> 4월 27일자

99명의 독일 지성이 뽑은 20세기 가장 위대한 독일어 소설, 세계문명사에 결정적 영향을 준 책 100권 등에 선정된 명작. 유럽 자유주의의 몰락과 파시즘의 대두를 예견한 문제작이다.

 

<연합뉴스> 4월 25일자

오스트리아 소설가 로베르트 무질(1880∼1942) 장편소설. 안병률 옮김.

울리히라는 인물을 내세워 당대의 학문과 사상을 총집결한다. 울리히와 주변인물을 통해 20세기 초의 사유를 담아내면서 이같은 사상의 집결이 어떻게 파시즘 같은 야만의 상태로 이어지는지 고찰한다.

먼저 펴낸 1∼2권을 나치가 판매금지한 뒤 무질은 소설을 완성하기 위해 스위스로 이주했지만 질병과 생활고를 견디지 못하고 숨을 거뒀다.

이번에 출간된 것은 1차분이다. 총 1천 쪽이 넘는 분량이 순차적으로 번역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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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목할 만한 방식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대서양 상공 위로 저기압이 걸쳐 있었다. 저기압은 러시아 상공의 고기압 쪽으로 움직이고 있었고 아직 이 고기압을 북쪽으로 밀어낼 낌새는 보이지 않았다. 등서선과 등온선은 서로를 지탱했다. 기온은 연중 평균. 가장 추운 달이나 가장 더운 달의 온도, 그리고 일정치 않게 변하는 월별 온도에 비해서 적당한 온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일출과 일몰, 월출과 월몰, 달과 금성, 토성의 띠, 그리고 다른 모든 중요한 현상들도 천문학 서적에 적혀 있는 그대로였다. 대기중 수증기는 최고의 장력을 유지했고, 습기는 아주 적었다. 좀 구식이기는 하지만 사실을 꽤나 잘 드러내주는 한마디 말로 하자면, 때는 년 8월의 어느 청명한 날이었다.

 

차들이 좁고 깊숙한 거리에서 밝은 광장의 평지로 달려나왔다. 보행자들의 검은 무리가 구름 같은 선을 이루었다. 속도가 만드는 힘찬 선이 차들의 부주의한 조급함을 가로지르는 곳에서 차들은 뒤엉켰고, 이내 빠르게 흐르다가, 잠시 동요하더니 다시 그들의 일반적인 흐름을 되찾았다. 수백 가지의 소리들이 서로 얽힌 소음들 사이로 섞이고, 거기서 하나의 고성(高聲)이 두드러져 가장자리까지 이어졌다가 다시 돌아왔으며, 찢어지는 듯한 소리가 명료하게 울렸다가 이내 사라져버렸다. 이 뭐라 표현하기 힘든 소리만 가지고도, 비록 이곳을 몇년간 떠나 있던 사람이라도 자신이 제국의 수도이자 국왕의 수도인 빈(Wien)에 와 있다는 것쯤은 눈을 감고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도시란, 사람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걷는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 눈을 뜬 채라면, 이러저러한 특징들을 찾아낼 필요도 없이, 거리의 움직임만 봐도 그곳이 어디인지 알아낼 것이다. 이것이 헛된 상상이라고 해도 문제될 것은 없다. 우리가 어디에 살고 있는지를 과대평가하는 습관은 목초지가 어디인지 알아내야 했던 유목시절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왜 인간은 파장을 이용해 붉은색을 백만분의 1밀리미터까지 정확히 묘사할 수 있으면서도 붉은 코에 대해선 그냥 붉다고 말하는 것으로 만족하며 그 코가 어떤 붉은색인지 궁금해하지 않는가? 여기에는 뭔가 중요한 점이 있다. 반면 왜 인간은 자신들이 거주하는 말도 못하게 복잡한 도시만큼은 그토록 정확하게 알고 싶어하는가? 그런 호기심은 더욱 중요한 것으로부터 우리를 떼어놓고 있는 것이다.

 

도시의 이름에 어떤 가치를 두어선 안된다. 다른 대도시들과 마찬가지로, 그 도시 또한 불규칙성, 변화, 돌발, 우왕좌왕, 사물들과 관심사들의 충돌, 잘 닦인 길과 그렇지 못한 길, 거대하게 규칙적인 박동, 모든 규칙들의 불일치와 혼란 같은 것들로 이루어져 있었고, 그것은 마치 건물과 법칙과 규칙과 역사적 전통의 소재들이 거품을 내며 끓고 있는 그릇 속 같았다. 그 속의 넓고 생기있는 거리를 걸어 내려가고 있는 두 사람은 당연히 이러한 생각을 하고 있지 않았다.

 

분명히 상층계급에 속했을 그들은, 세련된 옷차림과 행동, 대화방식을 가지고 있었고, 그들의 이니셜이 박힌 속옷을 입었으며, 이것은 그들의 적대적인 무의식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그들이 누구인지, 다시 말해 그들이 제국민이며 그 제국의 수도에 거주하는 사람들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아마 그들의 이름은 아른하임과 에르멜린다 투치였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그리 정확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투치 부인은 그의 남편과 8월엔 아우스제 해수욕장에 있을 것이고, 아른하임 박사도 아직은 콘스탄티노플에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누구인지는 아직 수수께끼인 것이다. 사람들은 아주 특이한 방식으로 이 수수께끼를 풀기도 하는데, 그 방식이란 만약 그들이 50걸음을 걸은 후에도 어디에서 서로를 만났는지 생각나지 않으면 서로 잊어버리는 방식이다.

