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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성 없는 남자 4권 양장판/편집자의 말

<특성 없는 남자> 편집자의 말

by 북인더갭 2024. 1. 26.

|편집자의 말|

 

김조을해

편집자이자 소설가. 작품으로 장편 <힐>과 단편집 <마시멜로 언덕>이 있다. 

 

 

 

 

프롤로그-자기애

열아홉에 과부가 된 여자가 있다. 이삼년 지나 아버지의 뜻에 따라 재혼을 했지만 결혼(재혼)생활은 수치스러울 뿐이다.

 

그러면 왜 다른 남자를 찾아보지 않았니? 아니면 공부를 하거나 독립적인 생활을 해보지 그랬어?”(28)

 

다 맞는 말이지만 여자는 고개만 가로젓는다. 그런데 잔인한 돌직구를 던진 이 사람은 후에 다음과 같은 고백도 남긴다.

 

나는 이제 네가 누군지 알아. 너는 나의 자기애야!”(341)

 

초교

로베르트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3(천년왕국으로-범죄자들)가 드디어 마무리되었다. 무질이 고릿적 소설가로 잊혀선 안 되는데, 북인더갭 라인업답게 고통스러운 지루함을 타협해선 안 되는데, 기다려준 독자님들을 실망시켜선 안 되는데편집의 처음과 나중이요 알파와 오메가는 역시 노심초사가 아닐까 싶다.

 

물론 가혹했다. 처음엔 늘 그렇듯 흰 것은 종이요, 검은 것은 글자였다. 원고는 과묵했다. 무질의 호흡, 무질의 도발, 무질의 불친절함, 무질의 사유, 무질의 신경쇠약에 다시금 익숙해지기 위해선 당류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리고 얻어낸 첫 단어, 행동.

 

행동

애국운동(평행운동)은 확실히 기가 꺾였다. 뭔가가 일어나야 한다는 맹목적인 의지는 무엇을 준비하고, 어떻게 실행하며, 누구를 위한 것인지도 모른 채 새로운 정신은 행동의 정신’(166)이라고 거칠게 수렴된다. 평화를 지키기 위해 무기 공장은 돌아가고, 군은 싼 가격에 석유를 공급받기 위해 재벌과 결탁해 유전을 개발중이다. 세상 누구도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외치지만, 광기의 전쟁을 사업 아이템으로 버무리고, 계획된 폭력을 허수아비 시인의 감상으로 포장하면서 순진한 평화까지 싸잡아 타락시켰다. 누가? 인간이! 유럽은 뭔가를 겁 없이 고대하고 있다.

그 와중에, 어느 늙은 추밀고문관은 세상을 떠난다.

 

아가테

아버지의 부고를 받고 고향집에 도착한 울리히와 미리 와 있던 여동생 아가테가 만나면서 3부는 시작된다. 고결한 여신으로 칭송돼온 디오티마와 애국운동의 명예비서로 위촉된 울리히가 소설 1, 2부의 주축이었다면, 3부에서는 다크호스 아가테가 등장한다. 아가테는 도덕과 비도덕, 선과 악에 대해 오빠와 팽팽한 논박을 이어간다. 공수攻守를 넘나들며 상대를 압박하는 울리히의 동생답게 아가테도 당돌함과 자유분방함으로 노련한 오빠에 맞선다. 이들의 긴장감 넘치는 갑론을박과 잠시 떨어져 있는 사이 각각 풀어헤치는 복잡하고도 도발적인 사유는 이 작품에서 놓칠 수 없는, 아니 놓쳐서는 안 될 관전 포인트다.

바야흐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1914년 봄, 상주로서 장례의 모든 절차를 맡아야 할 오누이는 성인이 되어 만난 어색함도 금방 잊고 일단 큰일부터 치른다. 이제, 오래된 저택에 덩그러니 남은 두 남매.

 

나쁜 짓 1

하지만 훈장들은 반납돼야 한다고 들은 것 같은데?”

