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지금 커소번을 괴롭히는 건 그의 아내였다.
아니 새파란 조카 윌 레이디슬로였다.
『신화학전해』에 대한 의지는 사그라들었다.
어이없게도 이미 독일에선 연구와 해석이 끝난 주제였다.
성경 속 신비와 고대 신화를 버무려 신묘한 뭔가를 골방에서 혼자 연구하던 커소번은
현타를 맞은 것이다. (그건 정말 나도 유감이다)
하지만 연구자로서의 진가는 그 다음부터가 아닌가?
낡고 한물간 주제라 해도, 남들이 해석과 정리를 끝냈다 해도,
연구자의 고독과 열망이 지적으로 진솔하게 구축되었다면
그것만으로 이미 충분하지 않은가.
스스로의 역량이 부족하다는 걸 받아들이고
그 한계 안에서 할 수 있는 마무리를 수행하는 게 연구자의 저력 아니겠는가.
그러한 결과물의 가치를 어느 석학의 것과 비교하겠는가.
커소번의 멘붕을 이해한다. 커소번의 고뇌와 외로움을 이해한다.
하지만 자기연민은 사양한다.
스스로도 아무 비전 없이 고문서 뒤에 숨어 있었다는 뼈아픈 진실을
지금이라도 직면했으면 좋겠다.
애먼 마누라 탓만 하지 말고.
커소번이 겪은 아내는 단순히 젊고 아름다운 여성이 아니었다.
아내는 남편을 비난하는 성질 더러운 여자였다.
도로시아가 인내하며 참을 때에도 커소번은 반항적이라고 생각했다.
반대로 스스럼없이 대답을 하거나 말을 보태면 우월감에 들떠 설친다고 비난했다.
그러니 입을 열어도 입을 닫아도 남편 눈에는 ‘독선적인’ 아내였다.
(이런 남편이랑 같이 살면 없던 병도 생긴다, 내가 예언한다!)
조카 윌이 로마에서 미들마치로 돌아온 것도, 로윅 근처를 어슬렁대는 것도,
<파이어니어>의 편집을 맡은 것도, 원인은 다 도로시아인 것이다.
그런데 질투와 복수심에 찬 추측은 한걸음 더 나아갔다.
젊은 아내는 내가 죽더라도 큰아버지에게 받은 것도 있으니 어려움은 없겠지,
하지만 그 재산 때문에 위험에 빠질 수도 있는 일 아닌가,
아내는 얼마나 무분별한가?
아내의 어리석음을 악용할 남자가 옆에 있다면 아내는 그런 남자의 밥이 되지 않을까…
바로 그 놈이 내가 죽기를 기다리며 지금 내 저택 로윅 근처를 어슬렁거리고 있지 않은가…
(윌이 유부녀를 흠모하며 어슬렁거리는 건 사실이지만,
윌은 커소번 당신처럼 비겁한 인물은 아니라고 생각함.
밑도끝도없이 상대를 의심하는 스스로를 먼저 돌아보길 바람!)
의사 리드게이트를 만나기로 한 주목나무 늘어선 가로수길을 거닐며
커소번은 북치고, 장구치고, 노래하고, 춤추며, 혼자 맘껏 죄를 짓고 있다.
시간이 지나, 의사 리드게이트가 말을 타고 저택을 빠져나간 걸 도도는 확인했다.
그제야 도도는 남편을 만나기 위해 정원으로 나선다.
그러나 남편에게 다가가 팔짱을 낀 순간 도로시아의 온몸에는 소름이 쫙 돋는다.
남편은 아내가 다가왔는데도 뒷짐 진 손을 풀지 않는다.
눈길도 주지 않는다. 걷던 길을 걸을 뿐이다.
나무 막대기가 와닿았는지, 잡초가 닿았는지,
마누라를 완전 투명인간 취급하는 남편에게 무엇을 바라며 도로시아는 다가갔는지.
“전에는 조심스럽게 그의 눈빛을 살피며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그녀의 가장 소중한 영혼을 감옥에 가두어 놓고 눈을 피해 가며 만나러 가곤 했지만,
이러한 처지에 놓이면 여자들 가운데는 증오를 느끼기 시작하는 사람도 있다.”(724쪽)
이렇게 미묘하게 폭력적이라니.
