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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성 없는 남자 1, 2/미리 읽기'에 해당되는 글 1

  1. 2013.04.24 <특성 없는 남자> 미리보기_1부 1장

1.

주목할 만한 방식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대서양 상공 위로 저기압이 걸쳐 있었다. 저기압은 러시아 상공의 고기압 쪽으로 움직이고 있었고 아직 이 고기압을 북쪽으로 밀어낼 낌새는 보이지 않았다. 등서선과 등온선은 서로를 지탱했다. 기온은 연중 평균. 가장 추운 달이나 가장 더운 달의 온도, 그리고 일정치 않게 변하는 월별 온도에 비해서 적당한 온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일출과 일몰, 월출과 월몰, 달과 금성, 토성의 띠, 그리고 다른 모든 중요한 현상들도 천문학 서적에 적혀 있는 그대로였다. 대기중 수증기는 최고의 장력을 유지했고, 습기는 아주 적었다. 좀 구식이기는 하지만 사실을 꽤나 잘 드러내주는 한마디 말로 하자면, 때는 년 8월의 어느 청명한 날이었다.

 

차들이 좁고 깊숙한 거리에서 밝은 광장의 평지로 달려나왔다. 보행자들의 검은 무리가 구름 같은 선을 이루었다. 속도가 만드는 힘찬 선이 차들의 부주의한 조급함을 가로지르는 곳에서 차들은 뒤엉켰고, 이내 빠르게 흐르다가, 잠시 동요하더니 다시 그들의 일반적인 흐름을 되찾았다. 수백 가지의 소리들이 서로 얽힌 소음들 사이로 섞이고, 거기서 하나의 고성(高聲)이 두드러져 가장자리까지 이어졌다가 다시 돌아왔으며, 찢어지는 듯한 소리가 명료하게 울렸다가 이내 사라져버렸다. 이 뭐라 표현하기 힘든 소리만 가지고도, 비록 이곳을 몇년간 떠나 있던 사람이라도 자신이 제국의 수도이자 국왕의 수도인 빈(Wien)에 와 있다는 것쯤은 눈을 감고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도시란, 사람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걷는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 눈을 뜬 채라면, 이러저러한 특징들을 찾아낼 필요도 없이, 거리의 움직임만 봐도 그곳이 어디인지 알아낼 것이다. 이것이 헛된 상상이라고 해도 문제될 것은 없다. 우리가 어디에 살고 있는지를 과대평가하는 습관은 목초지가 어디인지 알아내야 했던 유목시절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왜 인간은 파장을 이용해 붉은색을 백만분의 1밀리미터까지 정확히 묘사할 수 있으면서도 붉은 코에 대해선 그냥 붉다고 말하는 것으로 만족하며 그 코가 어떤 붉은색인지 궁금해하지 않는가? 여기에는 뭔가 중요한 점이 있다. 반면 왜 인간은 자신들이 거주하는 말도 못하게 복잡한 도시만큼은 그토록 정확하게 알고 싶어하는가? 그런 호기심은 더욱 중요한 것으로부터 우리를 떼어놓고 있는 것이다.

 

도시의 이름에 어떤 가치를 두어선 안된다. 다른 대도시들과 마찬가지로, 그 도시 또한 불규칙성, 변화, 돌발, 우왕좌왕, 사물들과 관심사들의 충돌, 잘 닦인 길과 그렇지 못한 길, 거대하게 규칙적인 박동, 모든 규칙들의 불일치와 혼란 같은 것들로 이루어져 있었고, 그것은 마치 건물과 법칙과 규칙과 역사적 전통의 소재들이 거품을 내며 끓고 있는 그릇 속 같았다. 그 속의 넓고 생기있는 거리를 걸어 내려가고 있는 두 사람은 당연히 이러한 생각을 하고 있지 않았다.

