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이탈리아를 다룬 가장 중요한 정치적 산문이자 탁월한 문학적 성취로 꼽히는 카를로 레비의 작품 『그리스도는 에볼리에 머물렀다』가 국내에 처음 번역돼 나왔다. 기독교로 상징되는 문명세계조차 철저히 외면해온 남부 이탈리아의 척박한 역사 속에서 국가와 종교 너머의 강인하고 마법적인 세계를 살아가는 농부들의 삶을 그려낸 이 작품으로 카를로 레비는 장-폴 사르트르, 이탈로 칼비노 등 세계적인 작가들의 찬사를 받았다. 또한 이 작품은 회고록이자 일기로, 정치적 텍스트이자 아름다운 문학작품으로 읽힌다는 평가를 받으며 진정한 르네상스인이 쓴 현대의 고전으로 지금까지도 전세계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1945년 카를로 레비의 『그리스도는 에볼리에 머물렀다』가 출간되어 각국에 번역되면서 화제를 모으자 평자들은 먼저 그 장르적 특징에 주목했다. 이탈리아의 저명한 평론가 파올로 밀라노는 『뉴욕타임스』 올해의 책(1947) 선정 기고문에서 이 책이 “일기이자 사회학적 연구이며 소설이자 정치적 에세이로 읽힌다”면서 “어느 장르에도 한정되지 않는 아름다운 책”이라고 소개했다. 또한 그는 이 책의 장르만큼이나 규정하기 힘든 작가의 르네상스적 측면, 즉 작가이자 화가이며 의사이자 반파시즘 운동가로 활동한 카를로 레비의 다양한 면모에 주목했다.
이 책은 카를로 레비가 무솔리니 정권 시절 반파시즘 활동 때문에 당국에 의해 이탈리아 남부의 벽지로 유배된 실제 체험을 바탕으로 씌어졌다는 면에서 일기이자 회고록에 가까운 특징을 갖는다. 또한 이탈리아 남부의 문제, 즉 문명에서 소외된 채 극도의 가난에 내몰린 지역의 현실을 날카롭게 파헤쳤다는 점에서 정치적 에세이 또는 사회학적 연구로 볼 수 있으며 그 가운데 이탈리아 남부의 풍광과 거친 듯 신비한 생명력을 이어가는 농부들의 삶을 빼어난 문체로 그려냈다는 점에서 문학작품으로 봐도 무방하다. 이 작품은 출간 이후 ‘이탈리아에 대한 가장 중요한 10권의 책’(『가디언』), ‘비영어권 100대 논픽션’(『카운터펀치』),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1001권의 책’(피터 박스올) 등에 선정되면서 일찌감치 현대의 고전으로 자리잡았다.
르네상스적 인간이 쓴 현대의 고전
이처럼 이 책이 큰 주목을 받은 이유는 무엇보다 이탈리아 남부의 문제를 바로 그 현장의 목소리로 담아낸 뛰어난 책이기 때문일 것이다. 리소르지멘토(이탈리아 통일운동) 이후 이탈리아 남부의 문제는 그람시 같은 지식인들을 괴롭혀온 대표적인 고민거리였다. 그러나 카를로 레비에 와서 이 문제는 국가나 이념 같은 추상적 틀을 벗어던지고 바로 그 남부의 역사와 이야기 속에서 생생하게 재현되고 새롭게 모색되었다. 제목에서 암시되듯이 레비가 유배된 남부의 벽촌 갈리아노(현 지명 알리아노)는 ‘그리스도’마저 그 문턱(에볼리)에서 외면한 지역으로, 그러니까 종교나 국가 같은 인간 문명이 한 번도 주목하지 않은 야생의 상태로 방치돼 있었다.
그러나 레비는 이 상황을 문명 대 야만의 단순한 구도로 바라보지 않는다. 오히려 작가는 문명 세계의 탐욕과 그에 굴하지 않는 농부들의 생명력을 극명하게 대비시킨다. 레비는 먼저 마을 광장을 어슬렁거리는 지방 귀족들의 야망을 파헤치는 데 주력한다. 갈리아노 시장 돈 루이지로 대표되는 지방 토호세력은 이미 대도시로 떠나버린 엘리트 집단의 잔존세력으로 관료나 의사, 교사, 군인, 사제 같은 중간계급을 형성하며, 아무런 실력도 없이 오로지 기층 민중들의 고혈을 짜내는 데 주력한다. 원래 의학을 공부했으나 화가로 전향한 레비는 이 마을에 의사가 둘이나 있음에도 주민들이 말라리아로 죽어나가는 현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결국 마을 사람들의 간청에 의해 그는 의사로 복귀하지만 이마저도 마을 토호세력의 감시와 견제 때문에 방해를 받는다. 이른바 마을의 ‘귀족’을 형성하는 이 토호세력은 겉으로는 자유주의자나 왕당파로 행세하지만 실은 중앙으로 진출하지 못한 몰락한 계급일 뿐이다. 또한 이른바 문명으로 일컬어지는 국가(파시즘)와 종교(가톨릭)가 이 마을에서 하는 일이란 이들 토호세력에게 이데올로기적 기반을 제공하는 것이 전부이다.
