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그래서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다/언론 서평

<그래서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다> 언론 서평

by 북인더갭 2018. 5. 23.

<중앙일보_중앙SUNDAY>

 

페미니즘 서적들이 쏟아진다. ‘페미니즘 빅뱅이다. 페미니즘(feminism)이란 무엇일까. 이즘(ism)이다. 이즘은 우리 표준국어대사전에도 나오는, 주의(主義)와 동의어인 외래어다. 이런 용례가 나온다. “그건 염상진이라는 개인의 뜻이 아니라 정치 폭력화한 이즘의 충돌이었던 것이다.조정래, 태백산맥/ 죽음을 걸 만큼 그 이즘이라는 것이 그렇게 절대한 가치였었는지를 나는 회의하지 않을 수 없다.김성동, 만다라.”

 

유럽·미국 기준으로 대표적인 페미니즘은 자유주의 페미니즘, 급진 페미니즘,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 사회주의 페미니즘, 문화 페미니즘, 환경 페미니즘이다. 하지만 페미니즘·여성주의를 비롯한 이즘·주의는 계속 진화하고 분열한다. 페미니즘이라는 우산 용어(umbrella term)’ 속에서 다양한 페미니즘 조류가 공존하고 경쟁하며 서로 맹공을 퍼붓기도 한다. 심지어는 보수 페미니즘도 있다. 보수 페미니즘이라는 페미니즘의 작은 우산 속에는 개인주의적 페미니즘, 복음주의 페미니즘, 국가 페미니즘, 포스트페미니즘이 자리잡고 있다.

또한 남성 페미니즘도 있고 생활 페미니즘도 있다. ‘미투 페미니즘’ ‘메갈리아 페미니즘’ ‘워마드 페미니즘도 충분히 가능하다. 페미니즘이라는 거대한 체계화된 학설·이론·운동 속에서 각기 목소리를 낼 수 있다.

형용모순 같은 안티페미니즘적인 페미니즘도 있다. 그래서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다가 그런 경우다. 원제는 나는 왜 페미니스트가 아닌가: 페미니스트 선언(Why I am not a feminist: a feminist manifesto)’이다. 버트런드 러셀(1872~1970)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1927)와 마르크스·엥겔스의 공산당 선언(1848)을 한꺼번에 연상키는 묘한 제목이다. “나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다라고 말한 마르크스의 선례를 감안하면 그래서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다라는 제목이 그리 이상한 것은 아니다.

좌파 페미니스트 논객인 저자가 반대하는 것은 가부장적인 자본주의에 만족하고 적응하는 미국의 주류 페미니즘이다. 미국 페미니즘은 급진적인 변혁 운동이 아니라 라이프스타일 페미니즘으로 추락했다는 뜻이다. 그가 보기에 라이프스타일 페미니즘은 세상을 바꿀 수 없다.

저자 크리스핀은 개량주의·점진주의 페미니즘에 반대한다. 저자는 이빨 빠진(toothless)’ 페미니즘이 여성 최고경영자(CEO), 여성 정치인 숫자의 확대에 만족하는 것은 아닌지 의문을 제기한다. 그런 페미니즘은 저자에게 탈정치화된 자기계발 페미니즘에 불과하다. 체제를 바꾸지 않는 페미니즘은 의미가 없다는 게 저자의 판단이다.

크리스핀은 기성 페미니즘을 맹공하지만, 특정 페미니스트 운동가나 그룹을 타깃으로 삼아 지칭하지 않는다. 자본주의와 가부장제라는 공동의 적을 눈 앞에 두고 불필요한 싸움, 적전분열을 피하기 위해서다. 같은 이유로 크리스핀은 남성을 인간 이하의 존재로 깎아 내리는, 온라인·디지털 세상을 주무대로 삼는 격노(outrage) 페미니즘에도 반대한다. 그는 남성혐오를 혐오한다. 반성하는 남성은 페미니즘의 우군이 될 수 있다고 보는 듯 하다.