 

이 두 사람은 그들 앞에 벌어진 일 때문에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방금 전 무언가 선에서, 그 고요하고 긴 움직임에서 튕겨나갔다. 급회전을 하며 길가로 미끄러진 그것은 큰 트럭으로 곁길에 바퀴 하나를 걸친 채 전복돼 있었다. 마치 벌통 구멍으로 모여드는 벌처럼, 사람들이 한가운데를 조금 남겨둔 채로 그 작은 원 주위로 모여들었다. 차에서 나온 운전사가 포장지처럼 창백해진 채로 거친 동작을 해 보이며 사고를 설명하고 있었다. 새로 모여드는 사람들의 시선은 처음엔 그를 향하다가, 그 구멍 한가운데에서 마치 커브 길의 곡면을 베고 죽은 듯 누워 있는 사람에게로 향했다. 누구나 인정하듯이 그가 그런 유감스런 일을 당하게 된 것은 그 자신의 부주의 탓이었다. 사람들은 교대로 그의 곁에 무릎을 꿇고 그를 도와보려 했다. 어떤 사람은 그의 상의를 펼쳤다 여몄다 해보았으며, 다른 사람들은 그를 일으켰다가 다시 뉘었다가를 반복하기도 했다. 그러나 실제로 구급차가 도착해 적절하고 적법한 조치를 취하기 전까지는 누구도 시간이 가기만을 바랄 뿐, 다른 행동을 하길 원치 않았다.

 

그 부인과 그녀의 동행인도 다가와 부상자의 머리와 구부러진 등을 보았다. 그러더니 부인은 물러서서 망설였다. 부인은 심장과 명치에서 뭔가 불쾌한 것을 느꼈고 그 느낌을 동정심으로 여겼다. 그러나 그것은 뭐라고 결론지을 수 없는, 사람을 꼼짝 못하게 하는 느낌일 뿐이었다.

 

잠시 침묵하고 있던 동행인이 입을 열었다. “이렇게 무거운 트럭은 제동거리가 무척 길게 마련이죠.” 부인은 이 사려깊은 생각에 속이 조금 편안해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이 말을 많이 들어봤지만 제동거리가 사실 뭔지도 몰랐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단지 이 말 덕분에 무시무시한 사고가 어떤 규칙에, 또한 그녀가 더이상 직접적으로 간섭하지 않아도 되는 기술적인 문제에 포함되는 것으로 충분했다.

 

사람들은 구급차가 경적을 울리는 소리를 들었고, 그에게 달려온 구조대의 신속함은 모든 구경꾼들을 충분히 만족시켰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회적 기능인가. 구조대는 부상자를 들것에 실었고, 그를 들것과 함께 차에 밀어넣었다. 단일한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이 부상자를 위해 일했고, 그 구급차 안은 누가 보더라도 아주 깨끗하고 잘 정돈돼 있어, 꼭 커다란 병실처럼 보였을 것이다. 사람들은 아주 적법하고 규칙에 딱 맞는 사건이 일어난 것 같아 곧 안정된 느낌을 받았다. “통계에 의하면,” 그 신사는 말했다. “매년 미국에선 자동차 사고로 19만 명이 죽고 45만 명이 다친다고 하죠.”

 

“그가 죽었을까요?” 그와 동행한 부인이 물었고, 그녀는 아직도 뭔가 뜻밖의 일을 경험했다는, 검증되지 않은 느낌에 휩싸여 있었다.

 

“아마 살았을 거요.” 그가 대답했다. “사람들이 그를 차에 실었을 때, 꼭 살아있는 것처럼 보였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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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가장 중요한 독일어 소설 1위!

현대 지성들은 카프카 대신 로베르트 무질을 선택했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조이스의 『율리시즈』와 함께 20세기 모더니즘의 3대 걸작 중 하나로 꼽히는 로베르트 무질의 소설 『특성 없는 남자』가 번역돼 나왔다. 이 소설은 세계 문명사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책이자 지난 한세기 가장 기억에 남는 책으로 꼽힌 현대의 고전임에도 유독 우리나라에서는 그 명성에 값하는 대우를 받지 못했다. 20세기의 가장 독특한 ‘사유 소설’로서 밀란 쿤데라와 존 쿠체 같은 현대작가들에게 지속적인 영향력을 끼친 『특성 없는 남자』가 이번 번역으로 한국 독자들에게도 뜻깊은 작품으로 다가서길 기대한다.

