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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 쏘울 메이트/책 소개

세상의 변혁을 꿈꾼 시인과 경제학자들

by 북인더갭 2020. 4. 28.

세기의 쏘울 메이트

김연 지음

시와 경제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가까이 할 일이 거의 없는 두 존재로 느껴진다. 만약 이 둘이 서로 마주한다면, 세상물정 모르는 낭만적 언어라고 꼬집거나 피 한방울 나지 않는 계산이라며 서로를 몰아붙이기에 바쁠 것만 같다. 그러나 우리의 선입견과 달리, 시인과 경제학자는 서로 다른 도구로 한곳을 바라보는 둘도 없는 쏘울 메이트임을 밝힌 책이 나왔다. 『세기의 쏘울 메이트』는 저자가 케인스에서 에이드리언 리치까지 78명의 시인과 경제학들 사이에 오고간 깊은 영혼의 교감을 드러낸 책이다. 이 책은 ‘기본소득’ 같은 사회적 경제에 시적 상상력이 끼친 심오한 영향을 증언하면서 시와 교감하면서 더욱 인간다워진 경제학의 얼굴을 그려내고 있다.

저자 김연은 서울, 보스턴, 시칠리아, 파리 등에서 컴퓨터공학, 통계물리, 경제학을 공부했으며 지난 2015년 『시와시학』을 통해 시로 등단하여 시작활동을 이어오고 있는 시인이다. 현재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계산과학연구센터에 연구원으로 있으며 최근 코로나19 사태를 맞아 슈퍼컴을 이용해 사회적 거리두기와 확진자 사이의 연관관계를 계산하여 주목을 받은 바 있다.

지금 세계는 코로나19가 몰고온 재앙으로 깊은 시름에 빠져 있다. 생산과 서비스 활동이 멈춰서 공황에 가까운 파국에 직면한 지금, 각국은 이 난국을 돌파할 해결책으로 ‘기본소득’과 같은 사회적 경제에 각별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다행히 이미 많은 경제학자들이 이 문제에 관심을 가져왔는데, 공교롭게도 이 경제학자들 다수가 시인과 교류했고 시적 상상력의 영향을 받았음을 저자는 이 책에서 밝혀내고 있다.

사회적 경제와 시적 상상력의 교감

사회적 경제를 주장하면서 시인과 교류했던 경제학자 중 먼저 주목할 만한 사람은 질비오 게젤과 군나르 뮈르달이다. 현재 ‘재난소득’의 형태로 발행되고 있는 ‘지역화폐’ 개념은 일찍이 독일 경제학자 질비오 게젤에 의해 발견된 바 있다. 그는 모든 것은 썩는데 오직 돈만은 썩지 않는 현상을 비판하면서 돈도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가치를 깎아서 꼭 쓰이게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런 사회신용운동은 게젤이 흠모했던 시인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의 영향에서 나온 것이었다. “진입의 정적이 가진/ 벌거벗은 존엄, 그 심원한 변화가/ 그들에게 다가와, 그들은 뿌리를 박고/ 꽉 움켜쥔 채, 새날을 직감한다.”(「봄 그리고 모든 것」) 이처럼 삶이 파괴되는 순간 다시 살아나는 사회적 약자들의 삶을 그려낸 윌리엄스의 시를 접하면서 게젤은 자연스럽게 순환하는 경제를 상상해냈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북유럽 복지국가 모형의 근간을 세웠고 장하준 교수에게도 많은 영향을 끼친 군나르 뮈르달도 언급된다. 빈곤이 더 큰 빈곤을 낳는다는 뮈르달의 ‘누적과정’ 이론은 안정망이 없는 자본주의 자체를 교정하기 위한 강력한 국가의 개입을 지지한다. 뮈르달 역시 시인과 교감을 나눈 것으로 유명한데, 그 상대는 바로 미국 흑인들의 고단한 삶을 블루스 가락에 담아낸 흑인 시인 스털링 브라운이다. 저자는 키 작은 채송화를 바라보듯 낮은 곳을 향한 애정 어린 시선이 이런 교감을 가능케 한 원동력이었다고 설명한다.

우리는 흔히 옷과 밥과 집을 ‘짓는다’고 한다. 그런데 토지에는 ‘짓는다’는 말을 쓸 수 없다. 저자가 적절하게 비유하듯이 헨리 조지는 이처럼 아무것도 ‘짓지’ 못하는 토지가 경제를 지배하는 현상을 비판했다. 칼 폴라니 역시 비슷한 생각을 가졌는데 그는 전체 사회의 일부일 뿐인 ‘시장’이 공동체의 전부인 것처럼 행세하는 현상을 부정적으로 바라보았다. 이 같은 현상들은 결국 부의 불평등과 심각한 사회파괴 현상을 가져왔고 여기에 대한 해결책으로 헨리 조지는 ‘세금의 정확한 사용’을, 칼 폴라니는 ‘사회적 시장’의 회복을 제시했다. 저자는 이 경제학자들 곁에 시인들이 있었음을 주목한다. “지치고 가난한 그대들,/ 잔뜩 웅크린 채 자유로이 숨쉬고자 하는 사람들을 내게 보내주오.” 자유의 여신상 기단에 새겨진 이 유명한 시 「새로운 거상」을 쓴 엠마 라자러스는 헨리 조지와 교류하며 가난한 이민자들의 삶에 주목했으며, 헝가리 시인 엔드레 어디는 폴라니와 깊이 교감하며 더 나은 세상을 열망하는 변혁적인 시들을 완성했다.

