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자의 무시무시한 현상학
『곰스크로 가는 기차』는 좀 독특한 여행소설이다. 그러니까 여행이야기란 무릇 여행을 떠나서 목적지에 도달하기까지의 과정을 담아야 한다. 그 과정이 험난했든 아니면 나름 괜찮았든 말이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는 여행이 아예 초반에 중단되고 그것이 소설의 핵심 스토리가 된다. 말하자면 여행이 멈추고서야 소설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엄밀히 말하자면 이 소설의 원제는 ‘곰스크로 가는 여행’(Reise nach Gomsk)이 아니라 ‘곰스크로 가지 못한 여행’이라고 해야 한다. 왜 주인공은 곰스크로 가지 못하는가? 우리가 꿈꾸던 곳으로 가지 못하게 되는 데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가령 그곳으로 떠날 돈이 없을 수도 있고 시간이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다만 ‘의자’ 때문이라고 한다면 어떨까? 나는 이 소설에서 ‘의자’라는 상징이 ‘곰스크’라는 상징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사실을 아주 나중에야―어쩌면 책을 다 만든 후에야―깨달았다. 그렇다, 인생은 의자 하나를 어쩌지 못해 꿈을 날려버리기도 하는 것이다.
이 의자는 그럼 누구의 것인가? 그것은 아내의 것이라고 소설은 서술한다. 여기서 개입되는 오해 하나. 그럼 인생에서 배우자는, 또는 결혼은 이른바 내 발목을 잡는 걸림돌이 되고야 만다는 것인가? 하지만 내 생각에 이 소설과 부부관계는 큰 상관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건 홍상수 영화에서 질리도록 반복되는 ‘연애질’이 막상 작품의 주제와는 별 상관없는 것과도 비슷하다. 그의 영화는 내가 진짜 하고 싶은 것은 사랑인데, 막상 내가 하고 있는 것은 섹스에 불과하다는 무서운 현상학을 담고 있다. 마찬가지로 이 소설은 마치 대단한 이상을 추구하는 듯한 인생도, 알고 보면 우리 주위의 여러 현상에 붙들려 있을 수밖에 없다는 진실을 전해준다. 결국 그런 너저분한 현실의 대표격인 의자야말로 이 소설의 주인공이며 우리가 미성년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꼭 거쳐야 할 뒷골목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최규석 작가가 주인공과 의자의 다리를 기묘한 긴장구도 속에 배치한 삽화를 보내왔을 때 깊은 공감을 느꼈고, 당연히 이 그림을 표지화로 선택했다. 최규석 작가는 이 소설이 전혀 따듯하지 않아서 좋았다고 한다. 나는 그의 의견이 옳다고 본다. 따듯하기는커녕, 이 소설은 현상과 이상 사이의 을씨년스러운 갑을관계를 담고 있다. 어떤 곰스크(이상)도 의자(현상)를 괄호치고는 완성될 수 없다는.
87년체제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90년대 초반에 이 소설을 처음 접한 나는 어쩌면 저 곰스크를 사회변혁의 이상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여전히 그런 꿈들이 천대받아서는 안되겠지만, 지금이라면 그런 꿈들을 이루기 위해서라도 먼저 의자 하나를 제대로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그것이 이 소설이 말하는 바라고 나는 믿는다.
북인더갭 대표 안병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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