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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희송 신작 <세속성자> 출간 기념 북토크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교회의 문제, 신앙의 문제 등으로
고민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특히 열려 있는 자리입니다.

10월 5일 7시 30분

합정동 빨간책방 카페(3층)입니다.


아래 링크를 클릭하여 신청하시면 됩니다. 


http://bit.ly/secularsai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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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속성자> 언론 서평 모음

2018.09.14 12:33 | Posted by 북인더갭

<한겨레> 2018. 9. 14.

 

눈에 보이지 않는 기체교회를 세우자

 

어떤 거대한 권력 집단이 점점 몰락의 길을 걷더라도, 내부에선 항상 개혁의 움직임이 있기 마련이다. 기독교인들이 교회에서 채울 수 없는 지적 깨달음과 대안적인 삶에 대한 요구에 응답하고 있는 청어람아카데미가 그런 곳이다.


아카데미를 만들고 이끌어온 양희송 대표기획자는 지난 2013년부터 일요일에 교회에 가지 않는 가나안 성도들을 위해서 5년간 상하반기로 나눠서 12주씩 수요일마다 모여서 예배를 드렸다. ‘가나안 성도란 교회에 다니다가 실망하거나 또는 냉담해져서 더는 교회에 나가지는 않지만 마음 속으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로, 전체 개신교인 중 10~20%100~200만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한다. <세속성자>는 이 모임에서 양 대표가 성-속 이분법, 예배와 전도, 공공선과 같은 뜨거운 주제를 끌어안고 분투한 고민을 담은 결과물이다. 최근의 대안적인 기독교 담론을 충실하게 소화하면서도 현실적인 균형감각을 놓치지 않는 내공이 단단하다.

책에선 특히 고체-액체-기체교회 개념을 제안한 대목이 인상적이다. 그는 고체교회는 기존의 교회당을 기반으로 한 교회를, ‘액체교회는 해변교회나 길 위의 교회처럼 성도들의 모임이라면 굳이 교회당이 없어도 된다고 보는 관점을 말한다. 그럼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간 기체교회는 뭘까. 그는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을 보면서 이 개념을 떠올렸다고 한다. 핀란드, 덴마크 같은 나라들에선 교회나 교인을 찾기는 어렵지만 국가 자체가 기독교적 가치에 기반해 있어 자유롭고 평등하면서도 삶의 질이 높다. 이런 기체교회와 같은 존재방식을 고체·액체교회와 공존하며 현실화하는 것이 기독교의 앞으로의 과제가 아니겠냐고 말한다. 필 주커먼이 <신 없는 삶>에서 했던 관찰과 통하는 바가 있다.

이 책이 나온 와중에 대형 보수 교단 중 한 곳인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교단이 지난 11일 총회에서 양희송 대표가 이끄는 청어람을 비롯해 교회개혁실천연대, 좋은교사운동 등 그나마 합리적이고 공익적인 활동을 하는 기독교 단체들을 조사하겠다고 결정했다. 교인들이 이 단체들의 활동에 참여해도 되는지 판단하겠다는 것이다. 자기들이 이렇게 샅샅이 찾아서 틀어막는 것이 사실 자기 숨구멍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날이 올까?

김지훈 기자

 

 

<문화일보> 2018. 9. 14.

 

더 종교적인, 종교 밖 사람들의 삶

 

 종교가 세상을 걱정하는 게 아니라 세상이 종교를 걱정하는 시절이다. 세계적으로 이 같은 시대의 공통된 종교 현상은 ()종교화. 이미 종교 인구가 미미해진 유럽은 말할 것도 없고, 사실상 개신교 국가로 불리며 여전히 그 영향력이 큰 미국의 경우에도 지난 25년간 종교가 없다고 하는 사람이 두 배나 늘어났다. 한국도 지난 2015년 통계에서 무종교인이 전체 인구의 절반(56.1%)을 처음 넘어섰다. 이들 무종교인은 젊고 교육수준이 높은 연령대에서 두드러져 앞으로 더 늘어날 전망이다. 한편 제도 종교의 밖에서 새로운 형태의 신앙을 모색하는 사람들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지구적으로 종교는 가장 끔찍한 살육을 벌이는 분쟁의 원인이다.

 

근래 국내 대형교회의 목회 세습과 일부 목회자의 잇따른 성폭력 사건, 불교 최대 종단 지도급 스님의 추문 등으로 이게 종교냐는 목소리가 커지고, 종교의 행태를 비판하고 분석하는 책들이 적지 않게 출간되고 있다. 그중 사회학자인 필 주커먼 미국 클레어몬트 피처 칼리지 교수가 쓴 종교 없는 삶은 무종교 신념과 가치들을 살펴보는 저작이고, 신학자이면서 개신교 개혁운동가인 양희송 청어람아카데미 대표가 쓴 세속성자는 이른바 제도권 교회의 틀을 벗어나 새롭게 찾아나서게 되는 신앙적 지향에 대해 사색한 책으로 눈길을 끈다.

 

필 주커먼은 미국 내 다양한 인종과 직업, 연령대의 사람들을 심층 인터뷰하고 많은 통계수치를 분석해 이 책을 펴냈다. 종교를 가진 많은 미국인은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좋아하거나 신뢰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난다. 종교가 없는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거나 무언가 결여된 삶을 살며, 무절제하고 오만하며 이기적일 것이라는 막연한 편견이 있다. 이런 배타성과 편견은 무종교인을 더 늘어나게 한다. 저자는 무종교인들에 대한 혐오와 불신에서 깨어나게 돕기 위해서 이 책을 썼다고 말한다.

 

수많은 인터뷰와 자료를 통해 저자는 무종교인이 문제를 실용적이고 합리적으로 해결하고, 집단적 사고나 군중심리에 휘둘리지 않으며, 현세의 일들과 사람들에게 애착심을 갖는 태도를 지닌다고 말한다. 또 과학적 탐구를 좋아하고, 인간적 공감능력이 높으며, 성숙한 도덕성을 키우고 삶의 유한성을 고요히 받아들일 줄 아는 등 공통의 특색과 가치를 지녔다고 분석한다. 지구촌에 종교가 없는 사람들 대개는 종교를 파괴하지 않는다. 무종교인은 정치의 영역에서든 사적인 삶에서든 종교를 해결책으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타 종교에 적대적인 국가나 사람은 오히려 종교국가나 종교인들인 경우가 흔하다. 저자는 무종교인을 변론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진정한 종교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한다. 무종교인들은 자신의 삶을 외부가 아닌 내면에 두고 끊임없이 성찰한다. 이들은 이분법적 사고보다 통합적 이성, 타인이나 사회와의 관계를 중시함으로써 배타적인 종교인들보다 더 종교적인 삶을 산다는 것이다.

 

세속성자의 저자는 이미 2014가나안 성도, 교회 밖 신앙을 펴낸 바 있다. 앞선 책이 교회 밖으로 나가는 가나안신자의 증가 원인에 대해 주로 다뤘다면, 이번 책에서는 이들의 실천적 신앙에 대해 말한다. 성스러움과 세속성, 믿음, 기도, 전도, 영성과 종교의 공공성 등 오랫동안 개신교 신자들이 가슴에 품은 의문을 다루고 있어 찬찬히 음미해볼 만한 책이다.

 

성자는 거룩한 사람을 뜻하고, ‘세속은 그 정반대에 있는 존재라는 점에서 세속성자는 형용모순이 되는 표현이다. 저자는 더 이상 교회와 목회자의 권위에만 의존하지 않고 오로지 신앙적 양심에 호소하는 새로운 신앙인들을 세속성자라고 부른다. 교회는 세상 저 안쪽에 거룩하게 존재한다는 사고를 세속성자는 거부한다. 우리 시대의 세속성자란 교회의 집단적 실패에 맞서 스스로 정당한 질문을 던질 줄 아는 개인들이다.

 

저자는 우리 삶의 전반을 차지하는 노동과 쉼을 영성에서 제외하고 홀로 거룩하면 참된 그리스도인인가라고 묻는다. 신앙을 삶과 유리해 일하고 소비하고 욕망하는 자본주의 가치 속에서 아무런 비판적 검토도 없이 맹목적으로 살아간다면, 우리는 결국 형제자매는 물론 스스로를 노예적 노동으로 내몰 수밖에 없다고 저자는 말한다. 근래 대형교회보다 작은교회를 지향하거나, 혹은 카페 등지에서 정해진 목회자 없이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데, 이 책도 저자가 참여하고 있는 세속성자 수요모임5년간 경험을 토대로 쓰였다. 각 권 42018000, 25214000.

