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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페미니스트인가? 그렇다고 생각해왔다. 당당했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그런데 저자인 제사 크리스핀이 왜 자신이 페미니스트가 아닌가 신랄하게 조목조목 짚어낼 때마다 점점 자신이 없어졌다. 지금보다 조금 더 잘 살고 싶고,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여야 합니다라는 문구의 가방을 자랑스럽게 들고 다니며, 억울하게 당했던 경험들을 가슴에 품고 칼을 가는 내 모습이 크리스핀이 비판하는 오늘날의 페미니스트들과 겹쳐 보여서다. () 역자 또한 독자로서, 페미니스트라 자처하는 한 여성으로서, 크리스핀의 문제제기와 선언에 깊이 공감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수긍이 갔던 것은, 페미니즘이 여성들에게 대안적 삶의 가치를 제시하거나 대안적 삶이 가능하게끔 돕는 인프라는커녕 그런 대안적 삶을 꿈꾸는 상상력조차 만들지 못했다고 비판하는 부분이었다. 옮긴이의 말에서

 

옮긴이 유지윤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영어과에서 번역을 전공했다. KBS 라디오 PD로 근무하다 지금은 미국 LA에 거주하면서 번역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다. 한국언론재단 국제행사 프로그램 및 기사 등을 번역했고 한국에 출간된 번역도서의 감수를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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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_중앙SUNDAY>

 

페미니즘 서적들이 쏟아진다. ‘페미니즘 빅뱅이다. 페미니즘(feminism)이란 무엇일까. 이즘(ism)이다. 이즘은 우리 표준국어대사전에도 나오는, 주의(主義)와 동의어인 외래어다. 이런 용례가 나온다. “그건 염상진이라는 개인의 뜻이 아니라 정치 폭력화한 이즘의 충돌이었던 것이다.조정래, 태백산맥/ 죽음을 걸 만큼 그 이즘이라는 것이 그렇게 절대한 가치였었는지를 나는 회의하지 않을 수 없다.김성동, 만다라.”

 

유럽·미국 기준으로 대표적인 페미니즘은 자유주의 페미니즘, 급진 페미니즘,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 사회주의 페미니즘, 문화 페미니즘, 환경 페미니즘이다. 하지만 페미니즘·여성주의를 비롯한 이즘·주의는 계속 진화하고 분열한다. 페미니즘이라는 우산 용어(umbrella term)’ 속에서 다양한 페미니즘 조류가 공존하고 경쟁하며 서로 맹공을 퍼붓기도 한다. 심지어는 보수 페미니즘도 있다. 보수 페미니즘이라는 페미니즘의 작은 우산 속에는 개인주의적 페미니즘, 복음주의 페미니즘, 국가 페미니즘, 포스트페미니즘이 자리잡고 있다.

또한 남성 페미니즘도 있고 생활 페미니즘도 있다. ‘미투 페미니즘’ ‘메갈리아 페미니즘’ ‘워마드 페미니즘도 충분히 가능하다. 페미니즘이라는 거대한 체계화된 학설·이론·운동 속에서 각기 목소리를 낼 수 있다.

형용모순 같은 안티페미니즘적인 페미니즘도 있다. 그래서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다가 그런 경우다. 원제는 나는 왜 페미니스트가 아닌가: 페미니스트 선언(Why I am not a feminist: a feminist manifesto)’이다. 버트런드 러셀(1872~1970)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1927)와 마르크스·엥겔스의 공산당 선언(1848)을 한꺼번에 연상키는 묘한 제목이다. “나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다라고 말한 마르크스의 선례를 감안하면 그래서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다라는 제목이 그리 이상한 것은 아니다.

좌파 페미니스트 논객인 저자가 반대하는 것은 가부장적인 자본주의에 만족하고 적응하는 미국의 주류 페미니즘이다. 미국 페미니즘은 급진적인 변혁 운동이 아니라 라이프스타일 페미니즘으로 추락했다는 뜻이다. 그가 보기에 라이프스타일 페미니즘은 세상을 바꿀 수 없다.

저자 크리스핀은 개량주의·점진주의 페미니즘에 반대한다. 저자는 이빨 빠진(toothless)’ 페미니즘이 여성 최고경영자(CEO), 여성 정치인 숫자의 확대에 만족하는 것은 아닌지 의문을 제기한다. 그런 페미니즘은 저자에게 탈정치화된 자기계발 페미니즘에 불과하다. 체제를 바꾸지 않는 페미니즘은 의미가 없다는 게 저자의 판단이다.

크리스핀은 기성 페미니즘을 맹공하지만, 특정 페미니스트 운동가나 그룹을 타깃으로 삼아 지칭하지 않는다. 자본주의와 가부장제라는 공동의 적을 눈 앞에 두고 불필요한 싸움, 적전분열을 피하기 위해서다. 같은 이유로 크리스핀은 남성을 인간 이하의 존재로 깎아 내리는, 온라인·디지털 세상을 주무대로 삼는 격노(outrage) 페미니즘에도 반대한다. 그는 남성혐오를 혐오한다. 반성하는 남성은 페미니즘의 우군이 될 수 있다고 보는 듯 하다.


<한겨레>


페미니즘에 관한 강의나 토크행사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질문 중 하나는 이렇다. “남편/남성 동료/남자친구/아들이 페미니즘을 이해하고 행동과 말을 바꾸게 할 수 있는 좋은 말이나 책은 뭐가 있을까요?” 내가 생각하는 답은 다소 회의적이다. 기득권을 가진 사람이 흔쾌히 받아들일 수 있는 모범답안이 있다면, 애초에 차별이 없었겠지.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 그러니까 동물과 식물을 비롯한 생태계까지 포함해 세상의 살아 숨 쉬는 모든 존재가 득을 보는 것이 페미니즘이라는 주장은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을 ‘설득’하기에는 그럴듯해 보여도 설득의 결과는 미미하다. 누구의 기분도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해 하는 말은 공허할 수밖에 없고, 사회운동으로서의 힘을 갖기 어렵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백인 페미니스트들, 즉 최근 몇 년 미국을 휩쓰는 ‘페미니즘 유행’ 이전부터 여성의 권익 신장과 자유를 위해 싸워왔다고 자부심을 갖는 이들의 생각을 잘 알 수 있는 책 중 한 권이 바로 제사 크리스핀의 <그래서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다>다. 결론부터 말하면 더 급진적이고 시스템을 바꾸는 시도야말로 페미니즘의 본령이라는 주장을 담고 있다.

제사 크리스핀은 앤디 자이슬러의 <페미니즘을 팝니다>처럼 ‘선택적 페미니즘’을 비판한다. 이것은 진정한 변화에 따르는 불편함은 감수하지 않고 급진적 페미니스트를 물리치는 태도이며, “여성이 무엇을 선택하든, 생활방식에서부터 가족관계나 대중문화, 소비에 이르기까지 무언가를 그저 하는 행위만으로 페미니스트에 걸맞은 선택을 한다는 믿음이다.” 페미니스트라고 적힌 티셔츠를 입는 ‘유행’의 일부가 된다고 페미니스트로서 실천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대중 앞에 서는 직군의 여성이 페미니즘, 페미니스트라는 말을 사용해도 아무런 위해를 입지 않을 경우에나 해당하는 이야기다.

한국에서는 여성 뮤지션이 페미니즘에 관심만 보여도 ‘소비자’인 남성 팬들의 공격에 시달린다. ‘레드벨벳’ 멤버 아이린이 팬미팅에서 <82년생 김지영>을 읽었다고 말하자 팬들은 아이린 얼굴이 있는 굿즈를 자르고 불태워 인증했다. 가수 겸 배우인 수지가 유튜버 양예원씨가 과거 피팅 모델 스튜디오 아르바이트로 입은 성폭력 수사를 촉구하는 국민청원 글에 동의했다는 내용의 글을 인스타그램에 올린 다음 날인 18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연예인 수지의 사형을 청원합니다’라는 청원이 시작되었다. 일주일 가까이 있던 ‘수지 사형 청원’은, 비제이(BJ) 철구의 인터넷 방송을 시청한 일로 논란이 된 ‘에프티(FT)아일랜드’ 멤버 이홍기의 사형 청원이 시작되고 나서야(즉, 남성 연예인의 사형 청원 글이 올라오고 나서야) 나란히 삭제되었다. 한국에서는 페미니즘이라는 말도 페미니스트라는 말도 ‘패션‘이나 ‘유행‘이라고 부르기에는 생업의 안위를 걸고 하는 위험천만한 행위다. 크리스핀처럼 “그래서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다”라는 말은 “나는 페미니스트다”라는 말이 진부할 정도로 널리 쓰인 뒤에나 가능해진다.

최근 한국의 페미니즘 관련 논의에서 중요하게 떠오르는 주장은 여성들이 더 많이 공직에 진출하고, 관리직에 올라서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크리스핀은 이런 생각에 대해서도 단호히 반대한다. “어떤 분야든 여성이 그 분야의 ‘문화를 변화시킨다’는 관념은 속기 쉬운 거짓말이다. 더욱이 당신은 내부로 들어가기 위해 시스템을 세운 가부장들의 특징을 보여야 할 것이다.” 현대 페미니즘이 권력이 있는 여성을 본질적으로 좋게 보는 경향이 있다는 비판이 이어지는데, 그 예는 상원의원 시절 사회복지 프로그램을 폐지해 빈곤한 여성과 아이들에게 극심한 손해를 끼쳤던 힐러리 클린턴이다. 그래서? 크리스핀의 책을 다 읽은 뒤 나는 묻고 싶다. 그래서? 페미니스트가 된다는 것은 아무 흠 없는 인간이 되는 것이거나, 시스템을 전면적으로 거부하거나, 권력을 갖지 않는 것인가? 안주하지 말고 더 급진적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에는 찬성하지만, 다수의 성추행을 저지르고도 대통령이 된 트럼프를 비난하기보다 힐러리 클린턴을 비난하기가 더 수월한, 그 외의 사례들에서도 여성만 도마 위에 올린 모습을 보니 어리둥절해진다. 게다가, 한국에서 “나는 페미니스트다”라는 말을 여성이 할 때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 안다면, 크리스핀의 이런 도발은 그녀가 얼마나 많은 것을 누리고 있는지 역으로 입증하는 것으로 보인다. 더 급진적이 되자. 그 주장만을 받아들인다.

