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답하러 왔다니까요, 자 어서 일어나세요, 여보!
도도는 머리맡에 있는 사람을 붙잡고 애원했다.
남편에게 말씀 좀 전해주세요, 제가 다 설명하겠어요…
그러나, 커소번은 영원히 움직이지 않았다, 영원히.
도로시아의 제부 제임스 체텀 경은 그 누구보다도 흥분한 상태다.
“처형은 이미 주위 사람의 부주의로 희생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번만큼은 제가 처형을 지키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할 겁니다.”(824쪽)
남편은 석조 테이블에 엎드린 채 죽었다.
남편이 사라진 자리에 나타난 친족 성인 남성 제임스 체텀 경.
패밀리로서 처형의 명예를 위해 애쓰겠다는 그의 마음은 알겠다.
그런데 이 남자 때문에 도로시아의 운신의 폭이 좁아질 수 있겠다는 불안이 격하게 몰려온다.
물론 선의로 시작하는 마음을 모르는 바 아니나,
체텀 경은 한발짝만 더 나가면 스무살에 과부(!)가 된 처형을 위한답시고
한참 어린 처형을 통제할 위험이 다분히 있다.
이전까진 훈남 이미지였는데, 요주의 인물로 변신하는 느낌이랄까.
“커소번 씨는 참으로 비열한 방법으로 처형의 명예를 손상시켰어요,
확실히 커소번 씨는 신사가 아니었습니다.”
마침 동생 실리아는 귀여운 아들을 낳았다.
만신창이가 된 몸과 마음을 추스를 겸 도도는
동생과 체텀 경이 있는 프레싯 저택에서 일주일가량 보냈다.
하지만 로윅의 주인으로서, 또한 고인이 남긴 유언장의 유언 집행자로서 도도는
자신의 인생을 직면해야할 순간을 더이상 피하고 싶지 않았다.
커소번은 죽은 것이다.
의심과 아집과 분노와 무기력이 그를 죽음의 정점으로 인도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산 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교회의 후임을 어느 신부에게 넘겨야 할지, 연구 결과물을 정리해서 출판도 해야 할 텐데,
그리고 혹시 남편은 나를 위해 짧은 편지라도 남기지 않았을까…
그 마지막 흔적을 꼭 찾아보고 싶은데…
“자, 너는 아직 이러한 일을 생각할 시기가 아니야.
가까운 시일 안에 기회를 봐서 하는 거야.”
“큰아버지, 저는 이미 완전히 좋아졌어요. 이젠 무언가 하고 싶어요.”(827쪽)
커소번은 죽은 것이다.
신열과 헛소리에 시달리던 도로시아는 동생네 집에서 몸과 마음을 회복했고,
대답할 기회는 영원히 사라졌고, 이제 남은 건 도로시아의 새 인생뿐인 것이다.
그런데도 왜 모두 나를 가두려고 하지?
왜 나더러 자꾸 쉬라고만 하지?
왜 나를 이리도 불쌍하게 바라보지?
내 저택과 관련된 일들을 주인인 내가 처리하겠다는데
왜 모두 나를 믿지 못하지?
“지금 내가 무얼 잘못 생각하고 있니, 실리아?”(829쪽)
동생 실리아는 언니를 더이상 속일 수가 없다.
“지금까지 이미 충분히 싫은 느낌을 맛보았으면서, 그것으로 모자라단 말이야?
하지만 형부는 언니가 그 정도까지 해야 할 분은 아니야.
그건 머지않아 잘 알게 될 거야.
그분, 너무 심하셨어. 제임스도 대단히 화를 내고 있어.”
“실리아, 너무 마음 졸이게 하지 마. 무슨 일이야?”
동생 실리아는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그분, 유언장에 보충서를 덧붙였어. 유산을 모두 언니 손에 넘기지 않도록 하신 거야.
만약 언니가 재혼하게 되면… 요컨대 그…”
도로시아는 가볍게 웃었다.
커소번의 재산 따위에는 1도 관심이 없었다.
대단한 일이 아니라고 응수하는 언니의 말을 동생 실리아는 가로막았다.
“그… 재혼 상대가 다른 사람이 아니고 윌 레이디슬로 씨라면 말이야.
(…) 그러면 유산은 언니에게 돌아가지 않아.
형부는 세상 사람들에게 언니가 레이디슬로 씨하고 결혼하고 싶다고 믿게 하고 싶었던 것 같잖아.
그런 어처구니없는 소리가 세상에 어딨어?”(830쪽)
도로시아의 가슴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러고는 ‘허물어지듯 의자에 주저앉았다.
도로시아의 세계는 발작적인 변화 한가운데 있었다.’
이 느낌은 ‘죽은 남편에 대한 극심한 혐오’가 분명했다.
남편이 내게 그랬다고? 나더러 그 말을 믿으라고?
(아, 이 후지고 사악하고 한심하고 비열한 쉨 같으니라고!
이 인간의 만행에 대해선 더 언급하지 않겠다, 완전 양아치다, 썅!)
한편 윌 레이디슬로도 삼촌의 죽음이 당황스럽다. 정말 갑작스런 죽음이었다.
그런데 더 당황스러운 건 돌변한 브룩 씨의 태도다.
이 노인네가 왜 이렇게 갑자기 거리를 두지?
선거를 치르기 위해 언제는 껌딱지처럼 내게 들러붙더니?…
윌은 의아할 뿐이다.
아저씨가 어떠한 유언장을 남겼는지 모르는 윌로서는
저택에 발도 못 들이게 하는 분위기가 다소 억울하다.
(제임스 체텀 경은 윌을 외국으로 내쫓으라고까지 항의했지만 브룩 씨는 집에만 못 오게 하는 중이다)
본격적으로 선거 유세에 나서야 하는 브룩 씨에게는
윌이 꼭 필요한 인물이었으니 내쫓을 수는 없었다.
결국, 커소번의 강요와 압박은 사라졌고,
도로시아에게는 불안해할 필요가 없는 인생이 펼쳐졌으며,
윌에게는 인생의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뼛 속까지 허접했던 진짜 빌런은 영원히 사라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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