 

엄주엽 선임기자 ejyeob@munhwa.com

 

 

<연합뉴스> 2018. 9. 15.

 

 '가나안 성도'란 교회에 나가지 않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대형교회의 세습, 성추문, 비리 등으로 교회 밖으로 나가는 신도들이 늘고 있다.

 

이 책은 이들 '세상 속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세속성자'라 칭하며, 그들이 찾아 나선 신앙적 지향에 대해 탐구한다.

 

청어람아카데미 등을 통해 새로운 교회 생태계를 모색해온 저자는 가나안 성도를 위한 '세속성자 수요모임'을 지난 5년간 진행해왔다.

 

이 모임에서 고민한 교회와 신앙, 삶의 문제들을 이 책에 담았다.

 

이 시대의 기독교 신앙이 어떤 변화를 겪고 있는지 살펴보고, 세상을 떠나 교회에서 살기보다는 치열하게 일상을 살아가는 것이 세속성자의 참된 삶이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그는 "이제는 신앙적 실천의 장이 교회냐, 사회냐 구분하는 것이 크게 의미가 없다""우리의 교회론은 좀 더 유연하고, 포괄적이고, 새로운 상상력에 부합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북인더갭 펴냄. 252. 14천원.

 

<한국일보> 2018. 9. 14.

 

세속성자

 

양희송 지음. 대형교회의 세습, 성추문 등 사건 사고가 터져 나오는 때 한국 기독교가 가야 할 길을 모색한다. 성벽 안은 신앙이요, 성벽 밖은 불신이라는 이원론을 깨고 오히려 성벽 내의 맹신을 드러내자고 주장한다. 그들을 세속성자라 부르자는 것. 북인더갭25214,000

 

<경향신문> 2018. 9. 15.

 

세속성자

 

대형교회들의 세습, 성추문, 비리, 소수자 혐오로 얼룩진 한국 기독교를 돌파할 해법을 모순형용처럼 들리는 세속성자에서 찾는 책이다. 교회를 떠나는 가나안 성도들에 주목했던 저자가 이번에는 과감히 성벽 밖으로 나가 새로운 신앙을 모색할 것을 제안한다. 양희송 지음. 북인더갭. 14000

 

<조선일보> 2018. 9. 15.

 

세속성자(양희송 지음)=성과 속의 이원론을 넘어 과감하게 성벽 밖의 신앙을 모색하는 성도들을 '세속성자'로 정의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새롭게 상상한다. 북인더갭, 1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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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속성자> 저자의 말

2018.09.10 09:32 | Posted by 북인더갭

들어가는 말



“그날 인류는 떠올렸다. 새장 속에 갇혀 있던 굴욕을…” 2013년 한국에서 대히트를 쳤던 일본 애니메이션 「진격의 거인」은 이 의미심장한 내레이션과 더불어 시작합니다. 이 작품은 식인 거인들의 공격을 피해 인류가 월 마리아, 월 로제, 월 시나로 불리는 3중의 방벽을 쌓고 살아가는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의 첫 장면은 월 마리아의 50m짜리 거대한 방벽 위로 초대형 거인이 솟아올라 그 벽을 깨뜨려버리면서 대혼란에 휩싸이는 사건으로 시작합니다. 무너진 벽 틈새로 거인들이 쏟아져 들어와 사람들을 찢고, 밟고, 아무렇지 않게 살육하는 장면은 그야말로 충격입니다. 주인공 에렌은 이 사건으로 어머니를 잃고, 사람들은 이 절체절명의 위기를 피하기 위해서 앞다투어 두번째 성벽 안쪽으로 들어가려고 아우성을 칩니다. 이것 외에 무슨 다른 길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흥미롭게도 주인공은 독특한 발상을 합니다. 모두가 두번째 성벽, 혹은 그것이 실패하면 세번째 성벽 안으로 피신함으로써 생존을 도모하고자 할 때, 그는 인류가 살 길은 거인들이 돌아다니는 저 성벽 바깥에 있을지 모른다며 그곳을 조사하는 부대에 자원합니다. 이 애니메이션은 성벽 바깥에 존재하는 잊혀진 역사를 장대하게 풀어나가며 시리즈를 이어갑니다. 

「진격의 거인」은 한국 개신교가 처한 상황을 너무나 실감나게 보여주는 하나의 우화로 보입니다. 성벽 바깥 ‘세상’에는 우리를 공격하는 식인 거인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 거인들의 이름은 사탄에 사로잡힌 ‘대중문화’나, 인륜을 파괴하는 ‘동성애’, 혹은 종교를 멸절시키는 ‘좌파’일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과 싸워서 결코 이길 수가 없으므로 성벽 안쪽에 머무는 것이 최선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상상을 초월하는 초대형 거인이 나타난 거지요. 그 앞에 우리의 성벽은 무용지물이 되었습니다. 유일한 대안은 더 안쪽의 성벽으로 도망가는 것입니다. 더 높은 성벽, 더 헌신된 훈련과정, 더 굳센 정통의 신학이 제2, 제3의 장벽 안에는 있을 것이므로, 그리로 피하면 살아남을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오늘날 개신교의 상황판단이 대략 이렇지 않습니까? 

저는 이 책에서 기독교적 대안을 찾는 이들은 더 안쪽의 성벽으로 퇴각하는 것이 아니라 과감하게 성 바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엉뚱한 제안을 하려고 합니다. 현실세계에 성벽을 쌓아 안팎을 성과 속으로 구분하고, 이를 분할통치하는 것으로는 이런 문제를 결코 풀 수 없을 것이며, 그리고 원래 기독교는 그런 것을 대안으로 여기지도 않았다는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성벽 안쪽은 신앙이고, 성벽 바깥은 불신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거꾸로 저는 성벽 내의 불신 혹은 맹신을 드러내고, 성벽 바깥에서 성심으로 신앙하는 삶을 그려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이런 신앙인을 ‘세속성자’a secular saint라는 개념으로 부르자고 제안합니다. ‘새장 속’에 갇혀 있는 삶을 ‘굴욕’이라고 느끼는 이들을 불러내고자 합니다. 

이 책에는 2013년 1월 ‘주일에 교회에 가지 않는 “가나안 성도”를 위한 수요예배’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시작한 ‘세속성자 수요모임’이 지난 5년간 고민했던 주제가 담겨 있습니다(자세한 정보는 웹사이트 http://iChungeoram.com 참고). 우리는 매년 상하반기 12주씩 수요예배로 모였습니다. 언뜻 매우 실험적인 모임처럼 보이기도 했겠으나, 대부분 모임은 찬양-설교-기도로 이어진 느슨한 시간이었습니다. 설교는 성경의 한 책을 선정해서 한 장씩 ‘강해설교’를 해나가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는데, 그렇게 들여다본 책들이 다니엘서, 갈라디아서, 누가복음, 잠언-전도서, 요한복음, 히브리서, 아모스서에 이릅니다. 2016년 가을에는 지난 시간을 되짚어보며 ‘세속성자를 위한 12개의 질문’을 주제로 그간 우리가 화두로 삼았던 질문 12개를 하나씩 짚어보았습니다. 이 책은 그 모임의 직접적 결과물입니다. 

