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미들마치에선 경매가 일종의 축제였다.
(우리 문화로 치면 장날이라고나 할까^^)
대지주 중 한 사람인 라처 씨의 가구, 서적, 그림 등이 지역주민을 위한 경매에 나왔다.
“혹시 어머니 성함이 새러 던커크 씨죠?”
그런데 붐비는 경매장에서 누군가 윌 레이디슬로에게 말을 건다.
“네, 맞습니다. 그것이 어떻다는 겁니까?”
심사가 뒤숭숭한 윌이 바로 받아쳤다.
말을 건 사람은 다름 아닌 래플스. 빌런이 돌아온 것이다.
그러니까 15화에서 언급됐던 ‘새러’라는 이름은 윌 레이디슬로의 엄마 이름이었다.
“언짢게 생각지 말게. 자네 어머니가 생각났을 뿐이야…
처녀 시절의 어머니를 알고 있어서 말이야.
하지만 자네는 아버지를 닮았어.”(1033쪽)
너의 어머니 집안은 도둑 장사 집안이야, 전당포 사업이라 알려졌지만 사실은 최고급 장물 거래소를 운영했지, 그렇게 돈을 모은 집안이라고, 너의 어머니는 이 부정한 사실을 알아내고는 집을 나갔어, 사실 네 어머니는 무대에 서고 싶어 했어… 사람들 앞에 서길 원했다고…
떠들어대는 래플스를 뒤로 하고 자리를 떠나는 윌.
그래서, 뭐, 당신 따위가 뭔데 내 어머니를 들먹여!
그런데 문제의 빌런 래플스는 은행가 벌스트로드 저택까지 찾아간다.
당연히 놀라자빠질 지경인 그의 아내.
“불행하고 무절제한 녀석인데, 이전에 약간 돌봐준 적이 있어. 그렇지만 이제 당신이 성가실 일은 없을 거야. 필시 은행으로 올 테니까… 돈 아쉬운 소리를 하러 말이야.”(1038쪽)
일단, 식구들을 안심시키는 벌스트로드.
이 즈음, 벌스트로드의 흑역사를 잠시 살펴본 후 이야기를 이어가도록 하자.
한때 벌스트로드는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더 큰 부를 쌓아야 한다고 확신하는 '교회오빠' 부류였다.
신실한 척하지만 속물인 이상한 오빠 말이다.
그래서 그는 전당포 사업을 하는 유대인 집에 충성을 다했다.
개인의 신념이나 욕심을 위한 게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말이다!
(믿음이 쎈 건지, 얼굴이 두꺼운 건지…
탐욕스럽다고 스스로를 인정하면 좋겠는데 인간은 그게 안 된다.
하느님, 영광, 은혜, 축복 등을 남발하며 인간은 자기의 죄성을 숨긴다.
하나님의 영광을 나의 돈으로 증명해야 한다면,
나는 그런 하나님을 피하고 싶다. 피도 눈물도 없는 하나님이라니…)
그런데 옳지 못한 방법으로 돈을 모았다는 사실을 알아버린 전당포집 딸은 집을 나가버린다.
사실 그집 딸은 돈 같은 거에는 아예 관심도 없었다. 딸은 무대에 서고 싶었다.
이 부잣집에 불행이 밀려오기 시작하자 아들까지 죽었다. 이어 전당포 주인까지 세상을 떠난다.
남편과 아들이 죽어나가고 딸은 집을 나간 상황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부인은 엄청난 재산을 상속받았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 미망인 옆에는 충성을 다하는 벌스트로드가 있었다.
과부는 당연히 재산 관리를 그에게 맡겼다. 그뿐인가? 곧 그와 재혼까지 약속한다.
그런데 재혼의 절차를 치르기 전에 부인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딸을 찾아야 한다! 딸을 찾기 위해 안 해본 일이 없었지만, 딸의 행방은 묘연했다.
젊은 벌스트로드도 주인집 딸,
곧 자신의 의붓딸이자 장기적으로는 재산을 나눠야 할 경쟁자를 찾아 헤매는 척(!)했지만
결국 찾지 못한 척(!)했다.
“하지만 실은 딸을 찾기는 찾았다. 그러나 이를 안 사람은 벌스트로드와 또 한 사람의 사나이뿐이었다.
벌스트로드는 비밀을 지킨다는 조건으로 그 사내에게 돈을 주어 그 지방을 떠나게 했다.(…)
벌스트로드는 정작 딸이 발견되자 그 딸의 소재를 숨기고 말았던 것이다.”(1047쪽)
그 사내가 바로 래플스다.
벌스트로드랑 곳곳을 헤매며 주인집 딸을 찾던 시절 그의 조수였던 래플스.
무덤까지 비밀을 지키기로 약속했던 작자가 다시 돌아와 협박을 시작한 것이다.
늙은 과부와 결혼해 막대한 재산을 홀랑 다 상속받은 벌스트로드.
