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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성 없는 남자 1-3권 합본 양장판/옮긴이의 말

특성 없는 남자_옮긴이의 말

by 북인더갭 2021. 10. 4.

지난 2013특성 없는 남자1·2권을 펴내고 8년이 지나서야 특성 없는 남자3권을 세상에 내놓으면서 그간 펴낸 1-3권을 묶은 합본 양장판을 펴낸다. 후속 권을 약속해놓고 이렇게 늦어진 데 대해 독자 여러분께 죄송하다는 말씀을 먼저 드린다. 1·2권을 내놓고 3권부터는 공역을 추진하다가 함께 번역하기로 한 분이 중도에 포기하는 안타까운 일을 겪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때 역자도 포기하고 싶었다. 워낙 내용이 난해한 데다 미완성 대작이라는 분량상의 압박이 다시금 마음을 약하게 했기 때문이다. 반쯤 자포자기 상태에 있는데 후속 권에 대한 독자들의 문의가 끊이지 않았다. 한편으로 죄송하면서도 누군가 이 책을 읽고 있으며 또 기다려준다는 사실에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 너무나 부족한 능력이지만 독자들의 기대에 부응하고 싶어 조금씩이나마 번역을 이어온 결과 이렇게 3권의 분량이 완성되었다. 이 책이 2권에서 끝나지 않고 독자들과의 약속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책을 읽어주시고 기다려주신 분들 덕분이다. 그분들께 깊은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3권은 특성 없는 남자2부의 중후반부에 해당한다. 로베르트 무질은 생전에 특성 없는 남자를 전체 3, 2권의 단행본으로 펴냈는데 이번 번역으로 2부까지가 출간되면서 전체의 3분의 2 정도가 완역되었다. 3부는 무질도 미완성 상태로 끝을 맺었으니 체계가 어느 정도 갖춰진 부분까지는 완역이 된 셈이라 역자로서 마음의 빚을 조금이나마 던 기분이다.

 

제국의 현실과 이념

 

3권에 들어서면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위태로운 역사적 상황은 점점 더 확연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이 제국의 전신인 오스트리아 제국1804-1867은 원래 프로이센을 포함하는 대독일주의의 꿈을 키워가고 있었다. 그러나 소독일주의를 추구한 비스마르크가 이끈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함으로써1866 제국은 서서히 몰락의 길을 걸었고 궁여지책으로 헝가리 왕국과의 국가연합을 타진해1867 무질이 카카니엔이라고 부른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이 탄생했다.

 

영토로는 오스트리아, 헝가리, 체코, 폴란드,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이탈리아 북부 등을 아우르는 대제국의 면모를 여전히 과시했으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통치 체제는 안정되지 못했다. 프로이센에 굴욕적인 패배를 겪은 탓도 있었지만 각 지역에 뿌리내린 민족주의가 안정된 통치를 방해하는 주원인이 되었다. 제국은 독일인, 마자르인, 슬라브인 등 여러 민족이 뒤섞인 다민족국가였고 1848년 혁명 이후 불붙은 자유주의적 사고가 각 민족의 독립 요구를 촉발하던 중이었다. 이런 갈등 상황은 1914년 극에 달했고 결국 발칸의 민족주의자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사라예보에서 페르디난트 황태자 부부를 저격함으로써 1차 세계대전이 촉발되었다.

 

특성 없는 남자의 인물들은 이런 역사적 상황 속에 실재했던 이념을 대변하고 있다. 라인스도르프 백작은 오스트리아 제국의 구체제, 즉 황제 치하의 진실한 오스트리아를 꿈꾸는 귀족으로 독일 황제의 30주년 즉위식에 맞서 오스트리아 황제 70주년 기념행사인 평행운동을 고안한 애국주의적 인물이다. 그의 곁에 오스트리아 문화로 세계 평화에 기여하자는 영혼의 이상주의자 디오티마가 있고, 그녀 곁엔 프로이센 출신의 독일인이자 세계적 자본가로서 디오티마의 영혼에 매혹되어 평행운동에 참여한 아른하임 박사가 있다.

 

한편 라인스도르프의 애국주의 운동은 오스트리아 내의 독일민족주의인 범게르만주의의 극렬한 반대에 부딪힌다. 독일인의 탁월함과 반유대주의에 기반을 둔 범게르만주의 입장에서는 평행운동이 반독일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2부의 끝부분에서 라인스도르프 백작 저택으로 모여드는 시위대는 이러한 범게르만주의자나 민족주의자 같은 반대 세력의 움직임을 짐작하게 한다. 청년 한스 제프는 전형적인 범게르만주의자로서 유대인을 멸시하고 독일민족주의의 부활을 꿈꾸는 불안정한 인물로 등장한다. 반면 게르다의 아버지인 유대인 레오 피셀은 한스 제프의 독일민족주의에 맞서면서 평행운동의 국가적 지향에도 동의하지 않는 자유주의적 인물로 그려진다. 여기에 더해 예술적 천재의 탄생을 꿈꾸는 니체주의자 클라리세와 생명과 자연의 건강성을 흠모하는 자연주의자 발터가 있고, 새롭게 부상하는 민중계급의 아이콘으로 라헬과 졸리만 등이 가세하며 스토리를 확장시킨다. 오스트리아 관료주의의 상징인 투치 국장, 위대한 지식의 지도를 그리려다 실망하고 군국주의적 결론으로 치닫는 슈툼 장군도 주요한 인물이다. 어떤 법적과학적 담론으로도 포섭되지 않는 문제적 범죄자 모오스브루거, 그리고 이 범죄자를 옹호하는 한편 당대의 욕망을 상징하는 보나데아도 빠질 수 없는 인물들이다.

