옮긴이의 말
스무살의 골방에서 세상으로
안병률
스무살 무렵 나는 골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그곳은 내가 다니던 대학의 캠퍼스 맨 위쪽
언덕에 자리잡은 낡은 건물 3층의 골방으로, 이른바 문학회의 동아리방이었다. 문을 닫고 골방에 앉아 있으면 딱딱하고 칙칙한 복도에서 학생들의 떠드는 소리며 발걸음 소리를 들을 수 있었는데, 복도에서 동아리방으로 다가오는 발소리만 듣고도 대충 누구인지 짐작할 정도로 나는 그 골방생활에 중독돼 있었다.
그런데 그중 좀 튀는 발걸음 소리가 하나 있었다. 그것은 뭐랄까 유독 또렷하게 또각또각거리는 구두소리였다. 그 소리는 우리를 긴장시켰다. 구두소리의 주인공이었던 선배가 무서워서가 아니라, 이제 막 입시를 뚫고나온 단순한 머리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철학적이고 문학적인 이야기들을 그 선배가 전해주곤 했기 때문이다.
내 기억이 맞다면, 「곰스크로 가는 기차」라는 소설 역시 그 구두소리와 함께 우리에게 던져진 과제였을 것이다. 이 소설이 언제부터 교내에 퍼지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독일어를 공부하던 선배가 번역한 것이 복사본으로 돌아다니다 우리에게 전달된 것만은 확실했다. 아무튼 이 소설의 여파는 잔잔하면서도 긴 것이었다. 우리는 머리통을 맞대고 제법 진지한 토론에 몰입했다. 곰스크는 과연 무엇일까? 개인의 이루지 못한 작은 꿈일까 아니면 좀더 원대한 이상일까? 현실 때문에 꿈을 포기한 주인공의 선택은 과연 옳은 것일까? 무엇보다 나 자신의 곰스크는 무엇일까, 나에게 곰스크가 있기나 한 것일까, 있다면 언제 어떻게 나는 그곳에 갈 수 있을까? 이런 질문들은 결국 뒤풀이자리까지 이어졌고 우리의 불안한 미래와 암울한 현실에 대한 모호한 탄식으로 마무리되곤 했다.
그 후로도 20여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곰스크의 여파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정말 위대한 시인 아니면 소설가가 될 줄 알았던 우리들은 하나같이 그럭저럭 먹고사는 샐러리맨이 되었다.
그러나 이따금씩 만나면 정말 거짓말처럼 또다시 곰스크를 이야기하고 우리의 못다 이룬 꿈과 그 대신 얻은 아내며 아이들에 대해 수다를 떨어대는 것이다. 우리의 처지가 곰스크의 주인공과 점점 비슷해지는 것을 확인하는 일이란 그다지 유쾌할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어느새 우리에겐 또다른 곰스크가 눈앞에 펼쳐졌고 결국 곰스크는 우리 앞에 놓인 미래를 상징하는 고유명사로 뿌리내렸다.
이렇듯 곰스크는 내 청춘을 가로지르는 커다란 문학적 사건이었다. 하지만 내가 이 소설을 번역하여 이렇게 출간하게 되리라고는 당시로서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물론 편집자로 생활해오면서, 이리저리 출간할 방법을 찾아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때마다 좌절되었고 또 이미 한 방송국에서 이 소설이 각색되어 드라마로 소개된 터라 굳이 나서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프리츠 오르트만의 또다른 소설 7편이 실린 소설집 『럼주차』(Tee mit Rum)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어렵게 그 소설집을 구해 읽으면서 「곰스크로 가는 기차」(이하 「곰스크」)를 비롯한 이 작가의 소설을 번역해 묶어내도 좋겠다는 희망을 품게 되었다.
무엇보다 나는 『럼주차』에 실린 7편의 소설에서 「곰스크」 하나만으로는 뭐라 규정하기 힘든 저자의 생각이 더 뚜렷이 드러난다는 느낌을 받았다. 「배는 북서쪽으로」는 서로 다른 목적지로 가는 사람들이 알 수 없는 이유로 한배에 탄다는 독특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씌어졌다. 더욱이 이들을 이끄는 여행가이드인 주인공조차 이 배의 목적지를 기억 속에서 상실함으로써 이 배는 마치 목적을 잃고 바다를 떠도는 유령선처럼 돼버리고 만다. 그러나 잘 읽어보면 이 유령선은 바로 우리가 사는 세계의 메타포임을 알 수 있다. 주인공은 마침내 이 배의 선장에게 찾아가 도대체 배가 어디로 가는 것인지를 묻는다. 그러나 선장이라고 해서 그것을 선뜻 가르쳐주지는 않는다. 선장은 다만 자신에게는 정해진 항로가 있고 그것을 따를 뿐이라고 대답한다. 그러자 주인공은 “그것은 하늘의 별도 마찬가지”며 “돈도 그렇다”면서 그럼에도 사람들은 진정한 목적지를 원한다고 외친다.
주인공의 말처럼, 별(자연)이나 돈(자본주의)은 자기의 정해진 길을 갈 뿐이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다 저마다의 진정성이 있고 목적이 있다. 세상이 아무리 돈을 향해 나아가더라도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이 세상이 강요하는 길을 따라갈 수는 없는 것이다. 아마도 저자는 목적 없이 떠도는 유령선이자 인간의 자유의지를 무시하고 파괴하며 질주하는 기관차 같은 이 세계와 그것에 맞서는 인간의 마음을 보여주고자 이런 작품들을 썼으리라. (중략)
역자 나름으로는 최대한 원본의 의미를 훼손하지 않으면서 우리말로도 잘 읽히게 번역하려 애썼지만 여러모로 역부족이었다. 이만큼이라도 잘 읽히는 우리말로 재탄생하는 데는 소설가 김조을해―내가 카프카보다 더 좋아하는―의 도움이 컸다. 또한 이십년 전 함께 골방에 머물며 인생과 문학을 이야기하던 ‘동지’들에게도 고마움을 전한다. 구두소리와 함께 이 작품을 소개해준 선배처럼, 나도 우리 아이에게 다가가 이 책을 전해줄 날이 있을 것이다. 그날이 몹시 기다려져, 지금은 설렐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