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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성 없는 남자 1, 2/강연_특성 없는 남자의 자기소개서

특성 없는 남자의 자기소개서_강연

by 북인더갭 2013. 10. 31.

로베르트 무질 <특성 없는 남자>의 자기소개서

 

안병률

2013. 10. 8. <숨도> 책해부학 강연 

 

 

소설의 제목에서 시작해봅시다. 이 소설에서 <특성 없는 남자>의 주인공 울리히는 30대에 갓 접어든 젊은이죠. 그런데 사실 이 주인공에게 특성이 없는 걸까요? 읽어보신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특성이 없는 남자라고 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정말 특성이 많은 남자라고 생각했죠. 만약 울리히가 회사에 들어간다. 그래서 자기소개서를 쓴다고 생각해봅시다. 정말 쓸 게 하나도 없을까요? 아닙니다. 이 남자는 쓸 게 많습니다.

 

 

일단 사관학교를 나온 기병대 장교 출신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장교 출신은 채용 때 큰 이익을 받지요? 제 친구들도 ROTC 출신들은 취직이 잘된 편입니다. 아마 제가 울리히라면, 그걸 맨 위에 썼을 것 같고요. 그 다음은 엔지니어입니다. 장교 출신에다가 기술까지 가지고 있다면 정말 최고 아닙니까? 게다가 울리히는 수학까지 공부했네요. 그냥 기술자가 아니라 뭔가를 제대로 혁신할 줄 아는 기술자란 말입니다. 그는 복싱도 할 줄 압니다. 머리도 상당히 비상해서 아마 적성시험 같은 것도 잘 쳤을 것 같습니다. 이 정도면 삼성은 그냥 들어가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울리히의 최고의 라이벌인 발터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그는 늘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알고 있어. 그는 여자의 눈을 들여다볼 줄 알아. 모든 순간에 모든 것들을 제대로 숙고할 수 있지. 복싱도 할 줄 알고 말이야. 그는 재능있고 의지력도 있으며 편견도 없지. 용감하고 끈기도 있고 대담하며 신중하기도 해. 그가 그 모든 특성들을 소유했다는 것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아".(1권 115~6면)

 

[시계줄을 단 엔지니어]

결국 울리히는 특성 있는 남자군요. 그런데 왜 제목이 <특성 없는 남자>가 되었을까요? 그러니까 이 제목에서 <없다>는 말은 좀더 해석이 필요해 보입니다. 저는 그 없다가 무(無)가 아니라, 반(反)인 것 같습니다. 울리히는 특성 없는 남자가 아니라 특성이란 것이 싫은 남자, 그러니까 특성에 반대하고 저항하는 남자입니다. 그런데 왜 울리히는 특성에 저항하는 것일까요? 먹고살려면 특성에 저항해서는 안되는 것이 현대 사회 아닌가요? 자격증 하나, 그것도 없으면 면허증 하나라도 더 따두는 게 정말 중요한 사회잖아요. 그런데 여기서 특성이란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특기나 개성, 인간성 같은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럼 그가 그토록 혐오해마지 않는 특성이란 무엇일까요? 가령 여기서 한 대목을 읽고 넘어가고 싶습니다.

 

하지만 왜 엔지니어들이 이러한 예측에 꼭 맞는 삶을 살아가지 않는지를 말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예를 들어 왜 그들이 종종 조끼주머니의 바닥에서부터 한쪽으로 치우쳐 수직으로 이어진 채 그 위의 단추까지 걸쳐 있는 시계줄을 차고 있는지, 또한 왜 그것이 복부 위에서 마치 시를 읊는 듯한 하나의 상승과 두개의 하강 곡선을 그리게 놔두는 것인지, 왜 사슴 이빨이나 편자로 된 브로치를 넥타이에 꽂고 다니는 게 그들을 만족시켜주는지, 왜 그들의 옷은 마치 자동차의 앞좌석처럼 생겼는지, 그리고 왜 그들은 자신들의 직업 이외의 것은 거의 얘기도 하지 않고, 한다고 해도 깊이 들어가봐야 겨우 연골쯤에서 멈출 것 같은 자기들만의 어설프고 연관성도 없으며 피상적인 이야기만 해대는 것인지 하는 것들 말이다. 물론 모든 엔지니어들이 그렇진 않겠지만, 울리히가 근무했던 첫번째 회사의 사무실에서 알게 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랬으며, 두번째 사무실도 마찬가지였다. 제도판 위에 딱 붙어서, 그들은 자신이 직업을 사랑하고, 그 안에서 놀라운 덕목들을 소유하게 됐다는 식의 태도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기계가 아닌, 자신들의 생각이 지닌 대담함을 발휘해야 할 때면, 그들은 마치 망치로 사람을 죽여보라는 부당한 요구를 받은 것처럼 행동하곤 했다. (1권 64~65면)

