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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브: 영국식 잉여 유발사건/옮긴이의 말

<차브> 옮긴이의 말

by 북인더갭 2014. 11. 15.

옮긴이의 말

 


이 책의 원제가 되는 ‘차브’(Chav)라는 단어를 나는 2011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에 실린 서평기사에서 처음 접했다. 당시 나이 26세에 불과한 청년 오언 존스가 쓴 이 책은 영국 사회를 발칵 뒤집어놓았다. ‘지구의 소금’이라 칭송되던 노동계급이 어떻게 ‘지구의 쓰레기’로 전락했는지를 구체적인 사례 속에서 생생하게 그려낸 이 책은 그해 최고의 정치학 도서로 선정되면서 확고한 베스트셀러로 자리잡았다. 

 


2005년을 전후해 ‘차브 패션’이란 신조류가 국내 복식업계에 소개됐다는 사실을 뒷날 전해 듣긴 했지만, 영국 하위집단의 패션 트렌드를 일컫는 ‘차브’의 용례는 당시의 한국 언론에겐 여전히 낯선 것이었다. 당시 나는 신자유주의 세계에서 진행되는 체계적 배제와 소수자의 고립화 문제에 ‘꽂혀’ 있었다. 주간지 『한겨레21』의  와이드 기획을 준비하기 위해 관련 논문과 저널을 검색하다 말 그대로 우연히, ‘차브’와 조우한 것이다.


당시 국내에선 ‘차브’에 견줄 만한 신조어 ‘잉여’가 유행하고 있었다. 『월간 잉여』라는 잡지가 창간됐고, 패기만만한 20대의 잡지 발행인은 이름난 몇몇 ‘2030 논객’들과 함께 주간지 외고 담당의 섭외 리스트에 이름을 올린 상태였다. 이미 40줄에 들어선 내게 잉여는 그다지 호감가는 용어가 아니었다. ‘정규군 사회’로의 편입 기회를 봉쇄당한 20대가 스스로를 얕잡고 조롱하는 말이 ‘잉여’라 여겨진 탓이다. 그 자학과 체념의 냄새가 나는 싫었다. 스스로를 ‘공돌이’‘공순이’라 낮춰 부르던, 20대 시절 불우했던 옛 친구들의 무력감이 고스란히 되살아나는 듯했기 때문이다.


잉여는 말 그대로 ‘재귀성’이 강한 용어다. 누군가를 ‘잉여’라 부르기보다, 스스로를 ‘잉여’라 이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와 달리 ‘차브’는 사회적 타자를 지시하는 배제의 언어이며, 공격적이고 배타적인 경멸의 언어다. 잉여의 배후 감정이 체념이라면, 차브란 언어 뒤에 똬리튼 정념은 혐오다. 잉여가 상승 기회를 박탈당한 중간계급 2세들의 자기연민의 표현이라면, 차브는 몰락한 노동계급 2세들에 따라붙는 저주의 꼬리표다.


이런 이유로 차브의 의미값에 근접한 우리말은 잉여보다는 ‘양아치’‘쓰레기’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학교를 뛰쳐나와 골목 어귀나 놀이터를 어슬렁거리는 10대 청소년들, 역한 냄새를 풍기며 공공장소 주변을 배회하는 노숙인, 엄연한 주인이 있는 사유공간을 점거한 채 망루를 세우고 악다구니를 쓰는 철거민들은 또 어떤가. 이 몰락한 노동계급의 후예들을 우리 사회는 언제부턴가 범죄시·불온시하기 시작했다.


‘차브’라는 언어의 분류학적 기원을 찾다보면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영미권의 언어가 ‘언더클래스’(underclass)다. 1977년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은 마약·범죄·10대 임신 같은 도시적 병리현상을 열거한 뒤 “미국 도심에 호전적이고 위협적인 언더클래스가 출현했다”고 썼다. 언더클래스에 속하는 대부분의 구성원은 청소년과 소수민족이며, 미국 대도시의 음습한 이면에는 통제되지 않고 고립돼 있으며 호전적인 하층계급이 존재하고 있다는 게 기사의 핵심 메시지였다.


1982년에는 이들의 존재 양태를 △장기간 복지에 의존하는 수동적 빈민 △학교를 중퇴하고 마약을 상용하는 거리의 범죄자들 △지하경제에 의존하는 사기꾼과 매춘부들 △장애를 지닌 알콜 중독자 및 노숙자들로 구분한 『언더클래스』라는 논쟁적 저서가 출간됐다. 이를 계기로 미국 사회과학계에선 언더클래스의 규모와 동태를 둘러싼 연구가 유행했는데, 다양한 논의 속에서 합의된 사실은 언더클래스가 단순한 빈곤층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들은 ‘의존적이고 무기력하면서 범죄의 유혹에 노출된 타락한 빈민’이었고, 따라서 ‘보호받을 자격이 없는 빈민’이었다.


