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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의 루소/책 소개

김조을해 소설집_에밀의 루소

by 북인더갭 2024. 5. 27.

에밀의 루소-김조을해, 북인더갭

 

 

2004파라PARA 21로 등단한 작가 김조을해의 두번째 소설집 에밀의 루소가 출간되었다.

 

표제작 에밀의 루소를 포함해 7편의 단편이 수록된 이번 소설집에서 작가는

폐기될 위기에 처한 로봇에서 이상한 숙제를 받아든 초등학생까지

다양한 캐릭터들을 창조해내면서

끊임없이 낙인을 찍어내는 세상과 그에 맞선 낙오자들의 유쾌한 반격을 그려내고 있다.

 

또한 비밀에 휩싸인 삶의 숨결을 내면의 목소리로 아름답게 엮어내는 한편,

폭력과 전쟁이 난무하는 세계 속에서 생명의 가치를 수호하는 신화적 여성주의를 시도하고 있다.

 

 

반격의 낙오자들과 사랑의 가능성

 

이 소설집은 크게 세 파트로 나눌 수 있다.

먼저 참신한 소재 속에 묵직한 주제를 담고 있는 한나의 숙제에밀의 루소가 맨 앞에 자리한다.

 

표제작 에밀의 루소는 구형 취급을 받는 교육로봇 루소와 그 친구이자 제자인 ’(일명 에밀)가 겪는 하루를

통통 튀는 대사와 줄거리로 이끌어간 SF 소설이다.

철학자 루소와 그의 저서 속 제자 에밀의 관계를 절묘하게 뒤틀어,

때로 티격태격 다투지만 서로의 생각과 행동을 학습하면서

성향이 비슷해진 로봇(루소)과 인간(-에밀)을 등장시킨 점이 흥미롭다.

수에게 어느날 갑작스런 방문객 체시메가 찾아와

생산노동(출산)에 참여해 지원금을 타내자는 제의를 하면서 이야기는 갈등에 빠진다.

코믹한 로봇 소설의 외양을 한 이 소설에서

아이를 낳지 않고 혼자 사는 여성 와 구형 로봇 루소는 사회에 기여하지 못하는 낙오자로 낙인찍힌다.

이런 낙인에 맞서는 루소와 수의 모습을 통해 소설은

진정 새로운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출시되는 신형에 잠식된 사회,

그리고 생명의 가치를 돌보는 대신 인구의 재생산에만 몰두하는 디스토피아를 비판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한나의 숙제는 낙인찍힌 존재들을 만들어내는 구조를

초등학생 한나가 겪는 힘겨운 일상에서 섬세하게 다듬어낸 작품이다.

어느날 수학 문제를 풀다가 참지 못하고 머리를 긁는 한나에게 담임선생님은

머리를 자르고 오라는 숙제를 내준다.

단지 머리가 가렵다는 이유로 머릿니가 있는 전염병 환자 취급을 받는 한나,

그리고 장애를 가졌다는 이유로 친구들에게 왕따를 당하는 친구 영우의 모습은

사회 전반에 만연해 있는 낙인찍기의 구조를 암시한다.

그러나 한나는 씩씩한 아이다.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숙제를 한나 스스로 해결해가는 뜻밖의 과정은

통쾌함을 넘어 코끝이 시큰해지는 감동을 준다.

 

 

첫 소설집 마시멜로 언덕부터 김조을해 작가가 붙들어온 주제 중 하나는 과연 사랑은 가능하며,

가능하다면 어떤 모습일까라는 질문이다.

이번 소설집의 두번째 파트를 이루는 세 작품 숭의동」 「불빛을 보며 걷는다」 「보름 동안의 사랑

모두 사랑의 가능성을 되묻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등단작을 평하면서 소설가 최윤이 언급했듯이

작가는 대단한 서사 없이도 잔잔한 사건들을 통해 한 인물의 내적 성숙의 과정을 담백하게 그려내는데 능숙하다.