반면, 극도의 차별과 가난 속에서 살아가는 농부들의 삶은 깊은 체념과 비이성적인 주술로 가득 찬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작품의 진가는 얼핏 검은 운명으로 가득 찬 듯 보이는 농부들의 세계를 그 뿌리까지 파내려가 그려낸 데서 발휘된다. 이탈로 칼비노가 극찬했듯이 카를로 레비는 이탈리아 남부 농부들의 세계를 도시에 소개한 ‘외교관’으로서 사랑의 주술과 밤의 정령, 검은 여인들과 비밀스런 길들에 관한 소식을 전해주었다. 레비가 묘사한 루카니아 지방 농부들의 삶은 마치 고대의 예언자처럼 주술적 마력을 가진 여인들, 자연의 온갖 정령들과 인생을 주관하는 수호신들, 그리고 국가와 종교 너머에서 도덕적이고 예술적인 실천을 감행할 줄 아는 공동체로 가득 차 있다. 도시와 전혀 다른 차원과 시간을 회전하는 이 세계에 대한 레비의 묘사는 이후 1960년대나 돼서야 등장하는 레비스트로스의 인류학을 선취한 것처럼 느껴진다. 야만의 세계를 서구의 계몽적인 시각으로 재단하지 않는 카를로 레비의 시각은 지금 봐도 매우 신선하다.
신선한 견해와 탁월한 문학성
장-폴 사르트르는 이 작품의 문학성을 말하면서 모든 인물이 생생하게 살아 있으면서도 역사에서의 위치를 잃지 않는 보편적 균형감각을 높게 평가했다. 마을의 토호세력이든 농부든, 여자든 아이들이든, 심지어 동물에 이르기까지 이 작품에 묘사된 모든 생명체는 나름의 존재로 아름답게 빛나고 있다. 주술적 마력을 가진 여인 줄리아, 파시즘의 화신이자 토호세력의 상징 돈 루이지, 따듯한 인격의 소유자 돈 코지미노, 좌절한 지식인 데쿤도 대위, 가톨릭의 타락한 수호자 돈 트라옐라 신부, 프리스코 여인숙의 떠들썩한 친구들, 레비를 따라다니는 아이들, 그리고 신비한 개 바로네까지 모든 주인공들은 마치 고대 비극의 인물들처럼 악인이든 선인이든 자기 운명의 비극적 주인공이자 한 사회의 상처를 간직한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역자의 말대로 이 작품은 그 문학적 아름다움만으로도 충분히 읽을 가치가 있다. 저자가 그려내는 남부 이탈리아의 풍경과 작열하는 태양 아래 펼쳐지는 농부들의 질박한 아름다움은 독자의 마음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생명의 원체험을 건드리기에 결코 모자라지 않는다.
정치적 에세이로서의 이 작품의 가치는 작품의 후반부에 더욱 뚜렷하게 발휘된다. 작가는 이탈리아 남부 문제를 고민한 어떤 지식인과도 다른 독특한 정치적 견해를 피력한다. 그것은 농부들 스스로가 문제의 주인으로 부각돼야 한다는 것이다. 레비가 보기에 당대의 지식인들은 남부의 문제를 매우 피상적으로 바라보았고, 그래서 국가나 제도의 개혁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레비는 민주주의든 사회주의든 남부의 문제를 국가적 시각으로는 결코 해결할 수 없으며 오로지 농부들이 스스로 참여하는 자치적 형태를 띠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농민들의 자주적 정치참여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후 유럽에서 농민의 정치적 중요성을 배제하지 않은 일부 스칸디나비아 국가들만이 진정한 복지국가로 나아갔다는 점에서 매우 탁월한 선견지명이었다고 볼 수 있다.
가까스로 유배에서 풀려난 카를로 레비는 이후에도 당국의 지속적인 감시를 받았으며 그리하여 이 작품 역시 베네치아의 은신처에서 몰래 씌어졌다고 한다. ‘로마인 중의 로마인’이자 진정한 르네상스인이었던 레비는 전후에도 화가이자 작가, 정치인으로 활동했으며 사후 자신의 예술과 정치의 고향이었던 유배지 알리아노에 묻혔다. 현재 알리아노에는 작가가 머물던 집과 동상 등이 보존돼 있다. 이 작품은 이탈리아의 거장 감독 프란체스코 로지에 의해 동명의 영화로 만들어져 세계적인 주목을 받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