 

 

이 대목에서 묘사된 엔지니어의 모습은 다음 사진 같지 않을까 짐작해봅니다. 참 고색창연하지요? 이 사람이 그냥 귀족이라면 별 문제가 없겠지만, 이 사람이 엔지니어라면 어떨까요? 실제 이 사진의 주인공은 무질의 아버지로, 그는 당시 전형적인 엔지니어였습니다. 저 복부 아래쪽에 슬며시 드리워진 시계줄이 바로 위에서 묘사된 그 시계줄이지요.  이 사람은 비록 엔지니어의 특성, 그러니까 아주 합리적이고 정확하며 과감하다는 특성을 가지고 있지만 이상하게도 그에게는 여전히 불합리한, 그러니까 과거에 집착하고 비이성적이며 겁이 많은 특성 역시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그의 직업이 정확성을 추구한다고 해서 인간까지 정확해진 것은 아니라는 것이죠. 가령 아주 고성능의 핸드폰이 있다고 했을 때, 유독 그 껍데기의 디자인만큼은 뭔가 동물의 가죽이나 날렵한 몸 같은 원시적인 느낌이 선호되지 않습니까? 그 고성능 핸드폰을 개발한 사람 입장에서는 단지 디자인 때문에 제품이 덜 팔린다면 속상할 일이지만, 그게 인간인 것을 어쩔 수가 없는 것이지요. 아마도 무질이 혐오한 특성이란 이렇듯 정확함을 지향하는 듯하지만 결국 반만 정확할 수밖에 없는 현대의 상황이 아니었을까요? 이것 말고도 다른 하나가 있습니다. 제가 이 소설에서 참 좋아하는 대목인데요.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76~77)

 

그러던 어느날 울리히는 그 희망을 포기하게 되었다. 그때는 이미 축구장이나 권투 링에서의 천재들이 이야기되기 시작했고, 단 하나의 하프 백이나 테니스 선수가 잘 보도되지도 않는 열명의 발명가나 테너, 작가들보다 더 나은 시절이 돼버렸다. 그 새로운 정신은 자기자신을 확실히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그때 울리히는 어디선가 ‘천재적인 경주마’라는 기사를 읽었는데, 그 말은 마치 익기도 전에 떨어져버린 과일 같다는 느낌을 주었다. 그 기사는 세인들의 주목을 끌었던 한 경주마에 관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기자는 세인들의 정신이 그에게 그 기사를 쓰도록 만든 영감의 거친 부분들에 대해선 완전히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울리히는 단번에 천재적인 경주마가 자신이 살아온 모든 삶과 어떤 연관을 맺고 있는지를 알아챘다. 왜냐하면 말은 기병대에서 신성시하는 동물이었고, 유년시절에만 해도 말과 여자 이야기 말고는 어떤 것도 들어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가 중요한 사람이 되기 위해 그 말을 떠나 여러 일에 매달린 후, 이제 자신의 노력이 어느 정점에 도달했음을 느꼈을 때, 그 말은 그를 앞질러 달려와 그에게 인사를 건네는 것이었다. (1권 76~77면)

 

[위대한 경주마]

