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함을 가장하면서도
은근히 빛나는 기이한 소설들! _최윤
『파라PARA 21』(2004년 봄호)로 등단한 작가 김조을해의 소설집 『마시멜로 언덕』이 출간되었다. 등단작 「야곱의 강」을 포함해 총 7편의 단편이 수록된 이번 소설집에서 작가는 모호함이란 틀에 갇힌 젊음을 변호하면서 사회의 부조리한 현실을 드러내고 있으며, 권위의 파괴로 상징되는 예술의 생명력을 강렬한 캐릭터와 참신한 대화에 담아내고 있다. 또한 순수한 영혼을 향해 참회할 줄 아는 자로서의 모성, 절대자와 인간 사이의 끈질긴 기다림이라는 주제를 원숙하고 아름다운 문장으로 그려내고 있다. 소설가 최윤은 “고유한 언어에 대한 고심과 평범한 듯한 주제를 이끌어가는 남다른 발상이 돋보인다”며 작가의 소설을 높게 평한 바 있다.
젊음, 그 모호한 공포와 사회의 부조리함
이 소설집은 크게 두 가지 주제를 다루고 있다. 하나는 사회와 마주하고 있는 청춘의 초상이며 다른 하나는 예술과 신(神)이라는 형이상학적 문제에 대한 인간의 대응이다.
「연금술사에게」는 환상과 현실이 뒤섞인 독특한 서사 속에 모호한 젊음의 공포가 기이하게 스며든 작품이다. 소설의 앞부분에서 우리는 인사동의 한 한복집 앞에서 셔터 안에 갇힐 뻔하다 극적으로 탈출하는 주인공을 만난다. 그런데 장면이 바뀌면서 이 주인공은 남다를 것 없는 취업준비생으로 남자친구와 함께 카페에서 자기소개서를 쓰고 있다. 소설은 마지막 장면에서 다시 한번 셔터 안으로 갇힐 뻔하는 주인공을 남자친구가 구해주면서 끝을 맺는다. 이 소설에서의 공포는 대체로 모호하다. 주인공은 낙원상가에서 기이한 악기상을 만난 후 “아무 근거 없이 순식간에 극도의 공포감”을 느끼며 인사동으로 도망쳤다가 한복집 앞에서 “이유 없이 나를 모욕하는 것들”에 맞서게 된다. 얼핏 보면 이런 밑도 끝도 없는 공포가 자소서를 쓰는 취준생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의아해지지만 조금 더 들여다보면 그 모호한 공포가 바로 우리 사회의 부조리함과 묘하게 조응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흔히 젊음은 모호하다는 이유로 비난받는다. 그런데 저자는 역으로 이 모호함은 다름아닌 사회의 또다른 모호함(부정확함)에서 기인함을 역설적으로 항변한다. 그래서 셔터 안에 갇히는 비일상적인 정황은 주인공들의 ‘포기로 점철된 이십대’가 빠진 함정과 절묘하게 상응하는 것이다.
이처럼 어느덧 주변으로 밀려난 청춘의 초상은 「마시멜로 언덕」으로 상징되는 노동세계로 옮겨온다. 언덕이 주는 목가적인 어감과 달리 이 소설에서 주인공이 서 있는 자리는 아이스크림을 제조하는 공장 라인의 맨 위칸이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한다고 거짓말을 해놓고 공장에서 일하고 있는 ‘나’는 이 ‘언덕’에서 아래쪽 라인으로 포장 박스를 던지는 일을 한다. 이 공장에는 미색 블라우스에 촌스런 진주모양 단추를 단 라인장도 있고 자꾸 제품을 라인에서 놓치는 신참 여자도 있으며 늘 오른쪽 눈두덩이 멍들어 있는 화곡동 아줌마도 있다. 그리고 이 여성 노동자들은 엉덩이나 허벅지를 이마로 문대는 주반장의 성폭력에 노출돼 있다. 라인장은 ‘나’를 좀더 따듯한 자리로 옮겨주고 나 역시 신참 여자를 도와주려 하지만 이 여성들의 작은 연대는 공장이 내지르는 기계의 소음에 묻혀버리고 그 때문에 온몸이 땡땡하게 붓는 일은 피할 수 없다. 그래서 ‘춥지 않고 포근한 바람이 불어오는 (진짜) 언덕에서의 다정한 인사’는 이 소외된 노동세계에서는 여전히 하나의 상상으로밖에 그려지지 않는다.
겉으로 보기에 「아디오스 탱고」는 쓸쓸한 실연의 보고서처럼 보인다. 물론 그렇게 보더라도 이 작품은 누구나 통과해야만 했던 슬픈 의례에 대한 공감 때문인지 몇번을 다시 읽어도 똑같이 눈물짓게 하는 묘한 매력이 있다. 그러나 이 소설을 더욱 감동적으로 만드는 비밀은 사랑이라는 영역이 점점 현실의 영역으로 편입될 때 느껴지는 외로움을 실연의 시간 곳곳에 숨겨두었기 때문이다. 결국 실연이란 사랑이 현실로 변화되는 과정이 아니었을까? 그것은 불가능의 영역(사랑)을 가능의 영역(현실)으로 옮겨오는 지난한 과정 가운데 겪은 침묵과 외로움이었다는 작가의 성찰은 그래서 더욱 아름답게 빛난다.
