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외된 자들이 역사를 쓴다면
배려를 일깨우는 새로운 역사 교과서
안광복_중동고 철학교사, 한겨레 교육섹션 필진
갈릴레이는 지구는 돈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감옥에 갇혔단다. 그런데 그 감옥의 규모가 심상치 않다. 성베드로 성당과 교황청 정원이 바라보이는 방 다섯개짜리 집, 여기에 집사와 하인까지 딸려 있었다.
갈릴레이가 감옥에서 ‘고생(?)’하는 동안, 교회 관리들은 그에게 불리한 증거를 찾아 없앴다. 갈릴레이는 눈치가 빨랐다. 그래서 자신의 죄를 금방 깨달았다. 그는 자기주장을 거두었다. 그리고 자신이 전에 했던 주장을 혐오한다고 외쳐댔다. 물론, 종교재판소는 예외가 없었다. 갈릴레이에게도 ‘엄중한 형벌’이 주어졌다. 무려 3년 동안 매주 한 번씩 일곱 편의 시편을 외워야 했던 것이다.
그는 귀족이 쓰던 별장이나 자신의 농장이라는 ‘감옥’에 갇혔다. 시편 암송도 수녀였던 딸이 대신 해주었다. 갈릴레이가 받은 형벌은 처벌이라기보다 ‘보호’에 가까웠다. 왜 그랬을까? 이유는 간단했다. 권력자들이 그를 소중히 여겼기 때문이다. 그는 포탄의 궤적을 계산하는 기술을 갖고 있었다. 이처럼 실제 사실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내용과 다른 경우가 적지 않다. <피터 히스토리아>에서 소개된 이야기이다.
세상에 ‘상식’을 뒤집으려는 책들은 많다. <피터 히스토리아>도 이런 부류의 책이다. 그러나 이 책의 시도는 참신할뿐더러 충격적이다. 당연한 듯 잊혀졌던 ‘역사의 그림자’를 보게 하는 덕분이다.
예를 들어보자. 로마제국의 황제들은 개선문을 통과했다. 그들은 과연 ‘누구’를 정복했을까? 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성문이 일곱 개인 테베는 누가 세웠을까? 책에는 왕의 이름만 나와 있을 뿐이다. 과연 왕이 직접 돌을 날랐을까? 만리장성이 완성되던 날, 숱하게 많았을 미장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스페인의 무적함대가 무너졌을 때, 왕은 눈물을 흘렸단다. 왕만 피눈물을 흘렸을까? 나머지 사람들은?
책 끝에 실린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시(詩)의 내용이다. <피터 히스토리아>가 묻는 질문도 비슷하다. 역사책은 온통 남자들이 벌인 전쟁과 정복 이야기로 가득하다. 하지만 짓밟히고 희생당한 이들의 목소리는 어디에 있는가?
역사는 이긴 자들이 남긴 기록이다. 그래서 기록만 보면, 인류는 세월과 함께 끊임없이 발전해나간 듯싶다. 하지만 과연 그랬을까? 지금도 억압과 착취는 끊이지 않는다. 못살겠다는 아우성도 곳곳에서 이어진다. 우리의 화려한 옷과 음식에는, 못사는 나라 노동자들의 땀과 한숨이 담겨 있다. <피터 히스토리아>는 성공과 발전 뒤에 가려진 ‘숨겨진 역사’에 눈길을 돌린다. 그리고 우리의 미래 대해 깊은 물음을 던진다.
책의 구성 또한 아주 독특하다. 주인공의 이름은 ‘피터 히스토리아’이다. 이 소년은 원래 인류 문명이 시작된 메소포타미아에서 살았다. 그러다 바빌론이 쳐들어오자, 가족은 죽임을 당하고 소년은 노예로 끌려갔다.
