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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소설 덕후극 _미들 마치/21. 73장-76 장

고전소설 덕후극_미들마치_21_73-76장

by 북인더갭 2024. 4. 4.

벌스트로드는 회합 석상에서 받은 치명적인 공격으로 쓰러졌다.

그를 부축해서 회의 장소를 빠져나온 리드게이트도 확실한 공범으로 낙인 찍혔다.

쓰러진 사람을 치료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리드게이트의 발걸음은 천근만근이다.

결혼도, 의사로서의 긍지도, 인간으로서의 명예도 모두 끝났다.

로저먼드가 모든 걸 알게 된다면

 

미들마치의 부인들에겐 그 어느 때보다 할 이야기가 많아졌다.

그런 남자와 같이 살다니, 저라면 독살당하지나 않을까 해서

천 파운드를 받은 데는 다 이유가 있죠로저먼드도 한번 혼이 날 필요가 있어요

 

그래도 고모인 벌스트로드 부인이 조금 더 용감했던 걸까.

부인은 긴가민가하면서 오빠인 빈시 씨네 공장 창고로 마차를 향하게 한다.

 

오빠를 만나보자, 오빠는 다 알고 있겠지, 돌려 말하지 않겠지.

 

불쌍한 해리엇, 모든 걸 알고 있지?”(1265)

 

벌스트로드 부인은 집으로 돌아와 방에 틀어박혔다.

나는 거짓 세월을 산걸까.

지금까지의 긍지와 자부심, 안정과 풍요, 기쁨과 사랑은 다 어리석은 허상이었나.

갑작스런 이 굴욕과 불행이 정말 내 것이란 말인가

 

그러나 괴로워하던 해리엇 벌스트로드 부인은 남편을 위해 일어났다.

아내는 며칠 사이 쪼그라든 듯한 초라한 남편을 바라보았다.

부인은 엄숙하게, 하지만 다정하게 먼저 입을 열었다.

 

여보, 얼굴 좀 들어 보세요.”

 

(, 이 한마디가 왜케 내 맘에 와닿는지

용서와 긍휼이 느껴지는 이 한마디.

남편의 그늘 아래 안락하게 살던 살롱가의 해리엇이

대화로 이 역경을 풀어가겠다는 의지를 보이는 순간,

더 이상 평범한 부인이 아닌 뿌리 깊은 거목처럼 느껴지네)

 

두 사람은 함께 울었다.

남편은 말 없는 가운데 고백했고,

아내는 말 없는 가운데 변치 않을 것을 약속했다.’

그러나, 중상모략이죠? 근거도 없는 헛소문이죠? 라고 물을 수 없었다.

그렇게 물었더라도 남편 역시 나는 결백해, 라고 결코 답할 수 없었다.

 

미들마치 BBC 미니시리즈-은행가 벌스트로드 & 해리엇 벌스트로드

 

이제는 로저먼드 차례였다.

빚도 갚았으니 채권자들은 사라졌다.

남편과의 다툼은 수그러들었지만 피차 더이상 다정한 부부는 아니었다.

단조롭고 무료한 나날 가운데 윌 레이디슬로가 보내주는 편지가 기쁨이라면 기쁨이었다.

윌은 새로이 관심을 가진 식민지 건설에 관한 일로

미들마치에 곧 들를 것 같다고 소식을 전해왔다.

 

윌이 방문하기 전까지 무료함도 달랠 겸

로저먼드는 몇몇 사람들을 집으로 초대하려고 초대장을 보냈다.

사람들 속에서 과시하고 돋보이고 떠벌려야 직성이 풀리는 로저먼드니까.

그런데 어라?

하나같이 거절의 답장을 보내왔다.

 

당신은 도대체 어째서 내 허락도 없이 초대장을 보냈소?”(1276)

 

로저먼드는 으르렁거리는 남편을 보며 또 시작이군, 하며 넘겨버렸다.

이번에는 친정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런데 또 어라?

딸을 맞이하는 부모님의 얼굴에도 수심이 가득했다.

 

아빠, 무슨 일이 있어요?

 

빚만 하더라도 꼴이 아닌데, 이건 더 좋지 못한 일이 될 것 같구나.”(1277)

 

집으로 돌아온 로저먼드는 남편과 자신 사이에 짙게 낀 안개를 생각했다.

왜 먼저 말해주지 않았을까.

자신이 떳떳하다면 입막음 용으로 받은 돈이 결코 아니라고

왜 말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리드게이트는 아내가 먼저 말해주기를 기다렸다.

