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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통/독자 서평

표현하기 힘든 위로와 희망 <마흔통>

by 북인더갭 2016. 11. 14.

<마흔통> 마크 라이스-옥슬리, #북인더갭                                               김효주 


세상이 나를, 무엇보다 내가 나를 소외시킨다고 느낀다면 이 책을 통해 치료나 위로, 혹은 예방주사가 가능할 것이다. 우울증은 심하던 경미하던 당신의 문제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유능한 기자이자 좋은 남편과 아빠인 한 남자의 마흔살 생일파티에서 시작한다. 우울증으로 추락하고, 회복되다가 재발하며, 다시 회복하는 과정을 섬세하게 관찰하고 진솔하게 고백한다. 현대사회에서 상당히 많은 사람에게 해당될 수 있지만 사실 누구도 우울증이 무엇인지 정확히 모른다는 점이 문제다. 


" 그렇다면 우울증이란 정확히 무엇인가? …… 나는 정말로 어느 누구도 우울증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고 솔직히 말할 수 있다. 뇌는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려고 할 때 사용하는 풍요로운 신체기관이지만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기관이기도 하다.(47p) 


우울증을 바라보는 조금 더 영적인 다른 방법들이 있다. …… 당신 인생에 있어서는 안 되는 어떤 것이 들어와 있음을 경고하는 주요 신호이자 표현인 것이다.(48p) 


내면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어떤 것, 당신이 원하는 어떤 것, 당신을 참 당신으로 만들어줄지도 모를 어떤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실은 그것이 당신의 핵심 자아와 비극적으로 불화하고 있는 것이다.(49p) "


69년생 영국인 남자로서의 특수성도 있을 수 있겠지만, 사실 한국에서 살고 있는 나에게도 너무 익숙하게 이해가 된다. 나는 노력과 자기계발을 통해 자기운명을 얼마든지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무한긍정의 시대를 살고 있는 듯하다. 모든 영광과 책임을 개인에게만 돌리는 것은 인간의 역사 전체에서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이 낯선 문화는 우리 삶에 꼭 필요한 길고도 고된 수고나 희생과 인내에 대해서 많은 답을 주지 않는다.


더 이상 책을 읽을 수도 음악을 들을 수도 없고, 정상적으로 일을 하는 것은 물론 주변 가족들에게까지 절망을 주는 한 남자. 저자는 위축되고 무너지며, 자신의 우울증 밑바닥까지 들어가 관찰하고, 명상하고, 다시 회복되다 재발하며, 그로 인해 더 절망하고, 결국 받아들이며 극복해낸다. 그 과정을 날카로울 정도로 진솔하게 드러낸다.


" 나는 숨을 깊숙이 들이켜고 그 감정 속으로 들어가 정체를 파악하려 노력한다. 감정이지 실체가 아님을, 반작용이지 위협이 아님을. 이것은 전진하는 길이며, 나에게는 연습이 필요하다.(174p) "


저자는 단순히 성찰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알아가는 것 이상으로, 우울증이라는 증상에 대해 의학적이고 전문적인 고민과 시도를 했다. 주치의, 비슷한 증세가 있는 환자들, 동료들, 아내와 부모 등 많은 사람과의 대화를 통해서도 풍성한 관점을 보여주기 때문에, 우울증이라는 병 자체에 대해서도 상당히 직접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무기력, 과잉생각, 불면증 등 실제적인 측면에 대한 부분도 재미있다.


" 불면증은 수면 부족이 아니다. 수면이 부족한 사람은 가만 두면 선 채로 존다. 그들은 본능은 있지만 기회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불면증 환자들은 자신의 수면 능력을 믿지 않는다. 그들은 기회는 있지만 본능이 없다.(239p) "


저자 스스로의 관계에 대한 고민은 고스란히 현대 사회의 관계와 경쟁에 대한 고민과 맞닿아 있다. 우울증은 그 비교에서 오는 경쟁과 배타성에도 크게 영향을 받는 것 같다.


" 다른 사람의 성공을 기뻐하기 어려운 까닭은 무엇일까? 다른 이의 성공은 곧 우리의 실패라는 독성 논리는 어디서 오는걸까? 인생은 제로섬 게임이 아니다. 당신과 관련있는 누군가의 성공은 분명 그 관계를 부요하게 하여 당신의 세계마저 유익하게 하지 않는가?(213p) "


회복되다가도, 과제처럼 스스로와 경쟁하며 초조해하다가 재발하고 다시 더 깊은 절망에 빠졌던 저자는, 받아들이고 인정하면서 흔들리지 않는 안정을 찾는다. 혹 다시 상태가 나빠질 수도 있겠지만 이제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역설적인 결론을 인정하며 저자는 더 자신이 되었고, 주변을 더 받아들이게 된다.


" 나는 사람들에게 아니라고 말해도 좋으며 그래도 그들은 여전히 친구, 동료, 아내일 것임을 배워야 한다. 때로는 상황이 완벽하지 않아도 충분히 좋으면 대개 훌륭하다는 것을 배워야 한다.(335p) 


비가 퍼붓는데 피신처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다면, 물에 젖는 것이 얼마나 나쁠지 또는 해가 반짝이면 얼마나 좋을지에 관해 고민하지 마라. 그냥 물에 젖어 그게 정말 어떤 기분인지 겪어봐라. 그것이 이 병에 관한 근본적인 진리, 내가 이제야 겨우 이해하게 된 역설이다. 즉, 결코 제대로 좋아지지 않을 것임을 진정으로 받아들일 때 비로소 회복이 찾아온다.(369p) "


영국인스러운, 혹은 기자스러운 유머러스하면서도 회의적인 담담한 문장들이 더 진솔하게 마음을 움직인다. 유려한 번역 탓인지 읽히는 속도가 빠르고 몰입이 된다. 나는 서른 후반이다. 표현하기 어려운 위로와 희망이 있었다. 이 위로는 좀 신기했다. 왜냐하면 좌절과 추락을 말할 때도, 회복을 말할 때도, 재발과 다시 회복을 말할 때도 동일하게 위로가 되었기 때문이다. 결론과 교훈과 설득 이상의 울림이 이 책에 있다. 중년의 남자라면, 마흔을 기준으로 좀 지났거나 아니면 좀 남았다면, 혹은 이런 남자를 주변에 가까운 관계로 둔 여자라서 이해하고 도움을 주고 싶다면, 이 책은 참 좋을 것이다.


한 가지 더, 이 책의 원제는 <Underneath the Lemon Tree: A Memoir of Depression and Recovery> 이다. <레몬트리 아래서: 우울증과 회복에 대한 회고> 정도로 표현할 수 있을까. 이걸 <마흔통>으로 표현한 것은 이 책의 핵심을 정확히 재해석해낸 것 같다. 우리 사회는 생각보다 중년의 남자에게 실체를 보여주고 정체성을 찾아주는 일에 서툴러 보인다. 이 책을 통해 조금은 내가 가야 할 방향을 볼 수 있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