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깔이 냄새처럼 이렇게 사람 마음에 깊숙이 스며들다니 정말 놀랍구나.
그래서 <요한계시록>에도 보석이 영적 표상으로 적혀 있는 모양이야.
마치 천국의 단편 같아.이 에메랄드 반지가 제일 아름답지 않니?”
-『미들마치』, 주영사, 25쪽
조지 엘리엇의 소설 『미들마치』의 주인공 도로시아 브룩의 대사다.
신앙심이 이 정도는 되어야 고전의 주인공 반열에 오를 수 있다.
돌아가신 엄마가 남긴 보석류를 동생 실리아와 함께 살펴보던 중 내뱉은 말 속에는
그녀의 고결한 영적 감수성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도로시아 브룩(애칭은 도도)은
‘정말 행복한 결혼생활이란 아버지 같은 남편이 있어 원한다면 히브리어도 가르쳐 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남편은 자신을 무지에서 해방시켜 ‘장대한 길’로 이끌어줄 사람이어야 한다고 확신하고 있다.
그런 남편이라…
생각이 없는 여성이 아닌 도로시아이건만 남편에 관해서는 이다지나 나이브하다.
더욱이 조지 엘리엇도 소설 초반에 분명히 아래와 같이 밝혔다. 굉장히 시니컬한 톤이었으리라 짐작한다.
“여자는 자기주장이 약해야 한다는 것이 통념이었다.
여자가 사회생활과 가정생활을 안전하게 할 수 있는 최고의 보호막은
자기 의견에 따라 행동하지 않는 것이었다.”(18쪽)
걱정이 앞선다.
이토록 순진하고도 경건하며, 생각과 의견은 다양하지만 남편상에 관한 한 백치와도 같은
도로시아 브룩은 이 험한 세상을 어찌 살아갈 것인가.
그날, 식사 자리부터가 문제였다.
젊고 아름다운 자매가 있는 브룩 가에 남성들이 등장하지 않으면 뭔 재미로 소설이 진행되겠는가.
뭔 맛으로 밥을 먹겠는가.
먼저, 가장 수다스럽고 매력 없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브룩 씨를 소개한다.
브룩 씨는 도로시아와 실리아의 큰아버지다.
일찍이 고아가 된 두 조카를 독신인 브룩 씨가 자신의 팁턴 저택에서 돌보고 있다.
즉 자매들의 후견인이다.
브룩 씨는 입만 열면 이러한 발언을 하는 사람이다. 길게 설명하지 않겠다.
‘잘 알다시피 젊은 여자는 경제에 어둡지요’
‘젊은 처녀 아이들이 내 서류에 손을 댄다는 건 당치도 않아요. 아가씨들이란 변덕스러우니까요.’…
다음은 제임스 체텀 경.
준남작 귀족에다 구레나룻은 붉고 혈색도 좋다.
전반적으로 나무랄 데가 없다. 상식적이고 온화하다.
자신의 영지 안에서 농장을 운영하는데 나름 ‘기발한 농업 경영’을 꿈꾸는 신세대다.
무엇보다 우리의 주인공 도로시아 주위를 맴도는 중이다.
그리고, 가장 기이하면서, 음흉하면서, 시대착오적이면서, 학구적이지만 변태적(?)이기도 하고,
‘죽은 과거의 사람들하고만 살고’ 있는 에드워드 커소번 신부.
종교사에 대한 연구를 과거로부터 영원히 이어나갈 학자님이자 성직자인데,
대대로 돈이 꽤 있는 집안 출신이라는 소문도 자자하다.
곧 있으면 쉰 살을 찍는 말라깽이 책벌레에다 ‘이름만으로 감명을 주는’ 경건남이시다.
『신화학전해』을 쓰고 있다는 건지, 쓸 준비만 한다는 건지
여튼 뭔가 엄청난 걸 연구 중이다.
(개인적으로, 같이 밥 먹고 싶지 않은 사람이다. 같이 먹는 ‘사람’ 그 자체가 메인 아닌가)
그날의 식사자리에서 도로시아는 커소번 신부를 처음 만난다.
도로시아는 커소번으로부터 눈을 뗄 수가 없다.
제임스 체텀 경은 눈길도 주지 않는 도로시아 곁을 떠나 동생 실리아에게 다가간다.
언니만큼은 아니지만 동생도 예쁘다고, 생각하면서.
우리의 주인공 도로시아는 밥이 입으로 넘어가는지 코로 넘어가는지 모른 채
뭔가에 들떠 식사를 한다.
난 알지 못하겠어… 도로시아는 숲을 걷는다.
보석이나 드레스나 예쁜 모자나 화사한 리본, 꼼꼼한 자수 따위에는 관심도 없는 도로시아.
도로시아는 보람찬 삶을 살고 싶다. 더 깊고 더 넓은 지식을 얻고 싶다.
여학교에서 배운 가볍고 피상적인 것들로는 성이 차지 않는다.
더 가치 있고 더 숭고한 것들을 배우고 그것을 실천하며 살고 싶다.
미지의 것들을 동경하며 살고 싶다.
지금의 안락과 풍요에 만족하지 않은 채 이 순수한 열정을 키워나가고 싶다.
그러나 얄궂게도 순진한 처녀의 이상에 곧 먹구름이 낀다.
도도를 사로잡은 빛나는 지성과 고귀한 학식은 커소번 신부라는 중늙은이로 성육신해 그녀 앞에 나타난 것이다.
도로시아는 너무도 쉽고, 너무도 빠르게, 너무도 무모하게 커소번을 존경해버린다.
커소번을 생각하며 장원을 거니는 도로시아 앞에 나타난 제임스 체텀 경.
21세기 대한민국에선 아직도 외국인 노동자가 한겨울 비닐하우스 숙소에서 죽어나가는데,
19세기에 벌써 기후변화와 농민들의 주거 문제를 심각하게 여겨온 도로시아에게 제임스는 요청한다.
"당신이 만든 설계도를 보여 주시면 기꺼이 그대로 실행하겠습니다."
쾌적한 집단 농가를 꿈꾸며 직접 설계도까지 그리는 도로시아.
그녀는 제임스가 구애의 한 방편으로 다가오는 줄은 꿈에도 모른다.
둔한 여주인공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이 근방에서 볼 수 있는 그런 지저분한 집에 사람을 살게 하고 집세를 받고 있으니까요."
참 올바른 여주인공이다. 동생 실리아는 벌써 눈치를 챘는데 말이다.
“세상에, 제임스 씨가 가여워. (…)
언니는 늘 그렇듯이 발밑은 보지 않고 엉뚱한 곳을 밟고 마구 걸어가니까 말이야.”
마침 큰아버지 브룩 씨는 커소번 신부의 초대를 받고 이틀 동안 그의 집에 머물다 돌아왔다.
브룩 씨와 커소번 신부 둘만 놓고 보자면 결코 친밀한 사이가 아닌데도 말이다.
“네가 아직 성년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큰아버지는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다음 회 읽기: https://bookinthegap.tistory.com/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