빈곤을 타락과 범죄의 언어로 재정의하려는 움직임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한국사회에서도 감지되기 시작한다. 지난 2012년 봄, 경찰이 한 유력 신문의 후원 아래 시작한 ‘주폭(酒暴)과의 전쟁’이 전형적인 예다. 캠페인 3개월 뒤 주폭 단속의 성과를 홍보하는 이 신문의 1면 머리기사 제목은 ‘주폭 300명 잡았더니 살인 31% 줄었다’였다. 기사의 요지는 경찰이 주폭 단속을 시작한 뒤 3개월간 강력범죄 발생 건수를 셈해보니 전년도 같은 기간보다 살인은 31.2%, 강도는 36.6%, 성범죄는 5.9% 줄었다는 것이었다.


통계의 유의미성 여부는 차치하더라도, 이 보도는 국가와 유력 언론이 거리의 주취자를 예비 범죄자로 공식 인증하는 것이란 점에서 문제가 간단치 않았다. 나아가 이 기사는 주폭 단속이 사실상 예비 범죄자에 대한 예방 구금의 성격을 띠고 있다는 사실마저 우회적으로 드러냈다. 눈여겨볼 지점은 단속된 주폭들의 사회적 처지였는데, 단속 초기 구속된 주폭 피의자 100명 가운데 82명이 무직자였다는 사실로 미뤄볼 때, 절대다수가 집이 없거나 사는 곳이 일정치 않은 40~50대 실업자라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이들이 저지른 범죄라는 것도 식당·주점 등에서 행해진 업무방해(구걸, 무전취식) 같은, 평소였으면 훈방이나 합의로 마무리됐을 경범죄가 주종이다.


주폭 단속에서 보이는 하층민 일탈자에 대한 처벌과 낙인찍기는 그 기원이 1980년대 영국 대처리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사회는 없다. 존재하는 건 개인뿐”이라는 대처의 말은 빈곤과 일탈의 책임을 사회가 아닌 개인에게 묻겠다는 정치적 선언에 다름 아니었다. 그 선언에 담긴 통치 이데올로기는 보수당 집권기 다음과 같은 조처와 상황들로 현실화됐다. 하층민 범죄에 대한 검경의 의도적 이름 붙이기→선별적 정보 유출→보수신문들의 경쟁적 보도→충격과 공포 확산→법질서 회복을 위한 공권력 투입 여론 형성.


스튜어트 홀(Stuart Hal) 같은 연구자들에 따르면, 오늘날 하층민들이 공권력의 표적이 되는 것은 현대 자본주의 국가가 직면한 ‘정당성 위기’와 결부돼 있다. 고용(노동)이 성장의 함수가 되지 못하는 사회(‘고용 없는 성장’ 사회)에서 실업은 일시적 단계가 아닌 영구 상태가 된다. 사회는 그들의 기여 없이도 충분히 존속할 수 있다. 사회의 부를 키우지는 못하면서 비용(공공지출)만 증가시키는 그들은 ‘존재 자체가 민폐’인 쓰레기로 취급된다.


문제는 이 쓰레기(구조적 하층민) 양산 시스템을 변화시킬 능력과 의지가 오늘날의 국가엔 없다는 점이다. 국가는 이제 지배를 정당화할 근거를 다른 데서 찾게 되는데, 다름 아닌 내부의 위험요소를 격리하고 세척하는 일이다. 이 과정에서 민폐적 존재인 하층민들은 범죄시되고 격리된다. 이 일련의 절차 속에서 “궁핍의 언어로 씌었던 이야기는 타락의 언어로 다시 쓰인다.”(지그문트 바우만)


가난이 타락과 범죄로 재정의되는 순간, 가난한 자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도덕적 부채감은 사라진다. 그들 앞에 놓인 운명의 수순은 ‘추방’이다. 추방은 물리적인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인식적 추방’으로 이어지는데, 인식의 영역에서 추방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이들을 보이지 않게 만드는 것이다. 일단 눈앞에서 사라지면 관심에서도 멀어지며, 관심에서 멀어지는 순간 도덕적 공감은 불가능해진다. 이렇게 되면 추방된 자들이 아무리 고통과 부당함을 호소해도 ‘헛소리’와 ‘소음’으로 취급될 뿐이다. 약자에 대한 공감과 연대의식이 사라질 때 싹트는 것은 ‘무결점 사회’를 향한 유혹이다. 잘 가꿔진 잔디밭 위로 삐죽이 고개를 내민 잡초를 깡그리 제거해버리고 싶다는 욕망. 이것은 아우슈비츠를 만들어낸 전체주의적 열망과 동일한 것이다.


‘차브의 정치학’에 우리 사회의 ‘잉여’들이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신자유주의라는 운명의 보편성, 그 개인화와 배제의 시스템이 작동하는 한, 격리되고 추방되어야 할 쓰레기들(양아치들)의 목록에는 가혹한 소비사회의 규준과 척도에 미달하는 개인 누구라도 기입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차브는 가혹한 경쟁에서 상처받고 뒤처질 위험에 처한 우리 사회 모든 잉여들의 잠재적 미래를 지시하는 대명사에 다름 아니다.


이 책의 전반부(1~4장)는 안병률이, 후반부(5~8장)는 이세영이 번역했다. 차브 현상의 문화적 배후를 밝히는 4장은 전문번역가 박유신 씨의 도움을 구했다. 발행인이자 편집자, 공동 역자로서 더딘 작업을 참고 기다려준 안병률에게 감사의 뜻을 전한다.
 
2014년 10월 30일
옮긴이를 대표하여
이세영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