 

세계 문명사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책

 

 

지난 1999년 독일의 『차이트』(Die Zeit)지에는 놀라운 발표가 실렸다. 독일의 대표적 지성 99명에게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독일어 소설을 설문한 결과, 카프카의 『소송』(2위), 토마스 만의 『마의 산』(3위)을 제치고 로베르트 무질의 소설 『특성 없는 남자』가 1위를 차지한 것이다. 이 소설은 같은해 『르 몽드』(Le Monde)가 실시한 지난 세기 ‘가장 기억에 남는 책’ 100권에도 이름을 올렸으며, 2002년 노르웨이 북클럽이 전세계 100명의 작가에게 설문해 발표한 ‘세계 문명사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책’ 100권에도 포함됐다. 특히 2002년 설문은 인류 역사를 통틀어 가장 좋은 책을 뽑은 것으로 무질과 동시대인으로는 조이스, 프루스트, 로렌스, 톨스토이 같은 거장들만 그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이처럼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작품이지만 생전의 로베르트 무질은 그 명성을 거의 누려보지 못했다. 오히려 그의 인생은 안타까울 정도의 궁핍과 불운으로 점철되었다. 예민한 성격의 어머니와 불화를 겪으며 일찍 집을 나와 기숙학교를 전전했고, 역경을 딛고 『특성 없는 남자』를 집필해 1, 2권을 발표했지만 때마침 정권을 잡은 나치에 의해 판매가 금지되었다. 무질은 이 소설을 완성하기 위해 스위스로 이주하지만 질병과 생활고를 견디지 못하고 1942년 결국 미완성인 채로 제네바에서 숨을 거두었다.

 

소설은 사유가 될 수 없는가?

 

그렇다면 작가 생전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미완성 작품 『특성 없는 남자』가 왜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을까? 많은 전문가들은 이 소설만이 가진 ‘사유 소설’로서의 독특한 성격을 그 첫번째 이유로 꼽는다. 무질이 작품활동을 하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 빈(Wien)은 당시 유행하는 모든 사상의 집합소였다. 프로이트가 이 도시에서 활동했으며 언어철학자 비트겐슈타인, 무질의 스승이자 과학철학자인 에른스트 마흐, 클림트와 실레 같은 빈분리파 화가들, 쇤베르크를 필두로 한 음악가들까지 이 도시는 현대의 사상과 문화로 끓어오르는 용광로 같았고, 무질은 이런 사상의 흐름을 작품에 고스란히 투영시켰다. 무질의 소설에는 당대의 학문과 사상, 즉 심리학과 과학철학, 생철학을 비롯해 군국주의, 민족주의, 사회주의, 반유대주의에 대한 성찰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특히 주인공 울리히는 이 모든 사상들에 맞서는 ‘사유의 영웅’이라 할 만한데 이는 전시대의 주인공을 특징짓는 ‘행위의 영웅’에 비하면 매우 낯설고 독특한 캐릭터였다. 열렬한 무질 지지자인 밀란 쿤데라의 표현에 의하면 무질은 “소설가인 동시에 위대한 사상가”였으며 “어떤 철학이나 학문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소설을 쓴 작가였다.

 

중요한 것은 다양한 학문과 사상을 다루는 이 소설이 그저 박식함에 머문 것이 아니라 당대의 인물과 사회적 조건을 생생하게 그려냈다는 점에 있다. 사실 무질이 혐오해 마지않았던 것은 “학자의 연구실에서 떨어져나온 부스러기 같은 논문들”(2부 62장)이었다. 무질은 학문적 사고가 아니라 인간의 내적 삶에서 나온 ‘결정적 사유’를 자신의 소설적 무기로 삼았다. 또한 무질 스스로 ‘에세이즘’이라고 부른 자기만의 독창적 사유 속에는 이미 모더니즘 시대를 뛰어넘어 후기자본주의 시대의 사상가들에 필적하는 사상적 깊이가 담겨 있다. 가령, 모오스브루거라는 살인범을 그려내면서 법과 제도의 규율적 측면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장면은 푸코(M. Foucault)의 반(反)현대적 사유를, 또한 ‘현실 인간’에 대립되는 ‘가능성 인간’에의 추구, 그리고 ‘다른 도덕’을 향한 울리히의 실존적 모험에서는 들뢰즈(G. Deleuze)의 탈주하는 인간을 읽어낼 수 있다.

 

정신과 영혼의 신음

 

남아공 출신 노벨문학상 수상자이자 무질에 대한 평론을 쓴 바 있는 존 쿠체(John Coetzee)는 『특성 없는 남자』가 유럽 자유주의의 몰락을 파헤치면서 파시즘의 대두를 예견한 소설이라고 평했다. 다시 말해 이 작품은 그렇게 많은 사상과 문화에도 불구하고 왜 유럽이 야만 상태로 빠져들었는지를 말해준다는 것이다. 특히 무질은 이 소설에서 ‘평행운동’이라는 애국주의운동을 소재로 유럽의 정신과 영혼이 빠진 함정을 파헤친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황제 70주년을 기념해 주변국에 평화의 의지를 알리고 물질의 세계에 맞서 영혼을 구하자는 취지와는 달리, 소설 속 평행운동은 점점 지식인집단의 유령 같은 자기주장의 세계로 빠져든다. 디오티마가 주장하는 ‘위대한 오스트리아 문화’는 아무런 실제적인 대안이 없는 영혼회복운동이 돼버리며, 라인스도르프 백작의 민주적 군주국의 꿈은 관료세계의 서류더미에 묻혀버린다. 결국 남는 것은 자본과 문화를 결합하고자 하는 자유주의적 욕망과 이웃 프로이센을 향한 군사적 적대감이었으며, 운동 이면의 이러한 욕망들은 시간이 갈수록 전쟁을 향한 의지로 뒤바뀐다. 그러나 주인공 울리히에게 이 모든 영혼과 정신의 움직임은 그저 ‘불충분한 근거의 원리’에서 비롯되어 끊임없이 소비되는 ‘현대적 전율’에 불과하다. 울리히의 사유 가운데 무질은 현대세계의 ‘위대한 이상’이 역사의 진행 속에서 어떻게 전쟁과 파시즘 같은 야만상태로 빠져들어가는지를 냉철한 시각으로 관찰한다.

