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청소년문화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수능이 끝나고 등촌동 영구임대아파트에 살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기억 가능한 시간의 대부분을 산동네에서 살다가 아파트에 들어갔으니 새롭다면 새로운 경험이었다.
대학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던 나는 수업을 빼먹고 아파트 근린공원에서 농구공을 튕기는 게 일상이었다. 그곳에서 두 친구를 알게 됐다. 한 친구는 일찌감치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중국집에서 배달을 하던 현광이, 다른 친구는 좋은 대학, 좋은 직장을 꿈꾸며 가난에서 벗어나겠다던 우현이라는 녀석이었다. 지금은 잘 살고들 있을지….
셋이 농구를 하면서 조금씩 친해졌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주로 현광이가 말을 했고 난 맞장구를 쳤으며 우현이는 잠자코 듣기만 하는 편이었다. 서울 여러 곳에 산재해 있던 빈민촌 출신 아이들이 어느 순간 한 지역에 살게 되면서 빚어지는 풍경은 흥미로웠다. 말 그대로 무주공산. 누가 최고의 총잡이인지 또 누가 보안관인지조차 결정되지 않은 초기의 서부 개척지 같은 모습이었다.
그때를 다시 생각해보면 현광이와 우현이는 내가 겪은 청소년 시기를 다시금 보게 한 친구들이자 일종의 이념형적 모델이었다. 1990년대 초・중반만 해도 교실에는 최소 두가지 회로가 작동했다. 날라리와 범생이. 현광이는 가래 섞인 침을 내뱉을 때 그 점도에 따라 문화자본이 나뉘는 날라리 회로에 있었고, 우현이는 성적표의 석차라든가 즐겨 듣는 음악 취향과 CD 개수로 문화자본을 추구하는 범생이 회로에 있었다. 고2 때 엄마 말을 듣고 소위 정신을 차리기 시작한 나는 그 두 회로를 왔다갔다 한 경우였다. 물론 「돼지의 왕」(2011)에서처럼 이 모든 곳에서 두각을 나타내면서 모두의 경외를 받는 녀석들도 드물게 있었을지 모르겠다.
교실 생태계에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한 건 대략 1990년대 후반부터였던 것 같다. 기존의 날라리는 개날라리(또는 양아치)와 날라리로 세분화됐다. 이전의 날라리는 학교 규범으로부터 벗어나 소위 일탈 기미가 있는 친구들을 일컫는 말이었지만, 이때부터 날라리란 말에는 ‘공부도 좀 하고 놀 줄도 아는 녀석들’이란 뜻이 포함되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 놀기만 하는 친구들은 양아치에 준하는 것쯤으로 치부됐고, 범생이는 공부는 열심히 하지만 성적은 신통치 않고 친구들 사이에서도 잘 어울리지 못하는 녀석들로 이해되기 시작했다.
이런 양상이 보편적이었다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의미심장한 조짐이었던 것만큼은 분명하다. 언어가 복잡해졌다는 건 그 말들이 가리키는 현실도 복잡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날라리-범생이 시절엔 현광이도 우현이도 나름대로 권력을 가질 수 있었다. 현광이는 현재의 권력을, 우현이는 미래의 권력을 가진 셈이었다. 그런데 그 이후에는 현광이와 우현이를 섞어놓은 녀석들이 힘을 쓰기 시작했고 순수결정체로서 현광이와 우현이는 일종의 예외상태에 처하게 됐다. 개날라리는 건드려봤자 폭탄이니 예외였고, 찌질한 범생이는 건드려도 무방한 예외였다. 이 시기에 왕따와 같은 ‘괴롭힘’ 문화가 대두된 것도 우연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런 변화는 어떻게 해서 나타났을까. 입시전형이 다변화되면서 이제는 어느 정도 놀아도 대학으로 가는 길이 열려서일까. 아니면, 또래들 사이에서 공부를 잘하는 것이야말로 ‘간지’나는 권력으로 인정받는 문화가 생겨서일까. 그도 아니면, 청소년문화에 고민상담이라는 명목으로 교사 같은 외래종이 끼어들어 그들 고유의 생태계가 교란돼서일까. 그도저도 아니라면, 이제는 시대가 달라져서 부모의 계급적 위치가 또래들의 권력관계에 고스란히 반영돼서일까—예컨대, 서울대생의 절반 가까이가 서울 강남 출신이라는 것쯤은 그들도 이미 알고 있다.
