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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의 말



영국 전통의 엘리트 양성소인 옥스포드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했으며 『가디언』을 비롯한 여러 신문에 기고하고, BBC처럼 유명한 TV와 라디오 방송에 자주 출연하는 젊은이가 ‘기득권층’을 비판하는 책을 썼다고 하면 그저 맥 빠지는 자기반성에 그치겠거니 하는 편견이 앞설지도 모른다. 그러나 전작이자 첫 단행본 『차브』를 통해 일상에서 폭넓게 작동하는 노동계급의 악마화 문제를 속속들이 파헤쳐 찬사를 받은 오언 존스는 이 책에서도 기득권층의 문제를 거침없이 탐구한다. 그가 보기에 자신의 위치는 기득권층에게 접근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특권적일 수는 있지만, 그럼에도 이 점이 기득권에 대한 비판을 불가능하게 할 모순점이거나 자신을 기득권의 테두리 안에 넣을 이유는 되지 못한다고 단언한다. 



‘기득권층’에 대한 반감은 꽤 널리 퍼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 기득권층이 누구이고, 어떤 사람들이며, 기득권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는 오랫동안 불투명하게 남겨져 있었다. 저자가 보기에, 그러한 불투명성은 기득권에 대한 의미있는 도전을 더욱 지연시킨다. 군주가 부여하는 작위가 아직 존재하며 사회 계층・계급간 분리가 어느 정도 가시적인 영국에서, 기득권층이란 세습된 부와 작위를 가지고 태어나 이튼 칼리지-옥스브리지를 졸업한 상류계급 인사와 그들의 관계망 정도로 생각되기 쉽다. 실제로 기득권을 뜻하는 영어단어 ‘establishment’가 오늘날과 같은 용례로 쓰이는 데 큰 영향을 미친 1950년대 칼럼니스트 헨리 페얼리는 영국 귀족 및 상류계급의 인맥을 통해 작동하는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특권을 가리키는 말로 기득권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오언 존스는 기득권의 그러한 정의가 충분하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기득권층은 시대에 따라 변하는 유동적인 집단이기에 세습된 신분만으로 정의될 수 없다. 저자가 보는 현 기득권층의 핵심 요소는 대처리즘 이후 정착된 현 영국의 사회적 합의를 불변의 상식으로 여기며, 거기에 도전하는 모든 생각과 행동을 극단적이고 비현실적인 것으로 규정하는 일련의 사고방식이다. 이 사고방식은 경제적일 뿐 아니라 도덕적이기도 한 일련의 내러티브를 생산해낸다. 예를 들면, ‘개인의 자유로운 욕망 추구가 사회 발전의 원동력이다. 뛰어난 능력을 가진 비범한 기업인과 금융인이 나머지 무능한 인구를 부양할 부를 생산하므로 그들에게 충분한 보상이 있어야 한다. 시장이 다 알아서 최선의 길을 찾는다. 국가는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고, 각종 규제로 뛰어난 개인들의 재능 발휘를 방해할 뿐이다. 국영사업은 민간에 비해 비효율적이고 경쟁력이 떨어진다’와 같은 견해가 그것이다. 이와 동시에, 자유시장의 작동을 방해하고 교란하는 국가개입(복지와 같은)과 노동운동 등은 타파해야 할 적으로 악마화된다. 


