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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언론 서평

김조을해 장편 <힐> 언론서평

by 북인더갭 2015. 7. 6.

<경향신문> 2015. 7. 4.

 

[책과 삶] 딴생각 통제하는 제국수용소에서도 진실은 살아남는다

김조을해 지음 | 북인더갭 | 280| 12500

 

휴양지의 고급 리조트처럼 쾌적한 힐 공동체제국을 거스른 사람들을 수용하는 곳이다. 이곳에서는 모든 물자가 풍족하고 산책로와 체력단련실, 스파까지 마련돼 있다. 힐은 수용자들이 스스로 싸움을 포기하도록 점잖게 기다리면서 쉬어가며 삶을 정돈하라고 비열하게도 명령하는 교화기관이다.

 

작가 김조을해(46)의 첫 장편소설 <>은 가상의 나라 제국에 반하는 행동을 했다가 수용소 힐에 갇힌 사람들의 이야기다. 방언으로 글을 쓴다거나 학생에게 책을 선물하는 일, 정신병을 앓는 일 같은 게 제국의 교화 대상이다. 이에 맞서 인간 정신의 자유와 다양성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이들의 판타지가 시적인 언어로 풀려 나온다.

 

 

힐 공동체 동관 803호에 들어온 청년 마기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속국인작가 리간의 아들이다. 아버지는 본국인’, 곧 제국인이며 동생 욘데는 어머니의 고향인 남쪽의 원시부족에서 입양해 왔다. 마기는 최근 제국 병원에서 숨을 거둔 어머니가 제국행정어로 쓴 글을 국제표준어로 번역하는 작업 중에 힐에 끌려왔다. 애초에 리간이 처음 글을 썼던 남쪽 부족의 언어, 방언본을 국제표준어본과 함께 출간하려던 게 문제가 됐다.

 

힐은 형기가 정해지지 않는 곳이고, 마기는 생각을 바꾸지 않으면 감금 프로그램이 가동될 것이라는 위협을 받는다. 개인 필수면담과 필수강연에 참석하는 것 외에는 자유시간이지만 힐은 호텔식 감옥일 뿐이다.

 

성정체성을 의심받아 아내의 권고로 힐에 온 큐선생, ‘일주일 후면 나갈 수 있다는 거짓말에 수차례 속고 살아 온 여자 세벡 등 다른 수용자들이 마기의 위안이 되어준다.

 

제국은 마기의 시도가 의미없는 출간이자 제국에 대한 공격이라며 그만두길 요구하지만 마기는 굽히지 않는다.

 

가슴에서 먼저 터져나온 거칠지만 뭉클한 글은 방언으로 씌어진 글입니다. () 힘없이 사라져가는 한 부족이 자부심을 얻었다 해서 나라에 큰 위협을 가하겠습니까, () 그들의 피를 물려받은 작가를 기억하게끔 도와주고 싶은 겁니다.”

 

동생 욘데도 마기 이전에 힐을 거쳐갔으나 실종 상태임이 드러난다. 원하는 대로 남쪽으로 떠난 것인지, 제국에 의해 감금돼 있는 것인지는 밝혀지지 않는다. 욘데는 소수민족 언어가 현대 제국행정어의 뿌리임을 밝히고 어머니 고향의 자장가와 동시, 노동요, 옛이야기를 방언대로 정리해 아이들에게 읽혀 왔다. 마기는 욘데가 가 있을지 모를 남쪽을 이정표 삼아 희망을 갖는다.

 

남쪽을 노래하듯 그리워하는 마기의 판타지장면은 소설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분이다. 이제 없는 이상향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리간과 욘데가 태어난 남쪽의 부족은 제국에서 미개한 원시인 취급을 받지만 짝에게 자신이 지은 사랑의 글을 읽어줘야만 부부가 될 수 있는 족속이다. 음악을 사랑하고 전쟁을 모르며 느려터진 여유를 아는 사람들이다.

 

남쪽, 북쪽 하는 지칭은 한국의 분단을 연상시키는데, 제국과 힐이라는 공간은 현실의 남북한 체제의 모순만을 집약한 것 같아 보인다. 전체주의적인 사고를 강요하며 그에 어긋나는 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모든 물질이 풍족하지만 삶의 신비와 거룩함에 대해 묻지 않는 곳이 제국이다.

 

김여란 기자

 

 

 

 

<조선일보> 2015713일자

 

열대야 식혀줄, 장편이 왔다

이색 소재·서사 장편 잇단 출간

 

한국 소설이 장편(長篇)의 계절을 맞았다. 본격 문학 작가들이 최근 이색 소재와 서사를 갖춘 장편을 잇달아 내놓고 있다.