이번에 출간된 『특성 없는 남자』 1, 2권은 1930년 베를린 로볼트사에서 출간된 소설 1권의 83장까지를 번역한 1차분이다. 옮긴이는 1천여페이지에 이르는 생전의 출간분을 앞으로 순차적으로 출간할 계획이라며 “유럽의 짧은 자유주의 이후에 발생한 파시즘을 예견한 이 소설이 신자유주의 이후의 암울한 시대를 헤쳐나가는 우리 독자들에게 뜻깊은 작품으로 다가가길 바란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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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특성업는남자 1권을 사서 읽고있는 독자입니다.
    오타를 발견하여 이렇게 댓글을 남기게 됩니다. 1권의 94페이지 6째줄에 보시면,
    '무엇이든 할 있다는 듯한'이라고 나와있습니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듯한'아닌가요?
    그 전 페이지에서도 오타를 본것 같았으나 지나쳤는데, 또 오타가 나오니 가만히있을 수 없어서 이렇게 글 남깁니다.
    많은 페이지로 이루어진 번역본에서 오타없이 나온다는게 쉬운일이 아니지만, 독자를 생각한다면 더욱 완벽하게 옮겨 주시기를 바랍니다

  2. 저희 책에 관심을 가지고 읽어주시고 오자를 가려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교정을 하면서 여러 차례 읽고 오류를 줄이려고 노력한다고 했는데
    이렇게 오타가 발생한 점 사과드립니다.
    2쇄 때는 반드시 수정할 것을 약속드리고
    앞으로 더욱 정확한 책을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BlogIcon 장경미 2014.07.08 16:50 신고

      208페이지에도 오타가있네요;;;휴

    • 장기 출장으로 자리를 비워
      답변이 많이 늦어져서 죄송합니다.
      확인해보니 208면 아래서 다섯째줄
      <일요이라서 그랬나요>는
      <일요일이라서 그랬나요>가 맞습니다.
      2쇄 때는 반드시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3. 표툐쿄 2014.07.03 20:21 신고

    안녕하세요. 혹시 특성없는 남자 3권은 언제쯤 출간예정인지 알 수 있을까요?

    • 장기 출장으로 자리를 비워
      답변이 많이 늦어졌습니다. 죄송합니다.
      3권은 역자들이 애쓰고 있으나 여러 사정으로
      번역이 좀 늦어지고 있습니다. 이점 양해해주시고
      내년에는 선보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4. 길가다 2016.04.11 23:35 신고

    특성없는남자 2권 다 읽었는데...3권의 언제 나오나요...위글이 1년9개월이 지났는데 아직 인가요..대충 출시일이라도...

  5. 안녕하세요. 1, 2권을 번역한 안병률입니다.
    뒤늦게 답변을 드리게 돼 죄송합니다.
    실은 3권부터는 다른 한 분과 번역을 나눠서 진행하고 있었는데
    그분이 약속한 기일을 계속 미루시다가 최근에
    결국 번역을 포기하시는 바람에 저도 굉장히 당황스러웠습니다.
    결국 제가 혼자 번역을 이어가고는 있는데 다른
    생업이 있다보니 속도가 많이 느립니다. 가급적
    올해 안에 3권을 낼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어찌 됐든 약속을 지키지 못하여 대단히 죄송합니다.

  6. 설경 2017.04.30 20:59 신고

    3권 출간을 기다리는 독자입니다. 지난한 과정을 거쳐서 만나게 되는 책인 것 같습니다..번역자님 끈기에 감사드리며, 계속 기다리도록...

|옮긴이의 말|

 

영혼과 정신의 신음

안병률

 

1999년 독일 뮌헨 문학의 집과 베르텔스만 출판사는 99명의 저명한 독일 작가, 비평가, 학자들에게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독일어 소설을 선정해달라는 부탁을 한다. 33명씩 세 그룹으로 나뉜 전문가들이 각각 세 편의 소설을 선정한 결과는 다소 충격적이었다. 독일문학뿐 아니라 세계문학에서도 손꼽히는 작품인 프란츠 카프카의 『소송』, 토마스 만의 『마의 산』을 제치고 오스트리아 작가 로베르트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가 가장 많은 표를 얻어 1위를 차지한 것이다. 2002년 노르웨이 북클럽이 전세계 100명의 작가들에게 세계의 문명사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책 100권을 설문한 결과를 발표했는데 여기에도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가 선정되었다. 무질과 동시대를 살았던 작가들 중에는 제임스 조이스, 버지니아 울프, DH 로렌스, 마르셀 프루스트, 카프카, 토마스 만, 루쉰, 톨스토이 같은 대문호들만 그 명단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처럼 로베르트 무질이 20세기 세계문학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특히 『특성 없는 남자』는 조이스의 『율리시즈』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함께 20세기 현대문학의 걸작으로 일컬어진다. 그러나 무질은 생전에 이러한 명성을 한번도 누려보지 못했다. 오히려 그의 생애는 안타까울 정도의 궁핍과 불운으로 점철된 것이었다. 그런 불행은 이미 태어나기 전부터 예정된 것인지도 몰랐다. 그가 태어나기 4년 전 단 하나의 누이가 될 뻔한 엘자(Elsa)가 한살도 못 돼 사망한다. 이 사건은 무질에게 깊은 정신적 상처가 되어 평생을 따라다녔으며 여러 작품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가정사의 불행은 그것에 그치지 않았다. 무질의 어머니는 매우 복잡하고 예민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게다가 아버지의 묵인하에 다른 남자와 부적절한 관계를 평생 유지했는데 이는 무질의 유년과 청년기를 지배한 또하나의 깊은 그늘이 되었다.