그래서 아버지는 복제품을 만들어두었지. 관을 닫기 전에 복제품을 원본으로 바꿔서 가슴에 달아달라고 했어.”(45)

 

나쁜 짓 2

하지만 아가테는 이미 허리를 숙여 거들을 느슨하게 잡아주는 넓은 비단 가터벨트를 풀더니 관을 덮은 천을 열고 아버지의 주머니 속에 그걸 넣었다. () “무슨 짓을 하는 거야?”(63)

 

나쁜 짓 3

그저 몇 단어만 고치면 나의 의무 상속분은 이미 지불된 것이 된다고. 이제 와서 그걸 누가 알겠어?”(189)

 

선과 악

도발적이고도 망측스럽다. 하지만 또 얼마나 아슬아슬하면서도 통쾌한가. 3부의 부제 천년왕국으로-범죄자들을 힌트 삼아 위의 나쁜 짓을 분석하자면, 아가테는 백치 아니면 사기범이다. 그렇다면 오빠 울리히는? 왜 이래, 뭐하는 거야, 하지 마 등의 뻔한 말만 반복하며 동생을 말리는 척하지만, 울리히는 내면의 열망을 대신해주는 동생의 과감함에 이미 굴복했다. 오빠는 동생의 거침없는 행동을 보며 나의 또다른 자아, 내가 숨겨왔던 얼굴, 내가 억눌렀던 본성, 즉 비이성적이고 무지성적이며 비상식적이고 기습적이며 충동적인 날것의 를 정면으로 마주한다.

 

그녀에겐 정의와 불의가 더이상 일반적인 개념이나 수많은 사람 사이에서 맺어진 약속처럼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나와 너 사이의 마법적인 만남, 어떤 것으로도 비교할 수 없고 어떤 방법으로도 측량될 수 없는 창조물의 첫번째 착란처럼 여겨졌다.”(195)

 

샴쌍둥이

이렇게 되면 이들의 관계는 단순한 오누이가 아니다. 이들은 세상의 원칙과 질서를 죄책감 없이 무시했고 결연하게 비웃었다. 니체까지 들먹이며 동생을 가르치려는 오빠에게 아가테는 결정타를 날린다.

 

빈약한 원칙일 뿐이야! () 그런 원칙에 따라 내가 결혼을 한 거지!”(190)

 

정해진 도덕을 따라 살 수 없었던 자유영혼의 일갈일 수도 있지만, 27년 동안 자신을 한순간도 아끼며 사랑하지 못했던 한 여성의 뒤늦은 탄식일지도 몰랐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결혼도 했고 재혼도 했지만, 행동하지 않는 도덕주의자인 오빠 앞에서까지 그 억압을 참을 수는 없었다. 아가테에게 가슴이 터질 것 같은 희망과 기쁨은 물론, 때로는 비수로 찌르는 듯한 상처와 모욕을 준 오빠라는 존재는 이제껏 아가테가 만나보지 못한 또다른 이자 내가 바라던 찬란한 ’, 내가 찾던 반쪽의 완전한 였지만, 결국엔 동생을 통제하고 비난하며 아가테를 몰아세운다.

 

세상에 둘만 남겨진 고독한 남매가 영혼의 뒷모습을 발견한 듯 애틋하게 밀고 당기는 애정행각(?)은 이러한 바탕 위에서 시작되었다. 근친상간이나 신성모독이라는 터부를 넘어 현실에서 그들을 규정할 단어가 마땅치 않았기에 무질은 아가테의 입을 빌려 그들을 이렇게 명명했음이 분명하다.

 

남매로는 여전히 부족해! () 우리는 샴쌍둥이가 돼야 해.”(355)

 

하지만 사람들은 남매를 비난할 것이다. 이들의 결정과 선택은 한철 스캔들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이들이 살아갈 세상을 새로이 찾아 나서지 않는 한 남매는 잊히고 말 것이다.

