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근대적 주체, 외부인 놀이는 끝!
제자리에서 자기 목소리로 대화합시다!!
바둑에서 한판의 좋은 대국은 양편의 실력은 물론 구경꾼들의 실력을 향상시킨다. 좋은 논쟁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우리 지식계에서는 이런 논쟁의 전통이 너무나 부족하다. 하물며 서로의 실명을 걸고 펼치는 논쟁은 더욱 기대하기 힘든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전대호의 『철학은 뿔이다』는 철학의 영역에서 이런 금기를 깨는 과감한 시도를 담고 있다. 이 책에서 헤겔철학을 화두 삼아 저자가 논쟁의 장으로 끌어들인 철학자들은 바로 김상봉, 이진경, 김상환, 이어령이다. 현재 우리 지식계를 대표하는 이들과 맞서며 저자는 주체와 근대의 문제를 새롭게 조명한다. 우리 지식계를 이끌어온 철학에서 가짜 근대화의 논리를 읽어내며, 이제 외부인 놀이를 벗어나 제자리에서 자기 목소리로 대화할 것을 촉구한다.
전대호가 맨 먼저 대화의 장으로 끌어온 철학자는 김상봉과 그의 대표작 『서로주체성의 이념』이다. 저자는 주체의 제1성격을 ‘만남’으로 규정한 김상봉의 철학을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주체는 만남이자 결속이기 이전에 싸움이며, 무엇보다 대화다. 대화는 상대방과 나 사이의 자기거리가 드러나는 과정이며, 따라서 서로주체뿐 아니라 ‘홀로주체’, 즉 나 자신과의 대화 역시 이미 훌륭한 주체다. 또한 주체는 언제나 시스템 안과 밖에 동시에 있다. 쉽게 말해 내가 삼성전자의 직원이라면, 나는 또한 삼성전자 밖에서 얽매임 없이 말할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모든 주체는 이렇듯 만남이라는 과정에 상관없이 이미 대화에 나선 주체다.
김상봉의 철학에서 드러나는 또 하나의 문제점은 오직 한국적 주체만이 자기상실을 경험했으며 예속과 수동성에 사로잡혀왔다는 생각이다. 만약 김상봉의 자기상실이 타자와 주체 사이에 실재하는 ‘자기거리’를 뜻한다면, 한국적 주체만이 아니라 모든 주체는 자기상실을 경험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주체에서는 지배냐 예속이냐가 중요하지 않다. 다시 말해 삼성전자 사장이냐 직원이냐가 문제가 아니라, 그 관계 전체를 두고 대화할 수 있는 자가 주체라는 말이다. 따라서 ‘예속된 수동적 주체’로서의 한국인을 옹호하는 김상봉의 철학은 막상 주체 자신을 위해서는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로지 모든 각자가 서로를 아무 조건 없이 주체로 인정하는 것, 어떤 시스템 안에 있든지 그 시스템 바깥의 허공을 품고 그 허공과 대화하는 자를 주체로 인정하는 것이 더욱 요긴하다.
주체는 맞선 둘의 얽힘이다
이진경의 베스트셀러 『철학과 굴뚝청소부』에 대해서 저자는 더욱 날카로운 비판을 가한다. 이진경의 주체론은 근대에 들어 주체가 신으로부터 떨어져나온 동시에 대상으로부터도 분리됨으로써 제3자의 판정이 없는 한, 자신의 앎이 진리인지를 확인할 길이 없어졌다는 주장으로 요약된다. 이진경은 유명한 굴뚝청소부 일화를 통해 주체(주인공)와 대상(동료)만으로는 자기 얼굴이 깨끗한지 더러운지 알 수 없게 된 근대의 상황을 역설한다. 그러나 저자는 이 일화가 그저 주인공의 표상(더러워짐)과 그 대상(얼굴)이 일치하지 않은 흔한 경우일 뿐 주체와 대상의 일치와는 상관이 없다고 주장한다. 저자가 보기에 주체와 대상을 분리시키고 각각의 실체로 바라보는 이진경의 관점은 큰 오해를 품고 있다. 주체는 홀로 독립된 실체라기보다는 항상 대상에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주체는 ‘나’라는 명사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보기에’라는 부사구로 존재한다. 따라서 주체는 ‘무엇은 어떠하다’라는 술어를 반드시 필요로 한다. ‘내가 보기에 무엇은 어떠하다’라는 문장 안에는 주체가 대상에 스며드는 과정, 그리고 대상과 거리를 두는 과정이 모두 포함돼 있다.