이들의 서사는 결국 대처의 개혁이 복지국가와 노동조합이 일으킨 ‘영국병’(British disease)의 끔찍한 비효율성에서 영국을 구해냈다는 것이다. 동시에 실업급여나 장애연금을 비롯한 국가보조금 수령자들(이민자를 포함한)은 기업가가 창출한 부를 좀먹는 쓸모없는 존재이자, 실질임금 삭감과 생활수준 악화에 끊임없이 시달리는 영국인들의 분노를 돌릴 좋은 표적이 된다. 이런 서사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난다면 사회적·학문적·정치적 주류로 진입할 수 없을뿐더러 경청할 만한 소수의견으로 여겨지기조차 힘들 정도로, 이는 영국 사회의 굳건한 주류 내러티브로 자리잡았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러나 논리정연해 보이는 기득권층의 설명은 이미 널리 통용되고 있기에 그것이 비교적 새롭게 나타난 내러티브라는 점을 잊기 쉽다. 저자가 세심하게 상기시키는바,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영국은 사회민주주의적 좌파와 온정주의적 복지국가에 공감하는 주류 우파가 권력을 겨루는 국가였다. 당시만 해도 민영화와 부자 감세를 포함한 현 기득권의 상식들은 지나치게 극단적이고, 너무나 과격해서 현실성이 없는 몽상으로나 여겨졌다. 그 사실을 직시할 때 비로소 대처리즘의 실체 또한 바로 보인다. 대처리즘은 단순히 그 ‘개혁’의 적시성과 과단성 덕분에 성공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논쟁이 일어나는 지형 자체를 바꾸고 무엇이 중도이고 무엇이 극단으로 규정되는지를, 즉 사회적 합의를 바꿔내는 지각변동이었던 것이다. 대중이 받아들일 만한 의견의 테두리를 지칭하는 ‘오버턴의 창’을 옮기는 사상적 작업이 뒷받침되었기에 대처리즘은 영국 사회의 상식으로 지속되어, 심지어 신노동당 같은 그들의 정치적 반대파마저 대처리즘이 주조해낸 용어와 한계 속에 자신들을 가두게 된다. 


따라서 대처라는 카리스마적 인물 한 명이 갑자기 등장해 영국을 장악했다기보다, 적어도 프리드리히 하이에크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이 투쟁에 몸을 던진 이론적 선각자(outriders, 본문에서는 ‘선동자’로 번역됨)들이 한 세대 이전부터 이미 등장을 예비했던 것이다. 저자는 바로 그 선각자들의 기원까지 거슬러 올라가, 오늘날까지 유지되는 기득권층의 합의가 영국에서 작동하는 방식을 탐구한다. 정치인과 언론인에서부터 경찰과 같은 관료들까지도 폭넓게 동조하며 그 유지에 힘을 보태는 기득권층 선각자들의 사상 덕분에 사기업들은 공공서비스를 넘겨받아 비효율적으로 운영하며 이윤을 추구하고, 그러면서도 세금을 부당한 비용인 것처럼 회피하며, 금융가들은 규제받지 않고 이윤을 추구할 수 있었다. 기득권의 대항세력이 자신들을 의미있는 대안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실패함에 따라, 이러한 체제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마저도 대안은 없다는 체념에 깊이 빠지고, 이는 다시 기득권과 그들의 사상을 강화한다. 저자는 민영화-감세가 효율성을 증진시킨다는 신자유주의 도그마, 일하기 싫어하는 노동계급이 부정하게 세금을 타내기 때문에 영국이 만성 적자에 시달리다가 경제위기의 늪에 빠졌다는 내러티브 등의 허구성을 풍부하고 자세한 실례와 함께, 샅샅이 파헤친다. 