 

그거 알아,” 울리히가 그 말에 대답했다. “우리가 천년왕국으로 들어간다는 거?”(199)

 

예수가 재림하여 천년을 다스리는 동안 도래한다는 그 지상낙원을 울리히는 미리 선포해버렸다. 그들은 모순으로, 혼돈으로, 위험으로 기꺼이 빠져든 것이다. 이제야 찾은 나의 또다른 자아를 방치하지 않기 위해 오빠는 농담처럼 천년왕국을 운운했지만, 아가테는 오빠를 전심을 다해 믿었다.

 

오누이로 대변되는 이 세상의 정신머리는 어쩌면 돌아버렸을지도 몰랐다. 인간 안에 잠복해 있는 악을 숨기고 싶지도 않고, 그 악을 굳이 이기고 싶지도 않았던 오누이(=이 세상의 정신머리)는 넘치는 탐욕으로 실천을 자행하는 세상의 급물살을 이겨낼 수 없었다. 그 결과가 유럽의 1914년이다. 아마도 무질은 세상이 미쳐 돌아간다는 것, 그래서 다같이 망하는 길 위에서 평화를 위장한 전쟁을 선택하고, 행동을 신성시하는 꼬락서니들을 향해 아가테와 울리히의 입을 빌려 환멸을 토로했는지도 모른다.

 

재교

이걸 아가테에게 알려야 해. 도덕은 우리 삶의 모든 순간적인 상태를 지속되는 상태에 종속시키는 것이라고!”(298)

 

아무리 생각해도, 성인이 된 두 남매가 의지하며 함께 살기로 한 결정부터 좀 무모했다. 아가테는 재혼한 남편 하가우어에게 돌아가지 않겠다고 오빠를 만나자마자 선언한 터였다. 자신의 몫을 미리 받았다고 굳이 유언장을 위조한 까닭도 이혼 시 남편과 재산을 분할해야 할 상황까지 헤아린 결과였음이 분명하다. 아가테로서는 하가우어와 한푼도 나누고 싶지 않은 것이다. 하가우어는 옳은 사람이고, 진보적인 교사에다, 성실한 남편이지만 아가테는 이토록 끔찍하게 선한 남편을 통해 선함악함, 다시 말해, 단추를 하나하나 끼우듯 영혼도 없고 생명도 없이 선한 사람에게 그만 진저리를 치는 것이다. 하지만 아가테가 영원히 참는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아가테는 안정적인 가정에서 촉망받는 교육자의 아름다운 아내로 살롱 생활을 소박하게나마 이어갈 수 있을 것이다. 즉 기존의 도덕에 굴종한 결과 기득권을 얻을 것이다. 그런데 참지 못한다면? 같이 사는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남편의 기계적인 선함을 발설해버린다면? 속되고 계산적인 남편의 욕망을 까발린다면? 그래도 세상은 남편 하가우어를 믿을 것이다. 그는 백인 남성이고 선한 사람이고 도덕적인 데다 진보적인 교사니까.

 

나쁜 짓 4

그는 필연적으로 현대 교육학에서 잘 알려진 기본 가정에 즐겁게 빠져들었는데, 그녀에겐 객관적인 사유 능력은 물론 외부 세계와 지적인 접촉을 유지하는 능력조차 결여돼 있다는 것이었다!”(420)

 

하가우어가 아가테에게 편지를 쓰다 말고 아내에 대해 깨달은 사실을 장쾌하게 서술한 부분이다. 이리하여 아가테는 선한 남편으로부터 마이너스 변종으로 분류당한다. 다시금 읽어도 뼈아픈 대목이다. 이혼을 앞두고 무슨 소린들 못하겠느냐마는, 교육자랍시고 교육학 지식까지 끌어와 아내를 금치산자나 한정치산자 취급하는 인간을 아가테는 남편이라고 믿고 살았다. 하가우어가 두 번 선했다간 아가테는 격리병동에 갇히지 않았을까 싶다. 아가테의 탄식이 귓가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나 스스로를 조금이라도 가치있게 여겼다면, 내가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텐데.”(97)

 

디오티마-변신

그러니 이제 누구도 영혼을 논하지 않는다. 아니 영혼이란 게 존재하긴 하나? 이제는 행동이다, 과학이다, 힘의 균형이다, 이다.

