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칫 종교 서적으로 오해될 만한 이 책의 제목에 대한 궁금증은 책장을 얼마 넘기지 않아 풀린다. ‘그리스도는 에볼리에 머물렀다.’ 결국 그리스도는 우리가 사는 세상까지 오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것이 종교든, 이성이든, 문명이든 그 어떤 얼굴을 하고 있든 간에 구원자는 이탈리아 남부의 소외된 농민들에게 손을 내밀지 않았다. 그들의 절망적 소외감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표현이 바로 이 책의 제목인 것이다.
장화 모양의 이탈리아 반도 남쪽, 발바닥 안쪽 산악지대에 해당하는 곳이 오늘날 바실리카타 주로 일컬어지는 루카니아 지방이다. 그리스와 트로이의 정복자들이 이탈리아로 건너와 로마 제국을 건설할 때, 그들은 이탈리아 반도의 토착민들을 배제하고 또다른 정복민족인 에트루리아인들과 손을 잡았다. 사르데냐, 시칠리아, 나폴리 일대에 살던 토착민들은 이후, 군소 왕국 형태로 겨우 명맥을 유지했다. 로마 제국의 영광도, 북부 이탈리아의 부유한 도시들에서 시작된 르네상스의 훈풍도 이곳 남쪽까지는 닿지 않았다. 문명과 역사의 격변 속에서 강대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영토가 분할되고, 나폴레옹 군대의 군화에 짓밟혔지만, 이들의 존재를 인정한 정치체제는 단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다. 사르데냐로부터 시작된 이탈리아 반도의 통일 운동과 무솔리니의 파시즘 광풍 속에서도 이들은 지분을 얻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이들에게 당도하는 것이라고는 누군지도 알 수 없는 지배계급이 요구하는 등골 휘는 세금과 빈곤, 그리고 압제일 뿐이었다. 이탈리아 남부의 뿌리깊은 소외와 빈곤은 ‘메리디오날리즘’이라는 학문 분야를 탄생시켰으며 20세기초 이탈리아의 지성인 중 하나였던 그람시A. Gramsci의 중요한 고민거리이기도 했다.
바로 이 이탈리아 남부의 오지 마을로, 르네상스 도시 가운데 하나인 토리노 출신이자 유대인이며 의사인 카를로 레비가 유배된다. 동시대의 철학자 사르트르가 ‘로마인들 중 로마인’이라고 평가한 카를로 레비는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썼으며, 과학으로서의 의술을 연마한 현대적 르네상스인이었다. 1929년 그는 반파시즘 단체 ‘정의와 자유’Giustizia e Libertà를 세웠고, 레오네 긴츠부르그Leone Ginzburg와 함께 이탈리아 반파시즘 운동을 이끌기도 했다. 이런 활동으로 말미암아 그는 체포되어 이탈리아 남부의 ‘알리아노’로 유배되었으며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그리스도는 에볼리에 머물렀다』가 세상에 나오게 된 것이다.
작품 속에서 ‘갈리아노’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알리아노’는 루카니아 지방에서도 가장 낙후된 곳이다. 가진 것이라고는 오직 ‘햇빛’과 ‘가난’뿐인 이곳에서 그는 고집스러운 침묵과 체념으로 무장한 농부들과 만나게 된다. 검은 옷을 입고 검은 눈길로 응시하는, 가히 검은 문명이라 일컬을 수 있는 농부들의 세계와 조우하고, 한없는 애정과 존경심에 가까운 외경으로 그 세계의 속살을 어루만지는 것이 책의 중요한 뼈대라 할 수 있다. 국가와 종교가 찾지 않은 땅에 농부들은 신화와 욕망, 비유와 온갖 알레고리들이 꿈틀대는 그들만의 문명을 만들어냈다. 그곳에서 기독교와 샤머니즘, 도덕률과 욕망은 아무런 서걱거림 없이 한데 어우러지고, 과학과 주술은 상충하기보다 서로를 보완한다.
이탈리아의 문호 이탈로 칼비노Italo Calvino는 현대 문명 이면에 공존하는 이 검은 세계를 드러낸 것이야말로 카를로 레비의 문학적 성취라 극찬한 바 있다. 카를로 레비가 묵시론적으로 그려낸 이 검은 세계, 그가 ‘농민 혁명’이라 이름 지은 이 생명의 기운은, 20세기 지구 곳곳에서 다양한 정치적 목소리로 분출되었다는 점에서, 칼비노는 레비를 예언자라 일컫기까지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작품의 마지막 부분에서 카를로 레비는 공산주의와 파시즘을 포함해, 그 어떤 정치적 이념이건 국가를 신성시하고, 개인을 종속시키면 그것은 도그마일 뿐이라는 점을 힘주어 말하고 있는데, 이런 사상은 20세기에서 21세기로 이어지는 지성사의 한 축을 이루어왔다.
이런 정치적 함의를 배제하더라도 이 작품은 그 문학적 아름다움만으로도 시간을 들여 읽기에 손색이 없다. 일찍이 알베르 카뮈는 자신의 문학적 원체험으로 ‘햇빛’과 ‘가난’을 꼽은 바 있는데, 카뮈는 ‘빈곤은 나로 하여금 태양 아래서라면, 그리고 역사 속에서라면 모든 것이 다 좋다고 믿지 못하도록 만들었고, 태양은 나에게 역사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주었다’고 고백했던 것이다. 이 사실은 카를로 레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여서, 작품의 매 페이지에서 나는 그가 그려내는 남부 이탈리아의 풍경, 작열하는 태양 아래 농부들의 삶이 이루어내는 질박한 아름다움에 감탄하곤 했다. 검은색의 그 처연한 아름다움은 읽는 이가 누구라 하더라도 사뭇 가슴에 스며들며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생명의 원체험을 건드리기에 충분한 까닭이다. 작품의 마지막, 예기치 못한 사면으로 황급히 유배 생활을 마무리하는 작가는, 부러 시간을 끌며 차마 발걸음을 떼지 못한다. 마침내, 갈리아노를 떠나 북쪽으로 향하는 기차에 몸을 실은 주인공, 카를로 레비의 얼굴은 굳이 보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다. 아마도 그는 자신의 생에 스며든 검은 문명, 침묵과 체념으로 무장한 검은 농부의 눈길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책의 번역을 위해 영어본과 불어본, 이탈리아어본을 두루 비교하며 작업하였다. 세 가지 본이 문단의 나눔이나 챕터의 구별이 상이해 원본인 이탈리아어본의 챕터 구성을 따르되 가독성을 위해 문단은 원본보다 더 세세하게 나누었음을 밝힌다. 번역하는 내내 참으로 오랜만에 현대의 고전이란 이름에 값하는 책을 만나 기쁜 마음이었다. 좋은 기회를 주신 북인더갭에 감사드린다. 아울러 독자들도 나와 같은 기쁨을 느낄 수 있다면 그간의 수고로움에 대한 값진 보상이 될 것이다.
2019년 4월
박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