‘세속성자’ 이야기는 교회 울타리 바깥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가나안 성도’가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가나안 성도, 교회 밖 신앙』, 포이에마 2014 참고). 최근 몇년간 주목받았던 ‘가나안 성도’ 논의는 그들은 왜 교회를 떠났는가, 교회를 떠나서 신앙생활이 가능한가, 교회는 대체 무엇인가 등 교회론적 질문에 집중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질문에 답해나가다보면 기독교 신앙 전반을 재검토해보는 과정을 필히 거치게 됩니다. 익숙한 모범답안이 더이상 통하지 않는 상황에서는 질문이 많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가나안 성도’가 한국 교회의 교회이탈 현상을 묘사하는 데 중점을 둔 개념이라면, ‘세속성자’는 가나안 성도가 촉발한 질문에 공감하는 이들이 결국 찾아나서게 될 신앙적 지향은 무엇인지 대답하려는 노력입니다. 이 논의를 통해서 우리 시대의 기독교 신앙이 어떤 변화를 겪고 있는지, 새로운 질문은 무엇이며, 새로운 대답은 무엇인지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처음에는 매주 전했던 설교를 잘 정리해서 묶어내자는 소박한 수준이었습니다. 그러나 원고를 정리하다보니 그것으로는 취지의 전달이 쉽지 않겠다는 판단이 들어서 원래 원고를 들고 여러 날 고심을 했습니다. 결국 상당량을 다시, 혹은 새로 썼고, 순서도 흔들어서 재구성했습니다. 책 쓸 때마다 그러했듯이 이번에도 일생일대의 역작을 쓰자는 야망은 일찌감치 포기했습니다. 한두 마디 문장을 쓰다가 이와 관련해서 떠오르는 이런저런 학술적 논의와 신학적 함의를 일일이 다 추적해서 전말을 덧붙이는 것도 포기했습니다. 그랬더라면 논문이 여럿 나와야 했을는지 모르나, 그건 학자들과 연구자들의 몫으로 남겨드립니다. 이 책의 주장이 기존의 통념이나 교회의 목회적 형편과 어긋난다는 항변도 개의치 않기로 했습니다. 저희가 제기하고 싶었던 문제의식과 통찰만 잘 표현된다면 족하겠습니다. 배움이 깊고, 고민이 넓었던 분들에게는 더 파고들어볼 논점이 많이 눈에 띌 것입니다. 그것은 이 책 이후의 토론 과제로 돌려놓습니다. 일단은 지난 5년간 세속성자란 이름으로 모임을 해온 이들이 잠시 멈추어 서서 되새겨본 중간점검 기록으로 여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 책의 핵심 키워드 ‘세속성자’는 모순형용입니다. ‘성자’saint란 글자 그대로 ‘거룩한 사람’을 뜻하는데, 당연히 ‘세속’secular의 정반대에 있는 존재입니다. 세속을 거부하고 떠난 덕분에 거룩함을 취할 수 있었던 이들을 우리는 성자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기독교 신앙이란 마땅히 세속적 가치를 거부하고 거룩의 영역으로 옮겨가는 삶을 지향해야 한다고 배워왔습니다. 그렇다면 ‘세속성자’ 운운하는 것은 괜히 잘난 체해보려는 말장난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은 감히 그 모순형용을 잘 붙잡는 데에 기독교 신앙의 본령이 있다고 힘주어 말합니다. 우리의 통념과 경험에 충실하게 부합하는 이야기들이 사실은 여러 가지 오해와 왜곡에 기반했을 수 있고, 기독교 신앙은 오히려 역설적 긴장 앞에 설 때라야 진정한 면모가 드러난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이 긴장점을 쉽게 포기하는 순간, 기독교 신앙은 기독교 아닌 것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기독교 신앙이 지당한 말씀의 지루한 목록으로 대치되거나, 선한 얼굴로 성실하게 불법을 자행하도록 부추기거나, 품위있는 단어와 점잖은 문장으로 아무말 대잔치를 벌일 수 있는 이유입니다. 그런 허무한 꼴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 반드시 천착해야 할 기독교 신앙의 역설적 특성을 찾아보고자 했습니다. 

이 책의 구성상 각 질문에 포괄적이고 체계적인 답을 주지는 못합니다. 주석을 따로 붙이지도 않았고, 학술적 인용을 세밀히 하지도 못했습니다. 다만 사람들이 던지는 속 깊은 고민을 최대한 헤아려 그 갈증을 조금이나마 공론의 장으로 끌어내보려고 노력했습니다. 제1부는 ‘세속성자’란 명칭과 그 의미를 여러 갈래로 곱씹어보았습니다. 우리는 지금 ‘거룩’과 ‘세속’의 맥락이 완전히 전도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냥 하던 대로 이원론적으로 대응해서는 심각한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거룩과 세속이 어떻게 이해되었는지, 현대 사회에서 세속성이 어떻게 바뀌고 있는지를 찬찬히 살피자는 제안을 던집니다. 제2부는 세속성자의 신앙생활을 다루었습니다. 세속성자로 살 때 믿음, 기도, 예배, 전도가 어떻게 달리 다가올 것인지를 물어보았습니다. 우리는 그간 이런 신앙 행위를 그 내용과 방향은 이미 다 정해져 있고, 우리는 다만 열정과 성실함을 발휘하면 되는 문제로 여겨왔습니다. 그러나 곰곰이 따지고 들어가보면 신앙의 핵심적 실천들은 애초에 불가능한 범주들입니다. 신앙생활은 가능한 것을 열심히 하는 것이 아니고, 불가능한 것을 시도하는 문제입니다. 몇가지 신앙행위를 자주, 많이, 크게, 세게 하는 문제로 기독교 신앙을 환원시키고, 교회에서 이런 시스템을 성찰 없이 기계적으로 돌려서는 곤란합니다. 이 문제를 전면적으로 재검토하지 않으면 신앙이 무엇인지 사유하는 것조차 불가능합니다. 

제3부는 세속성자 논의를 통과하면서 하나님 나라, 교회, 영성, 공공선 등이 어떻게 재정렬되는지를 살펴봅니다. 신학계에서는 제각각 별개로 다루고, 교회 내에서는 잘 언급하지 않는 주제들을 전면에 꺼내보았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저세상’the other world이 아니라 이 시대의 ‘새 하늘 새 땅’으로 만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진지하게 묻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광대한 스케일의 기독교적 논의가 단지 ‘교회를 키우자’는 단선적 결론으로 앙상하게 쪼그라드는 것을 볼 때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자괴감을 느낍니다. 기독교 신앙의 높이와 깊이와 넓이를 충분히 음미하고, 새로운 관점으로 신앙과 삶을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이 책이 나오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분들은 만 5년을 넘기고 있는 ‘세속성자 수요모임’의 구성원들입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함께하는 이들도 있고, 한 가족 전체가 꾸준히 오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청년에서 중장년까지 고르게 오시고, 팟캐스트로 꾸준히 설교를 들어온 분들도 국내외에 적지 않습니다. 이분들의 얼굴을 늘 떠올리며 ‘세속성자’란 개념을 다듬어왔습니다. 이 책은 함께해주신 모든 분들 덕분입니다.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이제 이 책을 새로운 세상으로 떠나보냅니다. ‘세속성자’ 가득한 세상을 꿈꾸어봅니다. 


2018년 9월 

신촌 청어람에서 양희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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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속성자> 저자 소개

2018.09.10 09:31 | Posted by 북인더갭


양희송 


서울대학교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영국 브리스톨의 트리니티 칼리지(BA)와 런던 신학교(MA)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월간 『복음과상황』 편집장 및 편집위원장을 지냈고, 한동대학교에서 ‘기독교 세계관’을 가르쳤다. 다양한 기독교 및 일반 매체에 글을 기고하고 있으며, 랍 벨(Rob Bell)에서 존 스토트(John Stott)까지, 톰 라이트(Tom Wright)에서 유진 피터슨(Eugene H. Peterson)까지 ‘복음주의 운동’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소개하는 일에 관심이 많다. 

한국교회와 사회의 다음 세대를 위한 인재발전소 ‘청어람아카데미’의 대표기획자로 있으면서 인문학, 정치사회, 문화예술 등의 분야에서 500여 회가 넘는 대중강좌를 기획 운영해오고 있다. 2011년에는 CBS TV와 ‘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을 공동으로 기획했다. 2013년부터 ‘가나안 성도’를 위한 수요예배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세속성자 수요모임’을 진행해왔고 이 모임에서 함께 고민한 교회와 신앙, 삶의 문제들을 『세속성자』에 담았다. 저서로 『다시, 프로테스탄트』, 『가나안 성도, 교회 밖 신앙』, 『이매진 주빌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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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교회들의 세습, 성추문, 비리 등으로 한국 기독교의 위상이 갈수록 추락하는 지금, 우리 시대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새로운 담론으로 모색한 책 세속성자』가 출간되었다. 이 책에서 양희송 청어람아카데미 대표는 성과 속의 이원론을 넘어 과감하게 성벽 밖의 신앙을 모색하는 성도들을 세속성자로 정의함으로써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을 새롭게 상상하는 귀한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세속성자는 저자가 지난 2014년 출간해 한국 기독교계에 거센 파문을 일으킨 가나안 성도, 교회 밖 신앙에 대한 실천적 대안 모색의 성격을 띤다. 가나안 성도가 교회론의 입장에서 교회란 무엇이며 왜 성도들이 교회 밖으로 나가는지를 물었다면, 이 책은 저자가 세속성자 수요모임을 기획해 성도들과 함께하며 우리 시대 세속성자들이 찾아 나서게 될 지향을 모색한 실천적 탐구라는 점에서 더욱 뜻깊다


세속성자란 무엇인가?

