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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성 없는 남자 4권 양장판/옮긴이의 말

<특성 없는 남자> 옮긴이의 말

by 북인더갭 2024. 1. 26.

이번에 펴내는 특성 없는 남자4권은 3천년왕국으로(범죄자들)1-38장을 옮긴 것으로 로베르트 무질이 1932년에 펴낸 원서의 2권에 해당한다. 무질은 1930특성 없는 남자1권을 펴낸 이후 곧바로 후속권 작업에 돌입하여 2년 후에 2권을 출간했다. 그러나 3권을 준비하던 중 1942년 갑작스런 뇌졸중으로 사망함에 따라 특성 없는 남자2권은 무질이 생전에 펴낸 마지막 책으로 남고 말았다.

 

특성 없는 남자원서 1권을 번역한 1-3권에 이어, 원서 2권을 번역한 4권 출간으로 무질이 생전에 펴낸 특성 없는 남자1, 2권이 북인더갭에서 완간되었다. 1권을 번역 출간한 지 근 10년이 지나 4권이 나올 때까지 지켜봐주시고 기다려주신 독자님들께 감사드리고, 또 뒤늦게나마 완간의 약속을 지킨 것을 역자로서 다행으로 생각한다.

 

미완성, 문학의 순간과 영원

 

4권 옮긴이의 말을 준비하면서 역자의 머릿속에는 미완성이란 화두가 떠올랐다. 맨 처음 특성 없는 남자를 접했을 때부터 이 소설이 미완성이란 점, 그럼에도 독일어권 소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작품에 속한다는 사실에 묘한 매력을 느꼈다. ‘어떻게 끝내지도 못한 작품이 소설사에 남을 명작이 될 수 있었을까?’ 아마 이런 의문에서 비롯된 끌림이지 않았을까 싶다.

 

작가와 그가 살았던 시대상을 보면 왜 이 소설이 미완성으로 남게 되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무엇보다 결정적인 사건은 이 소설이 출간된 이후 오스트리아가 독일 나치에 의해 합병되면서(1938) 책이 금서 조치를 당했을 뿐 아니라 저자도 망명길에 오를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다. 안 그래도 경제적 곤란과 건강상의 문제 때문에 소설 작업에 어려움을 겪던 작가에게 이런 역사적 조건은 최악의 집필 환경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역사적 배경 뒤에 소설 완성을 방해하는 아주 흥미로운 요소가 하나 더 있었는데, 그것은 저자 스스로 작품의 완성을 끊임없이 지체하는 글쓰기 태도를 고집했다는 사실이다. 글쓰기에서 무질이 겪은 어려움은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씌어진 글을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었다. 무질에게는 한번 쓴 글을 끊임없이 고치는 습관이 있었다. 물론 적당한 퇴고는 더 완벽한 작품을 탄생시키는 좋은 습관이지만, 무질은 그 정도가 심해서 강박적으로 작품의 디테일에 집착했고 새로운 구상이 계속 떠올라 거의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였다. 특성 없는 남자1권이 마무리될 무렵 이런 강박증이 극심해진 나머지 무질은 정신과 의사를 찾아갔고, 심리적 요인으로 인한 업무장애 판정을 받기까지 했다.

 

2권까지 무사히 출간되기는 했지만 무질은 완전히 만족하지 못한 상태에서 책을 펴내야 한다는 사실에 압박을 받았다. 또한 저자는 2권이 미완성 상태로 출간됨으로써 독자들이 결론을 오해하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에도 사로잡혔다. 특히 울리히와 아가테가 어떤 최종적인 구원을 찾아나설 것이라는 예감을 독자들에게 줄까봐 저자는 걱정했다고 한다.

 

저자의 이런 태도는 교정쇄 상태에서 진행된 후속권 작업에도 영향을 끼쳤다. 저자는 죽기 직전까지 교정지 위에서 수정작업을 이어갔는데 결국 만족하지 못한 채 후속권을 완성하지 못하고 말았다. 저자의 사후 부인 마르타 무질에 의해 그때까지 수정한 부분을 반영한 3권이 나오긴 했지만, 저자가 작품을 끊임없이 수정하고 있었고 끝내 만족하지 못했다는 사실 때문에 3권을 완성된 판본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또한 뒷부분의 많은 분량의 원고는 구상을 담은 메모 상태로 남겨졌다.

