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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낙원에 머물지 않는다/옮긴이의 말'에 해당되는 글 1

  1. 2013.10.14 옮긴이의 말_ 박총

| 옮긴이의 말 |

 

천의 얼굴을 가진 하나님

총 | 작가, 재속재가수도원 ‘신비와저항’ 수도사

 

 

우리는 결코 신을 모른다. 아무리 신과 살뜰한 사귐을 나눈다 해도 신을 안다고 말하는 순간 신은 아득히 먼 곳으로 사라진다. 신과 친밀하다고 믿는 사람일수록 신에 대한 사각(死角)이 너른 법이다. 신은 우리와 같은 몸을 입으면서까지 우리를 닮으려 애쓰지만 자신의 가장 깊은 존재는 불가해성의 신비 속에 남겨둔다.

 

 

그러고 보면 요즘 젊은이들이 연애의 정석으로 꼽는 ‘밀당’(밀고 당기기)의 원조는 신인 셈이다.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신에 대한 경험과 지식의 퍼즐조각을 모아 최대한 그럴듯하게 신의 얼굴을 짜맞추는 것이다. 하지만 무한한 신의 얼굴조각을 아무리 열심히 긁어모은다 해도 그것은 끼워맞출 수 있는 수많은 얼굴 중 하나에 불과하다. 인간은 그렇게 완성한 신의 얼굴을 가지고 누가 정통이네, 누가 성서적이네 하며 오랜 세월 지루한 싸움을 벌여왔다.

 

우리 모두는 신의 얼굴조각을 짜맞출 때 설명서를 사용한다. 신에 대한 자신의 선(先)이해가 바로 그것이다. 명토 박아 말하건대 신에 대한 우리네 지식은 선이해를 벗어날 수 없다. 자비로운 신은 우리의 제한된 선이해를 배려하며 그 안에서 자신을 계시해주신다. 이러한 그분의 맘씀씀이를 신적 적응성(divine accommodation)이라고 부르는데, 문제는 자신의 선이해와 그에 따라 재구성한 하나님의 얼굴을 절대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거기에 안주하는 데 있다. 크리스천들이 그토록 닮기를 사모하는 하나님의 얼굴이 특정한 방향으로 고착되는 한 아무리 묵상을 많이 하고 훈련을 오래 받아도 제 입맛에 맞춘 하나님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다. 입체적인 하나님은 평면으로 박제되고, 무지개색의 하나님은 무채색으로 탈색된다. 그렇게 한번 받아들인 하나님을 죽는 날까지 절대 바꾸려들지 않는 외곬의 태도야말로 한국교회를 좀먹는 가장 고약한 좀벌레다.

 

일군의 입맛에 맞춰진 하나님은 그들의 이해를 위해서 얼마든지 왜곡되기도 한다. 필자가 한국 기독교 토착영성의 광맥을 이은 분으로 평가하는 권정생 선생은 『우리들의 하느님』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기독교 2천년 역사 가운데서 예수님은 많이도 시달려왔다. 한때는 십자군 군대의 앞장에 서서 전쟁과 학살에 이용당하기도 하고, 천국 가는 입장료를 어마어마하게 받아내는 그야말로 뚜쟁이 노릇도 했고, 대한민국 기독교 백년사에서는 반공이데올로기의 선봉장이 되어 무찌르자 오랑캐를 외쳤고, 더러는 땅투기꾼에게 더러는 출세주의자들에게, 얼마나 이용당하며 시달려왔던가.

 