이다혜 작가, 북칼럼니스트



<연합뉴스>

 

그래서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다 = 제사 크리스핀 지음. 유지윤 옮김.


페미니즘 사상가이자 작가인 저자가 오늘날의 페미니즘을 강렬하게 비판한다.

그는 페미니즘이 하나의 유행으로 자리 잡으면서 원래 페미니즘이 가진 급진성은 점점 사라지고 아무도 불편해하지 않는 껍데기만 남았다고 말한다.

이른바 '라이프스타일 페미니즘'이 지배문화의 가치는 그대로 둔 채 '포천'지 선정 500대 기업에 여성 최고경영자(CEO)가 몇 명인지, 의대 졸업생 중 여성이 몇 명인지에 집중한다는 것이다.

북인더갭. 200. 13500.

 

<서울경제신문>

 

오늘날 페미니즘은 껍데기만 남았다?

그래서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다( 제사 크리스핀 지음, 북인더갭 펴냄)= 페미니즘 사상가로 유명한 저자가 본래의 취지를 상실한 오늘날의 페미니즘을 강렬하게 비판한다. 저자는 페미니즘이 하나의 유행으로 자리 잡으면서 원래 페미니즘이 가진 급진성은 점점 사라지고 그 누구도 불편해하지 않는 껍데기만 남았다고 지적한다. 지적인 액세서리와 같은 라이프스타일 페미니즘은 남성 중심적 문화의 부당함은 외면한 채 100대 기업에 여성 최고경영자(CEO)가 몇 명인지, 의대 졸업생 중 여성이 몇 명인지 등에만 집중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냉철하게 직시하고 가부장제에 저항하면서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급진적 페미니즘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13,500


<외신들> 


이 가차없이 비판적인 책에서 저자는 21세기 페미니즘에 기름을 끼얹고는 유쾌하게 외친다. “페미니즘아, 까맣게 탄 지구를 떠나라!” 그래서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다라는 제목은 한편으로는 거짓말이자 다른 한편으로는 도발에 가깝다. 왜냐하면 저자는 뼛속까지 페미니스트인 사람이기 때문이다. 저자의 주장은 그 급진성과 분노에서 3세대 넷페미가 아니라 2세대 페미니즘에 근거한다. 저자는 이른바 라이프스타일 페미니즘을 가장 경멸한다.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여야 한다고 새겨진 600달러짜리 티셔츠를 입고서 정치적 영웅심리에 빠져 아무것도 하지 않는 페미니즘 말이다. 저자가 보기에 그런 페미니즘은 살아남기 위해 초남성적 세계를 모방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먼저 돈이면 다 되는 페미니즘, 남성과 자본에 기대는 페미니즘에서 벗어나야 한다. 가디언(Guardian)

 

진보를 현상유지와 동일시하는 최신 페미니즘을 비판하면서

혁명적인 페미니즘을 요청한다. 엘르(Elle)


매우 신선한 주장이자 어떤 질문도 제기되지 않는 페미니즘에

균형을 잡아주는 시도다. 뉴요커(The New Yorker)

 

유리천장을 깨는 게 문제가 아니다.

쇳덩어리로 구조를 깨부수는 것이 관건이다. 커커스리뷰(Kirkus)

 

간명하고 전투적이면서도 참신하다.

양심의 도전에 호소하는 책. 시카고 트리뷴(Chicago Tribu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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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 크리스핀 Jessa Crispin

 

1978년 미국 캔자스 주의 링컨에서 태어났다. 페미니즘 사상가이자 작가로 온라인 매거진 북슬럿(Bookslut)을 창립하고 편집자로 활약했다. 웹진 북슬럿뉴욕타임즈등 주요 매체에서 주목을 받았고 그녀의 서평은 가디언등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현재 뉴욕타임스』 『가디언』 『워싱턴포스트의 기고자로 있으며 페미니즘과 책에 관련된 칼럼을 쓰고 있다. 저서로 죽은 숙녀들의 사회(The Dead Ladies Project), 창조적인 타로(The Creative Tarot)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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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각 분야에서 페미니즘의 요구가 거세지는 시기에 오히려 오늘날의 페미니즘을 강하게 비판하면서 매우 색다르고 도발적인 물음을 제기하는 책이 출간되었다. 미국 페미니즘 사상가 제사 크리스핀(Jessa Crispin)의 신작 그래서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다는 자기역량 강화에 몰두하는 라이프스타일 페미니즘을 끝내고 가부장제에 저항하면서 새로운 사회를 꿈꾸는 급진적 페미니즘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남성들에 대한 분노와 울분을 넘어서 이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냉철하게 직시하는 페미니즘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도대체 페미니즘은 무엇을 한 것인가?

 할리우드에서 시작된 미투(#MeToo)운동이 전세계로 확산된 지금, 우리에게도 페미니즘은 더이상 낯선 단어가 아니다. 또한 하루가 멀다 하고 페미니즘 관련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으며 정치·문화·사회 전반에 걸쳐 페미니즘은 하나의 큰 주제로 자리잡고 있다. 문제는 페미니즘이 하나의 유행으로 자리잡으면서 원래 페미니즘이 지닌 급진성은 점점 사라지고 아무도 불편해하지 않는 껍데기만 남게 되었다는 점이다. 제사 크리스핀은 현재 유행하는 페미니즘을 가차없이 비판하면서 이를 보편적 페미니즘이라는 말로 요약한다.

보편적 페미니즘은 2세대 페미니즘의 급진성을 내버리고 좀더 친근한 버전의 페미니즘을 만들었다. 이는 여성이 삶에서 받는 억압을 정치·사회적으로 맥락화하는 대신 모든 것을 개인의 선택으로 치환한다. 가령 안드레아 드워킨 같은 2세대 페미니스트들의 논의는 성()과 결혼제도에 대한 근본적인 의심에서 시작됐다. 그러나 보편적 페미니즘은 자기를 꾸미고 계발하여 사회에 나서는 사람은 누구나 페미니스트라고 주장함으로써 그 급진성의 자리에 자기역량 강화라는 헛된 의식을 심어놓았다. 저자는 이러한 개인적 라이프스타일 페미니즘이 지배문화의 가치체계는 그대로 둔 채 페미니스트라는 이름표만 따온 것이라고 비판한다. 이런 페미니즘은 포춘지 선정 500대 기업에 여성 CEO가 몇명인지, 의대 졸업생 중 여성이 몇명인지에만 집중한다. 그래서 그 여성 CEO가 아이들과 여성들을 착취한다고 해도, 또 힐러리 클린턴 같은 여성 정치인이 사회복지 프로그램을 축소하고 민간인을 희생시키는 국제개입에 찬성한다고 해도 그리 놀라지 않는다.(1)

보편적 페미니즘이 여성의 자유와 독립이라는 꿈을 내세워 더 많은 여성들을 포섭하는 동안, 여성들은 사회적 가치들, 즉 가족이나 이웃, 돌봄의 가치들을 희생해야만 했다. 그 대가로 돌아온 것이 치열한 경쟁이며 추락한 직업 안정성, 어마어마한 학자금 대출이라면 도대체 페미니즘은 무엇을 한 것인가? 여성들이 가정과 돌봄, 공동체 같은 여성의 가치들에 남성의 자리를 마련하는 대신, 경쟁과 가부장적 가치 같은 초남성성의 세계에 들어가고 말았다는 저자의 지적은 그래서 뼈아프게 다가온다. 이제 여성들은 가부장제에 도전한 페미니스트들을 혐오하고 그 대신 여성의 사회적 진출을 위해 강력하고 세련된 중산층 여성의 이미지를 만들어낸 페미니스트를 추앙한다.(2)

 

남은 것은 각자도생, 역량강화뿐?

 저자가 보기에 이런 중산층 여성 페미니즘의 한계는 명백하다. 어느 정도의 돈과 권력을 얻은 여성들은 더이상 모두의 평등을 위해 싸우지 않고 자신의 욕망을 위해 싸우기 때문이다. 가령 육아문제에서 이들은 모든 여성에게 도움이 될 만한 사회복지 프로그램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자기 아이들을 사립학교 같은 좀더 괜찮은 교육기관에 맡기는 일에 더 몰두한다. 건강보험과 의료, 공공주택 등 저소득층 여성들에게 시급한 문제들은 페미니스트의 관심사에서 멀어져갔다. 그 결과 페미니즘에 남은 것은 각자도생이자 역량강화뿐이다.(3)

역사적으로 가부장제는 남성 가장의 권력과 재산을 위해 여성을 착취하고 이용하는 제도적 시스템이다. 이 시스템은 자본주의의 발전과 함께 가부장적 기업, 가부장적 국가로 이어졌다. 이 시스템은 권력과 돈의 논리를 중심으로 돌아가며 항상 누군가를 착취해야 하는 구조를 만들어낸다. 따라서 여성혐오 같은 현상은 그저 여성에 대한 막연한 혐오가 아니라, 동성애혐오나 빈곤혐오와 마찬가지로 상대를 비인간화여 정상/비정상을 구분하려는 가부장제의 구조로 봐야 한다. 문제는 페미니즘이 돈과 권력에 접근하면서 가부장제에 맞서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에 적극 참여한 것이다. 이로써 페미니즘 덕분에 더 평등한 세상이 온 것이 아니라, 여전히 불평등한 세상에 여성만 더 많아진 결과가 되었다고 저자는 말한다.(4)