그러나 이 책의 비범함은 단순히 오늘날 통용되는 지배적 내러티브 이면에 숨겨진 역사성을 밝혀낸 데 그치지 않는다. 저자는 사상의 확산과 통용이 이루어진 역사와 함께 그 양태와 영향을 살아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로 분석한다. 선각자들은 위기의 시대에 대안적 가치를 제시하고, 추상적 이념과 구체적 실현방안을 다각도로 연구했으며, 그들의 사상으로부터 얻을 것이 있는 이익집단의 동의와 지지를 구했다. 이 책은 선각자들의 사고 실험이 통치이념이 된 지금 영국을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존스는 힐즈버러 참사의 유족부터 영국 하원의원과 상원의원까지, 4대 회계법인 중역에서부터 불심검문에 노출된 흑인 피해자와 구직수당을 받은 경험이 있는 전 실업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목소리를 인용하고 있다. 그 인용은 특정인을 악마화하거나 반대로 도덕적으로 무조건 정당한 피해자로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저자는 백인, 비장애인, 남성, 성소수자 등으로 표현되는 자신의 자리를 부정하거나 망각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그들에게 공감하고, 반박하고, 동의하고, 논쟁한다. 그리고 그러한 분석을 바탕으로, 저자는 기득권층의 선각자들이 해냈던 것을 지금 기득권의 반대자들이 해내야 할 것이며, 따라서 현재 기득권의 반대자들은 선각자들과 같은 위치에 있다고 말한다. 저자는 선각자들이 주변부였을 때조차 잃지 않았던 신념과 낙관성, 끈기가 현재 학계의 상대적 주변부로 밀려난 장하준 같은 학자들의 쾌활함을 닮아 있다고 평한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저자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기득권의 선각자들이 수세에 몰렸을 무렵 19세기 자유주의를 향수했다면, 존스는 20세기 중반 이후 복지국가 모델의 성취와 성과를 돌아보며 그보다 더 앞으로 나아갈 힘을 구한다.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존스의 이야기는 선각자들의 내러티브에 대한 가장 철저한 반박임과 동시에 그들에게 보내는 찬사다. 수도 적고 현실성 없는 몽상가들, 한줌의 극단주의자들이 고안한 사상이 오늘날 영국의 지배이념이 되었다면 그 반대도 가능하지 않겠는가. 이제 지배이념의 승리는 좌파가 절망해야 할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오늘날 현 기득권의 반대자들에게 용기를 주는 선례다.


저자에 따르면, 선각자들은 일관적인 메시지를 반복하며 현 체제에 대한 체계적인 대안을 설계하는 데 골몰하여 마침내 위기를 기회로 전환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 역사를 상기하는 것은 그들의 성공 행보에 시작이 있었듯 끝이 있을 것이라는 점을 일깨워준다. 그러나 저자가 주지하듯이, 기득권의 반대편에 있는 이들은 2008년 경제위기 당시 그와 같은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보호무역주의를 앞세운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유럽연합이 흔들리며, 국경의 장벽 없는 자본의 이동과 수탈을 규제하고자 하는 열망이 들끓는 지금은 확실히 기존 기득권의 위기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득권에 대한 반감은 체제를 변혁하고자 하는 열망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반이민과 같은 극우주의 포퓰리즘의 자양분이 되는 것이 아직까지의 현실이다. 


한편, 한국에서는 한동안 ‘금수저’라는 말이 인터넷과 신문지상을 풍미했다. 원망과 선망이 섞인 형태로 금수저가 호명될 때, 거기에는 한편으로 신분상승과 자수성가의 신화가 더이상 지탱 불가능하다는 현실 직시가 존재하는 동시에 그같은 현실을 바꿀 수는 없다는 체념도 엿보인다. 


이처럼, 기존 기득권의 반대자들은 또다른 실패를 목전에 두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로 이런 때야말로 이 책이 필요한 시점이다. 공교롭게도 이 책이 영국에서 출판되고 한국어 번역 과정을 거치는 동안 브렉시트 가결이나 트럼프의 당선 같은 굵직한 사건들이 일어났다. 이런 시대에, 이 책은 세상을 바꾸는 일이 가능하며 실제로 일어났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지금 자연스러운 상식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을 주조하고 전파한 이들에 대한 값진 통찰을 제시한다. 저자가 기대고 있는 영국의 역사적 자산과 그다지 가깝지 않은 한국의 현실을 사는 사람에게도, 심지어 저자의 정치관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이 책은 귀한 참고점을 선물하리라 생각한다.


책을 번역하는 와중에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도움을 받았으나, 좋은 동료 연구자이자 조언자로 함께해준 루인과 영국의 기득권층을 한국의 ‘금수저’와 병렬하는 지혜를 통해 이 책을 읽어낼 통찰을 보태주신 이유진 선생님, 항상 곁에서 힘을 전해준 고양이 둘리와 개 아리, 원고 정리작업을 도와준 동생 은영과 늦어지는 작업을 너그럽게 기다려주신 북인더갭 안병률 대표님을 비롯한 출판사 여러분께 감사를 전한다. 