 

 

매우 역설적이지만 무질의 생애에 닥친 최대의 불운은 『특성 없는 남자』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첫 소설 『생도 퇴를레스의 혼란』을 발표할 때만 해도 그는 평단의 주목을 받는 유망한 젊은 작가였다. 고등군사학교 기숙사 생활의 체험을 소재로 삼은 이 소설에서 무질은 당시로서는 드문 소재인 동성애를 다룸으로써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는 이후 소설을 집필하면서 베를린대학에서 에른스트 마흐(Ernst Mach)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몇차례 교수직을 제의받는다. 그러나 교수직을 거절하고 1차세계대전 직후인 1919년부터 『특성 없는 남자』의 집필을 시작해 죽을 때까지 이 미완성 대작에 매달린다. 1930년 베를린 로볼트 출판사에서 1권(1·2부, 1~123장), 1932년 2권(3부, 1~38장)이 연이어 출간되었고 언론과 평단의 뜨거운 반응을 이끌어냈지만 이번에는 시대가 발목을 잡았다. 때마침 정권을 잡은 나치가 그의 작품을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판매금지시킨 것이다. 그나마 평단에서 나오던 반응마저 시들해졌고 그의 작품은 대중에게 잊혀져갔다. 이후 무질은 급격한 경제적 어려움에 빠졌고 나치를 피해 스위스로 거처를 옮긴 후에도 소설을 완성하지 못하고 결국 1942년 뇌졸중으로 제네바에서 숨을 거둔다. 『특성 없는 남자』가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 생전의 유고를 수합한 전집이 편집자 아돌프 프리제(Adolf Frisé)에 의해 출간되면서부터였고, 이후 세계 각국어로 번역되면서 세계문학의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무질의 유고가 워낙 방대하기 때문에 현재까지도 오직 디지털 상태로만 그 전부가 정리돼 있다고 한다.

 

사유와 소설

 

무질은 오스트리아 작가지만, 그가 태어날 당시 소속된 나라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1867~1918)이었다. 이 나라는 ‘카카니엔’(Kakanien)이라는 이상한 이름으로 불렸다. 『특성 없는 남자』를 이해하는 데 카카니엔은 각별한 의미를 지니기 때문에 잠깐 짚고 넘어가기로 한다. 무질이 이 소설 도입부(8장)에서 언급하듯이 카카니엔에는 ‘황제-왕실의’(kaiserlich-königlich) 또는 ‘황제의 그리고 왕실의’(kaiserlich und königlich)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독일어에서 k는 ‘카’로 발음되는데 말하자면 이 나라는 두개의 k(카)로 돼 있어 카카니엔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이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독특한 역사 때문인데 이 제국은 오스트리아 황제와 헝가리 귀족이 타협한 결과 오스트리아 황제가 헝가리의 국왕을 겸임했던 것이다. 흔히 이 제국이 이중제국이라고 불리는 것은 바로 이런 역사적 배경 때문이다. 그러니까 『특성 없는 남자』는 단순히 오스트리아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 아니라, 헝가리와 체코, 세르비아, 보스니아 등지를 아우르는 중부유럽의 거대한 제국이 1차세계대전으로 몰락하기 직전의 마지막 몇년을 그린 소설인 것이다.

 

실로 이 제국은 다양한 사상과 이데올로기로 들끓는 용광로 같았다. 특히 소설의 주무대인 제국의 수도 빈(Wien)은 봉건적 귀족주의와 시민계급의 자유주의, 한창 대두되던 사회주의와 민족주의, 독일식 군국주의와 반유대주의가 도시 전체를 감싼 사상의 집합소와 같은 곳이었다. 또한 이 수도를 중심으로 타오른 학문과 문학예술의 불길은 세계적인 영향력을 보여주었다. 우선 맑스와 쌍벽을 이루는 현대사상가 프로이트가 빈에서 활동했으며 언어철학자 비트겐슈타인, 과학철학자 에른스트 마흐, 클림트와 실레 같은 화가들, 쇤베르크를 필두로 한 음악가들, 마르틴 부버와 같은 신비주의자들까지 이 도시는 당대 최고의 지성인과 예술인들을 배출한 장소이기도 했다. 이른바 세기의 천재들이 모인 도시 한가운데 바로 무질이 있었고 사방에서 터져나오는 실험적이고 현대적인 시도들은 무질의 문학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특성 없는 남자』를 말할 때 가장 먼저 언급해야 마땅한 ‘사유(思惟) 소설’이라는 특징 역시 이러한 빈의 들끓는 사상적 풍경과 어느 정도의 연관성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특징은 그저 사상에 대한 소설의 대응이 아니라, 철저하게 의도된 하나의 실험적 시도로 보아야 하다. 무질의 소설에는 당대의 사유들, 즉 과학철학과 심리학, 생철학, 군국주의, 민족주의, 사회주의, 반유대주의에 대한 성찰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특히 주인공 울리히는 이 모든 사상들에 맞서는 ‘사유의 영웅’이라 할 만한데, 이는 전시대의 주인공들을 특징짓는 ‘행위의 영웅’에 비하면 매우 낯설고 독특한 캐릭터였다. 무질의 지지자이자 체코 태생의 현대작가 밀란 쿤데라(Milan Kundera)는 『특성 없는 남자』의 새로운 시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소설의 역사에서 사유가 그렇게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 작품은 없었다. 무질은 소설가인 동시에 위대한 사상가였다. 『특성 없는 남자』에서 그의 사유는 당대의 인물, 사회적 조건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그의 사유는 여러 학문을 답사해 나온 그런 답답한 지식이 아니라, 현실의 실존적 측면에 집중한 결과였다. 한마디로 독특한 소설적 사유였던 것이다.( 「나의 20세기 책」, 『차이트』 1999년 1월 21일자)