또래권력에서 성적이 중요해졌다는 건 의미심장한 변화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이러한 변화의 조짐들이 최근 청소년문화의 주된 특징이라는 데 있다. 수년간의 ‘생태계 교란’을 거치면서 이제 교실에는—어딘가 익숙하지만—새로운 두가지 회로가 자리를 잡은 듯하다. 어떤 책에서는 이를 두고 ‘널브러진 애들’과 ‘공부하는 애들’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2 물론 학교 바깥의 청소년들도 있을 수 있지만, 어쨌든 이 두 그룹이 오늘날 청소년문화에서 대표적인 이중회로를 이루고 있다는 데는 이견이 없을 것 같다.
필자는 이러한 표현에 적잖은 의미가 있다고 본다. 청소년문화를 더이상 날라리와 범생이의 구도로 이해하지 않는다는 것은 모종의 중대한 사실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날라리-범생이’ 구도는 말만 보면 서로가 동등한 관계라는 점을 연상시킨다. 날라리는 놀고 싶어 놀고 범생이는 공부하고 싶어 공부한다. 그에 반해 ‘널브러짐-공부열심’이라는 구도에는 이 두 그룹이 서로 동등하지 않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날라리가 노는 걸 좋아한다는 능동적 의미를 갖는 데 반해, 널브러진 애들은 ‘공부를 못해(또는 안해)’ 널브러졌다는 식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널브러진 애들이 실제로 무기력한 아이들인지, 공부하는 애들과 정말로 동등하지 않은 녀석들인지를 두고 왈가왈부하지는 말자. 이 둘이 동등하지 않다는 전제가 사람들 ‘머릿속’에 자리잡고 있다는 바로 이 사실이 중요하다. 공부가 싫어 자발적으로 널브러짐을 택한 경우도 있을 테고, 또한 학교가 아닌 다른 시공간에서는 엄청난 활력을 발휘하는 경우도 있을 테지만, 어쨌든 이들이 공부라는 1차 관문을 앞에 두고 널브러져 있다는 ‘판단’이 지배적인 것만큼은 사실이다.
어떤 독자는 공부가 중심적인 가치였던 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 아니냐고 되물을 법도 하다. 그러나 공부의 반대말이 ‘노는’ 것이 아니라 ‘널브러진’ 것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을 사소하다고 볼 수 있을까. 그들을 둘러싼 환경이 더 억압적으로 변했다고 볼 수 있을지언정 개선됐다고 볼 증거는 희박하다. 오늘날에는 아이돌이나 ‘패션왕’으로서 선망의 대상이 되지 않는 이상 오로지 공부 잘하는 것이 지배적인 덕목이다.
역설이 아닐 수 없다. 한국사회가 발전하고 있다는 믿음과 달리, 10대들의 삶의 조건은 전체주의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전체주의라 하면 억압적인 권력 같은 것을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공부라는 것을 우선으로 해서 세상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전체주의적이다. 너나 할 것 없이, 그것도 자율적으로 말이다.
이 책의 제목을 ‘18세상’으로 삼은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다. 역설로 가득 찬 세상에 대한 욕설, 어쩌면 역설 그 자체. 18세상이란 말이 단순한 욕설처럼 들릴 수도 있다. 물론 그런 느낌을 부정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사실 이 말은 청소년 인권운동가들이 만 18세 미만의 역설적인 인권현실을 꼬집기 위해 만든 표현에서 빌려온 것이다.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이런 계좌수표’라든가 ‘이 십장생’이라면서 검열을 피해가듯이, 18세상은 욕지거리를 이용해 풍자와 해학을 담아낸 표현이다.
오늘날 청소년문화는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역설투성이다. 몸과 정신은 성인 못지않은데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누릴 수 없는 상황, 성장을 돕는다지만 사실상 속박만 일삼는 가족과 학교라는 제도, 어른이 되고 싶지만 정작 그 방법을 알 수 없어 표류할 수밖에 없는 청소년 그 자신들, 그리고 그들을 억압함으로써만 우리네 사회체계가 유지된다는 불편한 진실 등등. 엄숙한 꼰대는 물론이고 열받은 10대들에 의해, 그리고 그들이 불안하게 제휴함으로써 꼬일 대로 꼬인 것이 바로 우리가 사는 18세상의 실체다.