2017년 3월

조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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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언 존스 Owen Jones

 

1984년 영국 셰필드에서 태어나 그레이터맨체스터주() 스톡포트에서 자랐다. 옥스퍼드 대학에서 역사학을 공부했으며 노동당 연구원, 노동조합 활동가로 일했다. 2011년 하층계급의 현실을 파헤친 차브(Chavs)를 펴내 가디언』 『뉴욕 타임스등에서 최고의 정치학 도서로 평가되면서 조명을 받았다. 두번째 책 기득권층(The Establishment)은 정치인, 기업인, 언론인 등 최상류층의 커넥션과 그들의 부패한 실상을 파헤쳐 다시 한번 가디언』 『옵저버』 등에서 올해의 책에 선정되었다. 현재 가디언의 칼럼니스트로 있으면서 BBC 등의 방송에 정치평론가로 출현하고 있다.

 

 

옮긴이

 

조은혜

 

영국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UCL)에서 석사(MA) 과정을 마치고 현재 연세대학교 대학원에서 비교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젠더 무법자: 남자, 여자, 그리고 우리에 관하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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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하층계급의 현실을 파헤친 차브를 펴내 세계적인 조명을 받았던 오언 존스가 두번째 책 기득권층으로 다시 독자들을 만난다. 엄청난 권력을 가지고 막대한 이권을 챙기는 사람들의 네트워크를 파헤친 이 책에서 저자는 우리가 말로만 듣던 기득권층의 실상을 낱낱이 고발한다. 기득권층이 하나의 정치적 화두로 떠오른 지금, 이 책은 오늘날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소수 권력자들의 발생과정과 그들이 끼치는 정치경제적 폐해를 새로운 시각으로 날카롭게 진단하며, 이에 맞설 민주적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기득권층이 도대체 무어냐?

금수저가 흔하게 거론되는 요즘 누구나 기득권층을 이야기한다. 이른바 최순실 사태에서 비롯된 탄핵정국에서도 기득권이라는 말은 가장 흔하게 정치인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그러나 도대체 기득권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대답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 문제는 우리가 기득권의 실체에 대해 무지할수록 기득권층에겐 이득이라는 점이다. 저자는 기득권층을 다음과 같이 정의내린다. 그들은 한마디로 권력을 가진 소수집단이다. 다시 말해 다수에 맞서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려는 자들, 즉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소수 권력집단이 바로 기득권층이다.


이 소수 기득권층의 뿌리에는 지난 30년간 다수의 권력을 체계적으로 최상층에 재분배하는 데 앞장서온 우익 이론가들이 있었다. 저자가 선동자들(The Outriders)이라고 부르는 이들은 70년대 초만 해도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소수 이론가들이었다. 하이에크(F. Hayek)로 대변되는 이들 자유방임주의 이론가들은 부자감세’ ‘규제철폐’ ‘민영화등을 외치며 전후에 합의된 사회민주주의 체제를 부정하다 대처리즘-레이거노믹스를 거치며 확고한 이데올로그로 자리잡았다. 초기 선동자들의 영향으로 태어난 애덤스미스연구소나 헤리티지재단 같은 자유주의 싱크탱크들은 보수파 사업가들에게 자금지원을 받으며 자유시장 이념을 전파했으며 국가와 공공지출의 의미를 악마화하는 데 앞장서왔다


가령 영국의 납세자동맹 같은 단체는 납세자 권익을 옹호한다는 탈을 썼으나 실은 복지기금이나 노조전임자를 공격함으로써 기득권층의 이익을 대변한다. 이는 마치 우리의 전경련이나 어버이연합 같은 단체가 그 이름과는 상관없는 기득권 옹호 단체인 것과 비슷하다. 그러나 선동자들은 그저 사업가를 옹호하는 냉소적인 돌팔이가 아니다. 선동자들은 흔들림없는 자유주의 신념을 가지고 일하며, 바로 이 신념이 사업가들을 사로잡아 돈을 내도록 이끈다. 이처럼 현재 정치적으로 수용 가능한 논의들, 오버턴의 창을 옮김으로써 선동자들은 원래는 불합리하다고 여겨진 민영화라든가 부자감세 같은 의제들을 건전한 상식이자 확고한 현실로 만들어냈다. (1)