 

분명히 상층계급에 속했을 그들은, 세련된 옷차림과 행동, 대화방식을 가지고 있었고, 그들의 이니셜이 박힌 속옷을 입었으며, 이것은 그들의 적대적인 무의식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그들이 누구인지, 다시 말해 그들이 제국민이며 그 제국의 수도에 거주하는 사람들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아마 그들의 이름은 아른하임과 에르멜린다 투치였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그리 정확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투치 부인은 그의 남편과 8월엔 아우스제 해수욕장에 있을 것이고, 아른하임 박사도 아직은 콘스탄티노플에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누구인지는 아직 수수께끼인 것이다. 사람들은 아주 특이한 방식으로 이 수수께끼를 풀기도 하는데, 그 방식이란 만약 그들이 50걸음을 걸은 후에도 어디에서 서로를 만났는지 생각나지 않으면 서로 잊어버리는 방식이다.

 

이 두 사람은 그들 앞에 벌어진 일 때문에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방금 전 무언가 선에서, 그 고요하고 긴 움직임에서 튕겨나갔다. 급회전을 하며 길가로 미끄러진 그것은 큰 트럭으로 곁길에 바퀴 하나를 걸친 채 전복돼 있었다. 마치 벌통 구멍으로 모여드는 벌처럼, 사람들이 한가운데를 조금 남겨둔 채로 그 작은 원 주위로 모여들었다. 차에서 나온 운전사가 포장지처럼 창백해진 채로 거친 동작을 해 보이며 사고를 설명하고 있었다. 새로 모여드는 사람들의 시선은 처음엔 그를 향하다가, 그 구멍 한가운데에서 마치 커브 길의 곡면을 베고 죽은 듯 누워 있는 사람에게로 향했다. 누구나 인정하듯이 그가 그런 유감스런 일을 당하게 된 것은 그 자신의 부주의 탓이었다. 사람들은 교대로 그의 곁에 무릎을 꿇고 그를 도와보려 했다. 어떤 사람은 그의 상의를 펼쳤다 여몄다 해보았으며, 다른 사람들은 그를 일으켰다가 다시 뉘었다가를 반복하기도 했다. 그러나 실제로 구급차가 도착해 적절하고 적법한 조치를 취하기 전까지는 누구도 시간이 가기만을 바랄 뿐, 다른 행동을 하길 원치 않았다.

 

그 부인과 그녀의 동행인도 다가와 부상자의 머리와 구부러진 등을 보았다. 그러더니 부인은 물러서서 망설였다. 부인은 심장과 명치에서 뭔가 불쾌한 것을 느꼈고 그 느낌을 동정심으로 여겼다. 그러나 그것은 뭐라고 결론지을 수 없는, 사람을 꼼짝 못하게 하는 느낌일 뿐이었다.

 

잠시 침묵하고 있던 동행인이 입을 열었다. “이렇게 무거운 트럭은 제동거리가 무척 길게 마련이죠.” 부인은 이 사려깊은 생각에 속이 조금 편안해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이 말을 많이 들어봤지만 제동거리가 사실 뭔지도 몰랐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단지 이 말 덕분에 무시무시한 사고가 어떤 규칙에, 또한 그녀가 더이상 직접적으로 간섭하지 않아도 되는 기술적인 문제에 포함되는 것으로 충분했다.

 

사람들은 구급차가 경적을 울리는 소리를 들었고, 그에게 달려온 구조대의 신속함은 모든 구경꾼들을 충분히 만족시켰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회적 기능인가. 구조대는 부상자를 들것에 실었고, 그를 들것과 함께 차에 밀어넣었다. 단일한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이 부상자를 위해 일했고, 그 구급차 안은 누가 보더라도 아주 깨끗하고 잘 정돈돼 있어, 꼭 커다란 병실처럼 보였을 것이다. 사람들은 아주 적법하고 규칙에 딱 맞는 사건이 일어난 것 같아 곧 안정된 느낌을 받았다. “통계에 의하면,” 그 신사는 말했다. “매년 미국에선 자동차 사고로 19만 명이 죽고 45만 명이 다친다고 하죠.”

 

“그가 죽었을까요?” 그와 동행한 부인이 물었고, 그녀는 아직도 뭔가 뜻밖의 일을 경험했다는, 검증되지 않은 느낌에 휩싸여 있었다.

 

“아마 살았을 거요.” 그가 대답했다. “사람들이 그를 차에 실었을 때, 꼭 살아있는 것처럼 보였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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