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에서 본 것, 그리고 좌파 정치 집단에서 일하면서 목격한 것 때문에 나는 정치 혐오에 빠져들었다. 한동안 독립노동당의 일원이었지만 이번 전쟁이 발발하자 그 조직을 떠났다. 노동당은 말도 안 되는 소릴 할뿐더러 히틀러에게 유리할 뿐인 정책 전선을 펴고 있기 때문이다. 감정적으로 나는 완전히 ‘좌파’였으나 작가라면 정당의 딱지에 상관없이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 내 지론이다. (10쪽)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언어를 개혁하자는 제안이 다소 별스럽기도 하고 호사가의 일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 사이에,--적어도 서로 가깝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얼마나 큰 이해의 장벽이 있는지는 한번 고려해볼 만한 일이다. 새뮤얼 버틀러가 최근 지적했듯이, 최고의 예술은(그러니까 가장 완벽한 사고의 전달은)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에게로 ‘살아남아야 하는’ 것이다. (38쪽)
“소수의 손아귀에 집중된 부”라는 짧은 문구에서 예이츠는 파시즘의 핵심 실체를 낱낱이 드러내는데 이런 실체는 파시즘의 프로파간다가 숨기려 했던 전체에 해당한다. 그저 단순한 정치적 파시스트는 항상 정의를 위해 싸울 것을 주장한다. 시인 예이츠는 파시즘이 불의임을 단번에 알아보았고 바로 그런 이유로 파시즘을 칭송한다. (56쪽)
나는 어떤 현대 지식인도 민족주의적 충성과 이런저런 혐오에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고 면밀하게 들여다볼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것들에 끌릴 수 있지만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사태를 바라보는 것이 지식인으로서 합당할 것이다. 그러므로 반유대주의 연구의 출발점은 “왜 이런 명백히 비이성적인 믿음이 사람들을 매료시킬까?”가 아니라, “왜 반유대주의는 나를 매료시킬까? 내가 그것에서 진실로 느끼는 바는 무엇일까?”가 되어야 한다. (118쪽)
주제의 중요성을 강조한다는 면에서 좌파 문학비평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문학이 시급하고 중요한 프로파간다가 되어야 한다는 요구 역시 우리가 사는 시대를 감안할 때 잘못은 아니다. 좌파 문학비평의 잘못은 정치적 목적에 이용하기 위해 겉으로 문학적인 판단을 하는 척하는 것이다. 거친 예를 들자면, 톨스토이가 스탈린보다 더 나은 작가라고 감히 인정하는 공산주의자가 과연 있을까? (167쪽)
흔히들 시에서는 언어만이 중요하고 ‘의미’는 상관이 없다고 말하지만, 사실 모든 시는 산문적인 의미를 내포하며 좋은 시라면 절박하게 표현하고자 하는 의미가 있게 마련이다. 모든 예술은 어느 정도는 프로파간다(선동)다. 「프루프록」은 허무의 표현이지만 한편으론 뛰어난 활력과 힘의 시이기도 하며 마지막 연에서는 로켓과 같은 분출을 선보인다. (201쪽)
지배계급이 스스로를 속이지 않으면서 자신들의 추종자들을 속이는 상태를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이런 상태가 아직 실현되지 않았다고 감히 확신할 사람이 있을까? 라디오나 국가에 의해 조종되는 교육의 사악한 가능성을 생각만 해도 우리는 “진실은 위대하며 승리할 것”이라는 말이 격언이 아니라 기도에 가깝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다. (220쪽)
쥘리앵 그린은 세계와 맞서 싸우기에는 너무 큰 환상을 품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세상을 좋아하는 척하지 않는다. 지난 수년간 젊은 지식인들이 매달렸던 상투성이야말로 정확히 그런 위선을 드러낸 탓에, 이 일기의 기이한 진정성은 더 깊은 울림을 준다. 이 책이 지닌 무능의 매력은 아주 낡아서 오히려 신선한 분위기를 품고 있다. (24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