이런 점에서 팔색조 하나님의 다양한 얼굴을 접하고 이를 통해 내가 받들어온 하나님을 더 사랑하면서도 흔쾌히 상대화시킬 수 있는 것, 내가 추구해온 신념을 지속하면서도 겸손히 내려놓을 수 있는 것은 우리네 삶과 신앙을 위해 필수적인 작업이다. 졸저 『욕쟁이 예수』(살림 간)에서 겁쟁이 예수, 양다리 예수, 변두리 예수 등 낯설고도 익숙한 예수의 모습을 모색한 것이나, 공저로 나온 『내가 만난 은총』(한국기독교연구소 간)에서 자궁 가진 하나님, 산파 하나님, 젖가슴 달린 하나님의 모습을 구현한 것은 바로 이런 까닭 때문이었다. 이렇게 신의 입체적인 얼굴을 정직하게 대면하는 것은 경직된 하나님 이해를 풍성하게 해주고, 그만큼 우리네 하나님 체험은 가멸어진다. 이 지구별 곳곳에서 동료 인간과 뭇 생명들이 저만의 삶의 처지와 상황에서 만난 ‘살아계신 하나님’(본서의 원서 제목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찾아서 Quest for the Living God』다)을 접할 때, 내가 만난 하나님만이 옳고 다른 하나님은 그르다는 근본주의적 편협함에서 벗어날 수 있다. 거기서 신과 동료 피조물 앞에서의 겸허함이 나온다.

 

이 책에서 우리는 고통받는 하나님, 해방자 하나님, 여성답게 행하는 하나님, 인종적 소수자인 하나님, 타종교에 너그러운 하나님, 진화를 허락하신 창조주 하나님 등 고혹적인 하나님의 얼굴을 마주한다. 진보와 보수를 떠나 자신이 아는 바가 최고이자 전부라는 교만을 버린 이라면 이 책에 담겨진 하나님의 다양한 생명력에 매혹될 것이다. 특별히 가톨릭, 개신교, 성공회의 보수적이며 복음주의 노선의 신앙을 고백하는 분들이 이 책에 빠져들길 바란다. 그분들에게 부분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대목도 있겠지만, ‘살아계신 하나님’이란 관용구가 개인의 영적 경험에만 제한되지 않고 생태, 인종, 여성, 삼위일체, 종교간 대화 등에서 경험될 수 있음을 가슴 떨리게 발견할 것이다.

 

필자 개인적으로는 본서에서 흑인 여성들이 만난 하나님이 마음에 가장 크게 닿아왔는데 그들의 하나님이 바로 우리의 하나님임을 절실히 경험했기 때문이다. 당시 우울증 등으로 만만치 않은 상황을 통과하고 있던 터에 흑인 여성들의 멘토로 추앙받는 하갈의 하나님이 필자에게도 나타난 것이다. 그 감동이 커서 ‘살아남게 하는 은혜’라는 제목의 글을 잡지에 싣기도 하고 설교로 나누기도 했는데 곳곳에서 큰 반향이 있었다. 낯선 이방인의 존재가 기존 사회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키듯이, 낯선 흑인들의 하나님이 기존 신앙에 신선한 들숨이 됨을 확인하고는 이 책의 가치를 한결 확신하게 되었다.

 

알다시피 이 책은 신학 서적이다. 하지만 이 책이 소개하는 신학‘들’은 학자의 서재에서 굴러다니던 사변과 정념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실제 삶의 자리에서 “맛보아 알게 된”(시편 34:8) 하나님의 생명력을 감칠맛나게 담아낸 신학이다. 저자 역시 서문에서 “이 책이 다루는 신학은 보통 학술적이거나 지적인 활동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행동에서 나온 것임을 독자들이 반드시 유념해주길 바란다”고 당부하고 있다. 한 영어권 추천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 책은 “모든 단어가 하나님과 교회와 세상에 대한 깊은 사랑으로 숨쉬는” 책이며 “저자가 평소 선보이던 신학적 정교함과 더불어 믿음의 삶에 대한 평생의 헌신에서 나온 실제적인 지혜가 결합된” 책이다.

 

따지고 보면, 여성신학이나 생태신학 등 현대 신학의 동향을 한 챕터씩 다룬 책은 허다하다. 하지만 이 책의 아름다운 차별성은, 그러한 현대 신학의 흐름을 하나님 체험과는 별개인 지적인 흐름으로만 다루는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이 어떻게 다양한 역사적 상황에 처한 이들에게 자신을 계시하고, 그들이 어떻게 실제 삶의 자리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에게 반응하는지를 보여주는 데 있다. 단언컨대, 『신은 낙원에 머물지 않는다』는 20세기 중반 이후 나타난 현대 신학의 동향과 우리 시대의 하나님 체험에 대한 성찰을 다룬 저작 중에 가장 탁월한 작품이다.