이 책에서 가장 논쟁을 불러일으킬 만한 부분은 이른바 남자들과의 싸움에서조차 페미니즘이 돌아볼 것이 많다는 저자의 주장이다. 우선 그 싸움의 심리적 기제는 투사(投射)’일 경우가 많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즉 남자들을 지나치게 공격적이고 대책 없으며 골치 아픈 사이코패스로 치부해버림으로써 여성들은 절대 그렇지 않다고 쉽게 안심하게 된다는 것이다. 또하나 싸움의 기제는 분노. 여성혐오 발언이나 성희롱에 관련된 남성들에 대한 페미니즘의 대응은 흔히 욕이 난무하고, 시위가 조직되며, 결국 해당 남성이 해직되는 데까지 나아간다. 이는 여성의 마음속에는 이른바 리스트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 안에는 여성이 겪은 모든 불의와 모욕, 나약했던 순간들이 기록돼 있으며 이 목록은 분노문화의 동력이 된다. 그러나 이렇게 터져나오는 분노에도 불구하고 왜 그런 남성들은 끊임없이 등장하는가? 저자는 이런 분노가 개개인을 솎아내는 기능을 할 뿐 여성혐오를 구조적으로 뿌리 뽑는 역할은 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처벌에 집중하는 분노문화는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경쟁과 폭력은 보상하고 연민과 보살핌의 가치는 깎아내리는 이 시스템 자체와 싸워야 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5-6)

 

낭만적 사랑을 넘어서 새로운 상상력으로

페미니즘이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는 분노문화만이 아니다. 오히려 더 결정적인 한계는 낭만적 사랑과 결혼이라는 제도 밖으로 한걸음도 나아가지 못한 것이다. 만약 한 여성이 낭만적 사랑과 결혼의 구조 밖에서 살기로 결심하다면, 그녀에게 남은 선택은 고독한 삶뿐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여성 다수가 사랑과 결혼 안에 머물 수밖에 없는 것은 그 외의 삶을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인데, 이는 새로운 양육 공동체나 한부모 육아 같은 문제를 상상하지 못한 페미니즘 탓도 크다. 지금까지 여성들은 낭만적 사랑에서 우위에 설 수 있는 방법으로서의 자기역량 강화에 주력해왔다. 낭만적 사랑에 기대는 것 외에는 대안이 없기 때문에 여성들은 어린 시절부터 미래의 배우자에게 어필할 수 있어야 한다는 압박을 받는다. 돈과 직업이 경쟁인 것처럼 사랑도 경쟁이기 때문에 사랑과 섹슈얼리티에서 이득을 보는 여성은 이를 지키기 위해 경쟁에 나선다. 페미니즘은 결국 여성들이 낭만적 사랑의 복합체 밖에서 살아볼 만한 인프라와 상상력을 만들어내지 못했다.(7)

여성의 안전 문제와 관련해 페미니스트들이 분노하는 데는 분명히 이유가 있다. 여성들은 이 문제로 고통을 받았고, 그 고통은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그러나 여성의 안전은 지난 수세기 동안 남성들의 선전도구로 이용당해왔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남성들은 전쟁에 나서고 싶어할 때마다 자신들의 적이 여성에게 얼마나 위협적인 존재인지를 부각해왔다. 또한 자신들의 폭력을 정당화하는 데 여성의 안전을 이용했다. 무조건 여성들만 피해자라는 인식도 위험하다. 여성도 거짓말을 할 수 있고 남성을 함정에 빠트릴 수 있다. 도덕적·정치적 올바름으로 무장하고 울분을 터뜨리는 것이 꼭 정의로운 방식은 아니다. 페미니즘은 시민적 정의와 더 올바른 싸움에 눈을 떠야 한다.(8)

이 책의 역자가 지적하듯이 과연 페미니스트라는 말이 한국에서도 똑같은 맥락으로 읽힐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그 막강하다는 한국의 아이돌들조차 스스로 페미니스트임을 밝히는 것이 부담스러운 사회이니 말이다. 그러나 이 책이 그간 논의돼온 페미니즘에 얼마간 균형추를 달아주고 새로운 질문들을 던져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문제를 인정하고 직시하는 일은 올바른 길을 여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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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맛대로 살아라』는 2015년 5월부터 2016년 8월까지 『한겨레21』에 연재했던 음식에 관한 칼럼 ‘어정밥상 건들잡설’과 다섯 편의 새로운 글을 더해 만들어진 책이다. 『한겨레21』로부터 연재를 부탁받았던 시기는 식재료에 관한 사사로운 견해를 묶어낸 책 『알고나 먹자』가 출간된 직후였다. 음식에 대한 이야기를 일반적이지 않은 시각으로 풀어주길 바라는 요청이었지만 더이상 음식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았다. 『알고나 먹자』에서 이미 충분히 서술한 데다 『딴지일보』에 연재했던 『야만인을 기다리며』(가제)라는 여행기를 통해서도 다양한 방식으로 이야기한 후의 제안이라 같은 말을 반복하는 일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차에 영화감독 구로사와 기요시가 떠올랐고 그에게 영감을 받아 연재를 시작했다. 



구로사와 기요시는 「큐어」 「도플갱어」 「밝은 미래」 「도쿄소나타」와 같은 B급 호러영화 혹은 장르를 규정지을 수 없는 이상한 영화를 만들어온 일본의 중견감독이다. 지금은 그가 제시한 새로운 영화언어가 영화계에 널리 알려져 있지만 「큐어」로 세상에 알려지기 전까진 괴짜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유년기부터 단편영화를 만들며 영화감독의 꿈을 키워왔지만 기회는 쉽게 찾아오지 않아 한동안 포르노 영화를 만들기도 했는데 포르노 영화 제작자(닛가츠 영화사)가 구로사와 기요시에게 했던 제안은 단순한 것이었다.

“70분짜리 영화에 섹스 장면이 다섯 번 이상만 들어가면 돼. 그리고 나머지는 너 알아서 찍어.”


구로사와 기요시는 제작자의 요청대로 섹스 장면이 다섯 번 이상 들어가는 포르노 영화를 찍었는데 그 안에서 호러, 미스터리, 코미디, 멜로, SF를 비롯한 다양한 장르를 뒤섞고 찢어발기며 마음껏 실험할 수 있었고 이때의 자유로운 실험이 자신의 영화 스타일을 만들었노라고 말했다. 


『한겨레』의 제안은 포르노 제작자의 제안처럼 들렸다. 소재가 음식이라면 내용은 작가의 역량에 맡긴다는 제안은 매력적인 것이었다. 구로사와 기요시와 내가 다른 점이 있다면 나는 작가의 꿈을 꾸는 사람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단지 생각나는 것을 『딴지일보』에 적어나갔던 『알고나 먹자』가 책이 될 때도 기쁨보다는 의아함이 앞섰는데 칼럼을 써달라니…. 제안은 칼럼이었지만 처음부터 칼럼이란 ‘장르’는 머릿속에 없었다. 느슨한 테두리 안에서 내면의 흐름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어정밥상 건들잡설’이란 제목을 짓고 첫 글 「미나리연연」을 썼다. 말하자면 ‘어정밥상 건들잡설’의 ‘어정밥상’은 형식이고 ‘건들잡설’이 주 내용인 것이다. 또한 주변에 차고 넘치는 그 못난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라도 기록해줘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나 자신부터 못나디 못났지만 나와 만나는 그녀 또한 못나디 못났고, 글에 자주 등장하는 내 어미 또한 지독하게 못났을 뿐만 아니라 내 주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대부분이 이 시대를 살았었는지도 모를, 기억해주는 이 아무도 없는 못난 사람들이어서 그들에 대한 이야기도 한마디 남기고 싶었다. B급의 품위는 못난 것들을 못나고 볼품없는 언어로 깊이깊이 품어 서로의 설움을 달래는 데 있지 않을까. 싸구려로 무장해 세련됨을 파괴하는 데 있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여전히 B급을 사랑하고 거칠고 투박한 B급 언어로 이야기한다. 


‘칼럼’이라는 짐짓 그럴싸한 형식과 위엄을 사투리와 욕설과 이해 못할 문장과 받아들이기 거북한 주제들로 버무려 끌어내렸다. 이러한 행위는 나 자신을 파괴하는 행위이기도 할 테지만 『한겨레』의 권위를 추락시키는 일이기도 해서 언제고 해고를 통보받을 법도 했는데 『한겨레』는 1년이 넘도록 내 글을 계속해서 받아주었다. 감사하기보단 고집이 참 쎄구나,라는 생각이 우선 든다. 또한 이런 글을 책으로 엮자고 제안한 북인더갭의 안병률 대표도 의아하긴 마찬가지다. 거칠고 사나운 글에서 따뜻함을 느꼈다니 B급을 사랑한 포르노 제작자임이 분명하다. 그 혜안(?)에 감사드린다. 