그런데도 대개의 사람들은 청소년문화를 이해하고 싶다면서 정작 낡아빠진 렌즈와 잣대를 들이대곤 한다. 1980~90년대의 좌표를 가지고 2010년대를 온당히 측정할 수 있을까. 현실은 이미 저만치 달아나 있는데 말이다. 청소년은 집중력이 부족하고 이성적 판단력이 모자라며 사회화가 덜 됐다는 편견은 결국 그들이 내는 목소리를 잡음이나 군소리 정도로 치부하게 만든다.
예컨대, 노스페이스 패딩 열풍이 불었을 때 이를 단순히 과시적 소비나 유행추종 현상으로 재단하는 것도 바로 이와 같은 선입견에서 비롯된다. 이 같은 진단들은 일종의 동어반복에 불과하다. 과시적으로 소비하기 때문에 소비적이며 유행을 추종하기 때문에 유행이 나타났다니. 학교폭력 문제는 또 어떤가. 학교폭력이 횡행하는 이유는 그들이 폭력적이기 때문이란다. 심지어, 청소년 자신들조차 자기 자신들의 문화를 이런 식으로 이해하는 걸 볼 때면 솔직히 화가 치밀어오를 때가 있을 정도다.
결국 우리는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재확인하는 데 그치곤 한다. 청소년문화의 새로운 요소를 알고 싶다면서 낡은 인식틀을 들이대다니 이게 무슨 경우인가. ‘나는 그들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어’라는 기만은 청소년들을 미성숙한 존재로 결박시킬 뿐이다. 이 또한 18세상이 아닐 수 없다. 세상은 온갖 역설들로 꼬여 있는데 그 암호를 풀어내는 독법은 오히려 그 같은 역설을 더 복잡하게 만들뿐더러 사실상 문제를 봉합하고 은폐하는 데 기여한다.
이 책은 바로 이와 같은 이중 삼중의 아이러니를 파헤치기 위해서 시작됐다. 이미 알고 있는 걸 굳이 반복하지 않으면서 현실을 따라잡아보자는 생각에서 말이다. 그렇다고 이 책에서 제안된 이해방식이 청소년문화에 대한 정답이라 우길 생각은 전혀 없다. 필자 역시도 모르는 것투성이고 언제나 헤매는 중이기 때문이다. 다만, 필자가 할 수 있는 일은 더 많은 질문을 만들고 더 깊은 의문을 제시하는 것이다.
모름지기 진정한 앎이란, 익숙한 전제에서 시작해서 사실들을 끼워 맞추거나 관찰된 사실들을 추린 다음 엔터키를 쳐서 결과를 산출하는 식으로는 결코 만들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상식적 전제가 잘못됐을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낯선 사실들이 언제든 나타날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한다. 그렇기에 청소년문화를 따라잡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답의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창조적으로 도약하고자 하는 도전적 가설들을 던질 수밖에 없다. 필자가 좋아하는 어떤 구절을 인용하자면, ‘불가능하지만 불가피하기 때문에 해야 하고, 불가피해서 하고 있지만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책에서 서술되는 내용들은 그런 의미에서 정답을 보여준다든가, 대안을 제시한다든가 하지 않는다. 정답과 대안이 있으면 여러 독자들에게 마음의 위안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그럴 능력도 없고 또 그럴 의사도 없다. 그저 독자들에게 청소년문화에 대한—새로운 정보가 아니라—새로운 인식을 제공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이 같은 문제의식을 이 책이 얼마나 실현하고 있는지는 솔직히 확신하기 어렵다. 그래도 본문의 흐트러진 글들 속에서 필자의 취지에 공감해주고 거기서 자극을 받아 더 많은 ‘풀리지 않은 의문과 정답 없는 질문’이 만들어질 수 있다면 바랄 게 없겠다.
독자 여러분이 마음 가는 대로 골라보는 것도 의미가 있겠지만, 이 책이 그리고 있는 지도와 나침반을 공유할 필요는 있을 것 같다. 본문은 크게 3부로 구성했다. 1부 ‘일상 기록’은 오늘날 대다수 청소년들이 공유하는 문화적 조건들을 다뤘다. 오늘날 다변화된 입시문화 속에서 10대들은 어떤 주체로 성장하고 있을까(4장과 5장). 갈수록 늘고 있는 알바 경험과 ‘노스 패딩’으로 대변되는 소비생활 그리고 일상화된 은어문화 속에서 어떠한 코드들을 소비하고 또 생산하고 있을까(1~3장).
