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의 예술을 항해 던지는 전언
김성호_서울여대 영문과 교수
이 책은 리하르트 바그너에 관한, 더 넓게 말해 음악에 관한 ‘전공서적’이 아니다. 이는 바디우의 논의가 소박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 정반대를 뜻한다. 사실 이전 시대에 아도르노가 그랬듯이 바디우의 음악학적 소양은 결코 만만치 않고, 특히 바그너 오페라에 대한 애착과 식견은 놀라울 정도다. 그러나 그에게 바그너라는 화두는 현대 예술과 문화, 그리고 철학의 중심문제들로 곧장 통하는 문이다. 「반지」 연작을 비롯해 수많은 바그너 오페라와 그 공연의 역사를 논하는 이 책에서 ‘총체화’ ‘라이트모티프’ ‘극화’ ‘지연되는 피날레’ 등의 음악사적·음악학적 쟁점은 한편으로 동일성과 차이, 부정변증법, 시간성, 주체, 기독교의 지양과 같은 철학적이거나 정신사적인 쟁점과, 다른 한편 독일 민족주의, 파시즘, 집단적 의식(儀式), 민주주의, 대중 같은 정치적 쟁점과 긴밀히 교차된다. “이처럼 ‘바그너의 경우’는 미학적·철학적인 경우이자 동시에 이데올로기적·정치적인 경우다.” ‘바그너의 경우’가 역사적으로 구성된 것인 한, 바디우가 바그너의 오페라 작품 못지않게 그것의 미학적·철학적·정치적 전유의 역사에 주목하는 것은 당연하다.
여기서 바디우는 서로 밀접하게 연관된 세 가지 기획을 동시에 펼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첫째는 바그너를 그에 대한 고전적인—미학적인, 그리고 정치적인—비판들로부터 구출하고 새로운 바그너 형상을 제안하는 것이다. 둘째는 음악과 철학의 관계를 사유하는 가운데 현대 예술과 철학의 근본적 문제들과 대결하는 것이다. 셋째는 앞의 작업들을 바탕으로 음악, 더 넓게는 예술 전반의 미래를 탐색하는 것이다.
바그너의 구출이라는 기획은 기존의 지배적인 바그너 형상을 해체하는 작업을 의미한다. 아도르노에 이어 프랑스 철학자 필립 라쿠라바르트로 대표되는 바그너 비판의 전통적 논리는 그의 예술을 총체화와 신화화의 정점이자 기술공학적 효과에 의존하는 대중예술의 시작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바그너에게는 총체적 예술작품(total artwork)을 창조하려는 야심이 있었고, 이는 오페라의 재현적 세계를 기원적 신화체계 및 신화적 규범에 종속시키려는 경향과 맞물려 있었다. 바그너의 오페라는 예술작품 내의 모든 변별적 요소들, 다시 말해 차이를 통일성에 종속시키고 불연속성을 연속성으로 덮어버리며 부정이나 지연을 궁극적 긍정과 “동일주의적 종결”로 해소하고자 하는 목적론적 지향을 함축했다. 음악에 통일성을 부여하는 일은 동시에 이데올로기적 작업이기도 했으니, 그것은 어떤 신화화된 독일 민족의 이념을 구축하는 데 봉사함으로써 바그너가 나치 지도자들에 의해 전유되는 길을 열었던 것이다. 다른 한편 바그너는 오페라에 음악적 기술 및 그 외의 기술을 총동원하여 예술을 가히 기술공학의 차원으로 이끌어갔으며, 이로써 오늘날 일반화된 기술공학적 대중예술의 창시자가 되었다고 이야기된다. 여기서 바그너와 대중예술의 연관 못지않게 흥미로운 것은 그의 예술이 지니는 ‘키치적’ 성격에 관한 논의다. 바디우 자신은 제국의 임박한 몰락에 발맞추어 “소란과 허무주의의 결합, 또는 소란한 허무주의”로서의 키치가 생산된다고 주장하면서 오늘날의 할리우드 영화에서 이 사실을 확인하는데, 바그너의 비판자들은 이미 이 ‘대중예술의 창시자’에서 진정한 역사적 내용을 결여한 채 기술공학적 효과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키치 예술을 발견했던 것이다.