 

여러 학문과 사상을 다루고 있는 이 소설이 그저 박식함에 그쳤다면 아마 이렇게까지 세계적인 명성을 얻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런 명성은 무질이 어떤 사상이든 그것을 당시의 인물과 그들이 처한 사회적 조건 속에서 매우 생생하게 그려낸 덕분이었다. 이런 소설적 특징을 일컬어 무질 스스로는 ‘에세이즘’(Essayismus)이라고 불렀는데 여기서 에세이의 참된 의미는 “학자의 연구실에서 떨어져나온 부스러기 같은 논문과 논설들”이 아니라 “인간의 내적 삶이 결정적인 사유를 통해 추론해낸 단 하나의 변할 수 없는 형식”(2부 62장)이다. 무질의 작품 도처에서 우리는 이런 ‘결정적 사유’의 흔적을 발견한다. 가령 역사에 대한 다음과 같은 사유를 보자.

 

우리는 이런저런 사건이 역사에서 이미 자리를 잡았다거나 앞으로 일어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진다. 그러나 이런 사건이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는 확신하지 못한다. (…) 사람들은 마치 신문이 그렇듯이 일어난 일을 그때마다 적어두거나, 그 일이 자신의 직업이나 재산 문제에 관련된다는 확신이 없으면 역사에 대해 뭐라고 주장할 수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은퇴까지는 얼마의 시간이 남았는지, 어느 때가 되면 얼마를 벌고 얼마를 쓰는지 같은 것이 더없이 중요한데다 전쟁조차도 그런 맥락 속에서야 기념할 만한 사건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2부 38장)

 

 

무질의 사유가 놀라운 것은, 그것이 학술논문의 엄정함을 간직해서가 아니라 삶 속의 매순간에서 현대사회의 특징을 날카롭게 간파하기 때문이다. 위의 인용은 현대세계의 추상적인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현대는 모든 것들을 빨아들여 개인과 집단의 실제 삶과 상관없는 무시무시한 추상체계로 바꿔놓는다. 가령 이제는 전쟁조차도 한 집단의 의지가 아니라, 증권시장의 그래프에서 더 큰 의미를 갖는다. 무질은 역사의 이런 추상적 진행을 ‘그렇고 그런 일이 벌어지다’(Seinesgleichen geschieht)라는 2부의 제목으로 압축했는데, 이는 어떤 사건도 구체적인 삶으로 체험하지 못하는 동시대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담고 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무질의 이런 사유가 이미 모더니즘 시대를 넘어서 후기자본주의 사상가들의 사유를 선취했다는 점이다. 인용된 부분은 아마도 기든스(A. Giddens) 같은 사회학자의 ‘추상체계’라는 개념과 잘 어울릴 것이다. 모오스브루거라는 살인범을 통해 법과 제도의 규율적 측면을 비판하고 광기의 인간적인 면모를 옹호한 무질의 사유는 푸코(M. Foucault)의 문제의식을 선취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현실 인간’에 대립되는 ‘가능성 인간’에 대한 추구, 그리고 ‘다른 도덕’을 향한 무질의 실존적 모험은 들뢰즈(G. Deleuze)의 ‘분열된 주체’와 ‘탈주를 향한 욕망’에 앞서 나온 것이었다.

 

영혼과 정신의 불완전성

 

현대소설사에서 『특성 없는 남자』가 차지하는 장르적 위치를 ‘에세이적 소설’, 즉 하나의 독창적인 ‘사유 소설’로 볼 수 있다면, 주제적 측면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영혼과 정신의 불완전성’이 될 것이다. 거대 제국 카카니엔의 시대적 운명은 두 방향으로 나아갔는데, 그 하나는 민족주의의 발호에 따른 1차세계대전이었고 다른 하나는 인종주의, 군국주의가 결합된 파시즘이었다. 1차세계대전은 카카니엔의 황태자 페르디난트가 세르비아 민족주의자에게 피살되면서 시작됐으며, 나치 총통 히틀러 역시 카카니엔 출신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왜 세계 지성과 문화의 집합소라는 제국의 수도 빈이 이러한 파국을 막지 못했던 것일까? 남아공 출신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존 쿠체(John Coetzee)는 『특성 없는 남자』가 유럽 자유주의의 몰락을 파헤치면서 파시즘의 대두를 예견했다고 평했다. 다시 말해 이 작품은 그렇게 많은 사상과 문화에도 불구하고 왜 유럽이 야만 상태로 빠져들었는지를 말해준다는 것이다. 파시즘에 관한 수많은 연구들과 구별되는 무질의 독특한 관점은 바로 ‘영혼과 정신의 불완전성’을 날카롭게 지적해낸 데 있다.