1부가 청소년문화의 일반적 조건을 다루고 있다면, 2부 ‘일탈 기록’에서는 지배적 규범에서 벗어난 관행들, 그중에서도 또래 내부에서조차 특이하게 여겨지는 문화현상들에 주목하고자 했다. 위조 주민등록증과 날로 진화하는 화장품 그리고 전자담배 같은 아이템들(6장), 성행위나 가출 그리고 알몸졸업식처럼 소위 청소년답지 못한 일들(7장~9장)은 왜 나타나며 그 효과는 무엇일까. 아울러 또래 내부에서조차 배제된 영역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오타쿠쯤으로 치부되는 세계관으로서 ‘중2병’ 현상(10장), 그리고 우리들 중 거의 누구도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는 이주배경 청소년(11장) 등이 대표적인 경우라 할 것이다. 이들이 우리 사회에 던지는 암묵적 메시지가 무엇인지 살피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 아닐까 한다.
3부에서는 청소년문화를 둘러싼 담론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기록의 기록’이란 제목을 붙인 것은 청소년 ‘문제’만큼이나 청소년 문제를 ‘문제화’하는 방식도 문제라는 생각 때문이다. 그 시작은 청소년을 미성숙하다고 보는 관점에서부터다(12장). 질풍노도의 시기기 때문에 폭력을 휘두르고 게임에 빠진다는 논리는 우리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논리가 아닐까 싶다(13장과 14장). 그 사이에 청소년의 인권이란 말할 수 없는 문제가 돼버리기 일쑤다. 그래서 마지막 두 장에서는 교육문제에 대해서 언급했다. 청소년 인권이 가장 억압되는 장소가 학교일 뿐만 아니라, 바로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전환을 위해서는 교육현장부터 다시 읽어낼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을 만드는 과정에서 여러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았다. 이 책은 원래 『한겨레 21』에 연재했던 ‘김성윤의 18세상’이 모태가 됐는데, 집필 기회를 제공해주고 근사한 제목을 붙여준 신윤동욱 기자와 편집부에 감사를 드리는 게 먼저일 것 같다. 2백자 원고지 10매짜리 조각 원고를 단순히 보완하는 선을 넘어서 40~50매 이상으로 늘리는 것은 거의 처음부터 새로 시작하는 것과 다를 게 없었다. 그 사이에 달라진 현실을 담아내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 버거움을 핑계삼았던 지난 2년의 게으름을 묵묵히 참아주고 오히려 성원을 보내준 북인더갭의 안병률 대표와 김남순 실장께도 감사를 드린다.
물론 누구보다 감사 인사를 받아야 할 사람은 모든 문제의식의 시작이 됐던 현광이와 우현이다. 그 친구들이 없었더라면 청소년문화에 대한 나의 관심도 없었을 것이다. 그 외에도 논술강사 시절 이런저런 수다를 나눴던 친구들, 방과후 학교에서 만났던 한서고등학교 친구들, 1학년 때부터 철없는 선생에게 도발을 당해서 괴로웠을 대학 새내기들, 뜬금없는 질문에도 당돌하게 응답해줬던 거리의 친구들, 그리고 깊은 교류는 없었더라도 존재 자체만으로 좋은 버팀목이 돼준 청소년 인권활동가들…. 알게 모르게 그들을 통해 이 책의 아이디어를 얻었기에 그들에게 감사하고 한편으론 미안하다.
문화사회연구소와 대학원 동료들에게도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그들은 여러모로 부족한 필자에게 물심양면으로 지지를 아끼지 않았고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었다. 그동안 나를 지도해주신 여러 선생님들께는 감사의 마음을 이루 다 표현할 길이 없다. 학자적이고 선비 같은 풍모를 따라가기엔 미약하고 경솔하기만 한 제자지만, 내가 조금이나마 학문적으로 인격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그분들 덕택이었다.
이 책이 내 이름을 달고 있기는 하지만, 사실은 그 모든 이가 함께 만든 책이나 다를 바 없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는 인복이 많은 사람이다. 거듭 감사드린다.