글은 수많은 형식들을 끌어들여 비틀고 뒤섞어놓았다. 주제는 일관되지만 형식은 중구난방이다. 이게 소설인지, 시인지, 산문인지, 에세이인지, 칼럼인지 구분하기 힘들고 단락과 단락이 아무런 연관성 없는 이야기들로 이어지기도 하지만 다 읽고 나면 무슨 소린지 이해는 간다는 글들이 태반이다. 가령 「은하의 물고기들」과 같은 이야기는 이게 도대체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다는 사람들이 많았고, 『한겨레』에서도 화자를 표기하자고 제안했다. 그래서 단락마다 화자를 표기했지만 책에는 표기하지 않았다. 이 글은 다양한 인물들의 다양한 이야기일 수 있지만 내가 지어낸 다양한 사람들의 목소리이므로 한 사람(나)의 이야기로 읽는 것이 좋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 안에는 다양한 사람들의 전언과 소망이 담겨 있다. 따라서 「은하의 물고기들」은 시에 가깝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 화자를 구분 지으려는 노력은 매우 헛된 짓이다. 글 전체를 하나의 목소리로 읽으시길 바란다. 또한 「스스로 살아가기 마련이다」와 같은 글은 문단과 문단을 연결 지어 읽기 불편하게 써진 글이다. 삐거덕거리며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털털거리며 살아가는 두 인생의 이야기가 유려한 문장으로 부드럽게 표현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단어와 문장과 단락이 뚝뚝 끊어지고 시간을 급작스럽게 뛰어넘다보니 읽기에 불편하다. 어쩌면 이러한 글이 태반이다. 대체로 삐거덕거리며 살아가는 못난 삶들을 이야기에 담았으므로 형식 또한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연재를 하는 동안 단 한 편도 쉽게 씌어진 글이 없었다. 2년 가까이 글을 쓸 때마다 끙끙거렸는데 그때마다 흔들리는 마음을 지켜주고 주제와 형식에 대한 토론을 지치지 않고 이어나가준 사람은 ‘그녀’ 서윤이다. 나의 위대한 스승이자 도반인 서윤에게 이 글을 빌려 다시 한번 깊이 감사드린다. 존경할 수 있는 사람을 곁에 두고 친구이자 연인으로 생을 함께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저 높은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는 것보다 값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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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의 호구가 되어주는 일


by 북인더갭 김실땅



장마의 정점에서 한 권의 책을 마무리했다. 네 맛대로 살아라라는 음식 에세이집이다. 장맛비의 막가파식 빗줄기처럼 화끈하게 또한 끈끈하게 올 여름, 찜통더위와 신간의 폭포 속에서도 무사히 살아남기만을 바랄 뿐이다


틀에 박힌 레시피를 던져버린 재야 셰프, 전호용의 맛있는 인생잡설이란 부제목을 오케이 놓으며 새삼 읊조려보았다. 부제목의 느낌도 아주 좋았다. 레시피 따위에 벌벌 떨지 않는 셰프라니, 얼마나 멋진가. 또한 음식의 자도 모르던 내가 이런 책을 감동과 함께 만들어 내다니, 헼헼, 웃음이 막 나왔다

 

(시집간 언니가 4kg이 넘는 초우량아 조카를 낳고 병원에서 몸을 추스르던 어느 초겨울이었다. 착한 동생인 나는 집에서 미역국을 끓였다. 하지만 냉동실을 뒤져 아무거나 손에 잡히는 고깃덩어리를 꺼내든 순간부터 뭔가 막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 고기에는 하얀 기름이 넘 두툼하게 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어쨌든 고기잖아, 산모가 먹을 건데 기름진 고기를 많이 넣어야지, 나의 미역국 테러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 후로 식구들 사이에서 나의 만행은 거의 이십년이 다되도록 인구에 회자되는 중이다. 삼겹살로 미역국을 끓이다니. 그것도 산모 먹으라고, .)

 

내가 이런 사람인데도, 전호용의 원고를 읽으며 그렇게 기가 죽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나는 정말, 대로 산 것이다!?! 그리고 밥의 거룩함과 관계의 따뜻함, 그리고 맛있음의 사회적 의미 매료되기에도 바빴으니 쪽팔리거나 주눅들 시간이 없었다고나 할까

 

내 논에 물 들어가는 소리와 내 새끼 목구멍으로 젖 넘어가는 소리만큼 듣기 좋은 소리는 없다하지 않던가. 밥이라는 게 그런 것이다. 이것은 모두의 소박한 꿈일 수도 있지만 내 배 부르고 내 새끼 배부르면 장땡이라는 탐욕의 근원이기도 하다. 하지만 동시에 탐욕의 근원인 밥을 옆 사람과 나눠 먹으며 타인을 챙기고, 보잘 것 없는 어느 한 생명이라도 보듬는 행위는 성서의 오병이어 기적의 현대판 버전이라 감히 칭할 수 있을 것이다.

 

전호용의 표현대로라면 그것은 바로 내가 너의 호구가 되어주는 것이다.(74) 전단지를 돌려 먹고사는 용숙이, 육류 마니아 에그 조와 풀떼기 마니아인 아저씨, 몸을 녹여 농사를 짓는 홀로된 어미, 염전 구석 보루꾸로 담 올린 단칸방에 살던 옛 친구, 그리고 수프얀 스티븐스를 즐겨 듣는 명견 마당쇠에 이르기까지 이토록 못나디 못난’(7) 인생들의 호구가 된다는 것은 이들과 마주앉아 밥을 나눠먹는 일이다. 아무리 산해진미라 해도 뭔 맛에 혼자 먹간디.

 

또한 너무 귀하고 귀해 자주 만날 수조차 없는 그녀와의 데이트를 몰래 훔쳐보는 재미야말로 이 책의 별미가 아닐까 싶다. 그녀와 함께 꿈꾸는 모든 일들이 멋지게 이뤄지길.

 

도시에 있어야 안정감을 느끼는 서울 촌것인 나는 첫 페이지부터 끝 페이지까지 내내 감탄하며 읽었다. 무한경쟁을 부추기는 오늘날, 누군가를 밟아버린 후 빨리 앞서가고 싶은 욕망이 내 목을 옥죄올 때, 내 눈에 못나 보인다는 이유로 한 생명을 깔아뭉개고 싶을 때, 재야 셰프 전호용의 네 맛대로 살아라일독을 강추한다. 그리하면 누군가의 호구가 되어주는 신들린 오지랖에 완전 전염될 것이다. 기적이 별 거간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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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호용

 

학창시절 가출해 요리에 손을 댄 후 숙식제공이 가능한 레스토랑에서 본격적으로 요리를 배웠다. 공사판 막일꾼, 인쇄소 직공, 화물트럭 운전사로 일하며 틈틈이 조리사 자격증을 땄고 술집 주방, 분식집, 보쌈집, 일식집 등을 거치면서 거의 모든 요리를 섭렵했다. 몇차례 식당개업 후 지금은 전주에서 심야식당을 운영하며 글을 쓰고 있다. 아톰(Athom)이란 필명으로 딴지일보알고나 먹자」 「야만인을 기다리며, 한겨레21어정밥상 건들잡설을 연재했다. 저서로 알고나 먹자가 있다.

 

네 맛대로 살아라한겨레21에 연재한 어정밥상 건들잡설에 살을 붙여 펴낸 책이다. 이 책에서 나는 못나고 볼품없는 존재들에 대해 밥을 빌려 이야기했다. 세상은 못난 것들의 밥을 빌려 존재하고 유지된다. 밥이 넘쳐나는 시대라도 많은 이들에게 밥은 여전히 기복의 대상이다. 이 책에서 빌고 또 빌었다. 밥이라도 맘 편히 자시라고. 윤달 들어 5월이 유난히 길고 긴 2017년 늦은 장마 무렵에 이 책을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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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에 박힌 레시피를 던져버린 재야 셰프

전호용의 맛있는 인생잡설



레시피를 던져버린 재야 셰프전호용의 신간 에세이 네 맛대로 살아라가 출간되었다. 이른바 떠들썩한 먹방과 셰프의 시대에 맛이란 화려한 레시피에 달린 것이 아니라, 사람들과 나누는 관계에 좌우되는 것임을 그려낸 이 책에서 저자는 밥 주변을 서성이는 ‘B급 인생들을 통해 우리가 점점 잃어가는 맛의 참된 의미를 하나하나 짚어내고 있다. 저자 전호용은 학창시절 가출하여 숙식제공이 가능한 레스토랑에서 처음 요리를 배운 후 막노동판을 전전하며 조리사 자격증을 땄으며 술집 주방, 일식집, 분식집 등에서 세상의 온갖 요리를 섭렵한 독특한 이력의 셰프다. 서른일곱의 나이에 온갖 식재료에 담긴 비밀을 밝힌 알고나 먹자(2015)를 펴내 음식계를 깜짝 놀라게 했으며, 지난 2014년에는 1년 동안 야생에서 자기 손으로 거둬들인 음식만 먹고사는 과감한 실험을 감행하기도 했다.

 

맛이 중허냐, 먹는 사람이 중허냐?

 

세상에 넘쳐나는 것이 맛집이요, TV만 켜면 나오는 게 먹방에다 유명 셰프인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하지만 이 풍요로운 맛의 시대에 우리는 뭔가 아쉬움을 느낀다. 어느 실직한 가장이 아내를 기다리며 끓여낸 소박한 김치찌개는 과연 그런 먹방의 어느 한자리에 끼어들 수 있을까? 혹시 지금 들끓는 요리 열풍에는 정작 중요한 맛의 맥락이 끊어진 것은 아닐까? 전호용의 신간 네 맛대로 살아라는 바로 이런 문제의식에서 비롯되었다. 맛이란 것 역시 공동체 내에서 사회적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 그런 맥락을 되찾지 못하면 요리란 그저 맛있고 보기 좋은 음식에 머물고 말 것이라는 진단에서 이 책은 시작한다.


음식의 맛이 특별한 이유는 그 안에 담긴 맥락덕분이다. 아욱국 같은 음식이 그리 특별할 것 없는 한끼 식사용이라는 생각은 가당치 않다. ‘그녀에게 한끼 밥을 먹이기 위해 한줄기 한줄기 부드럽게 다듬고 쌀뜨물을 받아 아욱의 숨이 죽기를 기다리며 끓이는 그 시간은 감히 5분이라고 딱 자를 수 없는 의미를 갖는다(네 맛대로 먹어라). 떠들썩한 와일드푸드 축제에서 인파에 치여 구워먹는 옥수수나 감자보다는 동네 편의점에서 친구들과 웃고 떠들며 맛보는 컵라면 같은 것이 진정한 와일드푸드에 가까운 것도 맛에는 맥락이란 것이 존재하기 때문이다(밝은 미래).