이 책은 한국 기독교의 상황에 대한 흥미로운 비유로 시작된다. 일본 애니메이션 진격의 거인에서처럼 한국 기독교는 교회 밖 거인들의 공격에 더 안쪽의 성벽으로 퇴각을 거듭해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이른바 더 헌신된 훈련과정, 더 굳센 신앙이라는 안쪽의 성벽으로 도망가는 대신, 과감하게 성 바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제안을 내놓는다. 성벽 안은 신앙이요 성벽 밖은 불신이라는 이원론을 깨고 오히려 성벽 내의 맹신을 드러내고 성벽 밖의 신앙을 그려보자는 것이다. 저자는 이런 신앙을 꿈꾸고 직접 실천하는 자들을 일컬어 세속성자라고 부른다.

저자는 세속성자의 의미를 탐구하는 데 많은 공을 들인다. 얼핏 모순형용처럼 들리는 이 말 속에 저자의 새로운 주장이 고스란히 들어 있기 때문이다. 먼저 우리는 성자세속의 의미를 좀더 깊게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왜 성자인가? 흔히 성자라 하면 세속을 등진 순례자나 순교자의 이미지를 떠올리지만 원래 성자(Saint)란 성도(Sanits)와 같은 말이되 그것이 복수의 집단이 아니라 개인이라는 차이가 있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여기에는 한국 교회에 만연한 집단주의를 벗어나 개인적 신앙양심의 회복을 강조하는 한 차원이 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지적은, 그 집단주의 속에 도사린 한국 교회의 여러 실패 사례를 돌아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과연 교회는 개인의 신앙생활에 도움을 주는가? 저자는 이 질문에 매우 회의적이다. 오히려 교회는 내부의 갈등, 신앙에 방해가 되는 가르침으로 만연해 있으며 특히 대형교회들의 세습, 재정비리, 성추문, 정치권력에의 야합 등으로 세상의 비난과 지탄의 대상이 된 지 오래다. 그럼에도 교회는 이런 위기를 이단, 종북, 이슬람, 동성애에 대한 혐오주의로 돌파하려 한다는 데 문제가 있다. 저자는 세월호 참사와 촛불시위를 거치면서 등장한 자발적 시민으로서의 성도들이 이런 제도권 교회의 문제에 맞서 수많은 질문을 던지고 있음을 주목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더이상 교회와 목회자의 권위에만 의존하지 않고 오로지 신앙적 양심에 호소하는 세속성자가 등장한다. 우리 시대의 세속성자란 교회의 집단적 실패에 맞서 스스로 정당한 질문을 던질 줄 아는 개인들이다(1).

그렇다면 세속 안에서 성스럽다는 것은 이들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거룩함에 대한 교회의 가장 흔한 대답은 아마도 불결한 것을 쫓아내야 한다는 정결함의 추구일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예수가 추구한 거룩이란 안식일에 부정한 병자들을 고치고 밀밭을 터는가 하면 간음한 여인과 세리와 창녀들을 감싸는 것이었음을 항변한다. 세속성자의 거룩은 상식적 거룩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성문 밖에서 고난받기를 자처한 바보 같은 삶에 가깝다.(2).

저자는 이처럼 어디가 세속이고 어디가 거룩인지가 구별되지 않는 장면들에 주목한다. 가령 다윗의 증조할머니는 이방여인 룻이었고, 라합은 성판매 여성이었으며 욥 또한 이방인에 가까웠다. 이는 성과 속을 깨끗한 곳과 더러운 곳으로 구별하고 지상을 떠나 저세상으로 나아가자는 교회의 담론이 틀렸음을 말해준다. 오히려 성경은 이 공간을 시간의 흔적이 쌓인 공간으로 파악한다. 그래서 세상을 떠나 교회에서 사는 삶이 아니라, 이 세상 속에서 오는 시대의 가치를 따라 치열하게 일상을 살아가는 삶이야말로 세속성자의 참된 삶이 되는 것이다.(3) 결국 거룩이란 시간을 초월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늘 변하고 부패하고 결함에 노출된 상태를 인정하되 그것을 넘어설 가능성을 추구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성육신과 부활을 제대로 담아내는 삶이자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않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사는 세속성자의 라이프스타일이다.(4)


세속성자의 믿음, 기도, 예배, 전도

이 책의 2부는 신자라면 누구나 부딪히는 본질적인 문제들, 즉 믿음과 기도, 예배와 전도를 세속성자의 입장에서 어떻게 새롭게 해석해볼 수 있는지를 다룬다. 주목해볼 것은, 저자가 이 문제들을 한결같이 불가능의 영역으로 규정한다는 점이다. 우선 믿음을 보자. 흔히 이야기되듯이 믿음은 자기확신의 문제가 아니며, 크다 작다로 구분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믿음은 자신조차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이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상황을 수용하는 일에 다름 아니다. 성경은 신앙의 주체가 자신의 한계를 처절히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 있음을 반복적으로 강조한다. 아브라함은 친족살해 미수범이며 야곱은 가정파탄의 피해자로서 착취에 시달리다가 결혼사기까지 당하는 인물이다. 이들은 어떤 교리를 수용하느냐 마느냐 하는 확신의 상황에 처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역동성 속에서 어떻게 싸워나갈 것이냐 하는 기로에 서 있었던 것이다.(5) 기도 또한 불가능성에서 시작한다. 우리는 기도가 응답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신의 존재를 의심하면서도 다시 기도하는 모순에 처해 있다. 이렇듯 기도할 수 없는데 기도하고 있는 역설적 상황에서 우리를 건져주는 것은 주님이 가르쳐준 기도. 기도는 하나님 나라의 임재를 기원하는 것이며 우리의 의지와 완전히 독립된 하나님의 의지 속에 거하는 것이다. 또한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구체적인 일상의 행위이다. 기도하면서 성실히 악을 수행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따라서 세속성자의 기도는 탄식을 전달하는 기도가 아니라, 성령의 탄식에 동조하는 기도여야 하며 응답받는 기도가 아니라 응답하는 기도로 나아가야 한다.(6)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인간의 노력이나 고투와 별개의 것이므로 예배 또한 원천적으로는 불가능한 것이다. 예배에서 중요한 것은 장소나 죽은 제물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몸에 부끄럽지 않게 살자는 다짐이 동반되는 성찬이며 저 너머의 삶을 가리키는 이곳에서의 삶을 결단하는 것이다.(7) 우리 시대 교회의 전도는 마케팅이 되었고 선교는 전투처럼 되었다. 강제와 회유가 판치는 전도/선교의 현실에서 예수처럼 그저 문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낮은 음성이 필요하다. 성 프란치스코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행하되 꼭 필요하면 말을 하라고 권했다. 그처럼 지금은 현존의 전도, 말이 아니라 어떤 존재가 됨으로써 하는 전도가 필요한 때다.(8)

 

창조적 긴장 속에서 살아가는 일상

3부의 핵심은 세속성자로서 어떻게 창조적 긴장을 유지하느냐 하는 실천적 과제다. 저자는 죽어서 갈 저세상이나 천당의 개념으로 쪼그라든 하나님 나라를 지금-이곳에서 이뤄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의 나라는 종말을 맞아 한번에 휴거를 받는 게 아니라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먹고, 죄 짓고 빚진 자를 용서하며, 시험에 들기보다는 악에서 건짐을 받는 삶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 나라를 우리의 일상에서 살아내며 하나님의 통치(바실레이아)를 이뤄내는 것이다.(9)