여기서 보듯이 비판자로서든 옹호자로서든 ‘바그너의 경우’에 연루된다는 것은 현대 예술과 철학의 주요 문제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함을 의미한다. 바디우의 책에서 이 문제들은 여러 가지 대립쌍으로 변형되어 나타나는데, 이미 거론한 경우를 포함하여 몇가지를 열거해보면 다음과 같다. 총체화와 탈총체화(절제), 통일(단일성)과 분해(다수성), 동일성과 차이, 연속성과 불연속성, 닫혀 있음(폐쇄, 봉쇄)과 열려 있음(개방, 탈봉쇄), 긍정(변증법)과 부정, 형식(정형)과 비형식(비정형), 조성과 무조(無調), 구상과 성좌, 구원과 유기(또는 헛된 기다림), 수사(修辭)와 현존하는 고통, 정체성과 변신, 전통과 혁신, 순수예술과 불순한 예술. 이 쌍들이 음악과 철학의 교차지점에 있다는 사실, 즉 그것들이 예술적 가치의 문제를 구성하는 동시에 현대 철학의 가장 큰 관심사랄 수 있는 주체의 문제를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하기는 어렵지 않다. 또 하나의 사실도 곧바로 우리 시야에 들어오는데, 그것은 현대의 예술과 철학, 특히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불리는 제 경향은 전자를 비판하고 후자를 옹호하는 입장에 서 있다는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 볼 때 바그너는 두말할 필요 없이 총체화, 순수예술 등등의 관념을 대표한다. 문제는 바디우가 이런 식의 평가에 반대하면서도 바그너를 총체화가 아닌 탈총체화, 순수예술이 아닌 불순한 예술 편에 속한 음악가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며, 또 그 스스로가 단순히 후자의 관념들을 옹호하는 것도 아니라는 데 있다. 바그너에 대한 평가에서, 그리고 예술형식과 주체의 문제에서 바디우의 관점은 그보다 복잡하며, 바로 그 복잡성에 새삼스러운 바그너 옹호의 현재적 의의가 있다.
바디우가 ‘바그너의 경우’에 개입하여 궁극적으로 취하는 입장은 무엇인가? 우선 그는 기왕에 구축된 바그너의 형상이 터무니없는 것은 아님을 인정한다. “그런 바그너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전할 뜻은 없다.” 그러나 헤겔이 서구 형이상학의 정점이자 종결을 대표하듯이 바그너가 순수예술의 정점이자 오페라의 종결에 해당한다는 것은 총체적 예술작품에 관한 그의 선언, 즉 예술가의 의도에 기댄 관념일 뿐, 실제의 예술작품에서 검증되는 사실은 아니라고 바디우는 주장한다. 바그너에 대한 압도적인 비판과는 달리, 그리고 바그너 자신의 의도와는 별개로, 그의 오페라들(특히 「반지」 연작의 마지막 악극인 「신들의 황혼」과 「명가수」, 「파르지팔」 등)에는 피날레에서의 완전한 해결에 저항하는 표지들, 결말짓기의 어려움에 관계된 어떤 주저함, 그리하여 다수의 해석 가능성을 열어두는 경향이 과장된 종결의 제스처와 나란히 존재하며, 이는 대사보다 음악 자체를 통해 더욱 잘 드러난다는 것이다. 이 논의는 몇가지 다른 주장과 결부되어 있다. 바그너의 작품에서 실은 (수사로 환원되지 않는) 고통이 경험된다거나 새로운 시간성이 창조된다는 것도 그 주장의 일부지만, 더 주목할 만한 것은 바그너의 오페라에서 주체성이 그 이전까지의 오페라에서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구성된다는 주장이다. 모차르트의 경우를 포함하는 이전의 오페라에서 주체는 관습적 인물유형이거나 유형들의 조합이었다.