 

저자인 엘리자베스 존슨은 가톨릭교회에서 박사학위를 받을 수 있도록 허락한 최초의 여성신학자 중 한명이다. 전통적인 교계 인사들에게는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에 관용의 범위를 넘는 정도까지 도전했다는 말을 듣는 등 ‘하드코어’ 여성신학자로 비판받기도 한다. 하지만 본서 『신은 낙원에 머물지 않는다』를 통해 극단적인 여성신학 및 해방신학과 달리 기존 기독교 전통을 폐기하자는 쪽이 아니라 덜 배타적이고 수용적인 것으로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쪽임을 보여주었다. 그럼에도 미국가톨릭주교회의(United States Conference of Catholic Bishops) 교리위원회는 본서에 시도된 새로운 신학적 표현이 가톨릭교회의 인증된 가르침과 일치하지 않으며 이 책에서 드러난 하나님 이해가 심히 부적절하다고 비판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이름은 모두 메타포이다’ ‘하나님은 지속적으로 고통받는다’ ‘모든 종교는 하나님의 현존을 품고 있다’는 등의 표현은 가톨릭 신학 전통에 충분히 기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아가 넓은 독자층을 대상으로 쓰인 이 책이 일반 대중에게 교리 교과서로 사용될 수 있기 때문에 가톨릭 학교에서 금서로 지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맞서 미국가톨릭신학회(Catholic Theological Society of America) 등에서는 존슨의 신학을 옹호하며 나섰는데, 역자로서 모든 판단은 독자들에게 맡기는 바이다. 다만 전세계 각지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다양한 얼굴, 각기 다른 삶에 처한 사람들이 만난 하나님, 그리고 이를 글로 추려낸 다양한 신학의 모습을 살펴보는 데 있어 이 책보다 더 나은 책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본서의 1~4, 7장은 안병률이, 5, 6, 8, 9장은 박총이 번역했다. 평소 짧은 글을 번역하곤 했지만 단행본을 옮기는 일은 처음이었는데 아주 호된 신고식을 치렀다. 내가 쓴 글이야 내가 책임을 지면 그만이지만, 남의 말을 그릇 전달하면 어쩌나 하는 부담에 시달렸다. 두껍지도 않은 책을, 그것도 공저로 옮기면서 이런 말을 꺼내기가 부끄럽지만, 번역 기간 내내 ‘군대 귀신’에 가위눌려서 보냈다. 그동안 자신만의 문체를 가진 작가라는 과분한 평가를 받았지만, 매끄러운 문장과 저자의 의도라는 두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으려다 둘다 놓친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부족한 이들의 삶이 그렇듯 이 책도 많은 분들이 계셔서 나올 수 있었다. 이 멋진 책을 함께 옮겨보자며 제안해주고 우울증 등으로 진척이 없을 때에도 너그러이 기다려주신, 공역자이자 북인더갭의 대표인 안병률 선생님께 진심어린 고마움을 표한다. 또한 장신대 등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분주한 일정 속에서도 큰 도움을 베풀어준 이한숙 선생에게 사례한다.

 

이 책이 이끄는 조금은 낯선 여정을 앞두고 살짝 두려움을 지닌 독자들이 있을까 싶어 노파심에 한마디 남긴다. 낯선 곳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언제나 흥분과 더불어 불안과 불편이 반려한다. 하지만 두려움에 붙들려 더 너른 세상으로의 걸음을 떼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생명력 넘치는 수액이 얼마나 시퍼런지 알 수 없을 것이다. 하이데거가 즐겨 인용했다는 횔덜린의 파트모스 찬가는 “위험이 있는 곳에 구원도 자라는 법”이라고 노래한다. T. S. 엘리어트는 “너무 멀리 가기를 마다하지 않는 자만이 얼마나 멀리 갈 수 있는지 알 수 있다”고 화답한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보다 넓다. 그분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지 않은가!

 

이 책이 제시하는 지도에 따라 살아계신 하나님을 탐사하는 복된 여로에 오르는 독자들에게 모든 여행자의 수호신이신 그분이 함께 길벗하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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