저자는 교회가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자기성찰과 자기갱신을 통해 종말론적 이상을 향해 나아가는 영적 순례자이자, 세상 속의 거류민으로서의 두 자의식을 창조적 긴장으로 견지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교회는 세상 저 안쪽에 거룩하게 존재한다는 나이브한 사고를 세속성자는 거부한다. 교회는 멋들어진 건물이 있는 곳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임재가 있는 곳에 존재한다. 성령의 운행이 이뤄지는 현장에 교회(에클레시아)는 존재하기에 저자는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가 교회의 출발점이라고 고백한다.(10) 그렇다면 성령 안에 사는 삶은 도대체 어떤 삶인가? 우리 삶의 전반을 차지하는 노동과 쉼을 영성에서 제외하고 홀로 거룩하면 참된 그리스도인인가? 무조건 성실히만 일하면 만사해결인가? 저자는 희년을 꿈꾸는 안식과 해방의 길을 모든 그리스도인의 과제로 제시한다. 일하고 소비하고 욕망하는 자본주의 가치 속에서 아무런 비판적 검토도 없이 맹목적으로 살아간다면 우리는 결국 형제자매는 물론 스스로를 노예적 노동으로 내몰 수밖에 없다고 저자는 경고한다.(11)

마지막으로 저자는 한국 사회의 현실과 교회의 존재 의미를 아프게 돌아본다. 세속성자 논의에서 사회 내의 하위범주로 기능하는 기구로 축소된 작금의 교회론에 상상력을 불어넣어 이제 고체교회를 넘어서 액체-기체 교회의 다양한 존재방식을 시도하자고 저자는 제안한다.(12) 언제나 예상을 뛰어넘고 관습과 전통을 뒤집어엎는 예수의 삶을 통해 인생의 최대치를 살아낼 것을 권면하며 저자는 당부한다. 때를 놓치지 마라. CARPE DIEM.

Comment

나는 페미니스트인가? 그렇다고 생각해왔다. 당당했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그런데 저자인 제사 크리스핀이 왜 자신이 페미니스트가 아닌가 신랄하게 조목조목 짚어낼 때마다 점점 자신이 없어졌다. 지금보다 조금 더 잘 살고 싶고,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여야 합니다라는 문구의 가방을 자랑스럽게 들고 다니며, 억울하게 당했던 경험들을 가슴에 품고 칼을 가는 내 모습이 크리스핀이 비판하는 오늘날의 페미니스트들과 겹쳐 보여서다. () 역자 또한 독자로서, 페미니스트라 자처하는 한 여성으로서, 크리스핀의 문제제기와 선언에 깊이 공감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수긍이 갔던 것은, 페미니즘이 여성들에게 대안적 삶의 가치를 제시하거나 대안적 삶이 가능하게끔 돕는 인프라는커녕 그런 대안적 삶을 꿈꾸는 상상력조차 만들지 못했다고 비판하는 부분이었다. 옮긴이의 말에서

 

옮긴이 유지윤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영어과에서 번역을 전공했다. KBS 라디오 PD로 근무하다 지금은 미국 LA에 거주하면서 번역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다. 한국언론재단 국제행사 프로그램 및 기사 등을 번역했고 한국에 출간된 번역도서의 감수를 맡았다.



 

  

Comment

<중앙일보_중앙SUNDAY>

 

페미니즘 서적들이 쏟아진다. ‘페미니즘 빅뱅이다. 페미니즘(feminism)이란 무엇일까. 이즘(ism)이다. 이즘은 우리 표준국어대사전에도 나오는, 주의(主義)와 동의어인 외래어다. 이런 용례가 나온다. “그건 염상진이라는 개인의 뜻이 아니라 정치 폭력화한 이즘의 충돌이었던 것이다.조정래, 태백산맥/ 죽음을 걸 만큼 그 이즘이라는 것이 그렇게 절대한 가치였었는지를 나는 회의하지 않을 수 없다.김성동, 만다라.”

 

유럽·미국 기준으로 대표적인 페미니즘은 자유주의 페미니즘, 급진 페미니즘,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 사회주의 페미니즘, 문화 페미니즘, 환경 페미니즘이다. 하지만 페미니즘·여성주의를 비롯한 이즘·주의는 계속 진화하고 분열한다. 페미니즘이라는 우산 용어(umbrella term)’ 속에서 다양한 페미니즘 조류가 공존하고 경쟁하며 서로 맹공을 퍼붓기도 한다. 심지어는 보수 페미니즘도 있다. 보수 페미니즘이라는 페미니즘의 작은 우산 속에는 개인주의적 페미니즘, 복음주의 페미니즘, 국가 페미니즘, 포스트페미니즘이 자리잡고 있다.

또한 남성 페미니즘도 있고 생활 페미니즘도 있다. ‘미투 페미니즘’ ‘메갈리아 페미니즘’ ‘워마드 페미니즘도 충분히 가능하다. 페미니즘이라는 거대한 체계화된 학설·이론·운동 속에서 각기 목소리를 낼 수 있다.

형용모순 같은 안티페미니즘적인 페미니즘도 있다. 그래서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다가 그런 경우다. 원제는 나는 왜 페미니스트가 아닌가: 페미니스트 선언(Why I am not a feminist: a feminist manifesto)’이다. 버트런드 러셀(1872~1970)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1927)와 마르크스·엥겔스의 공산당 선언(1848)을 한꺼번에 연상키는 묘한 제목이다. “나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다라고 말한 마르크스의 선례를 감안하면 그래서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다라는 제목이 그리 이상한 것은 아니다.

좌파 페미니스트 논객인 저자가 반대하는 것은 가부장적인 자본주의에 만족하고 적응하는 미국의 주류 페미니즘이다. 미국 페미니즘은 급진적인 변혁 운동이 아니라 라이프스타일 페미니즘으로 추락했다는 뜻이다. 그가 보기에 라이프스타일 페미니즘은 세상을 바꿀 수 없다.

저자 크리스핀은 개량주의·점진주의 페미니즘에 반대한다. 저자는 이빨 빠진(toothless)’ 페미니즘이 여성 최고경영자(CEO), 여성 정치인 숫자의 확대에 만족하는 것은 아닌지 의문을 제기한다. 그런 페미니즘은 저자에게 탈정치화된 자기계발 페미니즘에 불과하다. 체제를 바꾸지 않는 페미니즘은 의미가 없다는 게 저자의 판단이다.

크리스핀은 기성 페미니즘을 맹공하지만, 특정 페미니스트 운동가나 그룹을 타깃으로 삼아 지칭하지 않는다. 자본주의와 가부장제라는 공동의 적을 눈 앞에 두고 불필요한 싸움, 적전분열을 피하기 위해서다. 같은 이유로 크리스핀은 남성을 인간 이하의 존재로 깎아 내리는, 온라인·디지털 세상을 주무대로 삼는 격노(outrage) 페미니즘에도 반대한다. 그는 남성혐오를 혐오한다. 반성하는 남성은 페미니즘의 우군이 될 수 있다고 보는 듯 하다.


<한겨레>


페미니즘에 관한 강의나 토크행사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질문 중 하나는 이렇다. “남편/남성 동료/남자친구/아들이 페미니즘을 이해하고 행동과 말을 바꾸게 할 수 있는 좋은 말이나 책은 뭐가 있을까요?” 내가 생각하는 답은 다소 회의적이다. 기득권을 가진 사람이 흔쾌히 받아들일 수 있는 모범답안이 있다면, 애초에 차별이 없었겠지.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 그러니까 동물과 식물을 비롯한 생태계까지 포함해 세상의 살아 숨 쉬는 모든 존재가 득을 보는 것이 페미니즘이라는 주장은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을 ‘설득’하기에는 그럴듯해 보여도 설득의 결과는 미미하다. 누구의 기분도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해 하는 말은 공허할 수밖에 없고, 사회운동으로서의 힘을 갖기 어렵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백인 페미니스트들, 즉 최근 몇 년 미국을 휩쓰는 ‘페미니즘 유행’ 이전부터 여성의 권익 신장과 자유를 위해 싸워왔다고 자부심을 갖는 이들의 생각을 잘 알 수 있는 책 중 한 권이 바로 제사 크리스핀의 <그래서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다>다. 결론부터 말하면 더 급진적이고 시스템을 바꾸는 시도야말로 페미니즘의 본령이라는 주장을 담고 있다.

