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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소설 덕후극 _미들 마치/13. 48장

고전소설 덕후극_미들마치_13_48장

by 북인더갭 2024. 3. 4.

도로시아의 마음도 편치 않았다. 윌과 인사도 제대로 못한 것도 그렇지만, 남편의 태도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예배당에 온 조카를 보고도 아무 말 없이 지나쳐버리다니. 남편의 매정함에 더욱 놀란 것이다. 도도는 이제 무력함마저 느꼈다.

 

그날 밤, 도로시아는 얼핏 잠에서 깼다. 둘러보니 난로 옆 두 자루 촛불 사이에 남편이 앉아 있다. 놀란 도도는 어디가 불편하냐고 묻는다. 남편은 그냥 잠에서 깼다고 대답한다. 한 시간가량 책을 읽다가 부부는 다시 잠자리에 든다.

 

잠들기 전에 부탁할 일이 있소.”

 

도로시아는 두렵다. 남편은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내게 무엇을 부탁하려는 걸까.

 

연극 <미들마치 삼부작> 중 도로시아와 커소본, The Orange Tree Theatre, 리치몬드, 영국, 2013년

 

내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일은 피하고,

내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해줄 것인가를 알고 싶소.”(809)

 

더 무거운 멍에를 짊어져야 하는 건가. 도로시아는 지금도 엄청난 멍에를 지고 있는데. 아버지뻘 되는 남편이라고 시키는 대로 하라, 고 어린 마누라한테 명령해도 되는 건가. 남편이 바람직하다고 선언하면 부인은 알아서 기어야 하는 건가. 남편이 정한 바람직함의 기준이 십계명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내용도 맥락도 모르는 명령 앞에 굽실거리라고? 커소번은 이제껏 무슨 지식을 쌓았다는 거지? 이 무례함은 뭐지?

 

싫소?”

(칼만 안 들었지, 강도가 따로 없군)

 

나는 내 판단에 따라 주기를 원해요, 싫소?”

(악질 가스라이팅이 확실함. 도로시아가 이 압박을 이겨낼 수 있을까)

 

순간, 도로시아가 남편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생각하며 묘한 연민을 느낀 건 사실이다. 연구의 목적은 이루지 못했다. 몸도 쇠약해졌다. 남편은 분노와 아집에 휩싸여 있다.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밑도 끝도 없이 자신의 말을 따르라고 몰아세우는 남편을 도로시아는 받아들일 수 없다. 거절해야 한다, 거절해야만 한다

 

내일까지 기다려 주세요.”

 

연극 <미들마치 삼부작> 중 도로시아, The Orange Tree Theatre, 리치몬드, 영국, 2013년

 

밤새, 생각은 멈추지 않았다. 자기불신에 빠져 부인까지 숨막히게 하는 남편을 위해 나는 어떤 대답을 해야 할까. 지금껏 쌓은 그 많은 지식과 그 거룩한(!?) 신앙심으로 왜 커소번은 자신의 삶부터 환하게 밝히지 못했을까. 이제껏 뭘 공부하고 뭘 믿었다는 소리인가. 남편은 나의 모든 걸, 그가 떠난 후까지 지배하고 통제하려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니, 그런 남편에게 나는 헌신을 다했다니, 심지어 내용도 맥락도 모르는 약속에 맹세까지 하라니?

 

도로시아는 뒤척였다. 눈물만 흘렀다. 누운 채 울면서 네 시간이 흘렀다. 날이 밝았다. 대답을 해야 하는 것이다. 잠 한숨 못 잔 창백한 아내의 안색 따위는 살피지도 않고 커소번은 서재에서 마주치자마자 묻는다.

 

관목림을 한바퀴 돌 참이오.()

어젯밤 이야기를 끝내고 싶은데,

대답을 들려줄 수 있겠소?”

 

조금 있다가 뒤따라가도 괜찮겠지요?”(814)

 

도로시아는 옷조차 걸칠 힘이 없다. 옆에서 옷을 입혀주던 하인이 마님의 안색이 이토록 안 좋으시긴 처음이에요, 기운을 내세요, 마님하고 말을 건넨다. 이 작은 위로에 도로시아의 마음은 터져버린다. 다시 무섭게 눈물이 솟구친다. 하녀의 팔에 기대어 도도는 비통하게 울부짖는다.

 

(텐트립이라는 하녀는 결혼 전부터 도로시아 곁을 지키던 하녀다, 신혼여행지 로마에도 같이 갔고 결혼 후 로윅으로도 같이 온, 도도가 신뢰하는 하인이다. 도로시아도 텐, 이라고 친근감 있게 하인을 부르는 장면이 소설에도 종종 나온다)

 

도로시아는 관목림으로 나가 대답을 해야 한다. 뭔지도 모를 맹세와 약속을 하라는 남편을 노엽게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이 혼돈과 불신의 순간을 피할 길은 없을까. 남편의 소망을 들어주고는 싶었지만 당장 아무것도 모른 채 그렇게 할 수는 도저히 없었다.

 

도로시아는 천천히 자갈길로 나섰다. 남편에게 다가가는 길이 이렇게 망설여지고 괴로울 수가 있을까. 모퉁이를 돌자 남편이 석조 테이블 벤치에 앉아 엎드려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남편은 요즘 들어 부쩍 이렇게 있는 편이 편하다고 하면서 엎드려 있곤 했다. 저기에 남편이 있다. 맹세와 약속을 강요하는 남편이, 나를 박제시키려는 남편이.

 

여보, 저 왔어요.”

 

남편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대답하겠어요.”

 

그러나, 남편은 절대 움직이지 않는다. 도도는 남편의 벨벳 모자를 집어 들며 외친다.

 

일어나세요, 여보. 대답하러 왔어요.”

 

, , 곧 갈 거예요, 약속할 준비가 되었어요, 몸은 이제 괜찮아요

 

도도는 열에 들떠 몇날 며칠 헛소리를 내뱉었다.

 

 다음 회 읽기 : https://bookinthegap.tistory.com/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