 

낡은 영혼, 부족한 정확성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상황에 녹아든 인물 지도는 대략 이 정도로 그려볼 수 있겠다. 그런데 작품에서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신념 넘치는 각 인물의 확고한 정체성이 아니라 그런 신념들을 가능하게 한 부정확한 근거일 뿐이다. 이런 부정확성은 인물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자기분열적 의식에서 드러나기도 하지만, 각 인물의 담론으로 뛰어들어가 그 허위의식을 파헤치는 주인공 울리히에 의해 밝혀지기도 한다. 이 점에서 울리히는 모든 특성 있는 것에 대한 부정 정신으로 존재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가령 울리히가 범게르만주의자이자 반유대주의자 청년인 한스 제프 무리와 진보의 의미에 대해 토론을 벌이는 장면을 살펴보자. 울리히가 보기에 단순히 계산적이고 합리적이란 이유로 진보를 부정하는 젊은이들의 태도는 너무 낭만적이고 퇴행적이다. 울리히는 이론적인 판단을 내리는 대신 현상에 숨겨진 본질을 좀더 정확하게 짚어내는 데 주력한다. 가령 진보의 내적 논리에서 울리히는 평균의 동력을 발견한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시대를 날아다니는 수많은 이념들이 있다고 가정해보는 거야. 그 이념들이 매우 느리고 자동적으로 위치를 옮겨다니면서 어떤 평균값에 도달한다는 것이고 그것이 이른바 진보 또는 역사적 상황이라고 불리는 것이지.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인간적이고 개인적인 운동은 여기서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다는 거야. 우리는 오른쪽이나 왼쪽으로 갈 수 있고 깊게 혹은 얕게 생각하거나 행동할 수 있어. 또한 신식으로나 구식으로, 예측 불가능하거나 생각한 바대로 할 수도 있지.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평균에는 완전히 무의미해. 신과 시계는 평균에만 관심이 있고 우리에게는 관심도 없다고!” (231)

 

울리히는 현대적 진보의 계산적 특성이 평균값에 대한 추종을 가져왔다고 주장한다. 울리히가 보기에 현대의 실증주의적 정신은 삶의 모든 변수들을 평균에 위치시키는 특징을 가진다. 가령 징병대상자가 신체의 일부를 잘라버리는 일정한 비율이 계산될 수 있다면, 그 현상은 더이상 한 인간이 마주한 실존이 아니라 공동체의 평균적 현상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울리히는 기계적 정확성이 삶의 부정확성까지 대체해버린무시무시한 상황이라고 진단하다. 결국 인간 없이 진행되는 진보의 냉혹함 가운데 한 개인의 삶과 의지는 무엇인지를 되묻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좀더 본질에 다가선 사유로 이념의 정체성을 해체하는 울리히의 시도는 이 작품의 가장 인상적인 장면들이 아닐 수 없다. 이 작품에서 또 하나의 인상적인 시도가 있다면 현대가 처한 아이러니한 상황을 밝혀내는 일종의 고현학考現學이다. 무질이 보기에 현대는 생략과 과장을 통한 부정확성이란 특징을 가진다. 부정확성은 테니스 선수나 경주마를 천재로 부르는 시대적 현상으로 드러나며, 그런 현상은 고정된 하나의 적이 아니라 어디서나 유령처럼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현대의 모습으로 존재한다. 이 작품에서 현대성의 유령 같은 측면을 가장 잘 대변하는 인물은 아른하임일 것이다. 그는 특히 이 가진 반복의 특성을 현대적 규율사회의 권력, 폭력성과 연결하는 대담한 사유를 전개한다.