 

위대하고 선한 존재, 빛나는 영혼의 소유자 디오티마는 인생 한때의 반짝임, 혹은 넘어짐, 내지는 유혹의 골짜기에서 막 방향을 꺾었다. 철강 재벌 아른하임과는 결별만 남은 듯하니 아내의 눈치만 살피던 남편 투치에게는 살 길이 열린 셈이다. 그런데 묘하게도, 3부에 등장한 디오티마는 남자들의 세계에서 숭배당하다 꼭두각시로 전락한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고결하고 성스런 여신으로 등극할 때부터 위험했다. 특히 슈툼 장군은 디오티마를 성녀로까지 바라보지 않았는가. 인간에게 성녀가 웬 말인가. 언젠간 끌어내리려는 심보도 고약하지만(슈툼과 아른하임은 물밑 진행중인 유전 사업을 디오티마에게는 절대적으로 함구한다. ‘완벽하게 남자들의 일이라는 논리 때문이다) 한 존재의 전인격을 이렇게 간단하고 편리하게 규정해버리면 다음에 어떤 캐릭터가 이어지든 김이 빠질 건 불 보듯 뻔하다.

 

결국엔 가정을 지켰고, 남편에게 헌신하리라 다짐했고, 타인들에겐 불가능하지만 남편에게라도 빛나는 영혼을 불어넣기로 결심한 여성이 지금의 디오티마다. 옛날 디오티마가 아니다. 이 모든 건 심리학과 생리학 서적의 도움으로 가능했다. 원대한 이상, 공적인 운동의 리더, 사회적 살롱가의 화려한 셀럽이었던 때와 비교하면 다소 급박하게 변조된 인상이다. 가정과 남편을 배반하지 않기 위해 영혼을 불사르는 디오티마는 서둘러 안주한 듯한 느낌이다. 하지만 질투인지, 스스로를 향한 탄식인지, 울리히와 보나데아의 관계를 추궁하던 디오티마는 나쁜 남자 울리히의 정곡을 찌르는 명대사를 남긴다.

 

당신은 연애 상대를 동등하게 대하지 않고 그저 당신의 보충물로 대했고 그래서 결국 실망한 거예요. 활기차고 조화로운 성애로 가는 길은 오직 더 엄격한 자기훈련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나요?”(228)

 

이 한마디라도 내뱉지 않았다면, 디오티마는 한없이 초라한 부인으로 잊혔을 것이다.

 

보나데아-혁신

성녀 아니면 창녀라는 이분법에 보나데아를 끼워넣을 생각은 없다. 하지만 금욕적인 디오티마와 색정증을 앓는 보나데아는 억압의 기제 아래 나타나는 상반된 캐릭터로 크게 구분지을 수 있을 것이다. 성과학을 아무리 연구하면 뭐하겠는가. 숭배당한다는 건 결국 박제당한다는 의미 아니겠는가. 그러니 꾸준히 경멸당해온 보나데아에게는 무궁무진한 기회가 열렸다. 보나데아만큼 현실적이고 세속적이며 솔직한 인물은 없다. 디오티마와 열심히 공부한 결과 보나데아는 경험에 이론까지 장착했다. 2부에서 울리히에게 비참하게 버림받던 보나데아는 3부에서 빛을 발한다. 어쩌면 보나데아는 울리히의 영혼까지 뒤흔들 파괴적인 한방을 날릴 유일한 여성 캐릭터일지도 모른다.

 

남성에게 그저 행동이 아니라 여성에 대한 올바른 인식에서 나온 행동을 요청하는 거야!”(319)

 

울리히의 곁을 서성대는 유부녀 보나데아는 질투심에 불타 디오티마의 성과학 클래스, 일명 사랑학 교실(!)의 제자가 되었다. 하지만 보나데아는 배워서라기보다는 육체로 맛볼 수 있는 쾌락의 최고점에서 역설적이게도 균형감을 찾았을 가능성이 높다. 디오티마의 딱딱한 지식에 보나데아의 수많은 임상(?) 경험이 더해졌기에 둘의 협업은 울리히에게 유의미한 공격을 감행할 만큼 훌륭했다. 하지만 그 후 틀을 뛰어넘기보다는 더 견고히 지키며 각자의 삶을 옹호하는 길을 두 여성은 선택한다. 가정의 그늘이 언제까지 그들을 인도할지는 독자님들의 상상에 맡긴다. 가정이란 왕국을 지배하며 생의 만족을 찾겠다는 논리는 내 안에 갇히기 쉬운 위험한 발상이지만, 어쨌든 무질은 두 여성에게 거기까지만 길을 내준 것이다.