울리히의 자기소개서에서 마지막으로 등장한 스펙이 바로 수학자였습니다. 울리히가 엔지니어를 때려치우고 수학자가 된 데에는 아주 중요한 이유가 있었죠. 수학자의 특징은 엔지니어처럼 그저 정확하기만 한 것인 아니라, 전복적인 힘을 소유했다는 점입니다. 잘 아시겠지만 수학은 그저 계산을 하는 학문이 아니잖아요. 수학에 있어서 진짜 중요한 힘은 부정이겠지요. 여기서는 늘 새로운 가정이 문제가 되니까요. 새로운 가정이 나오면 옛날의 증명은 다 헛것이 돼버리는 것이죠. 적어도 울리히한테는 이런 게 천재의 진정한 모습으로 생각됐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말 한마리가 나타나더니 수학자를 앞질러 달리게 된 것이죠. 정말 그렇지 않나요? 요즘 누가 수학자를 기억이나 하나요? 물론 수학자 때문에 폭탄이 제조되고 수많은 사람이 죽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수학자를 기억하지는 않잖아요? 반면 복싱선수나 경주마는 어떻습니까? 우샤인 볼트 같은 선수는 육상 천재로 기억되지요. 야구 천재 이종범이란 말이 저는 아직도 뇌리에 깊이 박혀 있거든요. 그러니까 현대는 전복적인 힘이나 열망 같은 게 스포츠 같은 현상으로 넘어간 것이나 다름없다는 생각. 이것이 바로 무질이 바라본 현대의 특성이 아닐까 짐작해봅니다.

 

[캠핑]

그래서 이 모든 걸 종합해볼 때 무질이 반대하고자 했던 특성은 여기 사진에서와 같은 모습이 아닐까 저는 생각해보았습니다. 정말 오해는 말아주시길 바랍니다. 여기도 캠핑 하시는 분들이 있겠지만 저는 캠핑 자체에 대해서 아무 불만이 없습니다. 저도 하고 싶고 그런데 다만 돈도 없고 워낙 게을러서 못할 뿐입니다. 아마도 캠핑을 즐기시는 분이나 그냥 저처럼 눈팅만 하시는 분이나 동의하는 게 한가지 있을 겁니다. 캠핑은 옛날의 유목민이나 사냥꾼들을 떠올리게 한다는 것이죠. 우선 야외에서의 거친 숙박이 그렇죠. 텐트가 꼭 필요합니다. 또하나 중요한 것은 고기를 구워먹는다는 점입니다. 이건 사냥한 짐승을 그 자리에서 요리해 먹는 것을 떠올리게 하죠. 그렇다면 겉으로는 아웃도어 스포츠에 불과하지만 캠핑의 이면에는 우리가 인간으로서 뭔가 더 본질적인 것을 체험하고 싶다는 욕구가 깔려 있지 않을까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닙니다. 선과 악을 떠나서 그 행위에는 뭔가 인간적인 경험에 대한 강한 욕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캠핑의 실상은 어떤가요? 우리가 먹는 고기는 우리가 사냥한 것인가요? 우리가 먹는 야채는 우리가 채집한 것인가요? 여기서 우리는 체험의 상실을 겪게 됩니다. 뭔가 더 인간적인 체험을 원했지만 그저 흉내만 내고 말았다는 허탈함이랄까요? 제가 좀 쉽게 설명하려고 든 예라 좀 그렇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바로 이런 것이 무질이 말한 <특성>이 아닐까 저는 생각합니다. 저한테는 이 구절이 아주 중요하게 느껴져서 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예전의 인간들은 오늘날보다 더 나은 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사람들은 들판의 짚더미 같았다. 아마도 그들은 신, 우박, 불, 페스트나 전쟁 때문에 오늘날보다 훨씬 더 심하게 동요되었겠지만 전체로서, 시(市)로서, 지역으로서, 들판과 아직 개인적인 것으로 남아 있는 각각의 집단으로서 그것들은 대답될 수 있었고 명확히 설명될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책임감의 무게중심은 사람들이 아니라 상황들에 넘어갔다. 만약 인간이 자신들의 경험이 인간과는 상관없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들은 극장으로 달려가거나, 책으로, 통계연구원의 보고서로, 탐사여행으로, 이데올로기나 종교집단으로, 그렇듯 마치 사회적인 실험이라도 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의 경험을 지불하는 대가로 독특한 방식의 체험들을 만들어내는 곳으로 달려가고 그 체험이 곧바로 실현되지 않는 한, 그것은 허공에 뜬 채로 남겨질 뿐이다. 오늘날 누가 과연 자신의 분노가 자신의 분노라고 말할 수 있을까? (1권 267면)

 

오늘날 누가 자신의 분노가 자신의 분노라고 말할 수 있을까? 바로 이것이지요. 우리의 분노는 혹시 헐리우드 영화의 분노가 아닐까, 어제 본 막장드라마의 분노가 아닐까, 또는 스릴러 소설에서의 분노가 아닐까. ‘우리의 체험은 이미 체험을 상실한 체험이다.’ 이것이 바로 특성 없는 남자에서 무질이 그토록 반대하고자 했던 우리 시대의 특성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진단해봅니다.

