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의 호구가 되어주는 일
by 북인더갭 김실땅
장마의 정점에서 한 권의 책을 마무리했다. 『네 맛대로 살아라』라는 음식 에세이집이다. 장맛비의 막가파식 빗줄기처럼 화끈하게 또한 끈끈하게 올 여름, 찜통더위와 신간의 폭포 속에서도 무사히 살아남기만을 바랄 뿐이다.
‘틀에 박힌 레시피를 던져버린 재야 셰프, 전호용의 맛있는 인생잡설’이란 부제목을 오케이 놓으며 새삼 읊조려보았다. 부제목의 느낌도 아주 좋았다. 레시피 따위에 벌벌 떨지 않는 셰프라니, 얼마나 멋진가. 또한 음식의 ‘음’자도 모르던 내가 이런 책을 감동과 함께 만들어 내다니, 헼헼, 웃음이 막 나왔다.
(시집간 언니가 4kg이 넘는 초우량아 조카를 낳고 병원에서 몸을 추스르던 어느 초겨울이었다. 착한 동생인 나는 집에서 미역국을 끓였다. 하지만 냉동실을 뒤져 아무거나 손에 잡히는 고깃덩어리를 꺼내든 순간부터 뭔가 막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 고기에는 하얀 기름이 넘 두툼하게 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어쨌든 고기잖아, 산모가 먹을 건데 기름진 고기를 많이 넣어야지, 나의 미역국 테러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 후로 식구들 사이에서 나의 만행은 거의 이십년이 다되도록 인구에 회자되는 중이다. 삼겹살로 미역국을 끓이다니. 그것도 산모 먹으라고, 헐.)
내가 이런 사람인데도, 전호용의 원고를 읽으며 그렇게 기가 죽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나는 정말, 내 ‘맛’대로 산 것이다!?! 그리고 밥의 거룩함과 관계의 따뜻함, 그리고 ‘맛있음’의 사회적 의미 매료되기에도 바빴으니 쪽팔리거나 주눅들 시간이 없었다고나 할까.
내 논에 물 들어가는 소리와 내 새끼 목구멍으로 젖 넘어가는 소리만큼 듣기 좋은 소리는 없다하지 않던가. 밥이라는 게 그런 것이다. 이것은 모두의 소박한 꿈일 수도 있지만 내 배 부르고 내 새끼 배부르면 장땡이라는 탐욕의 근원이기도 하다. 하지만 동시에 탐욕의 근원인 밥을 옆 사람과 나눠 먹으며 타인을 챙기고, 보잘 것 없는 어느 한 생명이라도 보듬는 행위는 성서의 오병이어 기적의 현대판 버전이라 감히 칭할 수 있을 것이다.
전호용의 표현대로라면 그것은 바로 ‘내가 너의 호구가 되어주’는 것이다.(74쪽) 전단지를 돌려 먹고사는 용숙이, 육류 마니아 에그 조와 풀떼기 마니아인 아저씨, 몸을 녹여 농사를 짓는 홀로된 어미, 염전 구석 보루꾸로 담 올린 단칸방에 살던 옛 친구, 그리고 수프얀 스티븐스를 즐겨 듣는 명견 마당쇠에 이르기까지 이토록 ‘못나디 못난’(7쪽) 인생들의 호구가 된다는 것은 이들과 마주앉아 밥을 나눠먹는 일이다. 아무리 산해진미라 해도 뭔 맛에 혼자 먹간디.
또한 너무 귀하고 귀해 자주 만날 수조차 없는 ‘그녀’와의 데이트를 몰래 훔쳐보는 재미야말로 이 책의 별미가 아닐까 싶다. 그녀와 함께 꿈꾸는 모든 일들이 멋지게 이뤄지길.
도시에 있어야 안정감을 느끼는 ‘서울 촌것’인 나는 첫 페이지부터 끝 페이지까지 내내 감탄하며 읽었다. 무한경쟁을 부추기는 오늘날, 누군가를 밟아버린 후 빨리 앞서가고 싶은 욕망이 내 목을 옥죄올 때, 내 눈에 못나 보인다는 이유로 한 생명을 깔아뭉개고 싶을 때, 재야 셰프 전호용의 『네 맛대로 살아라』 일독을 강추한다. 그리하면 누군가의 호구가 되어주는 신들린 오지랖에 완전 전염될 것이다. 기적이 별 거간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