 

하나의 예술작품이 미완성 상태로 남았다는 것은 분명 결핍과 실패를 드러내는 일일 것이다. 무질이 작품을 끊임없이 수정하는 태도는 정상적인 퇴고가 아니라 강박증에서 비롯된 습관이었다는 판단 역시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를 진지하게 읽어본 사람이라면 이런 판단에 흔쾌히 동의하기 힘든 것도 사실이다. 왜냐하면 이 작품이 미완성이라는 사실은 문학의 본질이 완성에 있지 않고 그런 완성을 의심하고 부정하는 사유에 있다는 작가의 태도를 웅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역설적이지만 무질에게 문학의 본질은 하나의 사유와 묘사에 온 정신을 투여하는 순간성에 다름 아니었으며 그런 순간성 덕분에 이 작품은 영원한 지속성을 부여받은 것은 아닐까, 그래서 저자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사로잡힌 강박 때문에 우리는 이런 미완성 대작을 손에 쥐게 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가져보는 것이다.

 

무질의 또다른 소설 생도 퇴를레스의 혼란에서 주인공 퇴를레스는 수학에서 허수나 무한수의 존재에 대해 의문을 품고 수학 선생님을 찾아가 그런 수들이 과연 존재하는지를 묻는다. 허수나 무한수는 개념 속에서만 존재하지만 그렇다고 존재하지 않는다고도 할 수 없는 모호한 정신을 의미한다고 역자는 생각해보았다. 무질에게 소설이란 그런 모호한 정신을 거의 무한대에 가깝게 밀고 나간 의지의 산물이라고 할 때 완성이란 개념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무질에게는 사실보다는 가능성이, 진보적 이상보다는 존재하지 않는 유토피아가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진실에 가까이 수렴하되, 결코 완성되지 않는 이런 지적 모험은 3부에 이르러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다른 상태를 향한 꿈같은 여정

 

특성 없는 남자의 구상은 이미 1905년경, 그러니까 저자의 20대 중반 무렵 일기 속에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원래의 구도는 크게 세 가지 이야기를 품고 있었다. 그 하나는 평행운동이었고 두번째는 울리히와 아가테 남매의 이야기였으며 마지막은 클라리세의 모험이었다. 이중 두 가지 구상이 소설에 실현되었는데 1, 2부가 평행운동 중심으로 진행되었고, 3부는 울리히-아가테 남매의 만남이 주된 줄거리가 되었다. 다행인 점은, 처음에는 뒤섞여 있던 구상이 시기적으로 분리된 것이다. 만약 1, 2부의 이야기가 3부가 함께 진행되었다면 독자들은 안 그래도 사유로 가득한 소설에 또 하나의 어려운 주제가 중첩되는 어려움을 감내해야 했을 것이다.

 

3부는 아버지의 죽음을 맞아 울리히가 평행운동의 소용돌이 속을 빠져나와 고향에 돌아가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고향집에서 울리히는 그간 잊고 있었던 여동생 아가테를 만나고 그녀가 남편 하가우어를 떠나고 싶어한다는 고백을 듣는다. 그러니까 3부는 남매가 아버지의 장례식을 계기로 여러 모험을 감행하면서 도덕에 대한 깊은 대화를 나누고 대도시 빈으로 함께 돌아와 평행운동의 인사들과 조우하는 과정을 큰 줄거리로 삼고 있다.

 

이런 줄거리 가운데 가장 부각된 인물은 3부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한 울리히의 누이 아가테일 것이다. 아가테는 사랑하던 첫 남편을 병으로 일찍 잃고, 두번째 남편과는 헤어지기로 결심한 상태였다. 그녀는 오빠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몇가지 범죄적 사건을 저지르는데, 그중 제일 먼저 독자들을 충격에 빠트리는 것은 아버지의 관에 그녀의 가터벨트를 집어넣은 사건일 것이다. 이 사건은 두 가지 면에서 아가테의 캐릭터를 드러내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우선 그녀가 아버지의 권위로 상징되는 법이나 규율, 가부장제에 절대 짓눌리지 않는 새로운 도덕적 모험을 상징하는 인물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또 하나는 지적인 사유를 펼치는 오빠 울리히에 대비되는 매우 직관적이고 감정적인 행동을 감행하는 성격을 가졌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아가테를 등장시킴으로써 저자는 울리히 중심으로 이끌어가던 소설에 강력한 상대를 마주세운 것이다.

