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부러울 것 없던 『가디언』 기자,
어느날 우울증에 빠지다!
20대 모스크바에서 첫 기자생활, 30대 보스니아에서의 AFP 통신원,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드디어 세계적인 언론사 <가디언>에 입사. 하지만 마흔살이 되는 생일에 저자는 우울증에 빠져들어 직장을 쉬고 칩거를 시작한다. 그토록 좋아하던 음악을 들을 수도, 책을 읽을 수도 없다. 그는 공황발작, 불면증, 자살충동에 시달리다 비로소 자신에게 우울증이 찾아왔음을 깨닫는다. 이 감동적인 고통의 기록 <마흔통>에서 마크 라이스-옥슬리는 지독한 우울증의 기억을 파헤치는 동시에 의학적 치료, 명상에 이르는 유용한 대처법들을 소개한다. 또한 의사, 심리치료사, 같은 병을 앓는 환자와 친구들을 인터뷰하면서 우울증의 실체를 파고들 뿐 아니라 쉼이 없는 삶이 마음에 끼친 끔찍한 영향들을 솔직하게 고백한다.
왜 중년의 마음은 쉽게 무너지는가?
런던 템스 강 ‘런던의 장미’라는 배 위에 한 남자가 있다. 그의 마흔살 생일에 열린 선상 파티. 이 자리에서 남자는 ‘어쩌다 마흔이 되었을까’라는 익살스런 자작곡을 불러 청중을 웃기고 있다. 번듯한 직장에다 사랑하는 아내, 세 아이와 함께 런던 인근 킹스턴에 살고 있는 남자. 세상 부러울 것 없는 이 남자의 마흔번째 생일 파티는 이렇듯 흥겹게 고조되건만, 남자의 마음속엔 알 수 없는 불안의 씨앗이 자라고 있다. 누구든 3초 이상 바라볼라치면 피로해지고, 가만히 앉아 있기조차 힘들다. 눈은 불거지고 얼굴은 파랗게 질린다. 남자는 파티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숨가쁜 햄스터처럼 자리에 눕는다. 당황한 아내가 눈물을 흘린다. 마침내 그 병, 우울증이 시작된 것이다.
전 세계 1억명 이상의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는 애물단지. 창 밖에 내리는 빗물 이미지를 연상시키지만 사실 그런 우울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심각한 정신질환. 그럼에도 그 원인이나 치료법이 명확히 정립되지 않아 미스터리에 휩싸인 병. 미약한 전조 증상으로 시작된 병은 점점 더 심각한 증세들을 동반하기 시작한다. 우선 나 아닌 모든 것들이 부러워지기 시작한다. 세상에서 가장 초라한 사람, 그 사람이 나인 것만 같다. 어떤 것에도 관심을 기울일 수 없고 두렵고 불안한 나머지 잠을 이루지 못한다. ‘그런데 왜 하필 나에게?’ 지나온 삶에 힌트가 있을까 싶어 저자는 자신의 마흔 인생을 되돌아본다.
자식을 아끼고 헌신적으로 사랑해온 부모님, 누구보다 사이좋게 유년 시절을 함께해온 여동생과 누나들, 무난한 학창시절….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고 그에 합당한 직장과 가족과 집을 얻었으니 누가 봐도 불행하거나 불우한 삶은 아니었다. 저자는 점점 더 심각해지는 증세에 결국 무급안식년을 신청하고 회사를 쉰다. 그리고 칩거 기간에 들어서야 비로소 자신의 숨겨진 모습에 눈을 뜨기 시작한다. 우선 일과 직장이 문제였다. 발병 전 저자는 <가디언>의 야간 뉴스 편집인으로 일했다. 낮 시간에는 각 나라에 자국 뉴스를 내보내는 ‘알바’까지 했다. 아침에 아이들을 챙겨 학교와 유치원에 보내고 낮에는 프리랜서로 활약하다 밤에는 본업인 『가디언』 기자 생활을 하는 무리한 일과가 이어졌다. 저자는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또한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을 챙겨야 하는 가차없는 삶을 살았던 것이다.