<한겨레>


페미니즘에 관한 강의나 토크행사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질문 중 하나는 이렇다. “남편/남성 동료/남자친구/아들이 페미니즘을 이해하고 행동과 말을 바꾸게 할 수 있는 좋은 말이나 책은 뭐가 있을까요?” 내가 생각하는 답은 다소 회의적이다. 기득권을 가진 사람이 흔쾌히 받아들일 수 있는 모범답안이 있다면, 애초에 차별이 없었겠지.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 그러니까 동물과 식물을 비롯한 생태계까지 포함해 세상의 살아 숨 쉬는 모든 존재가 득을 보는 것이 페미니즘이라는 주장은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을 ‘설득’하기에는 그럴듯해 보여도 설득의 결과는 미미하다. 누구의 기분도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해 하는 말은 공허할 수밖에 없고, 사회운동으로서의 힘을 갖기 어렵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백인 페미니스트들, 즉 최근 몇 년 미국을 휩쓰는 ‘페미니즘 유행’ 이전부터 여성의 권익 신장과 자유를 위해 싸워왔다고 자부심을 갖는 이들의 생각을 잘 알 수 있는 책 중 한 권이 바로 제사 크리스핀의 <그래서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다>다. 결론부터 말하면 더 급진적이고 시스템을 바꾸는 시도야말로 페미니즘의 본령이라는 주장을 담고 있다.

제사 크리스핀은 앤디 자이슬러의 <페미니즘을 팝니다>처럼 ‘선택적 페미니즘’을 비판한다. 이것은 진정한 변화에 따르는 불편함은 감수하지 않고 급진적 페미니스트를 물리치는 태도이며, “여성이 무엇을 선택하든, 생활방식에서부터 가족관계나 대중문화, 소비에 이르기까지 무언가를 그저 하는 행위만으로 페미니스트에 걸맞은 선택을 한다는 믿음이다.” 페미니스트라고 적힌 티셔츠를 입는 ‘유행’의 일부가 된다고 페미니스트로서 실천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대중 앞에 서는 직군의 여성이 페미니즘, 페미니스트라는 말을 사용해도 아무런 위해를 입지 않을 경우에나 해당하는 이야기다.

한국에서는 여성 뮤지션이 페미니즘에 관심만 보여도 ‘소비자’인 남성 팬들의 공격에 시달린다. ‘레드벨벳’ 멤버 아이린이 팬미팅에서 <82년생 김지영>을 읽었다고 말하자 팬들은 아이린 얼굴이 있는 굿즈를 자르고 불태워 인증했다. 가수 겸 배우인 수지가 유튜버 양예원씨가 과거 피팅 모델 스튜디오 아르바이트로 입은 성폭력 수사를 촉구하는 국민청원 글에 동의했다는 내용의 글을 인스타그램에 올린 다음 날인 18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연예인 수지의 사형을 청원합니다’라는 청원이 시작되었다. 일주일 가까이 있던 ‘수지 사형 청원’은, 비제이(BJ) 철구의 인터넷 방송을 시청한 일로 논란이 된 ‘에프티(FT)아일랜드’ 멤버 이홍기의 사형 청원이 시작되고 나서야(즉, 남성 연예인의 사형 청원 글이 올라오고 나서야) 나란히 삭제되었다. 한국에서는 페미니즘이라는 말도 페미니스트라는 말도 ‘패션‘이나 ‘유행‘이라고 부르기에는 생업의 안위를 걸고 하는 위험천만한 행위다. 크리스핀처럼 “그래서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다”라는 말은 “나는 페미니스트다”라는 말이 진부할 정도로 널리 쓰인 뒤에나 가능해진다.