도로시아가 느낀 모욕과 상처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이 끓어오르는 증오가 언제 폭발하려나.
애증의 밤이 밝자 도로시아는 의사 리드게이트를 만나기 위해 나선다.
알아내야 한다, 남편은 나에게 뭔가를 숨기고 있다, 의사와 단 둘이 무슨 대화를 나눈 것일까.
그러나 리드게이트 집에서는 웬 남자가 한바탕 노래하는 소리와 띵똥거리는 피아노 소리만 들릴 뿐이다.
“남편은 새로 세운 병원에 계십니다.”
그런데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나 말을 거는 윌 레이디슬로.
“제가 가서 모시고 올까요?”
목청껏 노래 부르던 남자는 다름 아닌 윌이었다.
도로시아는 순간 의아했다, 윌은 이곳에 무슨 용건으로 온 걸까.
윌도 묘한 굴욕감과 낭패감을 느끼긴 마찬가지였다.
내가 미들마치 같은 시골에 있는 이유는 오로지 도로시아 때문인데,
여러 사람과 교유하는 건 나의 타고난 장점인데, 도로시아가 오해하지는 않을까…
도로시아는 뒤도 안 돌아보고 달려나가 마차에 올라탄다.
새신부 로저먼드도 집에 돌아온 남편에게 미주알고주알 캐묻더니 단정한다.
“(윌은) 커소번부인을 아주 좋아하는 것 같아요.”
“불쌍한 녀석!” 리드게이트는 가볍게 웃는다.
새 병원의 월계수 정원에서 의사 리드게이트와 만났던 도로시아는 또 자기를 검열한다.
커소번은 심장병의 일반적인 징후와 증상을 알고 싶어 했다고
리드게이트는 도도에게 간단히 전했다.
그런데도 불안은 도도를 엄습했다.
‘(내가) 새로운 불안을 일으키게 할 만한 말이나 행동을 한 건 아닌가’…
이런 문장을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
커소번은 아내가 무엇을 하든, 어떤 말을 하든 다 맘에 안 들었을 것이다.
존재를 존재로 받아들이지 않는데 상대의 말과 행동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도도가 커소번의 눈앞에서 사라지더라도 커소번은 혼령을 두고도 의심할 위인이다.
한편, 리드게이트는 돈도 많고 의식도 있는 커소번부인이 몸소 찾아온
이 엄청난 기회를 흘려보내지 않았다.
미들마치의 새 병원은 일명 ‘전염성 열병을 위한’ 새로운 병원이었다.
그런데 이 병원의 설립을 반대한 사람들에게 리드게이트는 아직도 비난을 받고 있다.
그래서 그는 미들마치의 주요인물인 도로시아에게
하소연과 신세한탄(?)을 의도적으로 늘어놓은 것이다.
물론 새신랑 리드게이트에겐 아름다운 아내 로저먼드와(로저먼드는 막 임신도 했다)
안락한 가정이 있었다.
하지만 ‘집시’와도 같은 레이디슬로가 방문해 인생을 놓고 논쟁을 한 날이거나,
밀린 가구값을 갚으라는 독촉장이 날아온 날에는
마음이 슬슬 짜증스러운 것이다.
윌 레이디슬로도 마찬가지였다.
목표가 뚜렷한 의사 리드게이트와 집시처럼 떠도는 윌이 미래를 놓고 논쟁을 한다면,
누가 더 초라함을 느끼겠는가.
하숙집으로 돌아와서도 윌은 쉽게 잠들지 못했다.
하지만 도로시아만 생각하면 행복했다. 고민 고민하다 윌은 결심했다.
왜 도로시아를 만나지도 못하지?
누구 때문에?
오늘이 토요일 밤이네,
그럼 내일 날이 밝자마자 로윅 교구의 교회로 가면 되잖아! 할렐루야!
아침이 밝았다. 윌은 말을 타고 예배당으로 희망차게 달렸다.
지만, 예배가 끝나고도 커소번 아저씨는 당연히 노룩 패스였고,
윌은 도로시아와 인사는 고사하고 눈도 한번 맞추지 못했다.
묘지와 관목숲 사이의 쪽문으로 도로시아는 커소번과 함께 홀연히 사라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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