 

이 소설의 1, 2부의 핵심에는 ‘평행운동’이라는 애국주의운동이 자리잡고 있다. 카카니엔 황제 즉위 70주년을 기념하여 주변국에 평화의 의지를 알리자는 취지의 이 운동은 물질의 세계의 맞서 구질서를 회복하자는 영혼회복운동의 성격을 띠고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원래 취지는 사라지고 운동의 주위로 하나둘 모여든 엘리트들의 서로 다른 입장만이 남게 된다. 시민계급 출신이자 고위관료의 아내인 디오티마에게 평행운동은 ‘위대한 오스트리아의 문화’를 통해 물질문명의 나락으로 떨어진 세계에 영혼의 숨결을 불어넣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살롱에 모여든 다종다양한 사람들은 그저 전문가들일 뿐이었고, 현실세계에 대처할 아무런 구체적인 대안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평행운동의 창시자 라인스도르프 백작은 민중의 제안이 황제에게 전달되는 민주적이고 시민적인 군주국을 꿈꾼다. 그러나 그렇게 쏟아져나온 제안들은 자기집단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뿐이었으며, 결국 모든 제안들은 관료의 서류더미 속에서 방치되고 만다. 또한 그의 머릿속에는 언제나 프로이센에 대한 적대적 감정이 스며들어 있는데, 이는 언제라도 평행운동의 방향을 군국주의로 전환할 수 있는 폭탄 같은 것이었다. 세계역사에는 어떤 오류도 있을 수 없음을 주장하는 이성주의자이자 거대기업을 소유한 자유주의의 화신 아른하임은 또 어떠한가? 프로이센 출신인 그에게 평행운동은 분명히 어리석은 짓이지만, 그는 사유를 권력의 장에 끌어들이려는 야심을 품고 이 모임에 합류한다.

 

울리히에게는 이 모든 영혼과 정신의 움직임들은 그저 불완전한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비록 아름다운 영혼과 정신의 외양을 걸치긴 했으나 평행운동은 ‘불충분한 근거의 원리’에서 나온 것이며, 그래서 역사진행의 과정을 촉진시키는 촉매의 작용은 할지언정 전쟁이 될지 평화가 될지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울리히는 영혼과 정신이 모자란 것이 문제가 아니라, 과잉이 문제라는 점을 확실히 알고 있다. 또한 이러한 문제의식은 계몽주의를 거쳐 정신의 우월함을 주장했고 그것을 문명의 우위로 입증한 유럽인들에게는 하나의 충격으로 받아들여지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울리히는 당대의 정신이 처한 상황을 아래와 같이 웅변한다.

 

그러던 어느날 울리히는 그 희망을 포기하게 되었다. 그때는 이미 축구장이나 권투 링에서의 천재들이 이야기되기 시작했고, 단 하나의 하프 백이나 테니스 선수가 잘 보도되지도 않는 열명의 발명가나 테너, 작가들보다 더 나은 시절이 돼버렸다. 그 새로운 정신은 자기자신을 확실히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그때 울리히는 어디선가 ‘천재적인 경주마’라는 기사를 읽었는데, 그 말은 마치 익기도 전에 떨어져버린 과일 같다는 느낌을 주었다.(1부 13장)

 

 

무질이 보기에 바로 이런 것이 현대가 처한 상황이었다. 디오티마가 말끝마다 주장하는 ‘위대한 이상’은 새롭고 천재적인 사상이나 예술을 수용하고자 하지만, 이미 경주마 한마리가 ‘천재’로 대접받는 시대에 그런 사상과 예술은 끊임없이 ‘소비되는 전율’ 이상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정신의 불완전한 과잉상태는 모오스브루거라는 살인범을 처분하는 사회적 시스템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이 끔찍한 살인범은 우선 언론에 의해 집중적인 관심을 받다가 대중적인 관심이 흐려지면 전문가들의 손에 넘어간다. 그 결과 법학자들과 심리학자들이 이 살인범을 놓고 자기영역의 우수함을 다투지만 그 어느 영역도 모오스브루거의 내면에 자리한 광기의 의미와 범죄의 사회적 의미를 제대로 밝혀내지 못한다.