 

그녀는 남편에게 관대하라고 말했어. 그리고 뛰어난 여성은 결혼을 지배함으로써 뜻깊은 행복을 찾는다고 주장했지. 그녀는 어떤 불륜보다 그걸 더 높게 평가했어. 나 또한 항상 그렇게 생각해왔고!”(312)

 

클라리세-이중존재

하지만 울리히의 포스에 살짝 주눅이 든 여성 클라리세는 여전히 투쟁중이다. 클라리세는 지적인 얼음판 위를 마음대로 왔다갔다하는울리히를 사랑한다. 아니 동경한다. 하지만 클라리세는 현실의 언어로 자신을 표현하기엔 지나치게 예민하다. 긍휼과 사랑이 넘치고 세상 모든 것에 죄책감을 느낀다. 동정심이 끓어오른다. 클라리세의 오빠이자 의사인 지크문트가 누이의 상태를 정신장애의 징후로 단정하자, 발터는 아내인 클라리세를 옹호한다.

 

하지만 보편적인 체험과 일치하지 않는 모든 것을 장애로 취급하는 그런 미신이야말로 우리 삶의 죄이자 죄의 형상일 거야! 클라리세는 거기에 대항하는 내면의 행동을 요청하지.”(372)

 

소설 속 인물 가운데 유일하게 아파하는 사람. 클라리세는 개인의 삶을 뛰어넘어 사회의 사건사고에 상처받은 책임감으로 괴로워하다가 살인마 모오스브루거가 있는 정신병원까지 찾아간다. 하지만 반사회적인 폭력조차 낭만적으로 해석하는 클라리세의 시각은 분명 왜곡되었다. 한편 떠버리에 불과한 스승이자 손님인 마인가스트는 클라리세를 부추기며 자극하지만 클라리세는 계시를 받은 예언자처럼 존재의 맹점을 꿰뚫어본다. 떠버리에 의해 규정당하고 해석당하면서도 클라리세는 저돌적이다. 휘둘리는 듯싶다가도 상대를 완전히 제압한다.

 

우리가 집에 없을 때 당신은 그들을 부르지요. 소년들과 젊은 남자들!”(376)

 

불안정하고 비현실적인 인물이지만 무질은 그러한 문제적 인물을 통해 암시적인 불화살을 날리고야 만다. 클라리세는 신비한 이중존재가 맞다.

 

삼교

사견이지만, 소설은 좀 만만한 게 매력이다. 밤은 깊었지만 잠이 안 올 때, 맘 놓고 널브러지고 싶은 어느 날, 혹은 타인의 이야기를 엿듣고 싶은 그런 날, 즉 스스로에게 한줌의 평화를 선사하고 싶은 순간, 소설은 빛을 발한다(역시 사견이다). 그런데 이런 날 특성 없는 남자같은 책은 탈락이다. 일종의 셀프디스지만, 이 점이 이 책의 반전매력이기도 하다. 의외로 특성 없는 남자는 헐렁한 소설이다. 아마 주된 이유는 최악으로 치닫던 개인적 상황에 비해 무질의 의욕이 과했던 탓이 아닐까 싶다. 인물들의 행동과 선택이 헐거워지면서 소설을 마무리해도 시원치 않을 판국에 새 인물들을 마구 등장시킨다. 눈이 빠지도록 세 번을 읽으니 저자의 조급했던 마음이 보인다.