저자의 말을 곱씹어보면 밥은 남과 함께 먹는다는 의미에서 사회적인 것이다. 이 책에는 음식 주변으로 모여들어 서성거리는 여러 존재들이 등장한다. 식당 전단지를 돌려 먹고사는 용숙이, 오십줄에 접어든 육식 마니아 배달원 에그 조, 채식주의자 주방보조 아저씨, 몸을 녹여 농사를 짓는 홀로된 어미, 그리고 인디 음악을 즐겨 듣는 명견 마당쇠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버려지는 낙과(落果)처럼 못난 존재들이지만, 엄연히 을 둘러싸고 생명을 이어가는 존재인 것이다. 그리하여 이들과 마주앉아 밥을 나누는 것은 바로 내가 너의 호구가 되어주는것이다(용숙이). 밥을 나눠 먹으며 타인을 챙기고, 보잘 것 없는 어느 한 생명이라도 보듬는 행위는 그 자체가 하나의 기적이라고 감히 칭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저자에게 맛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맛 주변을 에워싼 사람들이다. 그런데 어느 시점에선가 맛은 물신화되어 그 인간적인 맥락을 잃어버렸다. 단칸방에 석유풍로와 연탄불로 밥을 지어먹던 시절, 매캐한 석유냄새와 함께 식탁에 오르던 마법같이 황홀한 음식들이 있었다. 석유풍로에서 국이 끓고 달걀물 바른 소시지가 부쳐지는 사이 연탄불에선 들기름 바른 김이 구워지고 가까운 바다에서 잡아올린 숭어가 올라오며 밥솥 안에는 달걀찜이며 호박잎 등이 쪄진다. 그런데 아파트가 들어서고 방이 넓어지고 식구들이 뿔뿔이 일터로 흩어지면서 그 풍요롭던 식탁에는 각종 패스트푸드와 배달음식이 채워졌고, 식구들이 함께 나누던 밥의 온기마저 식어버렸다(빈부빈부). 결국 공동체의 상실이 맛의 상실을 낳았으며 우리는 이 풍요의 시대에 역설적으로 매우 초라한 밥상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레시피를 던져버리고 맛을 상상하라!

 

그러므로 세상에 떠들썩하게 넘쳐나는 레시피란 것에 대해 저자는 깊은 유감을 표한다. 혹자는 무슨 시크릿 레시피가 있어서 그것을 따라하면 정답요리가 나올 것처럼 말하지만, 음식에 그런 정답은 없다(네 맛대로 먹어라). 레시피는 그저 방향을 제시할 뿐, 정답을 요구하지 않는다. 파가 없으면 양파로, 꿀이 없다면 설탕으로, 각 재료의 특성을 이용해 당신만의 음식을 만들면 그만이다. 오히려 한 가지 맛을 내려 고집하기보다는 단맛을 신맛과 연결해주는 쓴맛을 찾아내는 것, 다시 말해 설탕과 식초 사이에 겨자를 첨가하는 그런 실험이야말로 맛의 풍부한 변주를 즐기는 일이다(맛의 스펙트럼). 달을 쳐다보며 빵을 떠올리는 것처럼, 요리는 상상에서 비롯되고 완성된다. 그 점에서 맛이란 멋과 닮았다. 누구의 눈치를 봐서는 멋이 탄생할 수 없는 것처럼, 자기만의 이야기가 스며들지 않고는 맛이 나올 수 없는 것이다. ‘네 맛대로 살아라는 저자의 조언은 이런 의미를 담고 있다.


그처럼 숭배되는 레시피 대신 저자가 강조하는 바는 무수한 시간과 정성과 기다림이다. 예부터 콩나물시루를 요강 옆에 둔 것은 온가족이 요기를 해소할 때마다 물 한바가지를 끼얹어야 제대로 자라기 때문이었다(여럿의 무심함을 먹고 자라는 콩나물). 어디 그뿐인가. 미나리 한줌을 얻기 위해서는 춥디추운 날 가슴까지 차오르는 물속에 들어가서 거둬들이는 수고가 요구된다(미나리 연연). 토란대는 말린 것을 삶아 사나흘 물에 담가둬야 하며 고사리는 말리고 물에 불려 삶아 맑은 물로 씻어내야 하며 무청은 한겨울 바람 맞혀 말린 후 물에 불리고 삶은 것이라야 제맛이 난다(그리고 기다릴 것이다). 어쩌면 한국 음식은 세계 최고의 슬로푸드이며 우리 민족은 기다림의 민족이라 할 만하다. 그런데 그렇게 정성들여 키우고 기다린 대가는 어이가 없을 정도로 민망하다. 미나리 한박스에 7천원, 콩나물 한줌 값이 천원이 되지 못하는 시대는 처절하게 빛나는 노동의 가치가 무참하게 훼손되는 이 시대의 논리를 닮았다.

 

파는 밥에 담긴 진심 함량 25%

 

이 책에는 주변인들의 이야기뿐 아니라 저자 본인의 체험도 여기저기 녹아들어 있다. 지난 2014년 저자는 야생에서 오직 자기 손으로 거둔 것으로 1년간 연명한 적이 있다. 어느 셰프도 감행해보지 못한 이 전대미문의 시도에서 저자는 자연이 전하는 말에 귀기울이는 소중한 지혜를 터득했다고 한다. 처음엔 밥을 구하지 못해 20kg 이상 살이 빠지기도 했지만, 중반 이후엔 계절과 날씨, 밤과 낮의 변화에 적응하는 자신의 몸을 발견했다(안수정등달다). 육체는 겉으론 쇠락의 길을 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더우면 서늘해지고 추우면 혈액 속에 지방을 축척해가며 다시 먹을 것을 찾아나서는 놀라운 에너지 재생 능력을 보여주었다고 저자는 회고한다.


1년간의 실험을 끝낸 후 저자는 식당을 차려 자영업의 세계로 나아간다. 지금도 전주에서 심야식당을 운영하는 저자의 고백에서 우리는 밥을 팔아 밥을 벌어먹고 사는 사람으로서의 고통을 느낄 수 있다. 저자는 돈을 받고 내주는 밥은 치사하며, 아무리 맛있고 저렴한 음식이라도 파는 밥에 담긴 진심 함량25%에 불과하다고 단언한다. 그 나머지 75%는 계산과 구라인데 의아한 것은 그렇게 구라를 쳐서 팔아봐야 남는 것이 없다는 점이다. 각종 세금과 임대료, 재료비까지도대체 이 사회의 부는 어디로 가는가? 저자는 되묻지 않을 수 없거니와 이는 아마 밥을 팔아 생계를 이어가는 이들의 동병상련일 것이다(파는 밥에 담긴 진심 함량).


또 하나 저자의 내밀한 고백은 각자의 밥을 버느라 멀리 떨어져 있지만, 끊임없이 함께 미래를 꿈꾸고 속삭이는 그녀와의 이야기다. 계속 빚만 늘어가는 식당이지만 이들에겐 적은 돈을 모아 시골에 정착하여 땅에서 나는 것으로 먹고살겠다는 꿈이 있다. 그들의 예쁜 꿈을 맘속으로 응원하며 이들의 연애 요리법을 몰래 훔쳐보는 재미 역시 이 책의 별미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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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2017331일자

 

나라에 빨대 꽂은 신귀족, 그들은 누구?

 

차브쓴 정치평론가 오언 존스

정재계 언론기득권 이면 해부

 

고소득 직업군 전락한 정치인들

좌우·여야 없이 민주주의 파괴

 

비비시 셜록까지 좌편향 몰이

지금의 한국과도 판박이로 닮아

 

전작인 <차브>(Chavs, 2011)에서 권력과 부를 독점한 영국의 소수 상류층이 벌여 온 하층계급(차브)에 대한 무자비한 계급전쟁의 실상을 파헤친 오언 존스(33)는 후속작 <기득권층>(The Establishment, 2014)에서 지금의 영국 사회 실상을 이렇게 묘사한다.



수백 수천명이 푸드뱅크에 줄을 서야 하는 상황인데도 상위 1천명의 부자가 5200억 파운드를 움켜쥐고 있다. 나라를 경제 파탄의 수렁에 밀어넣는 데 일조하고, 공적자금 1조 파운드로 구제받은 재계 엘리트들은 여전히 번성하고 있다. () 언론은 정보를 알리거나 () 권력자를 비판하기는커녕 소수 거부들의 야심, 편견, 적나라한 사익추구를 위한 장이 되고 있다.”


옥스퍼드대에서 역사학을 공부한 노동조합 활동가 출신의 정치평론가인 존스는 이런 영국을 한마디로 부자들을 위한 사회주의국가로 규정한다. 기득권자들만의 동맹을 강조한 말이다. 지금은 자연스럽게 보일지 모르지만 후세대는 분명 이런 상황이 어떻게 정상적이고 합리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는지, 경악과 경멸을 금치 못할 것이라고 그는 썼다.

 

존스는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브렉시트)도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려고 상류층이 감행한 기획이라고 본다. 탈퇴 여부를 물은 주민 찬반투표에서 투표자 다수가 탈퇴 쪽을 택한 것은, 존스의 설명대로라면, 하층민과 이주민 등을 악마화하면서 민족주의와 인종주의를 부추겨 계급전쟁의 실상을 호도한 결과다. 존스는 다시 재가동될 것으로 알려진 스코틀랜드 분리독립운동도 독점적 특혜를 누리는 잉글랜드 중앙 기득권층으로부터의 소외에 대한 반발로 본다.


저자는 기득권층의 계급 이기주의를 여러 방식으로 설명한다. 기득권층은 민주주의가 자신들의 이익을 위협하지 않도록 관리하는 권력집단이다. 그들은 자신들을 더 광범위한 인구로부터 보호하려는 방화벽을 구축한다. 기득권층은 또한 권력이 행사되는 공적이고 사회적인 관계망 전체를 뜻하기도 한다.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소수 권력집단으로서 영국 기득권층의 연원을 존스는 우선 1947년 스위스에서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주도하에 결성된 몽페를랭 소사이어티에서 찾는다. 자유방임 자본주의경제를 주장하며 국가의 개입을 악으로 본 하이에크와 미국 자유시장주의자 밀턴 프리드먼의 주장은, 1930년대 대공황과 2차대전기의 전시계획경제를 거치면서 버림받은 소수 기인들의 파산한 이념 취급을 당했지만 화려하게 부활했다.


