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플스의 생명은 끈질겼다.
잠시 눈을 부치는가 싶더니 오후 6시 경부터 다시 죽을 것만 같다고
소리 소리를 질렀다. 한잔만, 한잔만!
벌스트로드는 알코올 중독자를 가정부에게 맡기고 객실로 내려왔다.
양초에 불을 붙였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진통제 대용인 아편 복용법은 설명했지만
어느 선에서 중지해야 한다는 것까지는 설명하지 않았다.
이런 걸 깜빡하다니.(정말 깜빡한 걸까?…)
벌스트로드는 촛대를 들고 벌떡 일어섰다.
그러나 그대로 가만히 서서 생각했다.
알려줄 필요가 있을까…
시간이 흘렀다. 하인이 주인 나리를 찾으며 다급하게 달려왔다.
환자가 죽을 것 같다고, 헛소리가 심해진다고, 술만 찾는다고.
“술 저장실 열쇠야. 거기 브랜디가 잔뜩 있어.”(1201쪽)
불쌍한 래플스.
래플스는 자신이 두려워하던 대로 갈라진 땅 밑으로 그렇게 사라졌다.
의사 리드게이트가 밤 10시 반에 도착했다.
그런데 상황을 보고는 ‘오히려 자기의 오진을 인정한 표정’을 지었다.
리드게이트 집에 압류가 행해진다는 소문은 미들마치에 이미 퍼지지 않았나.
그런데 리드게이트는 은행가가 사인해준 수표로 일단 압류를 막지 않았나.
도움을 받았으면 도움을 줄줄도 알아야 하는 법.
래플스는 죽은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벌스트로드가 래플스를 죽게 방치했고,
의사 리드게이트는 그걸 못 본 척한 것이다.
범죄의 냄새가 난다.
소설 초반만 해도 그저 돈 많은 은행가로만 알았던 벌스트로드가 범죄자로 타락했다.
은행가한테서 뭔가 구린 과거가 나올 것 같긴 했다.
자신의 치부를 숨기고 싶으니까 자꾸 ‘하느님’을 들먹거렸던 게다.
계산적인 성도님은 자신이 믿는 ‘하느님’도 계산적인 존재로 타락시켰다.
래플스가 죽은 지 닷새 후.
조지 엘리엇은 문제의 말장수 뱀브리지를 다시 등장시킨다.
(06화에서 프레드 빈시에게 엉터리 말을 팔았던 인물임)
이 인물은 최근 다른 지역에서 만난 사내에게 들은 비하인드 스토리를
‘그린 드래건’ 안뜰 입구에서 전파하는 중이다.
말장수는 아주 신이 났다.
“은행가 벌스트로드의 신상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요.
저 사나이가 어떻게 해서 재산을 모았는지 알고 계신가요?
희한한 이야기를 듣고 싶은 분한테는 공짜로 들려드리겠습니다.”
어디에나 집요한 사람은 있는 법.
이 소문의 진상을 밝히겠노라 결심한 몇몇 사람들은 증거를 모으기 시작했다.
페어브라더 신부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뭔가 구린 걸 충분히 예감했다.
“래플스를 두려워할 이유가 벌스트로드에게 있었다면,
그 공포는 그가 절친한 사이인 의사에게
인심 좋게 큰돈을 빌려준 사실과 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혹이
페어브라더 씨의 마음에 번쩍 떠오른 것이다.”(1215쪽)
벌스트로드와 리드게이트의 추문은 안주거리로 미들마치를 점령했다.
사람들은 떠도는 소문을 바탕으로 두 남자의 범죄를 이렇게 정리했다.
먼저, 은행가 벌스트로드는 자신의 죄를 알고 있는 래플스를 죽이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직접 죽일 수는 없지 않나.
→ 마침 의사 리드게이트는 돈에 쪼들린 상태다
→ 래플스는 술만 계속 먹이면 죽을 게 뻔한 상태 아닌가
→ 집이 넘어갈 지경인 의사에게는 돈을 꿔주면 된다
→ 입막음은 확실해지는 거지
→ 뇌물을 받은 주제에 래플스가 죽은 이유를 어찌 속속들이 캐내겠는가!
→ 당연히 의사는 벌스트로드를 쉴드쳐 주겠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런던에서는 콜레라가 횡행했다.
그런데 콜레라 환자가 미들마치에도 나타났다.
전염병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평의원회가 신속하게 구성되었다.
휘그당 토리당 구분 없이 소독이며 위생, 공동묘지 등등에 대해
유력자들은 논의를 시작했다. 그런데!
“당신에 대한 추문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든지,
그렇게 할 수 없다면 당신의 직무에서 물러나 주시오.
아무튼 우리네 신사 일동은 당신이 동료로서 함께하는 것을 거절합니다.”(1232쪽)
회의 중 안건도 아닌 문제를 어느 신사가 벌스트로드를 향해 발언한 것이다.
그 순간 같은 자리에 있던 의사 리드게이트도 깨달았다.
내가 받은 천 파운드는 뇌물이 확실했구나,
래플스의 사망원인에는 벌스트로드의 사악한 동기가 숨어 있었구나…
나도 공범이 되었구나.
한편,
이 혼돈의 정점에서 조지 엘리엇은 주인공 도로시아에게 갑자기 집중한다.
요크셔 지방에서 볼일을 마치고 미들마치로 돌아온 도도.
동네가 완전 난리가 났다.
신뢰했던 의사 리드게이트가 처한 상황을 전해 듣자마자
도로시아는 그를 돕고만 싶다.
“그분은 죄를 범하지 않았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러나 큰아버지도, 페어브라더 신부도, 제부인 체텀 경도
모두 도로시아를 말렸다. 특히 체텀 경이 난리였다.
체텀은 ‘그녀가 커소번 씨와 결혼했을 때와 같은 망상에
또 사로잡히지나 않을까 하여 끊임없이 경계하고 있었다.’(1241쪽)
“당치 않습니다. 여성은 신중해야 하며,
자기보다 세상일에 밝은 사람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도도 언니, 제임스가 말하는 대로 해.(…)
지금은 언니를 대신해서 제임스가 생각해 주잖아.
얼마나 고마운 일이야.”
동생 실리아까지 남편을 편들며 언니 도로시아를 꼼짝 못하게 한다.
생각을 대신해준다고? 그런 걸 가스라이팅이라고 하는 거야!
세상일을 모두 꿰고 있는 너의 말을 들으라고?
어디서 얼어 죽을 훈장질에다 언어폭력이야!
체텀 이 사람, 슬슬 위험해진다 생각했는데, 역시.
“나는 내 감정을 사사건건 방해받고 싶지 않을 뿐이야.”(1244쪽)
도로시아의 두 뺨에 눈물이 흐른다.
언성을 높이거나, 물리적인 폭력이 있거나, 기물이 파손되지도 않았다.
그런데 도로시아가 느꼈을 압박감과 모욕감, 무기력함을
조지 엘리엇은 아프게도 형상화해주었다.
왜 도로시아가 응접실에서 혼자 울어야 했는지,
왜 젊은 과부는 의견도 내면 안 되는지,
왜 떳떳한 도로시아가
큰아버지와 제부라는 남성 친족과 신부님이라는 남성 성직자의 눈치를 보며
숨어서 울어야 하는지,
이 장면을 읽다 빡이 치다 못해 나까지 슬퍼진다.
내 생각에도, 무례한 당신들의 폭력적인 생각이 하나도 안 고맙다!
다음 회 읽기 : https://bookinthegap.tistory.com/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