그러나 기득권층이 이처럼 신주단지 모시듯 떠받드는 자유시장은 환상에 근거하고 있음이 점점 드러나고 있다. 기득권층은 작은 정부, 적은 세금을 외쳐대지만 사실 이들의 기업은 엄청난 국가 부조(扶助)를 기반으로 운영된다. 가령, 구글의 검색엔진이나 GPS서비스조차 국가의 연구개발에 의지하며 도로, 항만, 철도 같은 기반시설 없이 기업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또한 기업에 필요한 노동자들은 국가의 교육으로 키워지며 세액공제, 주택보조금 같은 복지제도는 기업의 임금을 보전해준다. 무엇보다 스스로의 탐욕 때문에 무너진 기업에 제공된 엄청난 구제금융을 보라. 이는 부자와 기업이 필요할 때 국가가 언제든지 나서서 그들을 구제해주고 있음을 말해준다. 그럼에도 선동자들을 비롯한 자유방임주의자들은 부자 기업이 아니라, 최하층을 세금 낭비의 주범으로 몰고가기 일쑤다. 켄 로치의 영화 , 나니엘 블레이크에서 묘사되듯이, 자신들에게 돌아가야 마땅할 분노를 푸드뱅크에서 먹을 것을 구해야 하는 이들에게 돌리는 기득권층의 작태는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5, 7)

 

부자를 위한 사회주의?

저자가 적절하게 묘사하듯, 이런 부자들을 위한 사회주의이면에는 기득권층의 커넥션이 존재한다. 그중 누구보다 끈끈한 이들은 바로 정치인들이다. 정치인들은 보통 기득권의 요구를 잘 알고 있으며 이를 정책에 반영한다. 이들은 최고소득에 붙는 세금을 깎아주고 대신 부자와 기업들로부터 엄청난 후원금을 챙긴다. 기업과의 거래를 통해 사익을 챙기는 영국 정치인들의 모습은 우리 탄핵된 대통령의 행태와 그리 다르지 않다. 또한 이런 기득권층의 생각에 약간만 어긋나는 정책을 취해도 심한 반발이 이어진다. 2013년 노동당 당수 에드 밀리밴드는 공영주택 건설, 법인세 인상, 연료비 동결 등을 공약했다가 토지몰수에 나선 마르크스주의자라는 기득권층의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여론의 입장은 다르다. 유권자들은 연료비 동결은 물론 에너지산업의 국유화를 지지하며 부동산시장에 정부가 개입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실제 정치에서는 다수의 의견이 아닌, 소수 기득권층의 이익이 더 반영된다. 이미 기득권층의 사고방식이 정치를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회전문 인사는 문제를 더욱 악화시킨다. 정계의 많은 인물들이 기업인 출신이며, 정계 임기를 마치고 다시 기업으로 돌아가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그러니 정책에 기업의 이익이 더 많이 반영될 수밖에 없다. 정부의 복지부 수장이 국민연금을 움직여 대기업에 도움을 주고 다시 국민연금 이사장으로 발탁되는 것을 목격한 우리에게도 이런 회전문은 그리 낯선 일이 아니다. (2)


이 와중에 언론은 애완용으로 비단뱀을 키우는 복지수급자 같은 극단적 사례를 수집하는 데 열을 올린다. 사실 언론은 독자들의 생각에 관심이 없다. 대부분의 언론은 정치적 동기를 가진 소수의 소유주가 지배하며, 언론의 행태는 그 소유주의 생각에 좌우된다. 세계적인 언론재벌 루퍼트 머독은 지를 앞세워 1994년 노동당을 패배시켰으며, 보수당이 형편없이 망가지자 토니 블레어를 내세워 신노동당 정권 수립을 도왔다. 이제 기자라는 직업조차 특권층 일부에게만 개방되며, 기자가 된 후 이들이 만나는 사람도 거의 기득권층 일색이다. 언론계 인사들 역시 정치인들만큼이나 회전문을 통해 정계와 재계를 드나든다. 이렇게 기자들이 부유층 권력자와 사이좋게 지내니 언론이 현 상태의 유지에 기여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3)