소년은 원래 바빌론을 좋아했었다. 높은 탑과 풍부한 물자, 화려한 문화 등등. 그러나 노예 생활을 하며 소년은 문명의 어두움을 몸소 느낀다. ‘역사적 업적’ 뒤에는 숱한 이들의 희생이 녹아 있었다. 바빌론의 관리들은 외친다. 위대한 바빌론의 노예가 된 점을 자랑스럽게 여기라고. 역사의 일부를 이루는 일에 보람을 느끼라고 말이다.
그러나 왜 자부심을 느껴야 한단 말인가? 누군가를 착취하고 못살게 한다면, 화려한 문명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소년 피터는 이 물음에 대답을 찾기 전까지는 죽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그리고 바빌론에서 전성기의 그리스, 예수 시대의 예루살렘, 신대륙 개척기를 거쳐 프랑스혁명, 현대 이라크 전쟁까지 길고 긴 세월을 살아간다.
그 결과 피터가 얻은 결론은 무엇일까? 책이 막바지로 다다를수록, 독자의 마음을 먹먹해질지 모르겠다. 한마디로, 인류 역사는 나아진 게 없다. 예나 지금이나, 문명은 누군가를 억누르고 짓밟으며 굴러간다.
산업혁명 때는 아주 어린 아이들도 일을 했다. 그것도 하루에 12~14시간씩 중노동을 해야 했다. 매질과 학대는 당연한 듯 여겨졌다. 지금이라고 별다를까? 산업혁명은 여전히 진행중이다. 채석장에서 돌을 캐는 가난한 나라의 어린아이를 보라. 200여년 전 산업혁명 당시의 끔찍함은 세상 곳곳에서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프랑스혁명은 어땠는가? 세계의 인권선언을 외친 후, 과연 세상에는 억압과 착취가 사라졌던가? 프랑스에서조차 여성의 참정권은 1945년에야 주어졌다. 흑인들도 백인과 한자리에 앉지도 못할 만큼 모자란 인종으로 대접받았다. 과연 우리는 이들의 한스러움을 제대로 달래주었던가?
상처받은 이들의 안타까움을 역사책은 소홀히 다루곤 한다. 자유와 평등, 평화와 사랑의 미래를 가꾸어야 한다고 외치면서도, 정작 역사에서 보듬어야 할 대상에게는 소홀한 셈이다. <피터 히스토리아>는 이 점에서 무척 의미가 깊다. 인류의 역사를 훑은 피터에게, 그만큼 나이가 먹은 노인이 묻는다(사실, 그는 피터의 또다른 모습이다. 궁금하면 책을 읽어보라).
“수천년을 살았는데도 세상은 여전히 끔찍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게냐? (중략) 그래서 네가 뭘 할 수 있었느냐? 넌 그저 무기력한 방관자에 불과하지 않았느냐?”
문명은 원래 착취와 차별에서부터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이렇다면 인류에게는 희망이 없다. 올곧지 못한 세상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자기 것만 챙기는 삶이 현명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피터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소년은 노인에게 역사와 함께 하는 것이 자기의 책임이라고 잘라 말한다.
발버둥쳐도 아무 소용없는가? 그래도 인간은 역사 속에서 살아간다. 절망을 뚫고 일어서려는 인간의 의지가 역사를 만들어낸다. 우리가 역사에서 보아야 할 점은 화려한 문명과 업적이 아니다. 절망하고 짓밟히면서도, 자유와 평등을 꿈꾸며 끊임없이 나아가는 모습이다.
<피터 히스토리아>는 만화책이다. 그만큼 쉽고 빠르게 읽힌다. 반면, 책을 놓고 나서도 깊은 울림은 좀처럼 가시지 않는다. 한 편의 좋은 영화를 본 느낌이다. 반성과 성찰이 사라지는 시대, 우리 교육은 ‘역사적인 책무’보다 ‘개인의 행복’을 더 앞세운다. 그러나 정의로운 사회, 인류 전체의 행복은 이제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문제일까? 불행한 사회에서 개인의 행복이란 착각에 가깝다. <피터 히스토리아>는 이 점을 뼈저리게 느끼게 한다. <기획회의> 2011. 10. 5(30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