[그러나] 바그너에서 주체의 정체성은 다르게 기능하는데, 이는 주체가 그런 식의 인물유형들의 조합에서도, 심지어는 플롯에서조차도 자신의 정체성을 취하지 않고, 본질적으로 자기자신의 분열, 내적 분리에서 정체성을 취하기 때문이다. 이는 조합으로서의 주체적 정체성이라는 관념—내가 보기에는 사실상 바그너 직전까지의 오페라에서 여전히 통용되던 관념—을 근본적으로 뒤흔든다. 바그너에서 고통받는 주체는 변증법에 포괄될 수 없는 분열, 치유될 수 없는 분열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사실 어떤 진정한 해결의 가망도 없이 내적 이질성을 확립하는 주체 내의 분열이다.
내적 분열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지니는 주체란 간단히 ‘탈근대적 주체’로 정의될 수 없다. 바디우가 논하는 바그너의 작품에서 그것은 분열을 그 자체로 즐기는 주체가 아니라 해결을 탐색하는 주체이며 때로는 결단하는 주체이기 때문이다. 요는 궁극적 해결이 불가능하다는 점이며, 따라서 주체는 탐색과 변화의 과정 자체로 나타난다. 부정적으로 말해 바디우가 파악하는 바그너적 주체는 정주하는 주체도, 움직이기는 하되 최종 목적지에 정신적으로 결박된 주체도, 자의식적으로 다수의 정착지 사이를 떠도는 허무주의적 주체도 아니다. 바그너 오페라의 예술적 형식도 이에 조응한다. 바디우의 관점을 따르자면 바그너의 음악은 아도르노가 찬미하는 바의 ‘앵포르멜’(비정형) 음악, 즉 분열의 음악이 아니지만, 모든 부분을 남김없이 단일한 의미로 통일시키는 총체화의 화신도 아닌 것이다. 바디우는 “형식의 변형 자체가 절대적으로 무정형적일 수 있는가?”라는, 스스로 제기한 질문에 직설적으로 답하지는 않지만, 바그너의 경우를 통해 “열려 있음만을 지향”하는 음악 대신 “열려 있음과 닫혀 있음 사이의 독특한 상호작용”의 가능성을 옹호하는 듯싶다. 연속성과 불연속성, 전통과 혁신에 대해서도 근본적으로 동일한 말을 할 수 있다. “혁신은 새롭지 않은 어떤 것에 기초한 혁신이며, 예술이 재가해야만 하는 것, 그리고 예술의 힘을 창조하는 것은 바로 이런 변증법”이다. 나아가 “예술이 그런 힘을 지닐 수 있을 때, 예술이 역사를—절충적 종합을 통해서가 아니라 내재적 승인을 통해서—새로운 것 안에 편입시킬 수 있을 때, 오직 그때에만 예술은 하나의 민족이나 국민을 대표할 수 있다.” 이 마지막 인용문에는 정치적 맥락의 바그너 비판에 대한 바디우의 답변이 들어 있다. 이 대목에서 바디우는 「명가수」를 논하고 있는데, 그에 따르면 이 오페라는 독일 예술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그것은 독일 예술이 ‘독일의’ 예술이기 때문이 아니라 독일 예술 자체가 바로 독일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독일의 본질은 특정 정치체의 운명과는 단절된 독일 예술이다. 그러나 이 민족예술의 관념은 배타적·운명론적 민족주의와, 또는 ‘정치의 미학화’와 아무 상관이 없다. 독일 예술은 하나의 특수한 예술이지만, 어떤 특수한 동일성의 표현이라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전통과 혁신, 또는 열려 있음과 닫혀 있음의 변증법이 일어나는 역사적 장소라는 의미에서 그러하기 때문이다.
바디우가 제시하려는 새로운 바그너는 총체화와 순수예술 등의 반대항으로 이루어진 형상이라기보다 그 개념적 대립구조 자체를 넘어서 있는 형상일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중요한 것은 바그너 자체가 아닐지 모른다. 바디우의 궁극적 관심은 실재로서의 바그너보다 가능성으로서의 바그너, 그가 미래의 예술을 향해 던지는 소리 없는 전언에 있는 것이 아닐까.