제사 크리스핀은 앤디 자이슬러의 <페미니즘을 팝니다>처럼 ‘선택적 페미니즘’을 비판한다. 이것은 진정한 변화에 따르는 불편함은 감수하지 않고 급진적 페미니스트를 물리치는 태도이며, “여성이 무엇을 선택하든, 생활방식에서부터 가족관계나 대중문화, 소비에 이르기까지 무언가를 그저 하는 행위만으로 페미니스트에 걸맞은 선택을 한다는 믿음이다.” 페미니스트라고 적힌 티셔츠를 입는 ‘유행’의 일부가 된다고 페미니스트로서 실천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대중 앞에 서는 직군의 여성이 페미니즘, 페미니스트라는 말을 사용해도 아무런 위해를 입지 않을 경우에나 해당하는 이야기다.

한국에서는 여성 뮤지션이 페미니즘에 관심만 보여도 ‘소비자’인 남성 팬들의 공격에 시달린다. ‘레드벨벳’ 멤버 아이린이 팬미팅에서 <82년생 김지영>을 읽었다고 말하자 팬들은 아이린 얼굴이 있는 굿즈를 자르고 불태워 인증했다. 가수 겸 배우인 수지가 유튜버 양예원씨가 과거 피팅 모델 스튜디오 아르바이트로 입은 성폭력 수사를 촉구하는 국민청원 글에 동의했다는 내용의 글을 인스타그램에 올린 다음 날인 18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연예인 수지의 사형을 청원합니다’라는 청원이 시작되었다. 일주일 가까이 있던 ‘수지 사형 청원’은, 비제이(BJ) 철구의 인터넷 방송을 시청한 일로 논란이 된 ‘에프티(FT)아일랜드’ 멤버 이홍기의 사형 청원이 시작되고 나서야(즉, 남성 연예인의 사형 청원 글이 올라오고 나서야) 나란히 삭제되었다. 한국에서는 페미니즘이라는 말도 페미니스트라는 말도 ‘패션‘이나 ‘유행‘이라고 부르기에는 생업의 안위를 걸고 하는 위험천만한 행위다. 크리스핀처럼 “그래서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다”라는 말은 “나는 페미니스트다”라는 말이 진부할 정도로 널리 쓰인 뒤에나 가능해진다.

최근 한국의 페미니즘 관련 논의에서 중요하게 떠오르는 주장은 여성들이 더 많이 공직에 진출하고, 관리직에 올라서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크리스핀은 이런 생각에 대해서도 단호히 반대한다. “어떤 분야든 여성이 그 분야의 ‘문화를 변화시킨다’는 관념은 속기 쉬운 거짓말이다. 더욱이 당신은 내부로 들어가기 위해 시스템을 세운 가부장들의 특징을 보여야 할 것이다.” 현대 페미니즘이 권력이 있는 여성을 본질적으로 좋게 보는 경향이 있다는 비판이 이어지는데, 그 예는 상원의원 시절 사회복지 프로그램을 폐지해 빈곤한 여성과 아이들에게 극심한 손해를 끼쳤던 힐러리 클린턴이다. 그래서? 크리스핀의 책을 다 읽은 뒤 나는 묻고 싶다. 그래서? 페미니스트가 된다는 것은 아무 흠 없는 인간이 되는 것이거나, 시스템을 전면적으로 거부하거나, 권력을 갖지 않는 것인가? 안주하지 말고 더 급진적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에는 찬성하지만, 다수의 성추행을 저지르고도 대통령이 된 트럼프를 비난하기보다 힐러리 클린턴을 비난하기가 더 수월한, 그 외의 사례들에서도 여성만 도마 위에 올린 모습을 보니 어리둥절해진다. 게다가, 한국에서 “나는 페미니스트다”라는 말을 여성이 할 때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 안다면, 크리스핀의 이런 도발은 그녀가 얼마나 많은 것을 누리고 있는지 역으로 입증하는 것으로 보인다. 더 급진적이 되자. 그 주장만을 받아들인다.

이다혜 작가, 북칼럼니스트



<연합뉴스>

 

그래서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다 = 제사 크리스핀 지음. 유지윤 옮김.


페미니즘 사상가이자 작가인 저자가 오늘날의 페미니즘을 강렬하게 비판한다.

그는 페미니즘이 하나의 유행으로 자리 잡으면서 원래 페미니즘이 가진 급진성은 점점 사라지고 아무도 불편해하지 않는 껍데기만 남았다고 말한다.

이른바 '라이프스타일 페미니즘'이 지배문화의 가치는 그대로 둔 채 '포천'지 선정 500대 기업에 여성 최고경영자(CEO)가 몇 명인지, 의대 졸업생 중 여성이 몇 명인지에 집중한다는 것이다.

북인더갭. 200. 13500.

 

<서울경제신문>

 

오늘날 페미니즘은 껍데기만 남았다?

그래서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다( 제사 크리스핀 지음, 북인더갭 펴냄)= 페미니즘 사상가로 유명한 저자가 본래의 취지를 상실한 오늘날의 페미니즘을 강렬하게 비판한다. 저자는 페미니즘이 하나의 유행으로 자리 잡으면서 원래 페미니즘이 가진 급진성은 점점 사라지고 그 누구도 불편해하지 않는 껍데기만 남았다고 지적한다. 지적인 액세서리와 같은 라이프스타일 페미니즘은 남성 중심적 문화의 부당함은 외면한 채 100대 기업에 여성 최고경영자(CEO)가 몇 명인지, 의대 졸업생 중 여성이 몇 명인지 등에만 집중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냉철하게 직시하고 가부장제에 저항하면서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급진적 페미니즘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13,500


<외신들> 


이 가차없이 비판적인 책에서 저자는 21세기 페미니즘에 기름을 끼얹고는 유쾌하게 외친다. “페미니즘아, 까맣게 탄 지구를 떠나라!” 그래서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다라는 제목은 한편으로는 거짓말이자 다른 한편으로는 도발에 가깝다. 왜냐하면 저자는 뼛속까지 페미니스트인 사람이기 때문이다. 저자의 주장은 그 급진성과 분노에서 3세대 넷페미가 아니라 2세대 페미니즘에 근거한다. 저자는 이른바 라이프스타일 페미니즘을 가장 경멸한다.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여야 한다고 새겨진 600달러짜리 티셔츠를 입고서 정치적 영웅심리에 빠져 아무것도 하지 않는 페미니즘 말이다. 저자가 보기에 그런 페미니즘은 살아남기 위해 초남성적 세계를 모방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먼저 돈이면 다 되는 페미니즘, 남성과 자본에 기대는 페미니즘에서 벗어나야 한다. 가디언(Guardian)

 

진보를 현상유지와 동일시하는 최신 페미니즘을 비판하면서

혁명적인 페미니즘을 요청한다. 엘르(Elle)


매우 신선한 주장이자 어떤 질문도 제기되지 않는 페미니즘에

균형을 잡아주는 시도다. 뉴요커(The New Yorker)

 

유리천장을 깨는 게 문제가 아니다.

쇳덩어리로 구조를 깨부수는 것이 관건이다. 커커스리뷰(Kirkus)

 

간명하고 전투적이면서도 참신하다.

양심의 도전에 호소하는 책. 시카고 트리뷴(Chicago Tribu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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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 크리스핀 Jessa Crispin

 

1978년 미국 캔자스 주의 링컨에서 태어났다. 페미니즘 사상가이자 작가로 온라인 매거진 북슬럿(Bookslut)을 창립하고 편집자로 활약했다. 웹진 북슬럿뉴욕타임즈등 주요 매체에서 주목을 받았고 그녀의 서평은 가디언등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현재 뉴욕타임스』 『가디언』 『워싱턴포스트의 기고자로 있으며 페미니즘과 책에 관련된 칼럼을 쓰고 있다. 저서로 죽은 숙녀들의 사회(The Dead Ladies Project), 창조적인 타로(The Creative Tarot)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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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각 분야에서 페미니즘의 요구가 거세지는 시기에 오히려 오늘날의 페미니즘을 강하게 비판하면서 매우 색다르고 도발적인 물음을 제기하는 책이 출간되었다. 미국 페미니즘 사상가 제사 크리스핀(Jessa Crispin)의 신작 그래서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다는 자기역량 강화에 몰두하는 라이프스타일 페미니즘을 끝내고 가부장제에 저항하면서 새로운 사회를 꿈꾸는 급진적 페미니즘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남성들에 대한 분노와 울분을 넘어서 이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냉철하게 직시하는 페미니즘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도대체 페미니즘은 무엇을 한 것인가?