국가에 귀속돼야 할 세금을 포탈하여 주머니를 채우는 일 또한 기득권층의 주특기라 할 만하다. 세계에는 기득권층을 위해 마련된 조세회피지가 널려 있으며 여기에 부자들의 재산이 은닉돼 있음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최순실 같은 우리나라 기득권층 역시 해외에 엄청난 재산을 은닉했다는 의심을 받는 중이다. 대규모 의류도매체인을 운영하는 필립 그린 경 같은 사람들은 모나코에 거주하는 그의 부인 명의로 어마어마한 배당금을 빼돌려 세금을 절약한다. 스타벅스는 영국에서 번 이윤을 스위스로 돌리는 수법으로 법인세를 한푼도 내지 않았고 아마존이나 구글 같은 기업도 국외로 수익을 전송하는 방법으로 탈세에 가담한다. 회계법인이 주로 하는 일은 합법적 탈세로, 직원을 정부에 파견해 정보를 모은 다음 이 정보로 자기 고객들에게 탈세 서비스를 제공한다. 이는 결과적으로 국가의 공공서비스 공급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약탈하는 행위에 다름아니며 국가의 부조에 의지하면서도 세금만큼은 절대 내지 않겠다는 기득권층의 파렴치한 속내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행위다. (6)

 

우주의 지배자들

기득권층은 미국을 사랑하며 항상 미국과의 특수관계만을 떠받든다. 그러나 이라크전 같은 전쟁에서 실제로 피를 흘리는 사람은 기득권층의 자제가 아니라 실직 상태의 노동계급 청년이다. 겉으로는 피의 대가를 외치지만 이라크는 각종 이권을 노리는 기득권층의 놀이터가 되었다. 그 잘난 테러와의 전쟁덕분에 영국 청년들은 별 혐의도 없이 범죄인으로 송환돼 미국 교도소에 구금당한다. 경찰 공권력은 지난 30년간 꾸준히 기득권층의 방패막이가 돼주었으며, 이는 잔인한 노조탄압과 민주시위에 대한 억압에서 빛을 발했다. 지난 1989년 축구장 사고로 96명의 생명을 앗아간 힐즈버러 참사는 공권력이 얼마나 무책임하게 사건을 왜곡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결국 술취한 훌리건이 아니라, 경찰에게 사고책임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기까지는 무려 23년이 걸렸다. 공권력의 만행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심지어 영국 정보당국은 민주단체들의 비밀을 캐내기 위해 여성을 상대로 위장결혼을 감행하기도 했는데 이는 영국 사회의 엄청난 공분을 몰고왔다. (4, 8)


이처럼 70년대 선동가들의 이데올로기 투쟁에서 시작된 기득권층의 반민주적 권력은 이제 학계나 정계, 언론계, 금융계, 공권력을 가릴 것 없이 전 영역에 걸쳐 확고한 세력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저자는 지금이야말로 민주세력이 새로운 씨앗을 키워갈 때라고 주장한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소수 선동자들이 확고한 신념으로 세상을 자기네 것으로 만들었듯이, 이제 민주단체와 노동조합, 반체제경제학자들이 힘을 모아 우리의 선동자들을 만들어내야 한다. 반노조법을 개혁해 노조가 다시 숨을 쉬게 해야 하며, 각 노동현장에서 민주적 목소리를 내도록 해야 한다. 민영화 대신 민주적 공영화를 이루고 경제가 금융계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국가가 현대적 제조업을 육성해야 한다. 저자는 권력은 요구 없이 그 무엇도 내주지 않는다는 말로 이 책을 마무리한다. 역사가 그저 소수의 영웅놀이가 아니듯, 이제 세계는 이해를 같이하는 사람들의 집단적 힘으로 사회정의를 이뤄나가야 한다.


영국과 마찬가지로, 너무도 오랫동안 기득권층의 지배에 시달려온 대한민국 독자들에게도 이 책은 의미있는 도전이 될 것이며, 저항의 의지와 희망 또한 전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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