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사이 머리가 많이 자랐다. 파마기가 얼마 남지 않은 꽁지머리를 대충 묶으니 (좋게 말해) 차라리 자연스럽다. 가끔 혼자 중얼거려 본다. 내 머리는 피터 히스토리아 스타일이라고. 남들이 물을 것이다. 뭐라구, 피터 뭐시기라고? 여름 동안 『피터 히스토리아』도 안 읽고 뭣들 하셨나? 여러분들, 얼렁얼렁 서두르셔야 겠다.
만화 캐릭터에 삐딱이 김실장이 빠졌다. 푸우에게 마음을 준 이후로 두번째다. 서로 취향의 차이야 있겠지만 귀염둥이 푸우를 누군들 좋아하지 않으리. 착하고 순한 아기짐승은 사랑스러움의 극치 아닌가. 마찬가지로, 보석과도 같은 눈빛으로 역사 속에서 고뇌하며 행동하는 한 소년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으리. 피터가 발을 디뎠던 도시들과 그가 만났던 사람들, 그리고 그들과 나눈 대화가 머리에서 떠나질 않는다. 외우지 않아도 되는데 자꾸 외우게 되는 아이러니. ‘학습만화의 진보 선언’이라고 어느 광고에다 카피를 달았던데, 과장은 아닌 듯싶다. 저절로 외워지는 만화. 오예~~ 암기식이 아니니 한걸음 나간 진보(進步)의 의미로서는 정확한 표현이다. 발빠른 학부모들이 좋아라 달려들지 않을까.ㅋㅋ...
피터는 역사의 지류를 타고 떠내려온 소년일지 모른다. 그를 우연히라도 만나기 위해선 어둔 골목이나 허름한 오두막, 산속 깊은 동굴, 포성이 그치지 않는 땅으로 향해야 한다. 거기서라도 만나면 다행.
하지만 한번도 앞장선 적 없고, 험난했던 길을 누군가 닦아놓으면 뒤에서 졸졸 따라가기만 했으며, 한번도 역사의 짐을 함께 져본 적 없는 삐딱이 김실장은 피터를 만나도 입도 뻥끗 못할 형편이다. 왜냐하면 쪽팔리니까. 늘 편승을 일삼으며 편하게 여기까지 와서는 ‘기엑실땅’(?) 이랍시고 잘 먹고 잘 사니까.
크레이어 마님, 그 마님이 유독 내 마음에 남는다. 아니 내 마음을 찌릿찌릿 울린다. ‘난 돌아가지 않아요. 당신에게 돌아갈 바엔 차라리 자유인을 위한 낭떠러지로 나도 향하겠어요.’(2권 264쪽) 마님은 눈부신 드레스와, 황금의 장신구, 으리으리한 저택을 버렸다. 그리고 자신을 노예 취급하는 남편이란 작자 곁을 용감하게 떠났다. 제발 크레이어 마님이 술주정뱅이에다 돌파리 철학자인 밥통 같은 남편에게 다신 돌아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크레이어 마님의 용감한 첫발에 뜨거운 박수를! 짝짝짝~
크레이어 마님이 환생한 듯한 주근깨박이 소녀 메어리, 우와~ 포스가 장난이 아닌 소녀야, 너같은 딸이 내 곁에 있다면 무얼 더 바라겠니! 너에겐 버르장머리도 없고 겁대가리는 더 없지만(!!) 공평하지 못한 세상을 향한 분노와 용기가 있잖니. 메어리가 스미스 선생님에게 이렇게 내지르는 장면은 대박압권이 아닐 수 없다. ‘쓰레기 같은 당신 수업 따위는 이제 듣고 싶지 않아!’(2권 202쪽) 나도 흉내만 낸 쓰레기 같은 책들은 더 이상 읽고 싶지도 않다.
어른들이 문제다. 전쟁이나 일삼고 불평등과 차별을 당연시 여기며, 강자만이 살아남는 이상한 세상으로 만들어놓고선 잘난 척하는 꼴들이라니. 욕 얻어먹을 짓만 해놓고 아이들은 눈이 없나, 애들이 참다참다 한마디 대들면 말세가 왔다느니 니는 애미 애비도 없냐부터 시작해서, 너는 퇴학이다, 낙오자다 하며 얼마나 체제와 규율로 아이들을 감금시켰는지.
책을 돈주고 사서 읽으라 권하는 사람은 거의 부모라는 어른들이다. 이 책을 읽고 인문학의 헛바람에 아이의 정신이 나가버릴까 걱정되는 어른들은 이 책을 절대 사선 안된다. 사더라도 아이들이 읽지 못하도록 꼭꼭 숨기고 읽어야 한다. 혹시라도 마음이 약해져 자녀들에게 권해선 절대 안 된다. 그러면 우리의 아이들은 세상 돌아가는 부조리와 부당함에 눈을 뜨게 되고,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자신들의 벗은 몸을 부끄러워한 것처럼 이 아이들도 자신들의 몸과 마음과 영혼을 칭칭 동여맨 억압과 폭력의 사슬을 발견하게 될 것이며, 그제야 그들이 어른들을 향해 돌 던지며 달려올 땐 우리는 비겁하게 또 변명이나 해대며 뻔한 거짓말로 아이들을 협박할 것이다. 지옥이 따로 있을까.
이 책을 내가 삼십년 전에 봤다면 지금의 모습이 아니었을 거라구, 나름의 억지스런 변명이 없는 건 아니다. 그러나 변명이 많아지는 건 그만큼 늙어간다는 소리에다 꼰대의 길이 코앞이란 말씀이며,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살 거라는 탐욕스런 괴성일 뿐이다.
피터에게 세상의 거짓말을 가르쳐준 과학자 안드레아 아저씨가 남긴 한마디를 되새기지 않을 수 없다. ‘나도 어머니를 페스트로 읽었지만 페스트보다 더 무서운 병은 거짓을 진실이라고 믿고 살게 만드는 거야.’(1권 230쪽)
어른들아, 나를 포함한 동시대의 어른들아, 안드레아 정도는 돼야 어른이지 세상의 속임수를 따라가라고 부추기면 그게 어른인가. 이 아저씨처럼 페스트보다 무서운 병에 걸리지 않도록 경고해줘야 어른이지 노예의 낭떠러지로 얼라들을 몰아가면 그게 어른인가.
암튼, 한가위도 다가오는데, 빨리 머리를 어떻게 해야겠다. 미장원 가서 이렇게 말해볼까. ‘피터 히스토리아 스타일을 살려 쫌만 다듬어줘요. 곱슬거리지 않게 굵은 컬이 나오도록 빠마도 해주시고요...’ 이러다 삐딱이 김실장 피터 히스토리아 전도사가 되는 건 아닌지^^
모두에게 잊을 수 없는 감동의 책읽기 시간이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