 할리우드에서 시작된 미투(#MeToo)운동이 전세계로 확산된 지금, 우리에게도 페미니즘은 더이상 낯선 단어가 아니다. 또한 하루가 멀다 하고 페미니즘 관련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으며 정치·문화·사회 전반에 걸쳐 페미니즘은 하나의 큰 주제로 자리잡고 있다. 문제는 페미니즘이 하나의 유행으로 자리잡으면서 원래 페미니즘이 지닌 급진성은 점점 사라지고 아무도 불편해하지 않는 껍데기만 남게 되었다는 점이다. 제사 크리스핀은 현재 유행하는 페미니즘을 가차없이 비판하면서 이를 보편적 페미니즘이라는 말로 요약한다.

보편적 페미니즘은 2세대 페미니즘의 급진성을 내버리고 좀더 친근한 버전의 페미니즘을 만들었다. 이는 여성이 삶에서 받는 억압을 정치·사회적으로 맥락화하는 대신 모든 것을 개인의 선택으로 치환한다. 가령 안드레아 드워킨 같은 2세대 페미니스트들의 논의는 성()과 결혼제도에 대한 근본적인 의심에서 시작됐다. 그러나 보편적 페미니즘은 자기를 꾸미고 계발하여 사회에 나서는 사람은 누구나 페미니스트라고 주장함으로써 그 급진성의 자리에 자기역량 강화라는 헛된 의식을 심어놓았다. 저자는 이러한 개인적 라이프스타일 페미니즘이 지배문화의 가치체계는 그대로 둔 채 페미니스트라는 이름표만 따온 것이라고 비판한다. 이런 페미니즘은 포춘지 선정 500대 기업에 여성 CEO가 몇명인지, 의대 졸업생 중 여성이 몇명인지에만 집중한다. 그래서 그 여성 CEO가 아이들과 여성들을 착취한다고 해도, 또 힐러리 클린턴 같은 여성 정치인이 사회복지 프로그램을 축소하고 민간인을 희생시키는 국제개입에 찬성한다고 해도 그리 놀라지 않는다.(1)

보편적 페미니즘이 여성의 자유와 독립이라는 꿈을 내세워 더 많은 여성들을 포섭하는 동안, 여성들은 사회적 가치들, 즉 가족이나 이웃, 돌봄의 가치들을 희생해야만 했다. 그 대가로 돌아온 것이 치열한 경쟁이며 추락한 직업 안정성, 어마어마한 학자금 대출이라면 도대체 페미니즘은 무엇을 한 것인가? 여성들이 가정과 돌봄, 공동체 같은 여성의 가치들에 남성의 자리를 마련하는 대신, 경쟁과 가부장적 가치 같은 초남성성의 세계에 들어가고 말았다는 저자의 지적은 그래서 뼈아프게 다가온다. 이제 여성들은 가부장제에 도전한 페미니스트들을 혐오하고 그 대신 여성의 사회적 진출을 위해 강력하고 세련된 중산층 여성의 이미지를 만들어낸 페미니스트를 추앙한다.(2)

 

남은 것은 각자도생, 역량강화뿐?

 저자가 보기에 이런 중산층 여성 페미니즘의 한계는 명백하다. 어느 정도의 돈과 권력을 얻은 여성들은 더이상 모두의 평등을 위해 싸우지 않고 자신의 욕망을 위해 싸우기 때문이다. 가령 육아문제에서 이들은 모든 여성에게 도움이 될 만한 사회복지 프로그램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자기 아이들을 사립학교 같은 좀더 괜찮은 교육기관에 맡기는 일에 더 몰두한다. 건강보험과 의료, 공공주택 등 저소득층 여성들에게 시급한 문제들은 페미니스트의 관심사에서 멀어져갔다. 그 결과 페미니즘에 남은 것은 각자도생이자 역량강화뿐이다.(3)

역사적으로 가부장제는 남성 가장의 권력과 재산을 위해 여성을 착취하고 이용하는 제도적 시스템이다. 이 시스템은 자본주의의 발전과 함께 가부장적 기업, 가부장적 국가로 이어졌다. 이 시스템은 권력과 돈의 논리를 중심으로 돌아가며 항상 누군가를 착취해야 하는 구조를 만들어낸다. 따라서 여성혐오 같은 현상은 그저 여성에 대한 막연한 혐오가 아니라, 동성애혐오나 빈곤혐오와 마찬가지로 상대를 비인간화여 정상/비정상을 구분하려는 가부장제의 구조로 봐야 한다. 문제는 페미니즘이 돈과 권력에 접근하면서 가부장제에 맞서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에 적극 참여한 것이다. 이로써 페미니즘 덕분에 더 평등한 세상이 온 것이 아니라, 여전히 불평등한 세상에 여성만 더 많아진 결과가 되었다고 저자는 말한다.(4)

이 책에서 가장 논쟁을 불러일으킬 만한 부분은 이른바 남자들과의 싸움에서조차 페미니즘이 돌아볼 것이 많다는 저자의 주장이다. 우선 그 싸움의 심리적 기제는 투사(投射)’일 경우가 많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즉 남자들을 지나치게 공격적이고 대책 없으며 골치 아픈 사이코패스로 치부해버림으로써 여성들은 절대 그렇지 않다고 쉽게 안심하게 된다는 것이다. 또하나 싸움의 기제는 분노. 여성혐오 발언이나 성희롱에 관련된 남성들에 대한 페미니즘의 대응은 흔히 욕이 난무하고, 시위가 조직되며, 결국 해당 남성이 해직되는 데까지 나아간다. 이는 여성의 마음속에는 이른바 리스트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 안에는 여성이 겪은 모든 불의와 모욕, 나약했던 순간들이 기록돼 있으며 이 목록은 분노문화의 동력이 된다. 그러나 이렇게 터져나오는 분노에도 불구하고 왜 그런 남성들은 끊임없이 등장하는가? 저자는 이런 분노가 개개인을 솎아내는 기능을 할 뿐 여성혐오를 구조적으로 뿌리 뽑는 역할은 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처벌에 집중하는 분노문화는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경쟁과 폭력은 보상하고 연민과 보살핌의 가치는 깎아내리는 이 시스템 자체와 싸워야 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5-6)

 

낭만적 사랑을 넘어서 새로운 상상력으로

페미니즘이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는 분노문화만이 아니다. 오히려 더 결정적인 한계는 낭만적 사랑과 결혼이라는 제도 밖으로 한걸음도 나아가지 못한 것이다. 만약 한 여성이 낭만적 사랑과 결혼의 구조 밖에서 살기로 결심하다면, 그녀에게 남은 선택은 고독한 삶뿐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여성 다수가 사랑과 결혼 안에 머물 수밖에 없는 것은 그 외의 삶을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인데, 이는 새로운 양육 공동체나 한부모 육아 같은 문제를 상상하지 못한 페미니즘 탓도 크다. 지금까지 여성들은 낭만적 사랑에서 우위에 설 수 있는 방법으로서의 자기역량 강화에 주력해왔다. 낭만적 사랑에 기대는 것 외에는 대안이 없기 때문에 여성들은 어린 시절부터 미래의 배우자에게 어필할 수 있어야 한다는 압박을 받는다. 돈과 직업이 경쟁인 것처럼 사랑도 경쟁이기 때문에 사랑과 섹슈얼리티에서 이득을 보는 여성은 이를 지키기 위해 경쟁에 나선다. 페미니즘은 결국 여성들이 낭만적 사랑의 복합체 밖에서 살아볼 만한 인프라와 상상력을 만들어내지 못했다.(7)

