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을 통해 지금 현재의 한계에서 벗어나기를 상상하고, 경제적 유용성이라는 좁은 틀에 갇히기를 거부하고, 인류의 보편언어로 의사소통하면서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다면 여행을 시작하는 첫 장소는 당연 쇼베여야 한다. 쇼베에서 우리는 인류 보편언어로 이야기하는 법을 배운다. 74면
터키석의 색을 닮은 그 푸른색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석양이 지고 한낮의 그 아름다웠던 하늘이 어둠과 만나면서 살짝 무거운 색조로 바뀌는 사이 태양은 사라졌으나 아직 달은 휘영청 밝은 빛을 내지 않는 그때 보았던 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하늘색이 떠오른다. ‘갈라 플라치디아 블루’라고 명명할 수밖에 없는 그 푸른색 사이에 ‘구원’에 대한 갈망을 새긴 모자이크로 마우솔레움은 장식되어 있다. 108면
그래서 그는 타협안을 생각해냈다. 자신도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되, 소멸의 의미를 죽음에서 배제한 것이다.” 이러한 노력은 곳곳에서 발견된다. 비단 유스티니아누스뿐만 아니라 라벤나에 남아 있는 모든 성당 아니 더 나아가 로마제국 곳곳의 지하세계에서 땅으로 솟아오른 바실리카 양식의 건축물에 담긴 숨은 뜻은 죽음에서 소멸의 의미를 배제하려는 안타까운 노력이다. 105면
피렌체를 다시 떠나야 하는 마지막 날을 두오모 오페라 박물관에서 보냈다. 피렌체의 15세기를 열었던 기베르티의 산 조반니 세례당의 청동문 원본을 보고 나서, 이제 피렌체 여행이 끝났다고 생각하고 박물관의 출구로 향하던 중 마지막 방에서 도나텔로의 「막달라 마리아」와 마주쳤다. 스물여덟엔 몰랐다. 곧 내게도 인생의 고통이 다가오게 될 것을. 도나텔로의 「막달라 마리아」를 보고 도 그냥 지나쳤을 그때와 달리 두번째 피렌체에서 그 조각을 보는 순간 마른 눈물이 터졌다. 177면
장인도 신하도 아닌 자율적인 예술가가 되고 싶었던 모차르트의 꿈은 이렇게 한참 후 빈에서 다른 예술가에 의해 이뤄졌다. 아버지로부터 분리되고 싶었던 그의 열정, 자율적 예술가가 되고 싶었던 그의 충동, 그의 이른 죽음으로 완성하지 못했던 그 기획을 쇤베르크가 완성했다. 비록 빈은 여전히 그의 음악을 사랑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모차르트가 부활한다면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을 완수했다고 쇤베르크에게 박수를 보낼 것이다. 254면
그저 명성을 소비하는 자들에 의해 파리의 카페는 점령당했다. 워낙 사람들이 많이 찾기에 웨이터들은 거의 뛰어다니다시피 한다. 저 웨이터는 조지 오웰일까? 현재의 조지 오웰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현대에도 보헤미안은 살아 있을까? 파리의 댄디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늘 그랬듯 자본과 예술은 숨바꼭질한다. 예술은 충격을 주지만, 자본이 예술을 흡수하면 예술의 충격은 사라진다. 도발의 장소가 힙한 장소가 되면 보헤미안과 그의 친구 댄디는 다른 거처를 찾아야 한다. 현대의 예술가는 19세기 제2제정기의 파리 현장에는 당연히 없다. 그들은 지금 파리의 어딘가에 숨어 있다. 319면
1942년 8월 9일의 연주는 현재의 콘서트홀 실황 연주나 레코딩된 음반으로 듣는 연주, 그러니까 오랜 기간 갈고 다듬은 수준에는 미치지 못했을 것이다. (...) 1942년 8월 9일 레닌그라드 오케스트라는 유흥이나 교양의 표식으로의 교향곡이 아니라 히틀러가 야만적인 전쟁을 벌일 때 인간임을 포기하지 않았던 레닌그라드를 소리로 표현했다. 「교향곡 7번」 연주는 인간임을 증명하는 행위였다. 378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