싱싱한 예술세계와 신과 인간 사이의 끈질긴 기다림
「옛 노래 3—비교감상학 시간」은 다소 느리게, 그리고 사색에 잠겨 진행되는 앞의 작품들과 달리 청춘의 싱싱한 생명력이 스피드하게 전개되는 매우 경쾌한 스타일의 소설이다. 이 작품은 하나의 단막극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로드센이라는 예술학교의 강의실에서 벌어지는 학생들간의, 그리고 학생과 교수와의 대화로 이루어진 독특한 구성의 작품이다. 특히 이 작품은 작가의 특기, 즉 다양한 캐릭터를 인물 하나하나의 미세한 행동으로 잡아내는 관찰력과 마치 인물이 눈앞에서 말하는 듯 생생하게 다가오는 대화 처리가 돋보이는 소설이다. ‘베토벤 연주’를 두고 벌이는 로드센 예술학교에서의 토론 수업은 권위의 파괴, 개성의 확신이라는 점에서 생명을 관리하고 연장하여 노동세계에 정착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연으로서의 생명력이 그대로 꽃피고 자라나게 하는 수업을 상징한다. 이는 전체주의와 몰개성으로 특징지어지는 우리 학교의 현실에서 잠시나마 예술적 상상력이 맘껏 발휘되는 유토피아적 공간을 꿈꾸게 한다.
「옛 노래 1—겨울 순서」는 모성의 세계를 다뤘다는 점에서 앞의 작품들과 구별되지만 아이들의 영혼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또하나의 참신한 예술세계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한 아이를 잃고, 또 그 자신도 죽음을 앞둔 한 어머니의 참회록이다. 이 소설에서 모성이란 ‘참회할 줄 아는 자’로서의 어머니를 상징한다. 누구든 후회 없이 아이를 잘 키웠다고 말할 자신이 있을까? 겉으론 비겁하게 상황 탓을 하겠지만 우리 내면에는 용서받고 싶은 마음이 더 간절할 것이다. 이 소설에서 ‘동화’는 어른들이 쓴 것, 그래서 기법과 속임수를 동원해 아이들을 통제하고 위협할 가능성이 큰 기제로 그려진다. 그러나 아이들은 동화를 순수한 영혼으로 받아들이고 자기의 방식대로 해석한다. 작가는 이 소설이 ‘신발이 닳도록 뛰어노는 아이’를 보살피며 쓴 육아일기에서 비롯되었다고 고백한다(「저자의 말」). 그러니까 이 소설은 우리가 애써 거부한 아이들의 영혼에 대한 참회록이자 그들에게 내미는 사과의 손길 같은 것이다.
둘 다 절대자(신)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누군가」와 「야곱의 강」은 같이 읽어도 좋을 작품들이다. 흥미롭게도 「누군가」에서의 절대자는 구체적인 사람의 모습을 하고 등장한다. 그러나 절대자는 어떤 한 ‘거룩한 인간’의 모습이 아니라, 중학생에서 할머니까지 우리 주변 여러 인간 존재의 모습이 한 명의 몸 안에서 구현되는 ‘친근한 존재’로 상상된다. 또한 그 절대자가 하는 일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이 소설에서 ‘누군가’는 그저 같이 라면을 먹어주고 이야기를 들어주고 고장난 수도꼭지 같은 것을 고쳐줄 뿐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위기에 처해 있을 때조차 포기하지 않는 절대자의 끈기있는 기다림이다. 그것은 마치 인간의 내면 속에 이미 존재하는 어떤 선한 가치들처럼 그려지는데, 이 소설에서 그 가치들은 현실에서 모습을 바꾸며 친근하게 다가오는 절대자의 모습으로 형상화된다.
절대자와 인간 사이의 끈질긴 기다림이란 주제의식은 「야곱의 강」에서도 반복되고 있다. 폴란드의 거장 키에슬로프스키의 영화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의 스토리를 액자처럼 품은 이 소설은 이미 찾아온 사랑 앞에서 끊임없이 망설이며 헷갈려하는 주인공의 내면을 그려내고 있다. 사랑은 완벽한 상태가 아니라 어딘가 결여된 상태에서 시작된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다른 연애소설과 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그 사랑을 절대자의 사랑과 미묘하게 연결시켰다는 데서 이 소설의 특징이 있다. 인생에서 ‘끝’이란 게 그저 인간의 판단이라면, 그래서 절대자는 오히려 그 ‘끝’은 아직 멀었다고 말하면서 끈질긴 기다림을 제안하는 자라면 사랑 역시 삶을 고통의 나락으로 빠트리는 그 순간 이후를 기다릴 줄 아는 사람에게 찾아오는 것이 아니냐고 저자는 되묻는 듯하다. 저자는 이 과정을 아름다운 문장으로 요약한다.
“사랑에는 우리 삶의 모습을 관찰하는 눈이 있다고 생각해. 재미있지? 사랑은 우리를 관찰해. 더이상 잃을 게 없는 사람 옆으로 사랑은 다가와주는 것 같아. (…) 그러니 토멕이 잃은 것과 그녀가 얻은 것을 합하면 0이 되는 거야. 사랑은 공평해.”(242면)
소설가 최윤은 이 소설에 대해 “잔잔한 사건 아닌 사건들을 통해 주인공의 내적 독백과 주변 인물들과의 관계만으로도 한 인물의 내적 성숙의 과정을 담백하고 그려내고 있다”고 평한 바 있다. 어떤 강렬한 서사에 의존하기보다는 평범한 일상에 대응하는 여러 캐릭터의 독특함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참신하고 강렬한 대화, 무엇보다 현실 사회의 부조리와 날카롭게 대립하는 인간이라는 주제의식은 이 작품집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