1970년대 들어 미국이 주도한 전후 고원경기가 끝나갈 때 우익 학생정치의 거점 세인트 앤드루스대학의 대학원생 매드슨 피리가 하이에크와 프리드먼을 알게 되고 애덤스미스연구소를 차릴 무렵부터 사정이 달라진다. 1971년 베트남전쟁 개입으로 휘청거리던 미국이 브레튼우즈 체제를 해체한 뒤 석유파동의 충격파가 밀려왔다. 하이에크·프리드먼의 자유방임 시장주의 이념은 그 위기 속에서 부활했고, ‘사회주의 미늘톱니(역진 방지장치가 달린 톱니바퀴)’가 돼버린 영국 정치를 바꾸겠다던 마거릿 대처가 집권하면서 신자유주의로 거듭났다. 미국 로널드 레이건 정권 등장으로 신자유주의는 지배적 지위를 차지하게 된다. 당시 미 공화당연구위원회에서 일하던 피리가 역미늘톱니라는 용어를 만들어냈고 영국의 경제문제연구소, 공화당연구위원회에서 갈라져 나온 에드윈 퓰너가 만든 헤리티지재단 등 우파 싱크탱크들이 역미늘톱니를 앞장서서 돌렸다. 존스는 하이에크 이후 지금까지 역미늘톱니를 부르짖는 이론가들을 선동자(The Outriders)로 명명하며 자세히 설명하는데, 이들은 정치인 카르텔, 언론 귀족, 경찰, 갑부와 세금포탈범 등을 잇는 사상·이념의 연결고리다.


신자유주의 경제하에 정치인들은 고소득 직업군으로 전락했다. 좌우도 없었다. 대처 정권 이후 영국의 정치인들은 부자 감세, 민영화, 반노조, 경제금융화에 앞장섰고, ·야 구분 없이 기득권을 형성해 무자비한 계급전쟁의 핵심 전사가 됐다. 노동당도 1990년대 말 토니 블레어의 3의 길과 함께 사실상 신자유주의(대처리즘)에 투항했다. 말년의 대처조차 그런 노동당 집권을 대처리즘의 종말이 아니라 번성으로 받아들이며 감격해 했다고 한다. 저자는 블레어 이후 영국 노동당을 신노동당이라고 일컫고, 레이건 정권 뒤 신자유주의를 이어받은 빌 클린턴의 미국 민주당도 신민주당이라 부른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1997년 외환위기(IMF사태) 격랑 속에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인 한국의 집권당도 신민주당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파손된 민주주의를 바로잡는 데 앞장서야 할 언론은 오히려 기득권층의 마이크가 돼버렸다. 키스 루퍼트 머독 등 정치적 동기를 가진 소수의 소유주들이 지배하는 영국의 주류언론을 두고 존스는 영국에 자유로운 언론은 없다고 단언한다. “여론조사 결과 영국인 대다수는 철도와 에너지 및 공익사업의 재국유화, 주택 임대료 제한, 생활임금 도입과 부자 증세를 바라고 있으나 이런 요구를 지지한 주류 신문은 없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보수당 각료는 런던에서 좌파 교육을 받고 자란, 과잉 대표되는 좌경무리<비비시>(BBC)를 지배한다고 주장했다. 심지어 텔레비전 드라마 <셜록>까지 좌편향의 증거라고 하는 등 우파가 끊임없이 <비비시>를 비난한 건 영리한 예방책이었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중도 내지 중도 우파인 <비비시>를 좌편향이라 외침으로써 좌클릭을 미리 견제하는 동시에, 실제 극우파나 우파인 자신들의 위치도 중립이나 온건보수인 것처럼 보이도록 하는 전략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극우 내지 우파 언론, 정치인들이 <한겨레> 등을 좌파 언론으로 매도하는 것도 마찬가지 이치 아니겠는가.

영국 사회 주요 세력을 이런 식으로 까뒤집어 살핀 뒤 존스가 민주주의를 회복해야 한다며 내린 결론은 이렇다. “권력은 요구 없이는 그 무엇도 내주지 않는다.” “권력은 요구 없이 무언가를 포기한 적이 절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19세기 미국 흑인 노예였다가 사회개혁운동가로 거듭난 프레더릭 더글러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경향신문> 41일자

 

[책과 삶]영국의 민주주의는 선동당했다, 기득권자들에게

 

지금의 영국을 만든 건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다. 정확하게 말하면 대처의 승리가 심어놓은 하나의 사고방식, 이른바 대안은 없다는 그 유명한 구호다. 국가의 개입을 최소화하고 시장에 무제한의 자유를 주는 것 이외에 다른 대안은 없다는 사고방식이 대처 집권 이후 영국을 휩쓸었다. 지금 영국 기득권층은 대처의 정신적 후예들이다.

 

스물여섯살이던 2011년 영국 하층계급의 현실을 다룬 <차브>로 주목받은 젊은 논객이자 가디언 칼럼니스트 오언 존스는 새 책 <기득권층>에서 기득권층을 하나의 이데올로기를 공유하는 집단이라고 정의한다. 영국 기득권층이 공유하는 이데올로기가 바로 대처식의 사고방식이다. 존스에 따르면, ‘자유시장이라는 신념을 토대로 삼는 기득권층의 사고방식은 다음과 같다. “공공자산을 되도록 많이 영리사업으로 전환하고, 이전에 국가가 경제에서 담당해온 역할에 어느 정도 반대하거나 혹은 그런 국가개입을 적대시하며, 사익에 부과되는 세금의 감면을 지지하고, 어떤 형태이건 현 상태에 도전할 가능성이 있는 모든 조직을 격퇴한다.”

 

영국 기득권층을 구성하는 것은 선동자, 정치인, 기업인, 언론인, 갑부들이다. 먼저 짚어야 하는 것은 선동자의 역할이다. 보수파와 그들의 이데올로기가 처음부터 영국을 장악했던 것은 아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과 유럽을 지배한 것은 사회민주주의였다. 자유방임주의 경제학이 1930년대의 대공황과 전쟁에 대해 책임이 있다고 믿었던 그 시절, 자유방임주의를 신봉했던 유럽 우파들은 좌파의 힘에 짓눌려 있었다. 영국 또한 1945년 노동당 정부가 사회민주주의적 합의를 세운 이래 30년 가까이 사민주의적 정책이 시행됐다. 노조는 강력했고 주요 기업은 국영이거나 공영이었다.

 

보수당 정치인들조차 온정적 복지국가를 추구하던 그 시절, 우파 선동자들은 괴짜 취급을 받았으나 아랑곳하지 않고 사상 투쟁을 전개했다. 경제문제연구소, 애덤스미스 연구소, 정책연구소 같은 싱크탱크가 거점이었다. 끊임없이 담론을 생산하고 언론을 통해 유포했다. “처음에는 숫자가 적었는데도, 이 선동자들의 업적은 그야말로 엄청났다. 그들은 한때 구제받기 어려울 만큼 우스꽝스럽고 괴상한 착상이었던 것을 새로운 정치적 상식으로 만들었다.” 대처리즘의 초석인 민영화, 규제철폐, 부자감세 등의 정책이 이들의 입을 통해 영국 사회 안으로 침투했다. 19795월 대처가 집권했을 당시 영국 진보파는 이미 대처의 민영화 논리를 무너뜨릴 수 없을 정도로 정치적으로나 사상적으로 위축된 상태였다. 선동자들은 과격한 우익 사상의 지적 토대를 마련하고 그것으로 다수 대중을 사로잡음으로써 현재 영국 기득권층의 돌격대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 것이다.

 

물론 선동자들이 자신들만의 힘으로 우파 이데올로기의 성채를 쌓아올린 것은 아니다. 정치인, 언론인, 기업인들은 선동자들과 긴밀한 네트워크를 맺고 일종의 지배연합을 구축했다. 정치인은 민영화와 감세 정책을 내놓고, ‘팩트따위에는 신경 쓰지 않는 선정주의 언론인은 민영화 반대나 감세 반대를 헛소리로 몰아붙인다. 기업인들, 특히 금융자본가들은 이들의 자금줄이다. 영국 보수당의 가장 큰 후원자는 헤지펀드계의 일인자이자 보수당 공동 회계담당자인 마이클 파머다. 우익 싱크탱크는 보수파 거물들 및 소위 자유시장이라는 곳에서 기득권을 차지한 은행가들의 비밀회의소나 마찬가지다.

 

노동당의 변신이 보수파의 승리를 거들었다. 심지어 노동당이 총선에서 승리했을 때조차 진짜 승자는 보수파였다. 노동당은 부와 권력을 가진 자들에게 도전하기 위해 만들어진 정당이지만 1994년 토니 블레어가 지도부를 장악한 후 3의 길이라는 명분으로 보수 이데올로기에 투항했다. 블레어의 신노동당은 대기업의 세금 부담을 덜어줬고 최저임금제 시행에도 주춤했다. 정당과 지역사회의 연계성도 약화됐다. 1950년대 노동당 당원은 100만명이 넘었으나 책이 출간된 2014년 무렵에는 20만명으로까지 떨어졌다.

 

저자는 기득권층이 영국 민주주의를 축소하고 박탈했으며, 나라가 아주 소수의 허세를 부리는 엘리트를 위해 돌아가도록 만들었다고 비판한다. 그렇다면 기득권층으로부터 민주주의를 탈환하기 위한 방법은 무엇인가. 저자는 정책부터 제도에 이르기까지 영국 사회의 현실에 기반을 둔 다양한 제안들을 내놓는데, 한국 독자 입장에서 유의미한 것은 진보파의 단점을 지적하는 대목이다. “기득권을 수호하는 이들은 과격한 개인주의의 독트린을 설파하지만 그들 자신은 많은 경우 같은 목적을 추구하는 집단으로 함께 일하는 데 놀라울 만큼 잘 훈련되어 있다. 반면 기득권과 그 수호자들에게 반대하는 우리들은 연대를 설파하지만, 너무나 자주 개별적으로 행동하고 독불장군처럼 군다.”