 

[살인의 추억]

그렇다면 무질은 엔지니어의 세계, 수학자의 세계로 대변되는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정확성의 세계를 그저 반대만 한 것일까요? 제가 보기에 이 작품을 오해하기 쉬운 지점이 바로 여기인 것 같습니다. 이 소설이 단순히 정확성에 대한 반대라고 한다면 그건 정말 정확하지 못한 낭만적인 판단일 수 있습니다. 오히려 무질이 안타까워한 것은 단순히 정확성이 나쁘다는 게 아니라, 정확성이 모자란다는 것이 아닐까요? 바로 이 소설에서 모오스브루거 살인사건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정확성’ 때문입니다.

 

모오스브루거는 한 어린 여자를 아주 끔찍하게 살해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의 정신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이죠. 그는 “다람쥐는 여우가 될 수도, 토끼나 고양이가 될 수도 있다”고 합니다. 또한 “14 더하기 14는 28에서 40쯤 된다”고 대답하죠. 상황이 이렇다보니 이 사건에는 여러가지 전문가들이 개입합니다. 일단 언론은 센세이셔널한 측면에 주목하죠. 몇군데를 어떻게 찔렀다는 상세한 묘사들, 또는 사건과 전혀 상관없는 범인의 이력들. 이건 요즘 언론에서도 흔한 설정이지요. 그런데 언론이 애써 외면하는 것은 살해자의 인간적인 면모들이죠. 아무래도 살인하고는 안 어울릴 것 같은 고결한 품격 같은 건 절대 기사로 쓸 수 없잖아요. 하지만 그 반대라면 어떤가요? 아주 추악하다든가 내국인이 아니라든가 아이들을 학대했다든가 동영상을 자주 봤다든가 이런 것은 낱낱이 기사거리가 됩니다. 이런 측면 때문에 언론은 늘 부족한 인식에 머물 수밖에 없다는 게 무질의 비판 아닐까 싶어요. 그리고 의학이 접근하죠. 하지만 이런 살인사건에서 의학은 주인공이 되지 못합니다. 이미 파워에서 법에 한참 밀리는 것이죠. 그저 법의 눈치나 살피다가 자신들의 연구거리나 챙겨가고는 잊어버리는 그런 상황입니다.

 

마지막으로 법이 나섭니다. 법에게는 아주 중요한 순간입니다. 살인의 정도, 범인의 상태 등을 파악해 아주 정확한 판결을 내려야 하는 것이죠. 그런데 이 판결의 정확성이란 게 영 믿음직스럽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누군가 반은 정상이고 반은 비정상이라고 한다면, 법은 그가 적어도 반은 도덕적일 것이므로 그의 행위는 도덕적 판단을 거쳐 나왔다고 판단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행위에 대한 법적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죠. 여기에 대해 무질은 재미있는 비유를 들고 있는데 한번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나 법학은 이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법학은 말하길 인간은 법을 지킬 수 있든지 아니면 그럴 수 없든지 둘 중의 하나다. 이 두 상태 이외의 제3의, 혹은 중간의 것은 법학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 능력에 따라 사람은 처벌받을 수 있고, 이렇게 처벌받을 수 있다는 가능성이 사람을 법적인 인간으로 만들며, 그런 법적인 인간으로서 사람은 법이 주는 초인간적인 자비를 누리는 것이다. 누구든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는 기병(騎兵)을 떠올려야 한다. 어떤 말이 올라타려 할 때마다 미쳐 날뛴다면 그 말에게는 가장 부드러운 붕대, 최고의 기수, 엄선된 사료, 절제된 조련 같은 아주 각별한 보살핌이 제공된다. 그러나 기병이 뭔가 죄를 지었다 치면 벼룩이 들끓는 우리에 처넣고 수갑을 채우며 먹을것도 주지 않는다. 이런 차이가 생기는 이유는 말은 단지 동물적인 체험의 세계에 머무는 반면, 기병은 논리적이고 도덕적인 세계에 속하기 때문이다. (2권 110면)