이로써 문제는 다시 대화로 돌아온다. 이진경은 근대적 주체가 처한 곤경을 진리 보증의 딜레마, 곧 진리인지를 보증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데서 찾았다. 그러나 데카르트나 칸트, 헤겔 같은 근대철학자들은 이런 진리보증 문제를 제기한 적이 없다. 이들이 중요시한 것은 오히려 ‘내가 보기에’라는 전제이며 이런 전제들 사이에서 오가는 대화다. 결국 이진경의 실체존재론은 근대철학과 근대정신 전체를 가리고 주체를 말소하고 말았다.
‘헤겔만가’라는 부제가 붙은 김상환의 『철학과 인문적 상상력』을 두고서도 저자는 치열한 논쟁을 마다하지 않는다. 이 책에서 저자가 가장 집중하는 개념은 헤겔의 ‘부정성’이다. 저자가 보기에 부정성(이항대립)은 헤겔철학의 생명과도 같은 것이다. 그것은 언제나 맞선 둘의 대립을 묵묵히 인정하는 것이며 그리하여 주체 그 자체와 같은 것이다. 저자가 동의하기 어려운 것은 김상환이 이항대립 사이에 어떤 절대자(매개자)를 끼워넣어 대립되는 두 항을 제3의 항에 복속시키는 것이다. 헤겔철학에서 중요한 것은 매개자가 아니라 이항대립 그 자체다. 다시 말해 높은 심급의 전체란 없으며 맞선 둘이 각각 ‘이게 내 생각이야’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저자가 보기에 김상환은 마치 염상섭의 『만세전』에 나오는 이인화처럼 불행한 의식을 내세워 나-세계의 분열만을 인식하는 책상도련님의 전형이다. 저자는 나-세계의 합일도 진실의 한자락으로 인정하며 이로써 진실이 맞선 둘의 얽힘임을 깨닫는 것이야말로 올바른 헤겔 읽기라고 주장한다.
가짜 근대화와 헤겔이라는 해독제
4장에서 저자는 이어령을 필두로 야나기 무네요시, 이광수 같은 한국인론 저자들의 ‘외부인 놀이’를 비판한다. 야나기 무네요시가 조선의 예술을 슬픔과 한(恨)의 예술로, 이어령이 한국인을 한과 정(情)의 민족으로 규정할 때, 우리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그 개연성을 인정해왔다. 그러나 이들의 한국인론은 지금 여기에서 나온 주체의 목소리와는 거리가 멀다. 이들의 목소리는 오히려 자신을 철저히 외부인으로 인식하는 관점, 다시 말해 서구와 동양 사이에서 자신만이 이 민족을 세계와 매개할 수 있다는 관점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슬픔이니 한이니 하는 것들은 실제 우리의 삶과는 거리가 먼 허구일 가능성이 크다. 문제는 이러한 허구적인 규정이 탈정치적 성향을 가지며, 실제로 정권이 바뀔 때마다 등장하여 병적인 개조의 과정을 정당화하고 비민주적인 통치를 은근히 수용해왔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우리가 겪은 근대화를 헤겔적 의미에서 재해석한다. 저자는 우리의 근대화는 주체의 자기관계가 아니라 오히려 자기관계의 부정, 즉 세계화니 출세와 같은 것들이었다고 비판한다. 이는 마치 다리를 얻기 위해 목소리를 내준 인어공주처럼 ‘출세’를 위해 ‘자기표현’을 잃어간 우리의 초상과 다름없다. 저자는 변신과 출세를 강요하는 이런 가짜 근대화에 맞설 가장 강력한 해독제로 헤겔을 꼽는다. 헤겔의 근대화는 자기표현을 나 자신의 본질이자 운명으로 삼는 것이며, 그리하여 제자리에서 자기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 전대호의 자기표현에 과연 누가 먼저 대화 상대자로 나설지 귀추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