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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오스틴 무비 클럽/책 소개

영화로 읽는 제인 오스틴!

by 북인더갭 2021. 2. 4.

문학과 영화의 상호작용에 관심을 가져온 영화평론가 최은이 제인 오스틴 원작을 바탕으로 한 영화를 참신한 시각으로 읽어낸 책 『제인 오스틴 무비 클럽』이 출간되었다. 제인 오스틴은 출간된 모든 작품이 영화와 드라마로 만들어졌으며 2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꾸준히 재해석되는 생명력 넘치는 작가다. 이른바 제인추종자들로 알려진 엄청난 팬덤이 증명하듯, 제인 오스틴은 대중적 인기를 유지하는 고전 작가이자 현대의 대중매체에까지 끊임없이 영감을 주는 급진적 작가임에 틀림없다. <오만과 편견>에서 <레이디 수잔>까지 제인 오스틴의 원작을 바탕으로 한 26편의 영화와 드라마는 물론, 원작 소설과 비평을 꼼꼼하게 읽어가며 저자는 제인 오스틴 현상에 숨어 있는 비밀을 ‘여성의 글쓰기’라는 주제 아래 담백하게 써내려간다.

 

비혼 작가의 신데렐라 같은 결혼 이야기?

제인 오스틴의 생애에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그가 평생 비혼으로 살았으면서도 작품에서는 끊임없이 결혼 이야기를 다루었다는 점이다. 이런 이유로 제인은 한순간에 신데렐라가 된 여성들의 이야기를 쓴 작가로 오해받기도 한다. 그러나 저자는 제인을 당대 결혼 제도의 현실을 날카롭게 파헤친 작가로 바라본다. 가령 작품에서 주인공의 연수입은 얼마이며 유산으로 얼마를 물려받았다는 식의 ‘돈 문제’가 자세히 서술되는 이유는 제인이 속물적인 작가여서가 아니라 장남에게만 상속이 이뤄지는 제도적 한계 속에서 여성의 생존을 치열하게 고민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자산이 없는 비혼 여성인 제인에게 글쓰기는 취미일 수만은 없는 ‘노동’이었고 그래서 결혼시장에서 여성이 어떻게 자신의 삶을 지켜내는가는 작가의 큰 관심사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1~2장).

저자는 제인 오스틴 작품 곳곳에 여성들의 생존 전략을 심어두었는데 그중에서 <오만과 편견>의 샬롯은 전형적인 경우라 하겠다(3장). 주인공 엘리자베스는 절친 샬롯이 자기가 청혼을 거절한 ‘찌질남’ 콜린스와 결혼한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샬롯이 남편 콜린스와 부딪히지 않는 ‘자기만의 공간’을 꾸며놓은 것을 보고 엘리자베스는 친구의 선택을 인정하게 된다. 이렇듯 최선의 선택을 감행하며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않은 지혜로운 여전사로서의 샬롯의 모습은 우리 맘에 깊이 남는다. 제인 오스틴은 남성들의 청혼을 거부하고 자존감을 지키는 엘리자베스나 앤과 에마 같은 여주인공들의 용기있는 선택뿐 아니라 이미 터전을 잃고 몰락했거나 지참금이라고는 엄두도 내지 못할 낮은 신분의 여성들, 즉 샬롯이나 루시, 베이츠 양 같은 주변 인물들의 지혜로운 선택 또한 모두 품에 끌어안는다.

나쁜 사람이 늘 벌을 받지는 않는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되, 인물들 각자가 원하는 것을 모두 얻게 하는 제인 오스틴식 해피엔딩은 이안 감독의 <센스 앤 센서빌리티>에서도 빛을 발한다(4장). 부친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집도 절도 없이 쫓겨나게 된 엘리너와 마리앤 자매는 위기의 순간에 인생의 짝을 만나는 축복을 경험한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마리앤에게 상처를 주고 떠난 윌러비에게 제인은 보복성 징벌을 내리지 않는다. <오만과 편견>의 위컴에게도 마찬가지였듯이 말이다. 이는 제인이 남성이 입힌 상처와 악행에 집중하지 않고 그렇게 된 구조적 여건에 더욱 관심을 둔 덕분이었다. 또한 제인은 『이성과 감성』에서 소위 ‘말괄량이 길들이기’ 같은 방법으로 감성을 통제하려들지 않는다. 이것이야말로 제인의 ‘소심한 저항’이다. 감성의 결을 알아봐주고 받아들여주는 성숙한 이성을 요구하는 제인의 음성이 저자를 통해 나직이 들려오는 기분이다. 뚜쟁이 <에마>는 다소 의외의 인물로 다가온다(5장). 자신의 결혼 따위는 안중에도 없으면서 주변 사람들을 연결시켜주기 바쁜 에마에겐 ‘맨스플레인’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오가는 중년의 나이틀리 씨가 점점 다가오고 있다. 그러나 에마는 나이틀리의 지속적인 충고에도 쉽게 기가 죽지 않는 자존감을 지녔다. 에마는 감정적인 판단을 하는 대신 자신의 정직한 판단에 따라 상대 주장의 타당성을 인정하는 자존감을 발휘한다. 원작 『에마』는 계급상 ‘끼리끼리’ 만나도록 매칭하는 에마의 한계를 고스란히 드러냈지만 드라마와 2020년 제작된 어텀 드 와일드의 <에마>에선 하층계급에게 차별 없이 적극적으로 다가서는 에마를 만날 수 있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에마의 변신을 저자 최은은 놓치지 않고 소개한다.

