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잠옷을 입는 소리가 들려. 그렇지만 모든 준비가 끝나려면 아직 멀었지. 수백 가지 사소한 행동들이 남아 있지. 당신이 서두르고 있는 거 알아. 분명 모두 꼭 필요한 일들이겠지. 나는 이해해. 우리는 말 못하는 짐승들의 행동을 보면서, 영혼이 없는 동물들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필요한 행동들을 순서대로 처리하는 모습에 놀라지. 이것도 아주 똑같은 거야. 당신 눈에 꼭 필요해 보이지만 아주 사소한 그 모든 일을 처리할 때도 당신은 무의식적으로 하지. 그렇지만 그것들은 당신 삶의 곳곳에 스며들어 있지. 나는, 기다리고 있는 나는, 우연히도 그걸 느껴.”
-『1913년 세기의 여름』, 320쪽
잠자리에 먼저 누운 33세의 로베르트 무질이 이제야 잠잘 준비를 하는 아내를 기다리며 끄적거린 메모다. 참으로 아름다운 글이다. 곧 침대로 다가올 아내의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를 관찰하며 우연스럽지만 치밀하게 사유하는 이 사람. 그 어떤 연애편지나 사랑고백도 이보다 더 에로틱하고 진실할 수는 없을 듯하다. 특성 있다. 짧은 메모를 이 정도로 써대니 소설은 오죽하겠는가.
무질이 쓴 세기의 문제작 『특성 없는 남자』3권 편집을 끝냈다. 이 방대한 분량을 1권부터 혼자 낑낑대며 번역한 사람도 참 특성 있다. 지칠 만도 했을 텐데 해내고야 말았다. 3권을 내면서 1, 2, 3권을 묶어 합본으로도 펴냈다, 천페이지를 실로 묶어 양장판으로 고급지게. (편집하며 다크써클 코끝까지 내려오고 비염도 겹쳐 컨디션 난조로 토 나올 뻔ㅠ)
소설의 배경은 1913년 오스트리아 빈의 여름. 아직 세상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곧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불안과 쇠락의 기운이 감돈다.
프란츠 요제프는 다민족으로 구성된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을 60년 넘게 다스리고 있다. 황제의 통치에 경도된 라인스도르프라는 순진한 애국주의자 백작은 통치 70주년을 기념하는 이벤트를 미리 준비하는 중이다. 여주인공 디오티마는 이 운동의 핵인싸이자 이상과 영혼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범접하기 힘든 포스와 신화적인 아름다움을 겸비했으며, 특성 없는 남자 울리히의 사촌이기도 하다. (울리히에게 무참하게 팽당하는 보나데아와 헷갈리지 마시길) 울리히에게 ‘특성 없는 사람’이라는 타이틀을 안겨준 옛 친구 발터와 그의 아내 클라리세, 범게르만주의에 젊음을 바친 한스 제프와 한스에게 영향을 받은 게르다, 관료주의의 상징인 디오티마의 남편 투치 국장, 그리고 유부녀 디오티마 곁을 맴도는 유럽 철강재벌 아른하임, 디오티마와 아른하임의 하인인 라헬과 흑인 졸리만, 모든 걸 작전과 규율로 해결하려는 군사주의자 슈툼 장군, 그리고 문명화된 세상에서 야만적인 범죄를 저지른 모오스브루거, 이들이 움직이고 생각하고 충돌하는 그 시간 그 자리에서 주인공 울리히는 매사 부정하고 회의하며 기술과 과학, 현대성을 의심한다.
무질은 아주 불친절하게 소설을 썼다. 충분히 친절한 사람인데 일부러 고약하게 쓰지 않았나 싶다. 문장의 묘사나 비유, 캐릭터 형상화 능력, 스토리 없이 스토리를 이어가는 신박한 솜씨는 월드클라스 그 자체다. 게다가 그의 사유는 우주를 아우른다고 해야 할까. 어떤 부분에선 자신도 못 알아먹는 개똥철학(?)을 지겹도록 서술하는 느낌이다. 그러면서 이해 못 하겠어도 닥치고 읽어!, 라고 독자를 몰아대는 배포까지 장착했다. 물론 내 가방끈이 짧아서 못 알아먹은 걸 수도 있지만.
결론은, 전쟁은 일어나는 게 확실했다. 다만 ‘언제’ 터지느냐가 관건이었다. 인간은 소외당할 게 뻔했다. 도덕이나 지식, 합리성이나 현대성은 죄다 그림자에 불과했다. 그래서 울리히는 현대의 이 모든 (사악한?) 특성을 거부한 채 특성 없는 남자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퇴폐와 격정의 도가니에서 등장인물들은 각각의 이상과 목표, 관계의 모호함과 상처 속에서 1914년으로 뛰어든다. 이제 유럽은 1차 세계대전을 향해 몸을 뒤튼다.
그러나 무질은 이 소설을 완성하지 못한다. 나치를 피해 스위스로 망명하지만 돈도 없고 몸도 아파 작품에 집중할 수 없었다. 당대 소수 평단만이 기억했던 소설가. 그의 지칠 줄 모르는 의지가 안쓰럽다 (소설 지루하게 쓰기로는 나도 만만치 않은데, 이런 나를 기죽이다니). 그의 의지를 지탱했을 강박, 그 창조적 강박이 존경스럽다. ‘승화’라는 말은 무질에게 어울린다. 자신의 신경증과 우울증, 불면증, 뇌졸중 등 모든 ‘증’세를 그는 소설로 승화시켰다.
책을 끝낼 때마다 드는 생각인데, 누군가 다 대신 해준 것만 같다. 이번에는 안대표님의 독무대가 확실하다. 번역가이자 대표님인 안사장님께 깊은 감사와 뜨거운 애정을 표한다. 북인더갭의 ‘똘기’는 안대표님의 창조적 강박에서 비롯됐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눈이 빠질 만큼 힘들게 만든 책을 세상으로 떠나보낸다. ‘나는, 기다리고 있는 나는’, 로베르트 무질의 작품이 한국의 독자들에게 오래오래 사랑받기만을 바랄 뿐이다. 혹여 지루함을 사랑하는 분들께, 고독한 일독을 권하는 바이다.
2021년 9월
김조을해 (소설가/ 편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