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나 익숙한 공동체를 향한 불편한 질문들!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2022년 <인문교육콘텐츠 개발 진흥사업> 선정작!
각박한 개인의 시대에 공동체는 과연 가능한가? 가능하다면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을까? 공동체에 대한 막연한 환상을 넘어 공동체의 본질을 되묻고 새로운 반성과 대안을 모색한 책 『공동체의 감수성』이 출간되었다. 시민사회 현장에서 활동하며 공동체의 이론과 현실을 고민해온 젊은 연구자 구현주는 서울시 마을공동체 사업과 연관된 자료를 검토하고 현장 사람들을 인터뷰하여 이 책을 썼다. 이 책은 공동체의 본질이 무엇이며 새로운 공동체의 감수성은 어떻게 마련될 수 있는지를 참신하게 들여다본 책으로, 공동체에 대한 동경을 자극하는 성공사례에서 벗어나 실제 현장의 불편한 이야기를 가감 없이 전달했다는 점에서 신선한 시도라 할 만하다. 또한 공동체마저 변질되는 시대에 삶의 의제를 담보하면서도 민주적으로 연대하는 공동체는 어떻게 가능한지를 진지하게 모색하고 있다.
공동체사업의 이상과 현실
2000년대 들어 한국사회에 ‘공동체’ 열풍이 불기 시작했고 그 정점에는 고(故) 박원순 시장의 주도로 추진된 서울시 마을공동체 사업이 있었다. 관 주도의 공동체 만들기에서 벗어나 시정부와 시민이 파트너가 된 이 사업은 모범적 사례로 평가되면서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또한 공동체라는 이상이 정책과 만나 구체적으로 실현된 최근 사례라는 점에서 공동체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되묻고 공동체의 감수성을 새롭게 가다듬는 좋은 연구 대상이다. 저자는 2012년부터 2021년까지 마을공동체 사업과 연관된 기획·평가·보고서·기사 등을 검토하는 한편 공무원, 중간지원조직 단장, 활동가, 연구자 등을 심층 인터뷰하여 이 책을 썼다. 이 책은 공동체에 대한 막연한 성공사례를 담은 책이 아니며 공동체의 본질을 되묻고 실패를 확인하며 새로운 반성의 지점을 찾아내려는 시도다. 또한 공동체의 본질에 대한 다양한 토론이 필요하다는 취지에서 현장의 ‘불편한 이야기’들을 가감 없이 그대로 담아냈다.(들어가며)
우리가 공동체를 향해 품는 가장 흔한 환상은 도시사회를 벗어나 목가적 사회로 회귀하는 낭만적 모습일 것이다. 이런 환상은 게젤샤프트(이익사회)는 악한 것이며 게마인샤프트(공동체)만이 이타적이고 좋은 것이라는 관념에 기인한다. 그러나 저자는 이미 도시화된 현대사회에서 단순하게 이익사회를 파괴하고 공동체로 돌아가자는 것은 환상에 불과하며 지금의 공동체가 가진 결함을 수정하고 보완하며 그 안에 숨겨진 진실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1장)
저자는 먼저 사업으로 추진된 공동체운동이 새마을운동 같은 관 주도의 기획과 차별화되려면 어떤 조건이 필요한지를 점검한다. 저자에 따르면 새로운 사회운동으로서의 공동체운동이 성립하려면 오페(Offe)가 설정한 조건, 즉 개인의 삶에 대한 관심, 개방적이고 민주적인 참여방식, 탈계급적이고 전지구적인 연대 등을 만족시켜야 한다. 현재 서울시의 마을공동체 만들기에 대한 평가는 관 주도적 성격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비판적 입장과 진정한 공동체로 진행중인 운동이라는 긍정적 입장이 맞서고 있는 상황이다. 저자는 마을공동체 사업이 과연 민주적 조직구조를 유지하는 가운데 삶의 의제에 직접 참여하고 여러 주체와 연대하는 운동성을 가졌는지 중간점검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한다.(2장)
책의 3장부터 저자는 서울시 마을공동체 사업의 현장을 본격적으로 탐구한다. 마을공동체 사업의 목적은 ‘사회적 자본’의 축적으로 요약된다. 퍼트넘(Putnum)이 기초한 사회적 자본의 개념은 ‘사회가 얼마나 강한 유대와 결속력을 가졌느냐’는 것으로, 이런 결속력이 잘 갖춰진 사회일수록 정치적 참여가 늘어나고 그 결과 민주적인 발전을 가져온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실제로 서울시 마을공동체 사업은 친밀한 이웃 관계의 형성이 주민자치의 실현과 민주주의 발전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기대로 추진되었다.