 

 

숭의동은 초로에 병이 들고 만 엄마가 나이 마흔에 박사과정을 수료한 딸에게

자전거 타는 법을 가르쳐주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사범학교에 가고 싶었던 엄마는 가난한 동네 숭의동에서 조개장수를 할 수밖에 없었고

똑같이 가난한 남편을 만나 신산한 삶을 이어왔다.

주인공은 고난과 신산을 다 겪어내고도 여전히 엄마의 마음속에 반짝이는 무엇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깊은 전율에 휩싸인다.

 

 

불빛을 보며 걷는다역시 뚜렷한 서사가 아니라 나그네와 친구, 엄마와 동생들,

그리고 죽음을 앞둔 아버지에 대한 묘사로 이어진다.

그 묘사는 한번에 알아채기 힘들지만 듣는 이를 묘하게 설득시키는 힘을 발휘한다.

가령 불빛을 보며 걷는 이유에 대해 작가는

인생은 비밀투성이라고, 어떤 날은 불빛이 말해준다.

그것을 깨달은 사람들 눈에는 저 공기 끄트머리의 바람이 보인다.

한번이라도 이 기류를 느껴본 사람들 발걸음은 대부분 느리다.”고 묘사한다.

이처럼 작가는 비밀에 휩싸인 개인의 삶을 내면에서 반짝이는 불빛과 바람을 따라 거니는 듯한

아름다운 문장으로 한땀 한땀 엮어낸다.

 

 

보름 동안의 사랑은 사랑을 시작한 AB가 나누는 어설픈 몸짓, 간절한 대화,

내면의 소망을 세밀하게 관찰한 변화의 기록이다.

작가는 인물들의 사소한 습관이나 지나치듯 스쳐가는 대화,

심지어 숨소리 하나도 놓치지 않고 그 안에 숨어 있는 삶의 숨결을 드러내면서

사랑이란 자신들의 존재를 포기하지 않고 투명하게

서로에게 내보일 수 있는 용기라는 주제를 선명하게 빚어낸다.

 

<에밀의 루소> 앞표지

 

신화적 여성주의의 실험

 

이 소설집의 마지막 파트를 이루는 두 작품 옛 노래 4성년식옛 노래 2이교도

신화적 이야기 속에 여성주의적 세계관을 담아낸 매우 독특한 작품들이다.

 

 

옛 노래 4성년식은 성년식이라는 통과의례에 담긴 폭력적인 질서와

이에 맞서는 자연친화적이고 공동체적인 질서가 극명하게 대비된다는 점에서

신화적 여성주의의 성격을 강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주인공 미누옥은 성년식 축제에서 새용사가 되기 위해 자기가 키우던 새끼염소 루루를 죽인다.

하지만 이런 야만적 의례를 겪으면서 미누옥은 폭력과 전쟁이 난무하는 세계,

지나치게 가부장적인 남성적 세계를 끝내려면 무언가 큰 도전이 필요하다는 절실한 깨달음을 얻는다.

미누옥은 결국 큰용사 명산을 죽이고 성년식 제가를 벗어나

잠잠하고 고운 노래가 있는 세계로의 탈출을 감행한다.

소설의 마지막에 구출된 노예 아이와 미누옥이 함께 산맥을 넘는 장면에서

독자들은 도덕적 환희에 가까운 카타르시스를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 작품 옛 노래 2이교도는 재생산(출산)을 위해 총단으로 떠나게 된 주인공 슐라가

모든 강요를 뿌리치고 참된 종교의 자유를 향해 나아간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작품에서의 충격적인 결말은 인간의 욕망에 의해 제멋대로 신성시된 결과

오히려 인간을 억압하게 된 전능자가 아니라,

참된 생명을 주관하는 존재로서의 신의 신비를 암시하고 있다.

 

 

작가의 말에서 김조을해는 AI가 결코 하지 않을 미련한일에 도전하고 싶다고 밝혔다.

번거롭고 비효율적인 것을 마다하지 않는 작가의 사유와 유머, 통찰이

기술 시대에 더 외로워진 많은 이들에게 따듯한 위로를 전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