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신비』가 발표된 지 60년이 넘었지만, 그의 주장은 여전히 경청할 만하다. 특히 한국에서 살아가는 내게 안기는 의미는 결코 작지 않다. 다시 살아보라고 하면 프리단처럼 페미니스트 운동가로 살지는 못할 것 같다. 그러나 프리단의 충고처럼 당당한 주체로서의 자아의식을 가진 인간이자 여성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36쪽)
음악이 전달하려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면, 사람이 다양하듯 그 마음도 다채로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바에즈의 노래는 그 마음이 바에즈의 치열했던 삶과 어우러져 특별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여름밤을 웃고 또 웃는 바람의 자유는 21세기 오늘날에도 누구나 느낄 수 있는 초시간적 공감일 것이다. (46~47쪽)
여성의 관점에서 볼 때 어느 나라든 여성으로 살아가기는 고단한 일이다. 많은 경우 백래시는 마치 여성을 걱정하고 진정한 행복을 찾아주고 싶은 것처럼 말하지만, 그런 조언은 여성에게 현실과 맞지 않는 공포감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반격의 선동가들은 여성에게 가정으로 돌아가라고 주장하지만, 그런 전통적인 가정은 이미 소멸해가고 있다. (58쪽)
나혜석은 여성의 삶을 옥죈 장본인이 사회제도와 도덕, 법률과 인습이라고 선구적으로 경고했다. 그가 고난을 겪은 것은 참을 수 없는 것을 참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가정을 꾸리고 출산과 육아를 떠맡는 과정에서 당시 여성이 처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폭로했다. 자신이 불륜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변명하지도 않았다. 이혼 과정에서 자신이 처했던 상황을 사실 그대로 고백하고 알렸다. 우리 현대사에서 ‘상처받은 선각자’ 또는 ‘모성 신화 파괴자’라는 말이 나혜석만큼 어울리는 사람은 없었다. (102쪽)
인간과 사물이 모두 속한 세계는 평범하거나 일상적이라고 여겨지는 순간 놀라움을 잃는다. 놀라움을 잃은 세계는 눈에 띄지 않는다. 얼마나 많은 세계가 놀라움을 잃고 함부로 다루어지고 있는지. 시인의 눈에 띄어 놀라움을 회복할 때까지 바위는 그저 흙먼지를 둘러쓴 채 길가에 서 있고, 구름은 하늘에 흘러 여기저기 흩어질 뿐이고, 낮과 그에 따라오는 밤은 기억나지 않는 시간들로 채워진다. (149쪽)
외로움이 타인에 대한 적대감을 강화하는 사회에서 민주주의의 기반은 약화된다. 포퓰리즘은 바로 여기에 뿌리를 내린다. 21세기에 들어와 전 세계에서 사회·경제적으로 주변화되었다고 느끼는 사람들, 한때 지지했던 정당이 자신들에겐 관심을 두지 않는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극단주의 정당으로 몰려들고 있다. (187쪽)
선의란 착하고 올바른 마음을 말한다. 인간이란 본래 선한 존재라는 믿음만큼 중요한 건 없지 않을까. 작가 성기영의 『소록도의 마리안느와 마가렛』(위즈덤하우스 2017)에 나오는 마리아네 슈퇴거Marianne Stoeger 마르가리타 피사레크Margaritha Pissarek의 이야기를 읽어보면 인간의 선의는 분명 이 세상에 있다. (195쪽)
안나는 시대적 구속을 넘어서는 불가능한 꿈을 꿨다. 결국 안나가 행복을 위해 원했던 건 아내의 권리를 보장받는 이혼을 하고, 남편이 아들을 내주고, 브론스키와 결혼하는 것이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고 싶다는 소박한 꿈이었다. 그런데 당시 사회제도는 이 꿈을 허용하지 않았다. 안나는 불가능한 꿈을 향해 돌진하다 스스로를 파괴하고 만 비극적인 인물이었다. (236쪽)
티타는 열정에 자신의 삶 모두를 바쳤다. 그 열정에 이르는 과정은 자아의 독립으로 나아가는, 요리와 같은 일상과 함께 걸어가는 길이었다. 일상과 노동과 함께 가는 독립과 완성의 길. 이 길은 여성에게, 아니 우리 인간 모두에게 포기해서는 안될 도정道程이다. (292쪽)
김지영을 돕는 게 남편 정대현에게서 무언가를 뺏는 게 아니다. 김지영의 괴로움은 정대현의 괴로움이기도 하다. 아내가 괴로우면 남편도 괴롭고, 엄마가 괴로우면 아들도 괴롭고, 딸이 괴로우면 아버지도 괴롭다. (…) 남자도 당연히 이 팍팍한 세상을 살아가기가 힘들다. 남자와 여자 중 누가 더 억울한가를 따지기보다는 남녀 다 같이 잘 살 길을 찾아야 한다. (311~31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