그러나 아가테를 울리히와 충돌하는 정반대의 인물로만 볼 수는 없다. 오히려 그녀는 울리히가 마음속에 늘 품고 있지만 감행하지 못하는 것들을 과감하게 시도하는 인물에 가깝다. 울리히가 사유와 머뭇거림을 대변한다면, 아가테는 감정과 행동을 대변한다. 두 남매는 내면에 숨겨진 다른 면모를 서로에게서 목격한다.

 

특성 없는 남자3부의 핵심에는 이렇듯 심리적 거울에 다름 아닌 남매가 나누는 도덕에 관한 대화가 자리한다. 아가테의 강렬한 범죄 행위는 가터벨트 사건에서 멈추지 않고 곧 아버지의 유언장 위조로 이어진다. 여기서 범죄는 단순히 사회적 규율을 해치는 행위가 아니라 도덕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되묻는 계기로 작용한다. 다시 말해 범죄는 인간의 특성을 규정하는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맥락 밖에서 자아를 재구성하는 시도, 다른 상태와 만나기 위한 남매의 실험적 공간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 공간에서 도덕은 우리가 흔하게 떠올리는 반듯한 규율의 세계와 전혀 상관이 없다. 우선 여기에서의 도덕은 어떤 불가항력의 위대함에 짓눌린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유동하는 기능적 개념의 도덕이다. 울리히는 이를 다음 걸음의 도덕이라 부르는데, 행위의 좋고 나쁨이란 그 행위 자체로는 판단될 수 없고 그 다음 행위의 의미에 따라 정해진다는 것이다. 아가테는 오빠의 말에 호응해 누군가 도덕적으로 엄청난 속도로 날아가 새로운 진보에 도달할 수 있다면 그는 후회란 걸 알지 못할 것”(103)이라고 말한다. 남매에게 도덕은 어느 한순간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그 다음 걸음을 향해 끝없이 연기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남매는 도덕을 제도나 법이 아니라, 인간이 추구하는 다른 상태로 본다. 울리히에게 다른 상태란 우리가 묶여 있던 규율에서 벗어난 꿈같은 상태”(141)를 의미하며 아가테에게는 선이나 악 같은 건 없고 오직 믿음만이, 또는 의심만이 있는”(같은 쪽) 상태를 의미한다. 그러나 오늘날 도덕의 모습은 이런 상태와 전혀 다르다. 울리히는 현대의 도덕은 성취일 뿐이며 권력과 문명과 영광을 가져다준다면 빼앗고 속이고 죽여도 좋다는 규칙을 지지하는 국가”(109)에 의해 뒷받침된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오늘날 실행력이라는 것은 내면적으로 할 일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며 마치 나폴레옹이라도 된 것 같은 자세로 겨우 아홉 개의 나무 핀을 넘어뜨리는 볼링 선수”(110)의 행동에 불과하다고 풍자한다. 아가테 역시 부르주아의 삶에 내재된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속임수로 규정하며 그런 삶은 어떤 더 높은 것의 지시를 받지 않은 채 아무렇게나 쌓아둔 물건 같은”(283) 것이며 아이들의 무리를 상냥하게 바라보다가 갑자기 자신의 아이가 없다는 걸 깨닫고 불안에 빠져드는 것과 비슷하다고 비판한다.