 

하지만 돈은 확실히 폭력처럼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확실한 수단이며 우리로 하여금 그것의 순진한 사용을 단념하도록 하지 않습니까? 돈은 정신으로 승화된 권력이며, 유연하면서도 고도로 발전한, 창조적이면서도 특별한 권력의 형식입니다. 사업은 간계와 억압, 사기와 착취에 근거하지 않습니까? 또한 이 간계와 억압은 문명화되고 내면화되어 자유의 외양을 걸치고 있지 않습니까? 돈을 마련하는 능력에 따라 권력을 계급화하여 이기심을 조직해낸 자본주의는 가장 위대할 뿐 아니라 가장 인간적인 질서이자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인간의 행동을 측정하는 데 이보다 더 정확한 도구는 없을 겁니다! (261)

 

지적인 삶을 산업으로 육성하는 지식인이자 장사와 이상주의를 결합할 줄 아는 부르주아 자본가 아른하임은 도덕과 이성 같은 시민적 덕목이 돈에서 가장 강력하게 구현돼 있음을 발견한다. 그는 이성과 도덕 같은 시민적 덕목이 경찰이나 정부, 군대와 같은 폭력의 형식에 의지해야 마땅하듯이, 돈 역시 자본주의의 위대한 질서이자 자유주의로 승화된 억압과 간계임을 강조한다. 산업 부르주아 아른하임을 내세워 무질은 현대의 자본주의적 삶 속에 숨겨진 파괴적 본질을 날카롭게 진단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담론의 해체 내지는 현대성의 고발이라 할 무질의 실험적 사유를 여기 다 펼쳐놓을 필요는 없을 듯하다. 다만 역자는 무질의 이러한 독특한 사유 소설이 오스트리아적인 현상이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서구의 동쪽 끝을 차지하고 있던 제국의 몰락은 그저 한 나라의 몰락이 아니라 서구 정신의 몰락이라는 성격을 띤다. 20세기초 빈을 빛낸 프로이트, 후설, 부버 같은 지식인들이 하나같이 고민했던 것이 바로 유럽 정신의 위기였거니와 그것은 시효를 다한 유럽의 과학적이고 실증주의적 정신을 벗어나 새로운 인간성을 찾아내지 못하는 한 인류에게 희망은 없다는 절실한 과제를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질은 이런 정신을 소설로 표현한 또 하나의 오스트리아적 거장이었다. 그가 소설에서 표현한 실험적 사유는 실증적이고 과학적인 사고를 벗어나 현상 속에서 선험적 본질을 밝혀내려 했던 후설의 현상학적 방법, 또한 현대라는 가면 뒤에 숨겨진 사회적 내면을 파악하고자 했던 짐멜의 사회학과 통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직관이나 현대성 같은 어느 하나의 학문적 용어로 규정하려 할 때 무질이 가진 전체적 세계는 힘없이 무너지고 말 것이다. 무질에겐 아주 작은 비유 하나에도 시적 정확성을 담아내려는 치열한 정신의 힘, 어떤 담론에도 본질을 양보하지 않으려는 부정의 정신 같은 것이 어떤 이론적 탐구보다 중요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장대한 소설을 두 단어로 정리해보라면 역자는 영혼과 정확성이라고 말하고 싶다. 무질에게 영혼은 아름답지만 너무 낡은 것이었고 정확성은 새롭지만 여전히 부족한 것이었다. 영혼과 정확성이 처한 이런 현대적 딜레마를 벗어나기 위해 무질은 다른 가능성을 향한 끊임없는 정신적 모험을 시도한 것이 아닐까.

 

옮긴이의 말을 마치면서 특별한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사실 역자가 북인더갭 운영자로서 편집 및 출간까지 같이하기 때문에 객관적 입장에서 교정해줄 편집자가 절실했는데 이번에도 소설가 김조을해가 처음부터 끝까지 원고를 읽어주었다. 워낙 어려운 원고인 데다 역자의 부족함이 더해져 많이 힘들었을 텐데 꼼꼼하게 작업해준 노고에 깊은 감사를 전한다. 이 작품이 그나마 읽을 만한 책으로 다가간다면, 그것은 오로지 도와준 이의 수고 덕분일 것이다.

 

아울러 김조을해 작가의 응원에 힘입어 3권을 내면서 1-3권을 묶은 합본 양장판을 함께 출간함을 알려드린다. 합본 양장판은 1930년에 발간된 원서 1권과 같은 형태의 편집이란 의미가 있고 또 번역-편집상의 몇몇 오류를 수정한 개정판의 의미도 있을 것이다. 1천페이지에 이르는 두꺼운 책이지만, 의지를 갖고 독파할 독자들이 반드시 있으리라고 믿는다.

 

3권을 번역해놓고 나니 이제 역자도 무질이 이 책을 처음 출간했던 나이인 오십대 초반에 접어들었다. 남은 과제는 무질이 미완성으로 남겨놓은 제3(원서의 제2, 1932)인데 이번에는 곧 출간하겠다는 약속을 함부로 드리지 않으려 한다. 먹고사는 틈틈이 번역을 하는 것이 이제 일상이 되었으니 언젠가 나오지 않을까 정도로 말씀드린다. 응원해주시고 기다려주신 덕분에 3권이 나올 수 있었던 것처럼, 4권도 그런 과정 속에서 나올 것이라고 소망할 뿐이다. 독자들께 다시 한번 마음 깊이 감사드린다.

 

20219

안병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