 

늘 새롭게 해석되는 제인의 급진성

이처럼 제인 오스틴 원작의 영화와 드라마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새로운 급진성을 획득하며 재해석된다. 설득당하고 설득하는 이야기, 로저 미첼 감독의 <설득>에서도 원작과는 다른 선택을 한 주인공 앤을 만나는 묘미가 있다(6장). 가난한 선원 웬트워스의 청혼을 거절했던 열아홉의 앤은 8년이 흐른 뒤 해군 대령이 되어 컴백한 웬트워스와 다시 마주친다. 늘 듣기만 하고 설득만 당하던 앤은 이번에는 관습과 계급질서를 뛰어넘는다. 그리하여 선원인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가 아닌 함께 항해하는 아내의 길을 선택한다. 제인의 자전적 요소가 가장 많이 스며들어 있는 『맨스필드 파크』야말로 영국 식민지 제국주의의 폐해에 눈을 감았던 원작이 감독 패트리샤 로제마의 각색에 의해 급진적으로 해석된 작품이다(7장). 이모네서 더부살이를 시작하는 패니 프라이스가 성장하는 동안 영국의 노예무역으로 부를 이룬 이모부네 맨스필드 파크에는 제국주의의 악행과 이 가족들을 옥죄는 가부장제의 질서가 팽팽한 억압의 두 축을 이룬다. 이는 그의 큰아들 톰이 나타내는 육체적인 징후로 고스란히 증명된다. 물론 나중에는 제인의 원작답게 패니가 사랑하는 에드먼드와 결혼하면서 영화는 끝나지만, 원작이 침묵했던 제국주의 영국의 현실에서 영화가 시작되는 급진성을 저자는 날카롭게 잡아내고 있다.

『노생거 수도원』은 주인공 캐서린의 성장소설이자 고딕소설을 패러디한 독특한 장르의 작품이다(8장). 우리가 아는 처녀귀신이나 피범벅 시체가 아닌 현실에서의 공포를 깨달아가는 캐서린의 성장이 그 시절 앤 래드클리프의 고딕소설 『우돌포의 비밀』을 바탕으로 흥미진진하게 이어진다. 한편 제인이 소설가로서의 자의식을 드러내는 선언문과도 같은 문장들도 이 소설에서는 빛을 발하는데, 저자 최은은 그 부분을 제인의 ‘프라이드’를 강조하며 자세히 인용한다. 9장에서는 사촌언니 엘리자를 모델로 한 소설 『레이디 수잔』을 통해 전도된 남녀관계와 생계형 바람둥이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21세기의 눈으로 봐도 도가 지나친 레이디 수잔을 연민할 수밖에 없는 지점을 저자는 야박하지 않은 눈으로 바라봐준다.

 

제인 덕후들을 위하여

3부에서는 현대적으로 각색된 제인 오스틴의 작품들을 소개한다. 원작과 소설을 다 읽고 보았다 할지라도 현대적으로 각색된 작품들까지 섭렵하지 못했다면 당신은 진정한 제인추종자가 아니다. <제인 오스틴 북 클럽>(10장)에선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칠 만한 제인의 덕후들이 남기는 마지막 질문을 엿볼 수 있다. ‘제인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2000년대 초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브리짓 존스의 일기>에선(11장) 미스터 다아시와 브리짓의 로맨틱한 연애와 싱글 여성들의 서사가 현대적으로 변주되어 있다. <신부와 편견>(12장)처럼 발리우드 뮤지컬로 변신한 작품도 저자는 놓치지 않았고, 불멸의 B급일지도 모를 좀비영화 <오만과 편견 그리고 좀비>에 이르면 저자의 제인 오스틴 사랑과 그 원작 사랑의 깊이와 넓이에 독자들은 입을 다물지 못할 것이다. 또한 저자는 <프롬 프라다 투 나다>(14장)에서 갑자기 부친을 잃은 두 자매를 통해 멕시코계 미국인의 정체성을 고찰하기도 하고, 영화 <클루리스>를 통해서는(15장) 밀려오는 대중문화의 도도한 물결을 편견없이 수용하는 상징적인 인물 셰어에 주목하기도 한다. 그리고 16장, 제인 오스틴 팬덤의 끝판왕 <오스틴랜드>에 이르면 저자는 말로만 듣던 제인아이트(제인추종자)의 세계 속으로 풍덩 뛰어들도록 독자들을 독려한다. 가짜여도, 가벼워도 괜찮다고, 제인 오스틴을 여러 모양과 여러 색깔로 사랑하는 모든 독자들의 꿈이 무시당해선 안 된다고, 저자는 이 역동적이고 개방적인 대중의 사랑을 쓸데없는 소비라고 비난하지 않고 끌어안으며 글을 마무리한다.

장르이론과 탈식민주의, 페미니즘, 작가론, 대중문화 이론 등이 이미지와 활자 속에서 긴 호흡으로 뒤섞이는데도 책은 산만하지 않고 담백하다. 아마도 제인 오스틴을 향한 저자의 깊은 애정이 글을 안정감 있게 지탱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시대에 따라 새롭게 해석되는 제인 오스틴의 생명력이 궁금한 모든 독자들에게 영화평론가 최은의 『제인 오스틴 무비 클럽』은 가히 최애 소장품으로 그들 곁에 영원히 간직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