당신을 믿는다고, 마음을 모아서 위기를 견뎌내자고,

부인이 먼저 자기편을 들어주기를 기다렸다.

 

로저먼드는 윌 레이디슬로의 방문을 기다리면서,

리드게이트는 절망과 비참함을 견디면서,

그러니까, 상대가 먼저 다가오지 않는다고 서로가 서로를 비난하면서

이들 부부는 시간을 흘려보냈다.

 

로저먼드와 리드게이트는

너무 식상한 여자(얼굴 예쁜 여자)와 너무 식상한 남자(능력 있고 야심찬 남자)의 전형이라

한계가 뚜렷이 보인다고나 할까.

둘 모두에게 인식의 깊이를 기대할 수 없으니 커플 자체가 매력이 없다고나 할까.

좀 불쌍해 보이기까지 한다고나 할까.

 

한편, 결심을 굳힌 도로시아는 리드게이트를 로윅으로 호출했다.

사회적인 감수성 면에서 나름 캐미가 맞는 두 사람은 마주앉아 허심탄회하게 대화했다.

오늘날로 치자면 말이 통하는 여사친&남사친 사이라고나 할까.

 

저는 처음부터 오해임이 틀림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명예를 더럽힐 만한 일을 하실 분이 아니신 걸요.”(1287)

 

마누라한테도 받지 못한 격려를 도로시아에게 받고는 리드게이트 감동했다.

 

제가 지시한 조처가 어째서 행해지지 않았는지는 저로서는 답할 방법이 없습니다.”

 

도로시아는 주체할 수 없는 재산을 공적公的으로,

즉 모두에게 유익을 끼치는 방편으로 사용하고 싶을 뿐이다.

요크셔의 땅을 사서 근로를 가르치는 마을을 세우고자 했던 야무진 꿈은

제부와 큰아버지의 충고를 듣고 단념한 상태다.

그러니 벌스트로드가 병원 경영에서 손을 떼도 도로시아의 재산만 잘 활용하면

신설 전염병 병원과 구병원을 합병해 경영해도 어려울 게 없었다.

 

저에게 무엇보다 기쁜 일은 무언가 좋은 일을 하는 데 돈을 쓰는 겁니다.

가능하다면 사람들의 생활을 높이고 싶어요.”(1293)

 

공적인 뜻을 확인한 두 사람은 사적인 결혼생활로까지 대화의 범위를 넓혀간다.

리드게이트는 결혼은 속박이기도 하지만,

아내가 자기하고 결혼해서 그녀의 삶이 불행해졌다고

아내는 자기만 믿고 결혼을 했는데

누구에게도 드러내지 않았던 속내를 도로시아 앞에서 쏟아낸다.

 

우리는 이 일에 대해서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내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저는 잘 모릅니다. ()

제가 나빴던 겁니다. 좀더 숨김없이 이야기를 나누었어야 했습니다.”

 

부인을 만나러 댁에 들러도 괜찮을까요?”

 

도로시아는 이튿날 로저먼드를 방문할 때 가져갈 편지를 쓰면서

그 안에 손수 사인한 천 파운드의 수표를 같이 넣어두었다.

리드게이트가 벌스트로드에게 진 빚으로부터 그를 해방시키는 게 급선무였으니까.

그래야 그는 미들마치를 떠나지 않고

지역주민에게 질 좋은 의료 서비스를 계속 제공할 테니까.

 

미들마치 빈티지 버전

 

리드게이트는 집으로 향하며 생각한다.

 

저분은 남자하고도 친구가 될 수 있다

 

그는 그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젊은 여자(그것도 아름다운 청상과부)

젊은 남자(그것도 잘생기고 똑똑한 유부남 의사)가 만나

성적 긴장감 없이 차분히 감정을 나누고,

공동체의 공공의료를 위해 계획을 세우고,

급박한 현안을 해결해가고자 머리를 함께 맞대는 이 장면이

19세기 사람들에게도 충격적(!)으로 신선했을 듯하다.

21세기에 읽어도 멋지다.

돈 있다고 다 가오가 있는 건 아니잖은가,

남녀가 만났다고 다 연애질만 하는 건 아니잖은가.

인간은 그렇게 식상한 존재가 아니지 않은가.

 

조지 엘리엇은 19세기에 이미 이러한 균형잡힌 젠더 감수성을 견지했구나!

, 월드클래스는 역시 다르구나!

 

 

다음 회 읽기 : https://bookinthegap.tistory.com/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