저자는 사회적 경제에 끼친 시적 상상력의 사례를 여럿 더 소개한다. 적절하지 못한 분배 때문에 구매력이 떨어지고 불황이 초래됨을 주장하면서 기본소득을 제안한 클리포드 더글라스는 이미지즘의 대가이면서 그 스스로 경제학 책을 집필하기도 한 에즈라 파운드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빈곤을 파고들어 불균등한 성장과 물가의 급등을 그 원인으로 지목한 아마르티아 센은 그 유명한 인도 시인 타고르가 설립한 학교에서 공부했다. 경제이론의 목표를 사회적 약자에게 두어서 재정정책에 처음으로 소득분배 개념을 도입한 아서 피구는 시인 로버트 브라우닝에 대한 연구로 학위를 받기도 했다. 복지국가라는 개념조차 없었던 시대, 연대와 협동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협동조합운동을 지원하면서 국가의 역할을 강조했던 존 스튜어트 밀은 윌리엄 워즈워스의 시를 ‘모두의 기쁨’이라며 흠모하였다. 이처럼 우리의 예상을 벗어나는 수많은 시인과 경제학자들의 교류와 교감은 경제학이 시장 만능주의와 공리주의를 벗어나는 데 시적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지를 반증하고 있다.

둘도 없는 쏘울 메이트, 시인과 경제학자

시인과 경제학자의 환상 조합은 남의 나라 일만은 아니어서 우리에게도 그 못지않은 쏘울 메이트가 있었음을 저자는 밝히고 있다. 조선 후기 무너진 경제와 제도를 개혁하고자 한 성호 이익은 참신한 시와 산문을 쓴 혜환 이용휴의 숙부이자 스승이었다. “나는 병이 들어도 침 맞기 꺼리면서/ 사람을 곤장칠 때 숫자를 더할손가.” 이처럼 이용휴의 시는 민중과 함께하는 지식인의 모범이 되었다. 지역의 대표산물을 기술하는 지리학에서 벗어나 지역 상품의 특성을 분석하고 교역의 중요성을 강조한 한국 지리경제학의 태두 이중환은 당대 문인들, 특히 이인복과 깊은 교감을 나누었다. 민족 개념을 이론경제와 정책에 포함하고자 했던 개혁적 민족경제학자 박현채가 시인 조태일과 나눈 깊은 우정은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모든 만남이 그러하듯 시인과 경제학자의 만남 또한 때로는 불행한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수리경제학의 대가로 노예 농장주의 회계장부를 분석하여 그 수익의 부당성을 계산해낸 알프레드 콘래드는 가부장제 속 여성의 아픔을 강렬하게 묘사한 에이드리언 리치의 남편이었다. “이모가 돌아가실 때, 공포에 떨었던 그 두 손은 쉬게 될 것이다./ 그녀를 짓눌렀던 시련의 반지가 여전히 끼워져 있겠지만.”(「제니퍼 이모의 호랑이들」) 그러나 리치가 동성애자로서의 정체성을 뒤늦게 발견한 탓이었는지, 그렇게 좋았던 부부관계는 남편의 자살로 끝나고 말았다. 비합리적이고 과시적인 소비의 근거를 밝힌 『유한계급론』의 저자 소스타인 베블런은 엘렌 롤프라는 서정시인과 결혼했으나 스스로의 여성 편력으로 말미암아 관계는 무너지고 말았다. 전후 영국 사회복지의 근간을 마련한 『베버리지 보고서』의 베버리지는 「가지 않은 길」의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와 교류했으나 베버리지가 급격히 보수화하면서 둘의 관계는 앙숙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그러나 시인과 경제학자로 교류했던 대부분의 관계는 서로에 대한 깊은 애정과 신뢰로 발전되었다. 여성 경제학자 조앤 로빈슨은 생산에 기여한 만큼만 보수를 받는다는 한계생산성 이론을 비판하고 남녀의 임금격차를 문제시한 페미니스트 경제학자다. 그녀는 시인 어니스트 알투니언과 만나면서 새로운 생각의 영감을 길어냈다고 저자는 평가한다. 블룸스버리 그룹의 리더이자 여성의 경제적 독립을 주장한 『자기만의 방』의 저자 버지니아 울프는 케인스와 교류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들의 만남으로 여성에게 대학입학조차 허용되지 않던 시절의 편견이 무너지고 공급은 스스로 수요를 만든다는 오래된 주장이 뒤집혔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자본이 풍부한 미국에서 오히려 노동집약적 상품이 더 많이 생산된다는 역설을 발견해낸 경제학자 바실리 레온티예프는 초월적 자연시를 쓴 여성 시인 에스텔 막스를 만나 사람 사는 곳의 따듯함을 평생 함께 나누었다.

저자는 “연관이 없는 듯 보이는 두 존재가, 사실은 한곳을 바라보고 있음을 전하고 싶었다”면서 “언어경제학인 시 속에 담긴 꿈과 시적 사회학으로서 경제학이 그리는 땀이 씨실과 날실로 짜이기를 바랐다”고 말했다. 또한 “경제학자가 돈보다 삶에 집중하고 시인의 자아가 시 속에 숨쉬고 있을 때 이 둘의 본령을 찾을 수 있다”면서 사람의 냄새가 사라진 시와 경제학의 회복을 기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