 

경남 한산도(閑山島)에 사는 중진 작가 유익서는 전통 옻칠 공예의 미학을 다룬 소설 '세 발 까마귀'(나무옆의자)를 냈다. 지난 몇 년간 장편소설 공모에서 연거푸 당선된 젊은 작가 장강명은 요즘 한국 청년들의 현실 비판을 반영한 '한국이 싫어서'(민음사)를 내놓았다. 유익서 소설이 한국적 미학에 애정을 표현한 반면 장강명 소설은 한국적 삶에 환멸을 표출했다는 점에서 묘한 대조를 이룬다.

 

스페인 문학자 구광렬(울산대 교수)1980년대 멕시코 감옥에서 시작하는 소설 '여자 목숨으로 사는 남자'(새움)를 출간했다. 젊은 작가 김조을해는 가상세계의 수용소를 그린 소설 ''(북인더갭)을 선보였다. 해외를 무대로 하거나 판타지를 상상하는 것은 요즘 한국 소설의 새 흐름이기도 하다. 구광렬 소설에서 멕시코는 현실 공간이면서 마르케스의 소설 '백 년 동안의 고독'에 나오는 가상 도시처럼 남미 현대사의 집합체이기도 하다. 김조을해 소설은 환상 문학이면서도 오웰의 소설 '1984' 같은 디스토피아 소설의 계보에 속한다.

 

유익서의 '세 발 까마귀'는 경남 통영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예술가 소설이다. 옻칠 공예를 현대 미술에 응용해 세계 미술 시장에 내놓을 한국적 예술을 추구하는 예술가들의 이야기다. 작가는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서양 미술은 중세를 정점으로 미학적 아우라를 점점 잃어오지 않았는가"라며 현대 미술을 비판한 뒤 "옻칠과 자개의 특성을 살려 벽화의 전통을 구현하자"고 제안한다. 작가는 "전통의 계승은 풍요로운 샘"이라고 강조했다.

 

장강명의 '한국이 싫어서' 주인공은 '난 정말 한국에서는 경쟁력이 없는 인간이야'라고 자조하는 오늘의 청춘을 대변한다. 주인공이 호주로 떠나 고생 끝에 정착했다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지만 결국 한국적 삶에 안주하지 못해 호주로 되돌아가는 이야기다. 작가는 행복을 '자산성 행복''현금 흐름성' 행복으로 나눈다. 취업을 비롯해 현실에서 성취를 이룬 사람은 그로 인한 기억을 행복의 자산으로 삼아 힘들게 생존한다. 그런 성취의 기억이 없는 사람은 순간순간의 행복을 끝없이 추구하는 '현금 흐름성' 행복을 지향하게 된다. 한국에선 '현금 흐름성' 행복을 얻기가 힘들다는 게 이 소설의 전언이다. '집 사느라 빚 잔뜩 지고 현금이 없어서 절절매는 거랑 똑같지 뭐'라고 주인공이 한마디 날리며 한국을 떠난다.

 

구광렬의 '여자 목숨으로 사는 남자'는 멕시코 감옥에 억울하게 갇힌 한국인 유학생의 인생 유전을 다룬다. 주인공이 지옥 같은 감옥에서 탈출한 뒤 멕시코 반란군에 합류해 겪는 모험담이다. 작가가 멕시코 유학 체험을 바탕으로 원래 스페인어로 쓴 소설이다. 출간을 하려 했으나 원고를 잃어버렸다가 기억을 되살려 우리말로 복구했다고 한다. 한국과 남미의 정치적 유사성을 반영하며 쓴 분노의 소설이기도 하다. '어떤 일을 할 것, 어떤 사람을 사랑할 것, 어떤 일에 희망을 가질 것'이라는 칸트의 행복론을 인용해 소설 주인공이 파란만장한 모험에 뛰어든 동기를 에둘러 표현한다.

 

김조을해의 ''은 시대와 장소가 불분명한 가상현실을 담은 환상적 리얼리즘을 펼쳐놓는다. 정체불명의 제국(帝國)이 인간의 의식을 마비시키고 교화하기 위해 세운 수용소를 무대로 삼았다. 수용소 같은 현실을 벗어나 이상향을 찾아가려는 이야기다. 그 밑바탕엔 분단된 한반도에서 원초적 고향을 찾으려는 '실향민 의식'이 깔려 있다. 작가는 황해도에서 월남한 조부를 둔 피란민 3세대라고 한다. 분단과 전쟁 이전의 고향을 향한 실향민 가족의 무의식이 이 소설의 뿌리가 됐다.

 

박해현 문학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