내가 표명하는 입장은 우리가 순수예술의 부활 직전에 와 있다는 것이겠는데, 바로 이 지점에서 바그너가 호출되어야 한다. 내 가설은 순수예술이 다시 한번 우리 미래의 일부가 되었다는 것이다. 어떻게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나는 이것을 절대적으로 확신한다. 위대함은 더이상 우리 과거의 일부만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미래의 일부이기도 한 것이다. 두말할 필요 없이 그것은 예전과 똑같은 종류의 위대함은 아니다. 그러면 그것은 어떤 위대함인가?
그것은 확실히 순수예술이지만, 총체성에서 분리된 순수예술, 즉 총체성의 미학화로서의 순수예술이 아니라 오로지 총체성에서 분리되는 한에서의 순수예술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분명 새로운 유형의 위대함이다.
“총체성에서 분리된 순수예술”—이것이 바디우가 예견하는, 또는 희구하는 예술의 미래다. 또 그것이 바그너 오페라의 상반된 요소들 또는 지향들로부터 바디우가 구성해내고자 하는 새로운 가능성이다. 물론 여전히 모호하기는 하다. 라쿠라바르트처럼 예술작품의 총체성을 거부하되 그와는 대조적으로 순수예술을 살려내고자 하는 바디우의 이 시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바그너가 다만 그 그림자일 뿐이라면, 그런 순수예술의 실체를 어디서, 어떻게 분간할 것인가? 바디우의 “확신”은, 그가 그 근거에 관해서는 발을 빼지만, 어쨌거나 오늘날의 예술에 대한 직관에 기초하는가, 아니면 다만 바그너와 미래를 이어보겠다는 포부에 불과한가?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은 바디우로부터, 적어도 바디우로부터 충분히, 오지 않을 것이다. 답을 구해야 하는 곳은 끊임없는 실험이 이루어지는 예술적 실천과 비평의 현장이다. 철학자 바디우의 몫은 미래를 위해 하나의 의제를 던지는 것이며, 이 책에서 그는 이 몫을 충분히 감당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긴 발문을 쓴 지젝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지젝의 다른 책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그에게서 바디우의 논의에 대한 자상한 해설이나 제기되는 질문에 대한 답을 기대해선 안된다는 사실을 금방 알아차릴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발문’(Afterword)이라는 명칭은 그저 형식적인 것에 불과하다. 지젝이 실제로 ‘덧붙여놓은’ 것은 바디우의 바그너론에 관한 글이 아니라(물론 간간이 바디우가 언급되기는 한다) 자기 자신의 바그너론 및 모차르트론에다 이 논의들과 연관시킬 수 있는 온갖 주제—사랑과 섹스, 파스칼적 윤리, 자본주의적 요구로서의 경제외적 자선 등등—의 논의를 더한 어떤 것이다. 게다가 지젝의 바그너론이나 오페라에 관한 생각이 꼭 바디우와 일치하는 것도 아니다. (가령 지젝은 오페라에서 대사보다 음악이 진정한 의미를 전달한다는 통설을 반박한다.) 바디우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지젝의 글만 따로 읽어도 우리는 충분한 재미와 통찰을 얻을 수 있고,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을 (공저는 아니겠지만) 공편(共編)으로 부를 수도 있겠다. 자신의 글을 통해 바디우가 미래의 예술에 관한 의제를 제시한다면 지젝은 주체의 행위를 화두로 던진다. “참된 열려 있음은 결정 불가능성의 열려 있음이 아니라 사건의 여파 속에 살아가기, 결과를 이끌어내기의 열려 있음이다—무엇의 결과인가? 바로 사건이 열어 놓은 새로운 공간의 결과다. 셰로가 말하는 불안은 행위의 불안이다.” 이 불안을 견디는 것과 “총체성에서 분리된 순수예술” 또는 “새로운 유형의 위대함”에 헌신하는 것이 언제나 동일한 행위를 뜻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본질적으로 상통하는 지점이 있다고 나는 믿는다.
(하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