병마와 싸우며 저자는 우울증에 대한 새로운 사실들을 알게 된다. 가령 ‘아빠가 되는 것’은 ‘엄마의 산후우울증’만큼이나 심각한 우울 요인이다. 새로 아빠가 된 남자들의 20% 이상이 첫 자녀가 십대에 접어들기 전에 우울증을 겪는다고 한 보고서는 지적한다. 정신과 의사들은 여성 대 남성의 우울증 발병 비율이 3:1에서 2:1로 바뀌었다며 “생계를 책임지는 동시에 아이들의 잠자리를 챙겨주는 부드러운 아빠”라는 새로운 시대적 요구가 이런 경향을 낳았다고 진단한다. 더욱 큰 문제는 이렇듯 육아 환경이 바뀌는 동안 일과 직장에서 받는 스트레스는 거의 줄어들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신자유주의 초기에 학창시절을 보내고 사십줄에 이른 세대들에게 인내나 희생 같은 덕목을 가르쳐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들은 목표 지향적이고 자아 중심적인 데다 조급한 아이로 키워졌다. 그러니 육아가 큰 스트레스로 다가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울증의 시작과 끝
급기야 저자는 정신과 의사를 찾아갔고, 우울증이란 최종 진단을 받는다. 이때부터 저자는 우울증의 파괴적인 특징들을 기록하기 시작한다. 먼저 생각이 망가진다. 나쁜 생각이 뇌를 파고들어 꼬리를 물고 이어지면서 근심을 불러일으킨다. 우리 시대에 덕목으로 칭송받는 ‘생각’이 우울증 환자에게는 악덕이 된다. 저자는 자신의 지나친 ‘생각’ 자체에 회의를 품기 시작한다. 또 하나는 무기력이다. 철인3종을 섭렵할 정도로 활기찬 운동광인 저자는 이제 움직이는 것조차 버겁다. 그런데 돌이켜볼수록 자기가 해온 운동이 일종의 자기 학대였음이 분명해진다. 헬스를 할 때면 좀더 무거운 역기를 들기 원했고 사이클을 타면 남을 앞지르는 데 목숨을 걸었다. 그런 괴팍한 스포츠 정신은 일에도 고스란히 이어진다. 저자를 비롯한 중년 세대는 무슨 일이든 열심히 하고 본다. 성과와 숫자에 집착하며 어떡하든 ‘더 나은 스토리’를 만들어보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성과가 아니라 쉼이다. 심리치료사들은 말한다. “완벽하게 하려고 하지 말아요. 자신에게 너그러워져야 합니다.”
이 책의 마지막 ‘회복’ 파트에서 저자는 우울증에 유용한 몇가지 대처법을 제시한다. 우선 명상은 우울증의 모든 증세와 반대로 행할 것을 요구한다. 그것은 현재를 그대로 보고 느끼고 인식하는 것이며 무심하면서도 객관적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다. 가령 건포도 하나를 먹을 때도 그 주름을 관찰하며 조용히 무게를 느껴본다. 이렇게 뭔가를 마음으로 하는 것을 통해 우리는 분노, 히스테리, 격분 같은 나쁜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다. 로라제팜 같은 항우울제도 도움을 줄 수 있다. 하지만 효과를 보기까지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야 하며, 끊을 때는 천천히 복용량을 줄여 의존성을 극복해야 한다. 저자가 투병기간 동안 기록한 차트 역시 도움이 된다. 우울증은 단번에 낫는 병이 아니다. 끊임없는 재발 과정을 통해 천천히 좋아진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 아름답고 유머러스하며 지적이고 감성에 찬 책은 우울증의 시작과 끝을 잔잔하게 그려낸 한편의 수기이자 에세이로서도 뛰어나지만, 그 증세의 사회적 의미와 의학적 현황을 파헤친 르포로서도 손색이 없다. 마흔 즈음 우울증으로 아픔을 겪는 분들뿐 아니라, 나이와 상관없이 마음의 병을 심하게 앓는 분들에게까지 이 책이 도움이 되리라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