그런데 현장을 살펴본 저자는 기대와는 다른 모습과 마주한다. 우선 마을공동체 사업의 가장 뚜렷한 참여자는 ‘경력 단절 여성’, 아이를 키우는 ‘전업 주부’들이었다. 이는 여전히 심한 성별임금차에 따른 사회구조적 결과이지만 사업 측에서도 예측하고 오히려 장려한 결과이기도 하다. 그러다보니 공동육아나 음식만들기 같은 사업이 중심에 놓였고 이는 여성-돌봄노동의 패러다임을 공동체사업의 주력으로 인정함으로써 다른 주체들의 배제를 묵인한 결과를 가져왔다. 또한 기혼-여성 중심으로 사업이 진행되다보니 비혼자들이 배제되었으며, 생계에 매달려 여유가 없는 소외계층도 사업에 참여하기 어려웠다. 이런 부정적 결과를 벗어나기 위해 사업은 주민 3인이면 누구나 참여하도록 절차를 간소화하고 문턱을 낮췄다. 그러나 이 또한 엉뚱한 결과를 초래했는데, 프로그램 강사와 주변인들이 결합해 지원금 나눠먹기식 사업이 된 것이다. 이런 현상은 공동체의 목표라 할 민주주의가 사업 과정에서 훼손된 모습이라고 저자는 지적한다. 이런 배제와 왜곡을 피하려면 노동시간을 줄이는 것뿐 아니라 돌봄노동을 여성의 역할로 한정하는 의식구조가 바뀌어야 하며 공동체가 사회적 자본의 양극화에 오히려 기여하지 않는지를 면밀히 살펴야 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3장)
우리 안의 우리에서 벗어나기
『나 홀로 볼링』에서 퍼트넘은 가끔 만나 볼링을 치는 정도의 느슨한 관계에서 시민의 참여의식이 다져지며 결국 공적 영역으로 전개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른바 친밀권에서 공론장으로 단계적 발전이 이뤄진다는 가설은 하버마스나 서머빌, 사이토 준이치 같은 학자들이 공통으로 전제하는 이론이기도 하다. 3~4인의 소규모 활동을 지원함으로써 민주적 마을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다는 마을공동체 사업도 이 가설에 근거해 설계되었다. 그러나 저자는 실제 현장에서 이런 단계적 성장이 이뤄졌는지는 의심스럽다고 말한다. 현장에서는 취미 차원에서 소그룹 활동을 만족스럽게 하고 있는데 굳이 마을계획으로 확장할 필요가 있느냐는 목소리가 크다. 결국 주민들의 자기이해가 공동의 문제로 확장되지 못함으로써 공동체를 통해 민주적 시민의 성장을 꾀한다는 원래 취지는 무력화된 것으로 평가된다. 또 하나의 문제는 마을공동체 사업에 부여된 권력을 선점하기 위해 시민단체 내부의 갈등이 불거졌다는 점이다. 이는 시민단체가 새로운 주민운동의 형성에 협조하고 이바지하리라는 애초의 기대와 사뭇 다른 것으로, 오히려 시민단체가 자기 권력을 확보하기 위해 개별 주민의 성장과 진입을 방해하는 뜻밖의 결과를 초래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결론적으로 이는 시민의 자유로운 공론장으로 발전해야 할 공동체 현장이 서로의 약점을 숨겨주고 함구하는 변종적 공론장으로 변질됐음을 말해준다.(4장)
저자가 보기에 공동체사업을 통해 민주시민을 육성하겠다는 계획은 크룩생크(Cruikshank)가 간파한바, 근대의 전반적인 통치기획으로서의 ‘시민 만들기’로 기울어질 위험을 안고 있다. 이는 시민 만들기 기획이 중앙권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며 마을공동체 사업 역시 권력에 포섭된 측면이 있다는 비판이다. 가령 마을만들기를 위해 육성돼야 할 인력이 어공(어쩌다 공무원)으로 흡수돼 막상 현장에는 일할 사람을 찾기 힘든 경우가 여기에 해당된다. 국가행정에 문제를 제기하고 동등한 파트너십을 구현해야 할 사람들이 국가시스템에 부속되고 마는 것이다. 이런 한계가 드러난 근본원인은 공동체가 사업화되면서 자본주의적 사고에 편입되었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사업의 지향은 민주주의에 두면서도 그 과정은 지나치게 자본주의적 효율과 이윤을 따르는 모순을 낳았음을 보여주는 사례다.(5장)
공동체가 사업으로 추진됨으로써 배제를 양산하고 자본에 흡수되는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공동체의 본질을 되찾고 감수성을 회복할 수 있을까? 저자는 ‘우리(We) 안의 우리(Cage)’라는 비유를 통해 현상황을 벗어날 실마리를 제시한다. ‘우리’를 강조함으로써 외부와 선을 긋고 스스로 ‘우리’ 안에 들어가는 공동체. 새로운 참여자를 배제하는 이러한 공동체일수록 쇠락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그렇다면 어떤 방법을 취할 것인가? 저자는 모리스 블랑쇼(M. Blanchot)의 논의를 빌려 공동체를 위해선 오히려 공동체를 버려야 할 필요가 있음을 역설한다. 여기서 버리라는 말은 완전히 새로운 공동체를 건설하라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가 무엇에 오염되었는지를 깨닫고 회복하자는 것이다. 이를 위해선 무엇보다 단기적 사업이 아니라 사회의 구조적 변화, 시민사회 문화의 전반적 재조정, 그리고 더 열린 공동체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6장)
공동체는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여럿이 살아가는 삶 자체이며 그 안에는 다양한 구성원과 운동의 흐름이 이어져 있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공동체의 시작은 대단한 것이 아니라 내가 살아가는 공간을 사색하고 무엇을 연결해야 하는지를 고민하고 시도함으로써 성장할 수 있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가령 그냥 걷는 것만으로도 공동체는 시작될 수 있다. 걷다보면 어디가 안전한 길인지, 왜 장애인 복지시설은 가장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위치하는지를 알 수 있고 거기서부터 샛길이 생기고 새로운 사람들이 모여 활동을 벌일 수 있다. 그냥 기록하고 남겨보는 것도 좋은 시도다. 동네 어르신들의 사소한 소장품을 모으면 어느 역사박물관에도 없는 새로운 의미가 탄생할 수 있다. 무엇보다 이런 활동들이 우리 공동체가 배제하는 것은 없는지, 실제적인 토론이 이뤄지는지, 민주적 시민이 성장하도록 돕고 있는지 같은 질문 속에서 이뤄질 때 우리의 공동체 감수성은 깨어날 수 있다고 저자는 독려한다.(7장)
이 책은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의 2022년 <인문교육콘텐츠 개발 진흥사업> 선정작으로 마지막 장까지 우리에게 자기성찰과 낯선 시각을 일깨워주며 더 많은 질문을 던져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