여성의 안전 문제와 관련해 페미니스트들이 분노하는 데는 분명히 이유가 있다. 여성들은 이 문제로 고통을 받았고, 그 고통은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그러나 여성의 안전은 지난 수세기 동안 남성들의 선전도구로 이용당해왔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남성들은 전쟁에 나서고 싶어할 때마다 자신들의 적이 여성에게 얼마나 위협적인 존재인지를 부각해왔다. 또한 자신들의 폭력을 정당화하는 데 여성의 안전을 이용했다. 무조건 여성들만 피해자라는 인식도 위험하다. 여성도 거짓말을 할 수 있고 남성을 함정에 빠트릴 수 있다. 도덕적·정치적 올바름으로 무장하고 울분을 터뜨리는 것이 꼭 정의로운 방식은 아니다. 페미니즘은 시민적 정의와 더 올바른 싸움에 눈을 떠야 한다.(8)

이 책의 역자가 지적하듯이 과연 페미니스트라는 말이 한국에서도 똑같은 맥락으로 읽힐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그 막강하다는 한국의 아이돌들조차 스스로 페미니스트임을 밝히는 것이 부담스러운 사회이니 말이다. 그러나 이 책이 그간 논의돼온 페미니즘에 얼마간 균형추를 달아주고 새로운 질문들을 던져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문제를 인정하고 직시하는 일은 올바른 길을 여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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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맛대로 살아라』는 2015년 5월부터 2016년 8월까지 『한겨레21』에 연재했던 음식에 관한 칼럼 ‘어정밥상 건들잡설’과 다섯 편의 새로운 글을 더해 만들어진 책이다. 『한겨레21』로부터 연재를 부탁받았던 시기는 식재료에 관한 사사로운 견해를 묶어낸 책 『알고나 먹자』가 출간된 직후였다. 음식에 대한 이야기를 일반적이지 않은 시각으로 풀어주길 바라는 요청이었지만 더이상 음식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았다. 『알고나 먹자』에서 이미 충분히 서술한 데다 『딴지일보』에 연재했던 『야만인을 기다리며』(가제)라는 여행기를 통해서도 다양한 방식으로 이야기한 후의 제안이라 같은 말을 반복하는 일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차에 영화감독 구로사와 기요시가 떠올랐고 그에게 영감을 받아 연재를 시작했다. 



구로사와 기요시는 「큐어」 「도플갱어」 「밝은 미래」 「도쿄소나타」와 같은 B급 호러영화 혹은 장르를 규정지을 수 없는 이상한 영화를 만들어온 일본의 중견감독이다. 지금은 그가 제시한 새로운 영화언어가 영화계에 널리 알려져 있지만 「큐어」로 세상에 알려지기 전까진 괴짜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유년기부터 단편영화를 만들며 영화감독의 꿈을 키워왔지만 기회는 쉽게 찾아오지 않아 한동안 포르노 영화를 만들기도 했는데 포르노 영화 제작자(닛가츠 영화사)가 구로사와 기요시에게 했던 제안은 단순한 것이었다.

“70분짜리 영화에 섹스 장면이 다섯 번 이상만 들어가면 돼. 그리고 나머지는 너 알아서 찍어.”


구로사와 기요시는 제작자의 요청대로 섹스 장면이 다섯 번 이상 들어가는 포르노 영화를 찍었는데 그 안에서 호러, 미스터리, 코미디, 멜로, SF를 비롯한 다양한 장르를 뒤섞고 찢어발기며 마음껏 실험할 수 있었고 이때의 자유로운 실험이 자신의 영화 스타일을 만들었노라고 말했다. 


『한겨레』의 제안은 포르노 제작자의 제안처럼 들렸다. 소재가 음식이라면 내용은 작가의 역량에 맡긴다는 제안은 매력적인 것이었다. 구로사와 기요시와 내가 다른 점이 있다면 나는 작가의 꿈을 꾸는 사람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단지 생각나는 것을 『딴지일보』에 적어나갔던 『알고나 먹자』가 책이 될 때도 기쁨보다는 의아함이 앞섰는데 칼럼을 써달라니…. 제안은 칼럼이었지만 처음부터 칼럼이란 ‘장르’는 머릿속에 없었다. 느슨한 테두리 안에서 내면의 흐름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어정밥상 건들잡설’이란 제목을 짓고 첫 글 「미나리연연」을 썼다. 말하자면 ‘어정밥상 건들잡설’의 ‘어정밥상’은 형식이고 ‘건들잡설’이 주 내용인 것이다. 또한 주변에 차고 넘치는 그 못난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라도 기록해줘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나 자신부터 못나디 못났지만 나와 만나는 그녀 또한 못나디 못났고, 글에 자주 등장하는 내 어미 또한 지독하게 못났을 뿐만 아니라 내 주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대부분이 이 시대를 살았었는지도 모를, 기억해주는 이 아무도 없는 못난 사람들이어서 그들에 대한 이야기도 한마디 남기고 싶었다. B급의 품위는 못난 것들을 못나고 볼품없는 언어로 깊이깊이 품어 서로의 설움을 달래는 데 있지 않을까. 싸구려로 무장해 세련됨을 파괴하는 데 있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여전히 B급을 사랑하고 거칠고 투박한 B급 언어로 이야기한다. 


‘칼럼’이라는 짐짓 그럴싸한 형식과 위엄을 사투리와 욕설과 이해 못할 문장과 받아들이기 거북한 주제들로 버무려 끌어내렸다. 이러한 행위는 나 자신을 파괴하는 행위이기도 할 테지만 『한겨레』의 권위를 추락시키는 일이기도 해서 언제고 해고를 통보받을 법도 했는데 『한겨레』는 1년이 넘도록 내 글을 계속해서 받아주었다. 감사하기보단 고집이 참 쎄구나,라는 생각이 우선 든다. 또한 이런 글을 책으로 엮자고 제안한 북인더갭의 안병률 대표도 의아하긴 마찬가지다. 거칠고 사나운 글에서 따뜻함을 느꼈다니 B급을 사랑한 포르노 제작자임이 분명하다. 그 혜안(?)에 감사드린다. 


글은 수많은 형식들을 끌어들여 비틀고 뒤섞어놓았다. 주제는 일관되지만 형식은 중구난방이다. 이게 소설인지, 시인지, 산문인지, 에세이인지, 칼럼인지 구분하기 힘들고 단락과 단락이 아무런 연관성 없는 이야기들로 이어지기도 하지만 다 읽고 나면 무슨 소린지 이해는 간다는 글들이 태반이다. 가령 「은하의 물고기들」과 같은 이야기는 이게 도대체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다는 사람들이 많았고, 『한겨레』에서도 화자를 표기하자고 제안했다. 그래서 단락마다 화자를 표기했지만 책에는 표기하지 않았다. 이 글은 다양한 인물들의 다양한 이야기일 수 있지만 내가 지어낸 다양한 사람들의 목소리이므로 한 사람(나)의 이야기로 읽는 것이 좋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 안에는 다양한 사람들의 전언과 소망이 담겨 있다. 따라서 「은하의 물고기들」은 시에 가깝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 화자를 구분 지으려는 노력은 매우 헛된 짓이다. 글 전체를 하나의 목소리로 읽으시길 바란다. 또한 「스스로 살아가기 마련이다」와 같은 글은 문단과 문단을 연결 지어 읽기 불편하게 써진 글이다. 삐거덕거리며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털털거리며 살아가는 두 인생의 이야기가 유려한 문장으로 부드럽게 표현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단어와 문장과 단락이 뚝뚝 끊어지고 시간을 급작스럽게 뛰어넘다보니 읽기에 불편하다. 어쩌면 이러한 글이 태반이다. 대체로 삐거덕거리며 살아가는 못난 삶들을 이야기에 담았으므로 형식 또한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연재를 하는 동안 단 한 편도 쉽게 씌어진 글이 없었다. 2년 가까이 글을 쓸 때마다 끙끙거렸는데 그때마다 흔들리는 마음을 지켜주고 주제와 형식에 대한 토론을 지치지 않고 이어나가준 사람은 ‘그녀’ 서윤이다. 나의 위대한 스승이자 도반인 서윤에게 이 글을 빌려 다시 한번 깊이 감사드린다. 존경할 수 있는 사람을 곁에 두고 친구이자 연인으로 생을 함께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저 높은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는 것보다 값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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