그 돈으로 은행까지 차려 지금까지 부를 누리는 벌스트로드.
하느님의 영광을 말로만 떠벌리던 벌스트로드는 이제야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은행가 벌스트로드는 다른 사람에게는 몰라도 새러의 아들 윌 레이디슬로에게는 용서를 빌고 싶었다.
아내와 아이들이 나들이 간 날, 벌스트로드는 저택으로 윌을 초대했다.
마침 경매 날, 윌에게 부탁했던 귀도 레니Guido Reni의 그림도
좋은 값으로 구해줬으니 고맙다 인사도 할 겸.
“아주 내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이런 일은, 당신은 아마 꿈에도 생각한 적이 없으시겠지만,
당신의 성장 내력과 제 경력을 서로 연결하는
중대하고도 깊은 관계가 과거에 있었습니다.”(1052쪽)
윌은 첫마디에 이미 충격을 받았다.
이어지는 벌스트로드의 과거사를 다 들은 후에도 윌은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그러니까, 윌의 할머니는 은행가 벌스트로드의 아내였던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벌스트로드의 첫 번째 아내,
즉 벌스트로드는 할머니의 두 번째 남편.
지금 내가 이 은행가를 할아버지라고 불러야 하나?
커소번 아저씨는 무덤으로 가면서까지 나를 모욕했는데,
두 번째 할아버지도 나를 모욕하려는 건가?
“당신한테 재산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해서 만약 당신의 할머니께서 따님의 행방을 찾아내셨더라면
지금은 당연히 당신의 것이 되어 있을 저금이 있으므로,
그 가운데서 적절히 드리고자 합니다.”
벌스트로드는 자신의 범죄를 쏙 빼고 이렇게 전했다.
양심적으로 보이리라 확신하며, 적당히 선량한 척하며, 자신에게 유리하게끔.
그러나 윌은 한걸음 앞서서 물었다.
돈이라면 신물이 났으니 말이다.
“저희 어머니가 살아 계셨던 사실을 당신이 몰랐을 것 같지는 않군요.”
벌스트로드의 손이 덜덜 떨렸다.
은혜를 베풀면 감동하리라 예상했는데,
도리어 이 새파랗게 젊은 것이 재판관인 듯 자신을 몰아세우는 상황은 정말 꿈에도 생각 못했다.
우월감도, 자부심도, 왜곡된 신앙심도 모두 무너지고 있었다.
그래도 벌스트로드는 마지막까지 은근히,
너네 어머니네 재산은 ‘도둑이나 죄인과 동일시되는’ 사업이었고,
내가 관계하기 전부터 기초가 잡힌 사업이었으며,
그러니 준다고 할 때 너는 닥치고 받아라… 하는 태도로 추하게 맞섰다.
“제 명예를 더럽히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저로서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
어머니도 그것을 느끼셨던 겁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한 그것을 피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저 역시 그렇게 할 작정입니다. 그 부정한 이익은 당신이나 가지고 계십시오.”
윌은 그렇게 말하고는 자리를 떠났다.
본인만 모르던 추한 소문을 확인한 이상, 윌도 런던으로 도망치듯 떠나고 싶지는 않았다.
도로시아를 한번은 꼭 만나야만 했다.
혼돈과 분노, 외로움, 격정 속에서도 윌은 도로시아 생각뿐이었다.
날이 밝았다.
브룩 씨의 집에서 하숙집으로 옮길 때 빠뜨렸던 스케치북 몇 권을 그대로 둘 수 없어서
윌은 브룩 씨의 팁턴 저택으로 무작정 향했다.
그 시각 도로시아 또한 팁턴에 와 있었다.
외국에 나간 큰아버지가 편지로 부탁한 일들을 처리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우연히 만난 두 사람.
윌은 유언보충서(=유언장 테러)에 대해 뭔가를 말하고 싶었다.
그 말을 하지 않고는 떠날 수가 없었다.
벌스트로드의 말도 안 되는 유혹 따위는 문제도 아니었다.
그의 인생에서 소중한 건 도로시아뿐이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저는 자신을 타락시키는 그런 짓은 하지 않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저는 어떤 구실을 만들어…
말하자면 무언가 다른 것을 구하는 척하면서
실은 돈이 목적이었다는 말을 들을 만한 짓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걸 설마 도도가 모르겠니)
“저마저도 당신을 야비한 분으로 생각한다 상상하신다면,
윌, 당신은 참으로 매정한 분이세요.”(1070쪽)
(이게 다 커소본 때문이야! 어떻게 죽으면서까지 사람에게 이런 모멸과 빡침을 선사할 수 있지?
어떻게 이렇게 사람을 웃음거리로 만들 수가 있지? 얼마나 사악하면 그럴 수 있지?)
“모레 미들마치를 떠날 겁니다.”
“저는 당신을 나쁘게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저를 잊지 말아 주세요.”
도로시아는 북받치는 오열을 참으면서 말했다.(10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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