 

결국 이 딱딱한 전문가 사회에서 정신의 과잉은 오히려 대중의 의식을 무감각하게 만들고 말았다. 무질은 이들 전문가 집단을 향해 끊임없이 신랄한 야유를 퍼붓는다. 그 야유는 무엇보다 ‘특성’을 향한 비판이었다. 서구 역사에서 ‘신’을 대체한 이 특성은 ‘자아’ 또는 ‘주체’라는 이름으로 불려왔다. 그러나 우리는 이 ‘주체’들이 인류역사상 가장 야만적인 전쟁과 학살에 참여한 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모든 재앙은 무질이 살았던 카카니엔에서의 짧은 자유주의 시대가 끝나고 곧바로 찾아왔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신자유주의의 한복판을 지나 누구도 예상치 못할 역사의 길로 나아가고 있다. 그렇다면 미래는 또 어떤 재앙을 준비하고 있을까? 무질이 지금 살아서 백년 전이나 다름없이 대책없는 질주를 거듭하는 인류를 본다면 무슨 말을 할 것인가? 지금이야말로 정신과 영혼의 신음에 귀를 기울이고 좀더 정확한 영혼에 다가서려는 무질 같은 사람들, ‘특성 없는 사람’들이 필요한 시기가 아닐까?

 

20대 후반 대학원 시절 무질을 처음 접하고 그 소설적 깊이에 압도된 역자는 그때부터 공부삼아 이 소설을 조금씩 번역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인생의 기로에서 번역자나 연구자가 아니라 편집자라는 직업을 선택했기 때문에 번역은 계속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늦게나마 작은 결실을 맺게 돼 흥분되는 한편 독자들을 향한 두려움도 앞선다.

 

이번에 독자들께 선보이는 『특성 없는 남자』 1차분 1, 2권은 1930년 처음 발간된 소설 1권의 83장까지를 번역한 것이다. 사실 이런 형태의 두권짜리 번역본을 내기까지는 고민이 많았다. 우선 1차분을 먼저 내게 된 계기는 전체 소설의 분량이 워낙 방대하기 때문이다. 전집의 유고를 빼더라도 거의 1천여 페이지(번역원고로는 2천여 페이지)에 이르는 소설을 한꺼번에 내기는 아무래도 역부족이었고, 사실상 미완성 소설인데다 스토리보다는 한장 한장의 사유가 더욱 돋보이는 소설을 꼭 한꺼번에 낼 필요는 없겠다는 판단도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이 정도에서 중간결산을 해야지 앞으로의 번역작업을 이어나갈 힘과 용기가 생기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1차분을 굳이 두권으로 나눈 것은 좀더 많은 대중들에게 다가가고 싶어서였다. 많은 분량을 한권으로 낼 경우 독자들의 심적 부담이 크기 때문에 가급적 각권의 분량을 가볍게 하여 누구라도 쉽게 독파하는 책으로 만들고 싶었다. 두권이 힘들다면, 단 한권만 읽어도 큰 울림을 줄 수 있겠다는 희망섞인 기대도 있었다.

 

번역 원서로는 아돌프 프리제가 편집한 로베르트 무질 전집(Gesammelte Werke, Rowohlt 1978)을 사용했다. 워낙 묘사와 서술이 치밀한 작품인데다 무질의 사유를 하나하나 따라가기에도 벅찼기 때문에 작품에 스며든 작은 숨결까지 잡아내기에는 실력이 모자랐음을 고백한다. 미국에서 먼저 나온 훌륭한 번역본인 The Man without Qualities(Sophie Wilkins 번역, Vintage 1995)에도 많은 신세를 졌음을 밝혀둔다. 초판에서 부족한 부분은 끊임없이 수정해나가면서 좀더 나은 번역본이 되도록 노력하겠다.

 

아울러 10여년 전 어리숙한 대학원생에 불과했던 역자에게 용기를 주시고 번역 초반작업에도 많은 도움을 주셨던 안소현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또 이 책의 가치를 인정해주고 번역작업 내내 격려해주면서 원고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듬어준 소설가 김조을해에게도 깊은 감사를 전한다. 늘 친구 같은 성건이는 아빠의 첫 번역소설 『곰스크로 가는 기차』(2010)의 팬이 돼주었는데 이번 소설도 좋아해주었으면 좋겠다.

부디 이번 번역으로 한국에서 로베르트 무질이 그 명성에 걸맞은 평가를 받기를 기대한다. 또한 한국 독자들에게 사랑받는 작품이 되기를 소원하며, 2차분도 최선을 다해 곧 찾아뵙도록 하겠다.

 

 

 

 

 

 

 

Comment

  1. 뚱도리 2013.09.11 14:29 신고

    <특성 없는 남자 3>은 언제쯤 출간될까요?

    • 답변이 많이 늦어져서 죄송합니다. 3권은 내년이나 돼야 출간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가급적 빨리 나올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관심 가져주심에 깊이 감사드려요.

  2. ㅇㅇㅇ 2014.09.02 01:11 신고

    특성 없는 남자3 출간 계획이 있나요?

  3. 뚱도리 2015.03.31 09:20 신고

    오늘 인터넷 서점을 확인해 보니, 무질의 <사랑의 완성>이 나왔더군요.
    <특성 없는 남자 3>은 언제쯤 볼 수 있을까요?

    • 관심 가지고 문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특성 없는 남자> 3은 역자들의 사정에 따라
      출간이 많이 늦어지고 있습니다. 저희도
      독촉을 하고는 있지만 쉽지 않은 상황이라
      대단히 죄송하다는 말씀 드리고, 가급적
      3권이 빨리 나올 수 있도록 계속 애써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4. 이명 2017.09.11 02:05 신고

    혹시 특성 없는 남자 3은 아얘 중단된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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