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가장 중요한 독일어 소설 1위!
현대 지성들은 카프카 대신 로베르트 무질을 선택했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조이스의 『율리시즈』와 함께 20세기 모더니즘의 3대 걸작 중 하나로 꼽히는 로베르트 무질의 소설 『특성 없는 남자』가 번역돼 나왔다. 이 소설은 세계 문명사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책이자 지난 한세기 가장 기억에 남는 책으로 꼽힌 현대의 고전임에도 유독 우리나라에서는 그 명성에 값하는 대우를 받지 못했다. 20세기의 가장 독특한 ‘사유 소설’로서 밀란 쿤데라와 존 쿠체 같은 현대작가들에게 지속적인 영향력을 끼친 『특성 없는 남자』가 이번 번역으로 한국 독자들에게도 뜻깊은 작품으로 다가서길 기대한다.
세계 문명사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책
지난 1999년 독일의 『차이트』(Die Zeit)지에는 놀라운 발표가 실렸다. 독일의 대표적 지성 99명에게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독일어 소설을 설문한 결과, 카프카의 『소송』(2위), 토마스 만의 『마의 산』(3위)을 제치고 로베르트 무질의 소설 『특성 없는 남자』가 1위를 차지한 것이다. 이 소설은 같은해 『르 몽드』(Le Monde)가 실시한 지난 세기 ‘가장 기억에 남는 책’ 100권에도 이름을 올렸으며, 2002년 노르웨이 북클럽이 전세계 100명의 작가에게 설문해 발표한 ‘세계 문명사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책’ 100권에도 포함됐다. 특히 2002년 설문은 인류 역사를 통틀어 가장 좋은 책을 뽑은 것으로 무질과 동시대인으로는 조이스, 프루스트, 로렌스, 톨스토이 같은 거장들만 그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이처럼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작품이지만 생전의 로베르트 무질은 그 명성을 거의 누려보지 못했다. 오히려 그의 인생은 안타까울 정도의 궁핍과 불운으로 점철되었다. 예민한 성격의 어머니와 불화를 겪으며 일찍 집을 나와 기숙학교를 전전했고, 역경을 딛고 『특성 없는 남자』를 집필해 1, 2권을 발표했지만 때마침 정권을 잡은 나치에 의해 판매가 금지되었다. 무질은 이 소설을 완성하기 위해 스위스로 이주하지만 질병과 생활고를 견디지 못하고 1942년 결국 미완성인 채로 제네바에서 숨을 거두었다.
소설은 사유가 될 수 없는가?
그렇다면 작가 생전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미완성 작품 『특성 없는 남자』가 왜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을까? 많은 전문가들은 이 소설만이 가진 ‘사유 소설’로서의 독특한 성격을 그 첫번째 이유로 꼽는다. 무질이 작품활동을 하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 빈(Wien)은 당시 유행하는 모든 사상의 집합소였다. 프로이트가 이 도시에서 활동했으며 언어철학자 비트겐슈타인, 무질의 스승이자 과학철학자인 에른스트 마흐, 클림트와 실레 같은 빈분리파 화가들, 쇤베르크를 필두로 한 음악가들까지 이 도시는 현대의 사상과 문화로 끓어오르는 용광로 같았고, 무질은 이런 사상의 흐름을 작품에 고스란히 투영시켰다. 무질의 소설에는 당대의 학문과 사상, 즉 심리학과 과학철학, 생철학을 비롯해 군국주의, 민족주의, 사회주의, 반유대주의에 대한 성찰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특히 주인공 울리히는 이 모든 사상들에 맞서는 ‘사유의 영웅’이라 할 만한데 이는 전시대의 주인공을 특징짓는 ‘행위의 영웅’에 비하면 매우 낯설고 독특한 캐릭터였다. 열렬한 무질 지지자인 밀란 쿤데라의 표현에 의하면 무질은 “소설가인 동시에 위대한 사상가”였으며 “어떤 철학이나 학문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소설을 쓴 작가였다.
중요한 것은 다양한 학문과 사상을 다루는 이 소설이 그저 박식함에 머문 것이 아니라 당대의 인물과 사회적 조건을 생생하게 그려냈다는 점에 있다. 사실 무질이 혐오해 마지않았던 것은 “학자의 연구실에서 떨어져나온 부스러기 같은 논문들”(2부 62장)이었다. 무질은 학문적 사고가 아니라 인간의 내적 삶에서 나온 ‘결정적 사유’를 자신의 소설적 무기로 삼았다. 또한 무질 스스로 ‘에세이즘’이라고 부른 자기만의 독창적 사유 속에는 이미 모더니즘 시대를 뛰어넘어 후기자본주의 시대의 사상가들에 필적하는 사상적 깊이가 담겨 있다. 가령, 모오스브루거라는 살인범을 그려내면서 법과 제도의 규율적 측면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장면은 푸코(M. Foucault)의 반(反)현대적 사유를, 또한 ‘현실 인간’에 대립되는 ‘가능성 인간’에의 추구, 그리고 ‘다른 도덕’을 향한 울리히의 실존적 모험에서는 들뢰즈(G. Deleuze)의 탈주하는 인간을 읽어낼 수 있다.
정신과 영혼의 신음
남아공 출신 노벨문학상 수상자이자 무질에 대한 평론을 쓴 바 있는 존 쿠체(John Coetzee)는 『특성 없는 남자』가 유럽 자유주의의 몰락을 파헤치면서 파시즘의 대두를 예견한 소설이라고 평했다. 다시 말해 이 작품은 그렇게 많은 사상과 문화에도 불구하고 왜 유럽이 야만 상태로 빠져들었는지를 말해준다는 것이다. 특히 무질은 이 소설에서 ‘평행운동’이라는 애국주의운동을 소재로 유럽의 정신과 영혼이 빠진 함정을 파헤친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황제 70주년을 기념해 주변국에 평화의 의지를 알리고 물질의 세계에 맞서 영혼을 구하자는 취지와는 달리, 소설 속 평행운동은 점점 지식인집단의 유령 같은 자기주장의 세계로 빠져든다. 디오티마가 주장하는 ‘위대한 오스트리아 문화’는 아무런 실제적인 대안이 없는 영혼회복운동이 돼버리며, 라인스도르프 백작의 민주적 군주국의 꿈은 관료세계의 서류더미에 묻혀버린다. 결국 남는 것은 자본과 문화를 결합하고자 하는 자유주의적 욕망과 이웃 프로이센을 향한 군사적 적대감이었으며, 운동 이면의 이러한 욕망들은 시간이 갈수록 전쟁을 향한 의지로 뒤바뀐다. 그러나 주인공 울리히에게 이 모든 영혼과 정신의 움직임은 그저 ‘불충분한 근거의 원리’에서 비롯되어 끊임없이 소비되는 ‘현대적 전율’에 불과하다. 울리히의 사유 가운데 무질은 현대세계의 ‘위대한 이상’이 역사의 진행 속에서 어떻게 전쟁과 파시즘 같은 야만상태로 빠져들어가는지를 냉철한 시각으로 관찰한다.
이번에 출간된 『특성 없는 남자』 1, 2권은 1930년 베를린 로볼트사에서 출간된 소설 1권의 83장까지를 번역한 1차분이다. 옮긴이는 1천여페이지에 이르는 생전의 출간분을 앞으로 순차적으로 출간할 계획이라며 “유럽의 짧은 자유주의 이후에 발생한 파시즘을 예견한 이 소설이 신자유주의 이후의 암울한 시대를 헤쳐나가는 우리 독자들에게 뜻깊은 작품으로 다가가길 바란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