 

도덕과 전쟁 사이에서

 

3부의 주요한 한쪽이 남매의 대화를 통해 실험되는 다른 상태의 가능성에 있다면, 다른 한쪽은 1, 2부에서 이어져온 평행운동의 종말과 전쟁의 가능성으로 나아가고 있다. 평행운동을 통해 영혼과 사업의 합일을 꿈꾸었던 아른하임이 실은 갈리치아의 유전개발 사업의 배후에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평화적 애국사업의 위상은 점점 흔들리기 시작한다. 아른하임에게 배반당한 디오티마는 평행운동에 관심을 끊은 채 성과학에 몰두하고 성관계를 통해 부부관계를 회복하는 일에만 매진한다. 군부의 지식인 슈툼 장군은 유전 사업과 군부의 이익을 조율하기 위해 막후에서 활동하며 외교관 투치는 이 모든 사태 뒤에 놓인 허울 좋은 평화주의의 모습을 비관적으로 관망한다. 겉으로는 모든 민족을 포용하는 듯 보이는 라인스도르프 백작의 내면 역시 적대적 민족주의와 다를 바 없는 전체주의로 기울어져 있다. 시인 포이에르마울이 외치는 평화주의조차 전쟁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불길한 징조로 다가올 뿐이다.

 

소설이 미완성으로 끝나는 바람에 미궁 속으로 빠져든 평행운동이 이후 어떻게 전개되는지는 알 수 없다. 또한 소설 후반에 등장한 새로운 인물들, 가령 정부서기관이자 기자인 메제리처, 시인 포이에르마울과 그를 후원하는 드랑잘 부인, 교사 린트너 등의 면모가 제대로 드러나지 못하는 아쉬움을 남긴다. 등장인물 중 드물게 행동을 감행하는 인물 클라리세도 모오스브루거를 찾아 정신병원을 방문하지만 결국 그를 만나지는 못한다.

 

아마 저자는 이 모든 것들에 대해 더 할 말이 있었을 것이고, 상황이 허락했더라면 어떤 식으로든 소설을 끝냈을 거라고 역자는 믿는다. 다만 거듭 강조하자면 무질에게 소설의 본질은 완성이 아니라 문학적 순간의 황홀함에 있었다. 지금으로선 그 빛나는 순간으로 가득 채워진 이 대작 소설에 깊은 경의를 표하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랠 수밖에 없다.

 

특성 없는 남자1권에서 3권까지 펴내면서 옮긴이의 말을 쓸 때마다 꼭 감사의 말을 전한 사람이 있다. 바로 처음부터 끝까지 원고를 수차례 읽으면서 교열해주었고 편집에 조언을 아끼지 않은 편집자이자 소설가 김조을해 작가다. 그 수고가 너무 고마웠고 또 이번 3부만큼은 아주 색다른 여성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만큼, 4권 양장판에는 특별히 편집자의 말을 부탁해 수록했다. 역자가 미처 하지 못했던 독창적인 작품 해석을 편집자의 말에서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특성 없는 남자1-3권 합본양장판에 이어 4권 양장판이 발간됨으로써 북인더갭 양장본 두 권은 로베르트 무질이 1930년과 1932년에 발간한 형식을 그대로 따른 판본이 되었다. 1-3권 때와 마찬가지로 번역 원서는 로베르트 무질 전집(Gesammelte Werke, Rowohlt 1978)을 사용하되 영어본(The Man without Qualities, Sophie Wilkins 번역, Vintage 1995)도 참고했다. 무질의 문장은 상당히 길어서 읽기 힘든 면이 있으나 역자는 문장을 단문으로 끊기보다는 가급적 원문의 긴 호흡을 살려보려고 노력했다. 무질의 긴 문장이 주는 아이러니한 매력과 아름다움이 조금이라도 전달되었기를 바란다.

독자님들의 입장에선 너무 더디고 게을렀을 역자의 작업을 지금껏 지켜봐주신 데 다시 한번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역자에겐 두 가지 과제가 남아 있다. 하나는 기존 번역을 가다듬어 쇄를 거듭할수록 더 정확하고 섬세한 판본을 내놓는 것이고 또 하나는 무질의 사후 출간된 3권 중 메모 형태의 유고는 제외하더라도 교정쇄 상태로 끝까지 수정된 부분까지는 번역을 이어가는 것이다. 부디 거기까지 힘이 닿기를 기도할 뿐이다.

 

20241

안병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