 

 

<조선일보> 201741일자

 

영국 복지 부정수령액보다 엘리트의 세금 회피액이 20?

어수웅 기자

 

'로르샤흐 테스트'라는 심리학 검사가 있다. 좌우 대칭의 얼룩 잉크를 보여주고, 뭐가 떠오르는지 묻는다. 보는 사람의 편향에 따라, 다른 반응이 나오기 마련. 누구를 기득권층(The Establishment)으로 보느냐도 마찬가지다.

 

영국의 우익에게는 좌파가 기득권층이다. 1960년대 히피, 소위 68혁명 세대는 50년이 지나도 성숙하지 않았다는 것. 도덕적으로 타락한 자유주의를 아직도 유포하면서, 몽상적 혁명가에 머물러 있다는 주장이다. 반면 영국의 좌파는 사립학교와 옥스브리지(옥스퍼드+케임브리지) 출신의 끼리끼리 네트워크를 기득권으로 본다. 그렇다면 우리가 보는 것은 번진 잉크의 문양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모습인 걸까.

 

이 책은 영국 가디언지의 정치칼럼니스트인 서른셋 오언 존스의 기득권층 비판이다. '기득권층' 역시 영국이 타깃이지만, 역지사지(易地思之)와 반면교사(反面敎師)로서 의미 있다. 사례는 생생하고, 비판은 신랄하다. 옥스퍼드 역사학과 출신인 존스는 영국 노동 계층을 새로운 각도로 분석한 첫 책 '차브'(Chavs·2011)가 그 해 주요 언론들의 '올해의 책'으로 주목받으며 일약 스타가 됐다.

 

존스는 실직 이후 주당 71파운드(10만원)의 구직 수당으로 연명하던 브라이언의 사례를 든다. 알 수 없는 이유로 느닷없이 '수당 중단' 제재를 받았다는 것. 고용주와 구직자를 연결해주는 정부 사이트에 주 5회 접속하라는 지시도 어기지 않았고, 열심히 노력했다는 '구직 일기'까지 성실히 써서 제출했는데도 말이다. 집에 쌀 떨어진 지 3주 만에야 겨우 이유를 알게 됐다. 종이에 쓰는 구직 일기뿐만 아니라, 인터넷에 '온라인 다이어리'도 써야 했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 안내문에도 나와 있지 않았던 규정이었다. 영국에서는 2012년 통계로 그 해에만 86만 명이 복지 수당 제재 조치를 받았다고 한다. 전에는 제재가 최후 수단이었는데, 이제는 노동연금부가 가장 손쉽게 의존하는 방법이 됐다는 것.

 

반대의 사례로 존스는 영국 정부의 '기업자문단'을 든다. 43세에 영국 총리가 된 데이비드 캐머런이 2010년 집권했을 때 창설했던 자문기구. 구글 회장인 에릭 슈밋, 보다폰 최고 경영자인 비토리오 콜라오 등이 포함됐다. 세계 최고 기업의 대표이지만, 동시에 '조세 회피'로도 세계 최고 기업의 수장들이라는 것. 하지만 이 자문단은 기업 거물들이 총리와 핵심 측근들에게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통로가 됐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물론 촌스럽게 정부와 기업 사이에 직접 파이프를 잇지는 않는다. 파이낸셜 타임스는 지난 10년간 18명의 전직 장관과 고위 관료가 영국의 4대 회계법인에 취직했고, 이 중에는 노동당 출신의 장관과 국세청장도 포함됐다고 폭로했다. 존스는 이 회계법인들이 구글과 보다폰의 조세 회피를 어떻게 도왔고, 어떤 방식으로 법망을 피하도록 치밀하게 설계했는지를 현미경으로 전달한다. 이렇게 영국 엘리트들이 납세를 회피한 세금이 연간 250억파운드에 이른다고 했다. 우리 돈 35조원이다. 반면 정부 보조금 부정 수령으로 낭비된 돈은 12억파운드. 기득권층 조세회피액의 20분의 1에도 못 미치는 액수인데도 법은 사회적 약자에게 훨씬 더 가혹하고, 언론 역시 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고 있다는 주장이다.

 

존스가 정의하는 기득권층은 결국 촘촘하게 이어져 있는 네트워크다. 정치인 카르텔, 언론, 경찰, 기업 임원, 재벌, 그리고 미국에 종속적인 외교 관료, 그리고 이들을 호위하며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내는 이념적 경호부대(Outriders)까지. 그래서 2017년의 영국이라는 단면뿐만 아니라, 현 기득권층을 완성시킨 기원과 뿌리 역시 존스의 관심이다.

 

그가 호명하는 인물은 매드슨 피리(Pirie·76) 영국 애덤 스미스 연구소장이다. 바닷가 마을에서 고기잡이 그물을 만들어 생계를 꾸리던 한미한 집안의 자제였지만, 1970년대 세인트 앤드루스 대학에서 하이에크와 프리드먼을 공부하면서 '자유방임주의'의 신봉자가 된 인물. 애덤 스미스의 이름을 빌려온 연구소를 1976년 직접 설립한 이유도 그래서였다. 정부 개입을 죄악시하는 현 영국의 경제 정책은 이 연구소에서 사상적 토대를 얻었지만, 결국 오늘날 극단적 양극화의 씨앗이 됐다.

 

시작할 때 예로 든 로르샤흐 테스트처럼, 존스의 시각 역시 자신만의 프레임에 갇혀 있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폭과 두께에 차이가 있을망정, 기득권층이 존재하지 않았던 적도 없었고 말이다. 문제는 양극화와 불평등의 격차가 점점 커지고 있고, 중산층이 무너지면서 완충지대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우려다.

 

임계점이 멀지 않았다는 위험 신호가 지구 반대편 영국만의 일은 아니다. 다소 과격하고 선택적 인용도 없지 않지만, 이 땅의 지식 대중에게도 필요한 독서다. 산소가 부족하면 가장 먼저 격렬하게 움직인다는 '잠수함의 토끼'처럼.

 

<중앙일보> 41일자

 

[책 속으로] 기득권층의 천국, 영국을 해부하다

 

이스태블리시먼트(The Establishment)’는 우리말로는 흔히 기득권층·지배층으로 옮긴다. 영영사전을 찾아보면 어느 특정 그룹에서 권력이나 통제력을 지닌 구성원들”(웹스터 사전), “변화에 저항하는 것으로 인식되는, 사회에서 정책이나 취향에 권력과 영향력을 행사하는 그룹” (옥스퍼드 사전) 등으로 정의된다.


영국의 기득권층의 실상을 해부한 기득권층: 세상을 농락하는 먹튀의 귀재들(The Establishment: And How They Get Away With It)은 우리 독자들을 묘한 상념에 잠기게 만들 책이다. 영국은 프랑스·미국과 더불어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본향이다. 우리나라가 민주화가 된 것은 30년밖에 안됐다. 기득권층은 민주주의 원조 영국이나 민주주의 청년한국이나 도긴개긴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자부심을 느껴도 되겠다. 우리는 영국이 300년 동안 이룬 것을 30년에 해치웠다.


이 책을 읽은 영국 독자들과 마찬가지로 우리 독자들 또한 분노에 휩싸이게 될 것이다. 어떤 보이지 않는 손이 자꾸 오늘의 한국 상황을 떠올리도록 유도한다. 저자는 기득권층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부유한 엘리트가 민주주의 체제 내에서 자신의 이익을 방어하는 제도적·지적 수단.” 전작인 차브(2011)에서 희생자들인 노동자들을 악마화 시키는 기득권자들을 맹공했다.


기득권층은 이런 내용을 담았다. 저자에 따르면 영국은 세계에서 가장 부패한 나라 중 하나다. 법이 부패를 보장하는 나라다. 알고 보면 영국은 정경유착, 회전문 인사의 나라다. 기득권층은 국민의 혈세로 망해가는 기업을 살린다. 또한 영국은 엄청난 친미 국가다. 영미동맹은 기득권층의 권력 기반이다. 황당한 일도 있다. 대형 회계 회사들은 정부가 세제 정책을 꾸리는 데 도움을 준다. 회사들의 제안이 법이 되고 정책이 된 다음에 그들은 기업들에게 합법적인 탈세기법을 일러준다.


영국 기득권층은 계속 진화한다. 영국 기득권층에게 출신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사상이다. 공통의 이익을 수호하기 위해서다. 사상에 답이 있다. 현재 영국 기득권층의 이데올로그는 오스트리아 출신 영국 경제학자·정치철학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1899~1992). 그는 신자유주의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했다. 저자가 앞잡이(outrider)’라 부르는 하이에크의 후예들은 사회민주주의에 기반한 영국 기득권의 컨센서스를 대체했다. 정치인·관료·경찰·금융인·언론인·종교인 등으로 구성되는 영국 기득권층은 작은 국가·정부를 표방한다. 하지만 이들은 동시에 국가의 최대 수혜자다. 그들은 보다 공정하고 평등한 사회를 바라는 국민·유권자의 꿈을 짓밟는다.

저자 또한 기득권층에 속한다. 그는 옥스퍼드대 출신이며 좌파의 아성 가디언의 칼럼니스트다. BBC에도 단골 출연한다. 하지만 그는 폭로하는 내부자다. 그는 이 책을 쓰기 위해 수많은 기득권자들을 인터뷰했다. 그들 또한 기득권층에 대한 비판적인 의견을 내놓았다. 이 점에서 영국 기득권층은 건강하다.


사실 따지고 보면 한국과 영국은 역사적으로 앞서거니 뒤서거니했다. 고구려·백제·신라 통일은 668, 그레이트브리튼 섬의 통일은 1707년에 성취됐다. 민주주의 종주국 영국이 누리던 헤드스타트는 이제 거의 사라졌다. 한국과 영국은 이제 출발선에 나란히 섰다. 앞서 나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영국이나 한국이나 기득권층의 적폐를 쓸어내야 하지 않을까. 저자는 이대로 가면 기득권자들이 영국의 미래까지 조작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S BOX] 기득권층이 잘한 건 없었나?