최근 한국의 페미니즘 관련 논의에서 중요하게 떠오르는 주장은 여성들이 더 많이 공직에 진출하고, 관리직에 올라서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크리스핀은 이런 생각에 대해서도 단호히 반대한다. “어떤 분야든 여성이 그 분야의 ‘문화를 변화시킨다’는 관념은 속기 쉬운 거짓말이다. 더욱이 당신은 내부로 들어가기 위해 시스템을 세운 가부장들의 특징을 보여야 할 것이다.” 현대 페미니즘이 권력이 있는 여성을 본질적으로 좋게 보는 경향이 있다는 비판이 이어지는데, 그 예는 상원의원 시절 사회복지 프로그램을 폐지해 빈곤한 여성과 아이들에게 극심한 손해를 끼쳤던 힐러리 클린턴이다. 그래서? 크리스핀의 책을 다 읽은 뒤 나는 묻고 싶다. 그래서? 페미니스트가 된다는 것은 아무 흠 없는 인간이 되는 것이거나, 시스템을 전면적으로 거부하거나, 권력을 갖지 않는 것인가? 안주하지 말고 더 급진적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에는 찬성하지만, 다수의 성추행을 저지르고도 대통령이 된 트럼프를 비난하기보다 힐러리 클린턴을 비난하기가 더 수월한, 그 외의 사례들에서도 여성만 도마 위에 올린 모습을 보니 어리둥절해진다. 게다가, 한국에서 “나는 페미니스트다”라는 말을 여성이 할 때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 안다면, 크리스핀의 이런 도발은 그녀가 얼마나 많은 것을 누리고 있는지 역으로 입증하는 것으로 보인다. 더 급진적이 되자. 그 주장만을 받아들인다.

이다혜 작가, 북칼럼니스트



<연합뉴스>

 

그래서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다 = 제사 크리스핀 지음. 유지윤 옮김.


페미니즘 사상가이자 작가인 저자가 오늘날의 페미니즘을 강렬하게 비판한다.

그는 페미니즘이 하나의 유행으로 자리 잡으면서 원래 페미니즘이 가진 급진성은 점점 사라지고 아무도 불편해하지 않는 껍데기만 남았다고 말한다.

이른바 '라이프스타일 페미니즘'이 지배문화의 가치는 그대로 둔 채 '포천'지 선정 500대 기업에 여성 최고경영자(CEO)가 몇 명인지, 의대 졸업생 중 여성이 몇 명인지에 집중한다는 것이다.

북인더갭. 200. 13500.

 

<서울경제신문>

 

오늘날 페미니즘은 껍데기만 남았다?

그래서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다( 제사 크리스핀 지음, 북인더갭 펴냄)= 페미니즘 사상가로 유명한 저자가 본래의 취지를 상실한 오늘날의 페미니즘을 강렬하게 비판한다. 저자는 페미니즘이 하나의 유행으로 자리 잡으면서 원래 페미니즘이 가진 급진성은 점점 사라지고 그 누구도 불편해하지 않는 껍데기만 남았다고 지적한다. 지적인 액세서리와 같은 라이프스타일 페미니즘은 남성 중심적 문화의 부당함은 외면한 채 100대 기업에 여성 최고경영자(CEO)가 몇 명인지, 의대 졸업생 중 여성이 몇 명인지 등에만 집중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냉철하게 직시하고 가부장제에 저항하면서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급진적 페미니즘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13,500


<외신들> 


이 가차없이 비판적인 책에서 저자는 21세기 페미니즘에 기름을 끼얹고는 유쾌하게 외친다. “페미니즘아, 까맣게 탄 지구를 떠나라!” 그래서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다라는 제목은 한편으로는 거짓말이자 다른 한편으로는 도발에 가깝다. 왜냐하면 저자는 뼛속까지 페미니스트인 사람이기 때문이다. 저자의 주장은 그 급진성과 분노에서 3세대 넷페미가 아니라 2세대 페미니즘에 근거한다. 저자는 이른바 라이프스타일 페미니즘을 가장 경멸한다.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여야 한다고 새겨진 600달러짜리 티셔츠를 입고서 정치적 영웅심리에 빠져 아무것도 하지 않는 페미니즘 말이다. 저자가 보기에 그런 페미니즘은 살아남기 위해 초남성적 세계를 모방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먼저 돈이면 다 되는 페미니즘, 남성과 자본에 기대는 페미니즘에서 벗어나야 한다. 가디언(Guardian)

 

진보를 현상유지와 동일시하는 최신 페미니즘을 비판하면서

혁명적인 페미니즘을 요청한다. 엘르(Elle)


매우 신선한 주장이자 어떤 질문도 제기되지 않는 페미니즘에

균형을 잡아주는 시도다. 뉴요커(The New Yorker)

 

유리천장을 깨는 게 문제가 아니다.

쇳덩어리로 구조를 깨부수는 것이 관건이다. 커커스리뷰(Kirkus)

 

간명하고 전투적이면서도 참신하다.

양심의 도전에 호소하는 책. 시카고 트리뷴(Chicago Tribu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