 

도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백치와 다름없다는 평을 남편과 오빠에게 동시에 받은 아가테는 오빠의 집을 뛰쳐나온다. 어디로 갈까. 어디로 갈 수 있을까. 아가테가 교외의 언덕에서 만난 린트너라는 인물이나, 결정적인 회합의 날 등장하는 메제리처라는 서기관과 드랑잘 부인, 그리고 시인 포이에르마울에 이르기까지, 무질은 아마도 소설을 더 이어가고 싶었나보다. 아가테와 울리히의 2차전이나 또는 눈물의 화해, 내지는 유럽의 광기, 또는 회합의 결과 등 주요 인물과 관련된 사건들이 대충이라도 마무리되며 소설이 끝나지 않을까 기대했던 독자라면 모두 의아할 듯하다.

 

그런데 1, 2부를 이끌어왔던 평행운동이라는 거대담론이 사라지고, 울리히의 주변 인물들이 개성을 뽐내며 등장하면서 오히려 소설은 더 말랑해졌다. 인물들의 개성이 치열하게 경합하는 가운데 21세기에 읽어도 소름 돋을 만한 사유와 감수성이 심상하게 툭툭 튀어나오니, 이런 게 고전이 아닐까 싶다. 무질을 예언자적 작가라 일컫는 게 결코 과장이 아닌 것이다.

회합의 밤에 그 장소에 합류했던 아가테는 자신 때문에 그를 방해하고 싶지 않다는 말을 남기고 먼저 사라진다. 길고 길었던 소설은 그렇게 끝이 난다.

 

에필로그-헤어질 결심

완전범죄란 없다고들 한다. 과연 그럴까? 특성 없는 남자를 마무리하며 그 까닭을 생각해보았다. 어떤 행동을 죄인 줄도 모르고 행했는데 벌을 받았다 치자. 그때서야 깨닫는다. 이런 게 죄구나, 사람은 죄를 지으면서 똑똑해지는 것이다. 선과 악의 기준에 눈을 뜨며 형이상학을 깨닫다보니 죄에 대해 느슨해지는 것이다. 그럴 수도 있지, 나만 그런가? 그러니 완전범죄가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죄에 대해 더이상 민감하질 못하니까.

 

그럼, 완전()소설도 없을까. 군더더기 없이 딱 맞아떨어지는, 결말도 뚜렷하고, 이야기도 재밌고, 주제도 선명한!

 

원고를 씹어먹어도 시원치 않을 자세로 무질의 소설을 검토하다 든 생각인데, 아마도 소설은 완전할 필요가 없는 장르일 듯싶다. 죄 많은 인간에겐 내면의 완충지대가 필요한데, 이 완충지대에서 인간은 죄를 걸러내고, 윤리와 도덕을 시험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사유하며 세상의 출구를 탐색할 것이다. 그 과정을 통해 무질처럼 어마무시한 텍스트를 뽑아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약탈과 폭력, 혹은 무기력함, 내지는 탐욕과 성공, 명예, 건강 등 중심도 없는 거대한 질문의 순환’(336) 속에서 처절하게 뭔가를 찾아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 존재들을 허구화한 게 소설이다. 그러니 완전한 소설이 정말 있다면 아마도 불편하고, 불안정하고, 불쾌하고, 불쌍한(?) 그 무엇이지 않을까 싶다.

 

먼저 자리를 뜬 아가테의 미래를 상상해본다. 많은 인물이 등장하지만, 아가테가 길을 찾길 바라는 맘을 숨길 수가 없다. 독자님들도 각자 편들어주고 싶은 인물을 찾아, 혹독하고도 괴로운 일독의 체험으로 로베르트 무질을 기억해준다면 편집자는 더 바랄 것이 없겠다. 그러한 소망을 품고 새 원고와 새로운 사랑에 빠질 채비를 하며 무질의 원고와는 이제 헤어질 결심이다. 그런데 무질의 사유에서, 아니 무질의 압박에서, 더 정확히 말하자면 무질의 강박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아가테는 어디로 갔을까. 다시 오빠 집으로 갔을까, 아니면 하가우어에게?그것도 아니라면 천년왕국을 찾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