오언 존스의 주장에도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솔직히 이 책은 좀 편향된 것도 사실이다. 저자는 보수주의자들을 싫어한다. 기득권층이 출간된 후 좌파는 찬사, 우파는 비판을 쏟아냈다. ‘저자가 너무 어려서 잘 모른다는 식의 치졸한 비난도 있었다. 일리가 있는 의문도 제기됐다. 비평가들은 다음과 같이 존스에게 묻는다. ‘기득권층의 장점·강점, 잘한 것도 있지 않은가.’ ‘마거릿 대처가 등장하기 전의 영국은 과연 문제가 없었을까.’ ‘선진국 기득권층이 신봉하는 신자유주의 덕분에 수십억 세계 인구가 가난에서 벗어나고 있는 것도 사실 아닌가.’ 저자는 민주주의 혁명에서 해답을 찾는다. 대중의 활동과 노조의 강화 등을 통해 부()를 재분배하는 혁명이다. ‘나이브하다’ ‘새로울 게 없다는 평가도 있었다.

김환영 논설위원 whanyung@joongang.co.kr

 

 

<국민일보> 2017331일자

 

기득권층은 누구이고 기득권은 어떻게 작동되나

다수에 맞서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려는 권력집단

자유방임주의 선동자들과 정계·재계·언론계 네트워크

그 사고방식에 재정적 상호연관과 회전문 인사로 결속

영국 사례가 아닌 금수저대한민국 기득권층의 실상

 

 

기득권층’/오언 존스 지음, 조은혜 옮김, 북인더갭, 528, 19500

 

기득권층은 누구이고 무엇인가, 어떻게 생겨났나? 도대체 기득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이런 질문에서 시작한다. 권력을 가진 자, ()를 가진 자, 지배계층, 엘리트 집단. 우리에게 친숙한 용어인 기득권층의 정의는 다양하다. 여기서는 다수에 맞서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려는 자들, 즉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소수 권력집단으로 규정한다. 정치가, 언론계 거물, 기업인과 금융업자 등이 포함된다.

 

기득권층이란 단어가 오늘날과 같은 용례로 쓰이게 된 것은 1955년 영국 보수 저널리스트 헨리 페얼리의 고정칼럼을 통해서다. 페얼리는 기득권층을 함께 어울리고 필요할 때 서로 돕는 권력자들의 관계망으로 봤다. 기득권층은 시대에 따라 변하는 유동적 집단이다. 현재의 기득권층을 이루는 핵심 요소는 공유된 사고방식이다. 바로 자신들에게 도전하는 모든 생각과 행동을 극단적이고 비현실적인 것으로 규정하는 일련의 사고방식이다.

 

그 사고방식의 기본은 이것이다. 개인의 자유로운 욕망 추구가 사회 발전의 원동력이다, 비범한 기업인·금융인에게 충분한 보상이 있어야 한다, 시장이 알아서 최선의 길을 찾는다, 국가는 개인의 자유를 침해한다, 각종 규제는 뛰어난 개인들의 재능 발휘를 방해할 뿐이다. 자유시장이라는 신념이 토대가 된 자유방임주의다. 이 뿌리에는 부와 권력을 체계적으로 최상층에 재분배하는 데 앞장서온 우익 이론가인 선동자들(The Outriders)이 있었다. 70년대 초만 해도 주변부였던 이들은 부자감세’ ‘규제철폐’ ‘민영화등을 외치며 대처리즘, 레이거노믹스를 거쳐 확고한 이데올로그로 자리 잡았다.

 

기득권층을 결속시켜 주는 것은 공통의 사고방식, 재정적 상호연관, 회전문 인사다. 이를 통해 오늘날 부와 권력의 집중은 점점 심각해지고 있다. ‘세상을 농락하는 먹튀의 귀재들이란 부제가 붙은 이 책 기득권층(The Establishment)’은 엄청난 권력을 가지고 막대한 이권을 챙기는 네트워크인 영국 기득권층의 실상을 낱낱이 해부하고 정치경제적 폐해를 고발한다. 2011년 하층계급의 현실을 파헤친 차브(Chavs)’를 펴내 세계적인 조명을 받았던 영국 칼럼니스트 오언 존스의 작품이다. 영국 유력지 가디언’ ‘옵저버등이 올해의 책으로 선정했던 화제작이다.

 

책은 국가개입을 적대시하고 세금 감면을 지지하는 기득권층의 커넥션에 주목한다. 선동자들의 이론적 토대 위에 정치 엘리트, 기업 엘리트, 주류 언론인, 우익 싱크탱크 등이 강력한 연줄을 형성한다. 대기업 후원은 끈끈한 연결고리다. 정치적 동기를 가진 소수의 소유주가 지배하는 주류 언론은 기득권의 대들보다. 기득권층의 정책과 관념을 지속적으로 대중에게 전파한다. 정계·재계·언론계 등을 서로 넘나드는 회전문 인사는 유착을 더욱 강화한다. 행정부도 기득권층의 지배적인 사고방식을 공유하며 공생관계를 구축한다.

 

기득권을 통해 작동하는 것은 부자를 위한 사회주의. 국가는 부자와 대기업을 지원하고, 필요하면 언제나 구제해준다. 탐욕으로 무너진 기업과 은행들에 제공되는 구제금융은 엄청나다. 사회적 해악임에도 기업들의 교묘한 조세회피는 끊임없이 이뤄진다. 반면 가난한 이들이 보조금의 수혜자로 국가에 의존하면 이들은 빈대밥벌레로 악마화된다. 그리고 최하층을 세금 낭비의 주범으로 몰아간다. 대중의 분노는 사회의 상부가 아닌 최하층에게로 굴절된다. 기득권층의 적인 노동조합에 대한 무자비한 공격은 기본이다.

 

대안은 없는가. 저자는 민주적 혁명을 제안한다. 그 혁명은 기득권층의 성공으로부터 배울 때에 가능하다고 한다. 기득권에 맞설 설득력 있는 학문적 주장을 내세울 유능한 선동자들을 만들어내고 대항세력들을 조직화하는 게 핵심이라고 설파한다. 아울러 인터넷과 SNS는 주류 언론의 지배를 깨뜨릴 희망을 제공한다고 강조한다. 이런 집단적 힘으로 사회정의를 성취하자는 것이다.

 

이는 영국에 국한된 사례가 아니다. ‘금수저로 거론되는 대한민국 기득권층의 실상도 다르지 않다. 이 책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현실을 바꿀 수 없다고 체념해선 안 된다. 세상을 바꾸는 일이 가능하고 실제로 일어났었다.

 

박정태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jtpark@kmib.co.kr

 

 

<서울신문> 201741일자

 

기득권층 키워낸 우익 경제 카르텔

 

포털사이트에서 기득권층을 검색하면 영어 ‘Establishment’가 가장 먼저 나온다. 영국에서 특히 잘 쓰인다는 영어 표현이다. 왕족, 귀족이 여전하고 옥스브리지(옥스퍼드대와 케임브리지대를 합쳐 부르는 말) 출신들의 끈끈한 커넥션이 존재하는 영국의 상황을 반영한 듯하다.

 

새 책 기득권층은 이 같은 영국 내 기득권층의 세계를 들춰내고 있다. 목차를 보면 대략 짐작이 간다. 정치인 카르텔, 언론 귀족, 갑부와 세금 포탈범 등 대충 일별해도 한 폭의 그림이 그려진다. 거대한 철벽 안에 소수의 사람이 있고, 그 주변을 검·경과 언론이 둘러싸고 있는 모습 말이다. 우리나라 신문 만평에서 흔히 봤던 장면이다. 한데 독특한 게 있다. 1장에 나오는 선동자들이다. 이들이 누굴까.

 

영국 기득권층의 역사는 사실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기득권층이 짧은 시간에 확고히 뿌리내리려면 공신이 필요했을 터다. 저자는 이들이 선동가들’(The Outriders)이라 불리는 우익 이론가들이라고 본다.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폰 하이에크 등의 자유방임주의자들과 자유주의 싱크탱크는 부자 감세와 민영화 등을 주장했고, 거물 사업가들은 이들에게 돈을 기부하며 활동을 도왔다. 여기에 정치인과 언론도 힘을 보탰다. 이 같은 지원을 등에 업고 자유방임주의자들의 사상이 확고하게 뿌리를 내렸고, 기득권층 역시 구조화됐다는 게 책의 분석이다.

 

책은 영국의 사례가 중심이다. 영국과 웨일스 땅의 3분의1 이상, 그리고 시골 땅의 50% 이상이 36000여명의 귀족들 손에 있다. 성직자가 자동으로 입법기관에 들어가기도 한다. 영국 초등학교 4개 가운데 하나는 성공회에서 운영하고 성공회 주교는 당연직 상원의원이다. 저자는 이 같은 상황을 뒤집어엎기 위해서는 유능한 우리의 선동자들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러 장점이 많은 책이긴 하나 이 대목은 선뜻 와닿지 않는다.

 

우리 역사를 돌아보면 민주주의를 보다 앞당길 수 있는 장면들이 몇 차례 있었다. 한데 선동가가 없어서, 이론가가 없어서 우리가 끝내야 할 순간에 끝내지 못했던 건 아니었지 싶다. 영국이나 우리나 현 상황이 탐탁지 않은 건 비슷하다. 하지만 해소, 혹은 완화를 위한 지향점은 좀 달라야 하지 싶다. 예컨대 기득권층에 대한 개념과 범위부터 분명히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증오사회, 분노사회만 심화될 가능성이 높다. 손원천 기자 angler@seoul.co.kr

 

<세계일보> 201741일자

 

권력 가진 소수집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