 

말이 미치면 각별한 보살핌을 받지만 기병이 그러면 감옥에 갇히고 맙니다. 이건 뭔가 말이 되지 않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법적 선이라는 것은 그저 상상의 정확성에 불과합니다. 실제로 정확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저 정확하다고 상상한다는 말일 것입니다. 우리 인류는 정확성을 추구해왔습니다. 거의 모든 분야에서 그러하죠. 하지만 완벽에 이르지는 못했습니다. 무질은 바로 이런 점을 지적합니다. 정확성이 나쁜 것이 아니지만, 늘 모자란 상태에 머물러왔다는 것이죠.

 

[알몸졸업식]

그렇다면 이렇듯 우리의 본질적인 체험을 빼앗기고, 그럼에도 여전히 부정확한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혹시 무질이 그런 문제에 어떤 단서라도 남겨두지 않았을까 하는 점을 결론삼아 이야기해보겠습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미완성으로 끝난 소설에 제가 어떤 결론을 제시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저 중간 결산 정도가 되더라도 한번 정리해보자면, 무질은 굉장히 과감한 작가였고 그래서 우리 인간이 뭔가 본질적이고 인간적인 체험들을 회복해야 한다는 아주 새로운 도덕적 입장을 가졌던 것이 아닌가 짐작해봅니다. 무질은 그것을 ‘다른 도덕’이라고도 했고, ‘가능성 감각’라고도 했으며, ‘에세이즘’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현재 우리의 문제 중 하나를 끄집어내자면 바로 여러분이 보고 계신 저 <알몸졸업식> 같은 것입니다. 우리 때는 졸업식 때 밀가루 정도를 뿌렸지요? 그런데 요즘 아이들은 교복을 찢고 그 위에 달걀을 던지고 겨자를 치고, 거기다가 밀가루를 뿌린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졸업식이 열리자 언론에서 아주 센세이셔널하게 보도를 했고(청소년 관련 보도는 거의 센세이셔널하지 않습니까? 저 한심한 놈들 언제 정신차리나. 이런 말이 나와야 직성이 풀리죠) 그것을 이어받아 국가에서 강력하게 개입했습니다. 그러니까 졸업식이 열리는 전 중고등학교에 순찰차와 경찰을 보낸 것이죠.

 

과연 알몸졸업식을 한 학생들이 이상한 걸까요 아니면 여기에 경찰을 보낸 국가가 이상한 걸까요? 저는 학생들의 알몸졸업식에 법적 선이라는 잣대를 들이대는 행위가 말이 미쳐 날뛰면 자상하게 보호해주면서 기병이 죄를 지으면 감옥에 가두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비이성적이고 폭력적인 나머지 거의 미친 것이나 다름없는 입시제도를 가진 나라에서 학생들이 극단적인 선택 대신 알몸졸업식을 했다는 것은 정말 이들이 뭔가 ‘다른 도덕’에 대한 창조적인 에너지를 잃지 않고 있다는 희망을 보여주지 않습니까? 저는 무질의 소설에서 이런 다른 체험을 향한 열망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를 비인간적인 것으로 만드는 무수한 기제들에도 불구하고, 그 기제들에 대항하여 어떤 체험을 갈망한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것 같습니다. 그것이 무슨 도덕적 모험이나 정신적 파탄을 겪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저렇게 알몸졸업식을 하는 아이들을 기성세대가 이해해주는 것, 그런 전복적 행위를 비난하지 않고 함께 고민해주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무질이 말하는 다른 도덕의 세계에 참여하는 것이 아닐까 저는 생각해봅니다. 나아가 우리 스스로 좀더 정확하고 인간적인 체험을 향한 영혼의 모험에 나설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지요. 지금까지 부족하고 두서없는 저의 말을 들어주신 분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